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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최상
부정관과 60인의 스님의 죽음2 본문
?
● 부정관과 60인의 스님의 죽음2
○ 부정관은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 budr-00080.htm ◀앞 【목록】 뒤▶ budr-00100.htm ∽∞
////참고////
부정관의 문제점에 대한 글인데 상당히 내용이 깁니다.
분량상 여러 페이지로 나눠 올릴 수도 있지만,
결국 같은 주제에 대한 글인 이상 한 페이지로 묶는 것이 더 낫다고 보고
나누지 않고 올립니다.
긴 글임을 참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 끝 ////
● 앞에서 몸이나 시신(시체)의 깨끗하지 못함을 관하는 부정관의 수행방안에 대해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이 부정관의 수행을 부처님이 강조하자,
스님들이 몹시 몸을 싫어하고 근심하여 자살을 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리고 석존은 그런 행위를 금하고 다른 수행방안을 다시 설하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 참고: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251364 )
부정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기 쉽다.
우선 사람에게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면도 많다.
그런데 왜 굳이 시체나 신체의 더러운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또 잡아함경 첫부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영원하지 않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마음의 해탈[심해탈]'이라 하느니라." 라고 하신다. (T02n0099_p0001a07)
여기서 색수상행식은 물질-감수-생각-신구의3업의 변화 움직임[행]-의식 등을 말한다.
그것은 곧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 전부를 말하고
또한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 전부도 되고
따라서 현상을 전부 포괄하는 범주도 된다.
그런데 이들 색수상행식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염리(厭離)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신과 삶 그리고 세상 모두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가짐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깨끗하지 못함을 관하고
또 한편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은
불교가 염세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도 된다.
그리고 사실 이 부정관과 앞의 가르침만을 보면 염세주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많다.
○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다.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
불교는 염세주의적 종교라기 보다는
세속의 탐욕을 버리고 대신 진리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더욱더 깨끗하고 원대한 서원을 실천해가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144761 )
그리고 부정관의 내용에 대해 살피자면,
우선 부정관은 수많은 번뇌 가운데 탐욕에 대해 행하는 개별적 수행방법이다.
이 가르침은 속세에서 갖던 탐욕을 버리고 출가하여 막 수행을 시작하는 이를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다.
출가자는 세속에서 추구하는 많은 탐욕의 대상 즉 부, 권력, 명예 등에 대한 탐욕을 정리하고 출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과 자신의 생명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끊지는 못한 상태이므로,
이런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내용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대지도론 1권에서는 이 부정관을 부처님이 상대편의 마음의 병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설법을 하는 것[대치실단]이라고 말한다.
실단(悉檀 siddhānta)은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대치실단(對治悉檀)이란, 예를 들어
탐욕심이 많은 이에게는 부정관(不淨觀)을 말씀하고
분노가 많은 이에게는 자비관(慈悲觀)을 가르치는 등 상대의 병의 상태에 따라 하신 적절한 설법이다.
마치 설사병 환자와 변비 환자 각각에게 각기 달리 지사제와 완화제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의 본 취지와 본 목적은 하나의 대치실단 내용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인 가르침을 모두 같이 살펴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다른 곳에서 대략 살펴 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참고: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144761 )
○ 그러나 여하튼 부정관을 수행하다 보면,
자신에 대해 갖는 기본적 애착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게 되어,
세속에서 취하는 방향과는 정반대가 되게 된다.
예를 들어 세속에서는 사람들이 욕심을 갖는 것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가 여부로
서로 우열을 따지게 된다.
그러나 앞의 부정관은 모든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는 애착의 대상
몸에 대한 애착부터 근본적으로 버리고 떠남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그외의 나머지 것은 더더욱 당연히 애착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속의 가치 평가나 목적 상태와는 크게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왜 자기 자신의 신체나 애착을 갖는 것들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갖고 탐욕과 집착을 끊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신체까지 싫어하고 혐오하여 떠나려 한다면,
앞의 스님들처럼 삶을 혐오하여 죽음을 택해야 마땅한 것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쉽다.
그래서 다음에서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어 없어져 아무것도 없는 사멸(死滅)의 상태를 목표로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윤회의 고통을 끊으라는 것이며, 자살과 죽음을 목표로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싫어하고 떠나야 한다면,
대신 무엇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세간에서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는 대신
무엇을 어떻게 추구하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글이 길지만 따로 나누지 않고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
● 앞의 부정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우선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음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좋음은 좋은 것을 직접 얻고 누릴 때에도 얻지만,
한편 좋은 것을 기대하며 희망을 그려나가는 순간에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한 좋음을 얻기 위해 좋음을 얻을 많은 수단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물질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좋음을 줄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여러가지를 추구할 때 최종적으로 그것 자체보다는 그를 통해서 좋음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음은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지위나 물질 등등의 많은 수단을 추구한다고 하자.
그래서 원하는 지위나 물질을 얻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좋음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1000억이란 재산을 구해 얻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 재산으로 좋음은 얻지 못하고 만일 분쟁과 불쾌함 걱정 두려움 만을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에게 그 재산은 의미없을 뿐 아니라, 고통을 준 것뿐이다.
결국 사람이 원하는 것들은 최종적으로는 나쁨을 피하고, 좋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오직 이처럼 좋은 것을 얻어 늘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고
또 늘 좋은 것에 대한 희망을 그려가면서 좋아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삶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 우선 삶에는 좋음이 아닌 나쁨을 주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그 나쁨으로 고통받고 불쾌함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신체기관이 늙고,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들거나 죽음을 맞이하여 고통과 불쾌를 겪고
또 불쾌한 감각을 하거나,
또 욕구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아 번뇌를 일으키며 고통과 불쾌를 겪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갖는 욕망은 이미 앞 글에서도 밝혔듯, 무한하고,
그 무한한 욕망을 뜻대로 다 성취하지 못한다.
또 앞글에서 사람이 갖는 여러 욕망을 그 성격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가장 기본적으로 늘 건강하고 젊고 병들지 않은 상태로 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부터
- 생계를 해결하려는 욕구
- 그리고 비교로 인해 끝없이 생겨나는 욕망
- 끝없이 극한으로 나아가는 무한한 욕망 -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뜻대로 잘 성취되지 않는다.
또 성취되어도 정작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한 좋음은 잘 얻지 못한다.
또 자신이 좋음을 일시적으로 얻기는 해도
좋고 좋은 상태 즉,
자신에게도 좋고 남에게 좋고 모두에게 좋고, 지금 좋고 오래 오래 좋은 '좋고 좋은 상태'는 정작 잘 얻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이 겪는 고통과 불쾌가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 문제인 것이다.
○ 만일 현실이 이렇지 않고 모두 좋고 좋은 상태를 다 잘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또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수행자는 왜 굳이 어려운 수행을 할 것인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삶에는 고통과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의 목표와 방안이 제시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 부처님께서도 이런 사정을 경전에서 밝히고 계시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잡아함경에 나온다.
,,,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세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은 세간의 사랑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뜻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늙음·병·죽음이니라.
만일 세간에 사랑할 만하지 않고 생각할 만하지 않으며 뜻할 만하지 않은 이 세 법이 없었더라면,
여래·응정등각은 세간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요,
세간도 또한 여래·응정등각이 있어 알고 보고,
바른 법을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랑할 만하지 않고 생각할 만하지 않으며 뜻할 만하지 않은 늙음·병·죽음의 세 가지 법이 세간에 있기 때문에
여래·응정등각은 세간에 나왔고,
세간도 또한 여래·응정등각이 있어서,
아는 것과 보는 것으로 바른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아느니라.
[잡아함경, 대정장 2-95c 한글 (잡아함경-346. 삼법경) 남전장경 : a.10.76]
○ 위 내용은 결국 다음을 말한다.
즉 세상에는 해결하기 힘든 늙음, 병, 죽음의 문제가 있었기에, 부처님이 나온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필요성도 그다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바른 법을 설하여서
과연 인간 세상에서
사람이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상태를 얻게 되었는가.
○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른 종교를 살펴봐도 문제가 같다.
삶에는 여전히 늙음 병 죽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살아가는 한 다시 의식주와 같은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다시 서로 서로 얻고 차지한 것을 비교하며 욕심을 키우고, 그 욕심을 다 쫒아 성취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제각각 무한한 욕심을 향해 갈증을 일으키며 번뇌를 일으키며 살아간다는 문제가 있다.
삶에는 이런 고통과 불만, 불쾌함이 있다.
또 이런 고통과 불쾌를 겪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함이 있다.
또 원하는 좋음을 얻지 못하게 되거나, 이미 얻은 좋음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젖게 된다.
그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 우선 부처님은 일찍이
이처럼 삶에서 얻는 온갖 고통과 불쾌를
생,노,병,사,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로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색수상행식, 5 요소가 참된 성품을 가리고 덮고,
사람은 이에 집착하고, 이 오음에 수많은 고통이 쌓여 모이고 윤회를 반복하며 받는 고통을 말한다.
[中阿含 卷七 分別聖諦經]
결국 이들이 삶의 문제거리이다.
만일 앞에 나열한 여러 문제가 삶에서 진정 없다면,
도무지 삶에서 문제거리가 없고, 따라서 수행해야 할 필요성도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삶에서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에, 또 수행자가 수행목표를 세워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상태와 그 원인을 우선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없애고 문제가 해결된 상태의 원인을 찾아 행해야 한다.
우선 문제의 상태는 무엇인가.
우선 삶에서 만나게 되는 앞에 나열한 것과 같은 고통의 상태들이 문제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앞에서 욕망의 단계에 여러가지 단계의 고통을 나열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원적이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생노병사의 문제이다.
○ 그런데 그런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늙음·병·죽음의 세 가지 근본적인 고통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위 설법에 이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 가지 법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늙음·병·죽음을 떠나지 못한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이 있어 그것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능히 끊지 못한다.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가.
이른바 몸을 나라고 봄[신견身見]·
잘못된 목적과 실현방법에 대한 판단[계취戒取]、
의심[疑]이니라. ...." [잡아함경, 대정장 2-95c 한글 (잡아함경-346. 삼법경) 남전장경 : a.10.76]
결국 삶에서 고통과 불쾌함이 문제인데
그 문제의 원인을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근원으로 다시
색수상행식 5온이 일시적으로 화합한 몸을 실재의 자신으로 보는 견해(신견)와
잘못된 목적을 설정해 잘못된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견해와 자세(계금취견),
그리고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갖는 자세 등을 그 원인으로 다시 들고 있는 것이다.
○ 생각해보면 늙음 병 죽음이란 고통의 사태에 대해,
언제나 젊게 살게 만드는 방법이랄까,
절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랄까.
모든 병을 낫게 하고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서
약간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희망들이 원래 성취 불가능한 내용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사람이 고통을 받는 근본 원인은 그런 것을 성취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며,
그보다는 바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이 문제가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해결해야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문제의 핵심과 원인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
세간에서는 늙게 만드는 세포의 변화, 병들게 만드는 각종 원인, 죽게 만드는 각종 원인을
늙음과 병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제시하시는 이유를
우선 다음과 같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생명의 자연적인 현상 생노병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설령 가정하여 생노병사 자체를 없앤다고 하여도 고통과 악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사태가 가능하지 않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사람은 또 다른 상태에 대해 희망을 갖기에 그런 것이다.
반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면, 위 사태에 임한다 해도 고통을 얻어 갖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늙음·병·죽음(고통)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세 가지 법을 끊지 못함'에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 한편 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생각해보면 모든 욕심과 분노는 사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과 관련해 일어난다.
사람은 자신에 관해 집착하는 것이고, 또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탐욕을 일으키고, 또 그것들이 침해되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 핵심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들어 있다.
나 자신, 나자신이 애착을 갖는 것( 타인, 물건, 지위,,,등등)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모든 문제의 중심인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에서
바로 그 기초가 되는 '나'에 대한 인식이 잘못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신견(身見)의 문제이다.
즉 이른바 몸을 나라고 보는 견해와 자세를 말한다.
이 이해를 위해 다음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만일 누군가 사진이나 만화 그림으로 자신을 그려 놓고
그 후에 이들을 불태우면
마치 정말 자신이 소멸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가슴아프게 여긴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여기에서는 마치 가짜를 진짜처럼 잘못 여겨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을 떠 보게 되는 자기 자신의 모습,
또 만지면 느끼는 자신의 신체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앞의 사진이나 그림의 비유처럼 가짜고 일시적인 것이며,
진짜 실재의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서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자기자신과
자신의 것들을 잃거나 갖지 못한다고 하여
고통받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것은
사실은 바로 위의 예에서 사진이나 만화 속의 자신이
불태워진다고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관계는 어떻게 말해야 옳은가?
추리해 말한다면, 본래 '실재의 주체'와 '실재의 대상'이 서로 관계하여
마음에 이런 모습과 촉감 등으로 가상적인 현상 내용이 맺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에 맺힌 가짜의 자신과 대상을
우리는 모두 진짜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하면
반야경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모든 현실을 '마치 환영이나 꿈과 같다고 여기는 한편
비록 모두가 실체가 없기는 하나 있는 듯이 나타난다’고
이해해야 옳은 것이다.
즉, 현상은 앞의 비유에서 가짜의 만화나 사진과 같은 것이고
진짜의 나와 대상은 실재내용들이다.
그런데 그 실재내용은 얻지 못하고 공한 것이며,
또한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
그런데 우리는 가상적인 현상내용으로서 색수상행식의 화합상태를
진짜 자신이라 생각하고 집착하게 되며
이 견해와 집착으로부터
다시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해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갖는 근본원인에
앞과 같이 자신에 대해 잘못 갖는 견해 즉 신견(身見)이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견해 때문에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하고
다시 잘못된 목적을 세우고, 잘못된 실현방안을 찾아 헤매게 된다. [계금취견]
예를 들어 자신의 지금 모습에 애착을 갖고 세상을 바라 보는 이는
자신이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고
지내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예를 들면 방부제를 매일 조금씩 먹으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고 먹는다면
그런 것이 바로 계금취견의 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의 처음 기초가 잘못되어 있기에
다시 잘못된 목표를 세우고 잘못된 방안을 찾아 고집하는 것이다.
한편 진리가 그렇지 않은데,
진리의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자신의 희망과 부합하는 내용만 진리라고 믿거나
엉뚱한 견해를 진리라고 잘못 믿기에, [번뇌]
-> 그 믿음으로부터 행동[업]을 일으키고
-> 그것이 다시 고통의 결과와 악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고]
마치 어느 땅 밑에 황금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이가
한 없이 땅을 파내려가면서 고통받고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한편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아가 믿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고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에 원인이 있다. [의(疑)]
이처럼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그 원인을 살폈다.
이제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고통을 만드는 원인을 끊어 없애야 한다.
앞처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다면,
이들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자신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그런 자신에 대해 지금껏 갖던 집착을 끊어 없애고 탐욕을 끊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수행방안이
바로 앞에서 살펴 본 부정관인 것이다.
///////
그런데 부정관을 살피는 데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앞과 같이
더러운 욕심에 집착하여 얽매이는 마음, 즉 '탐욕에의 집착'을
왜 생노병사와 같은 고통의 원인으로 보시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문제를 가장 피상적으로 번뇌를 일으키고 고통을 받는 단계에서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문제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과 자신 외부(자신의 것)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이 잘못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계분별관 등에 관해 살필 때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비록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내용들이 진짜가 아니고
단지 가상에 불과하더라도
현실은 우리에게 마치 그것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러 감각을 주고 나아가 고통과 두려움 걱정 불안을 준다.
또 이런 자신에 대한 견해를 바탕으로 할 때
여러 욕망이 실현되지 못해 일으키는 번뇌와 고통을 언급해야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서
자신의 생노병사의 현상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생노병사의 문제는 다시 불교의 윤회관을 전제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즉, 일반인들은 사람이 한번 태어나 죽으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보는데 반해
부처님은 그렇지 않고 생노병사를 무한히 반복하고
한 생에서의 문제는 한 생에서만 문제되지 않고,
무한한 윤회과정에서 반복해서 문제가 됨을 말하시는 것이다.
더욱이 윤회과정에서는 고통과 두려움의 정도가 더 극심한 축생이나 아귀나 지옥의 상태도
있기에 더욱이 이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윤회의 고통을 뽑아 내는 방안을 살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윤회의 인정 여부는 별도로 살필 내용이 많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이 문제는 윤회를 굳이 인정하지 않고,
단지 한 생에서의 고통의 문제의 해결에만 치중하여 살펴본다해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윤회의 전 과정에 걸친 고통의 문제를 살피지 않고
단지 한 생에서의 생노병사의 고통의 문제만을 놓고 살피기고 한다.
우선 사람들은 이 현실에서 자신과 외부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반응한다.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많은 욕구를 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생노병사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임을 앞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좋고 나쁨의 문제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젊고 건강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좋은 것인데 반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인데,
그 늙음 병 죽음을 피할 수 없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른 욕구의 경우도 사실은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돈을 벌고 싶고 지위를 차지하고 싶고 .... 등등인데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또 뜻대로 성취해도 오래 좋음에 머무르지 못한다...등이 모두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며 좋고 나쁨을 느끼며 반응을 하는 과정에서
좋고 나쁨에 대한 반응을 올바르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에
고통이 만들어지고 확대되는 원인이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피할 수 없는 늙음 병 죽음이 문제라기 보다는,
그 늙음 병 죽음의 현상을 이해하고
이에 대해 갖는 태도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은 바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인 것이다.
그래서 생노병사와 윤회의 고통의 문제의 원인은
사람이 생 노 병 사의 과정을 거치고 윤회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윤회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있는 것이다.
○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다시 살펴 보자.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관념을 기초로
다시 좋고 나쁨을 구분하며 이에 대해 반응한다.
그런데 우선 좋음을 주는 것에 좋다고 느끼거나 판단하고,
또 나쁨을 주는 것에 나쁘다고 느끼거나 판단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음을 주는 것에 달라붙어 꼭 차지하려고 집착하고[탐욕],
나쁨을 주는 것에 분노를 일으켜 화를 내고 해치려 [분노]함이 나쁜 것이다.
또 이들의 기본 기초가 되는 어리석음이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에 또 나쁜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자신과 남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고 악을 행하게 된다.
따라서 악을 없애고 고통과 불행을 줄이려면,
좋음을 주는 것에는 탐욕과 집착을 끊고,
나쁨을 주는 것에는 반대로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좋음을 주는 것에서는 반대로 그 단점을 보아 탐욕과 집착을 끊고 중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나쁨을 주는 것도 그 반대로 그 장점을 보아 분노를 끊고 중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좋은 것을 보다 선하고 더 잘 사용할 더 필요로 하는 남에게 베풀고[보시],
자신에게 좋고 남에게 좋고 모두에게 좋고 지금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 좋은 정말 좋고 좋은 것에 대해 서원을 갖고
이 서원을 집착없이 추구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나쁜 것에 대해서는 이를 참고[인욕]
미움 원망을 일으키지 않고
연민을 느끼고 용서 사랑하여[자비]
자신도 남도 그리고 모두를 함께 좋고 좋음으로 이끄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수행의 최초단계는
일반적으로 좋은 것에 갖는 탐욕
나쁜 것에 대한 분노 집착의 상태를 중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부정관과 자비관이 그것인데,
먼저 부정관부터 살피기로 한다.
○ 부정관은 좋음에 대해 갖는 잘못된 자세를 올바로 고치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세속 사람들은 좋음을 주는 것을 좋아하고 이에 달라 붙어 집착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나쁜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좋음에는 우선 당장만 좋고 오래 좋은 상태를 가져다 주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술 담배 마약 도박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당장은 좋음을 주지만
오랜 시간 고통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행위도 있다.
또 여러 사람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 주는 악한 상태를 추구하며 좋음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는 일정한 목적을 악한 수단을 통해 실현하면서 좋음을 느끼는 경우 등도 그런 경우다.
이런 좋음을 좋다고 추구하면 당연히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반대로 그 좋음에 함께 달라 붙어 있는 다른 나쁨을 보고
그것을 좋아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런 경우에서 탐욕을 버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 한편 사람은 좋음에 대한 반응에서 그것을 '꼭' 반드시 취해 가져야 한다고 달라붙어 '집착'하기 쉽다.
이렇게 달라 붙어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마음이 일으키는 독 때문에
그것이 심지어 좋고 좋은 뜻인 경우라 할지라도
그 과정 및 결과가 모두 좋지 못하게 된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무엇엔가 집착하면 집착하기에 오히려 그 뜻을 잘 실현해내지 못하게 된다.
집착한 만큼 긴장하고 경직하게 되고 그래서 뜻을 오히려 잘 이루지 못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어떤 상태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히 뜻을 이루려는 의지를 꾸준히 갖고
그 원인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계속 꾸준히 행할 때 뜻을 잘 이룬다.
집착을 갖고 매달리는 것은 이와는 구별된다.
한편 그 좋음을 꼭 취해 가져야 한다고 마음에 집착을 가지면, 반대로 그것을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강한 불만 불쾌를 느끼게 된다.
그 불만 불쾌 고통의 정도는 반대의 상태에 대해 갖는 집착에 비례하게 된다.
삶에서 고통이 문제라면, 그 고통의 크기가 바로 반대의 상태에 갖는 집착의 정도만큼 얻어지고 커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집착하는 물건을 잃어 버릴 때의 고통은
집착하지 않는 물건을 잃어 버릴 때의 고통보다 크다.
그 고통의 크기는 그 물건을 집착하는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 물건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다면 어떨 것인가.
그는 그것이 부서지거나 없어지거나 생기거나 다시 찾거나 간에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집착의 문제는 물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노병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편 집착을 갖는 경우
그 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집착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걱정 불안에 빠지거나 긴장하고 초조하게 된다.
이 두려움 걱정 불안 불쾌의 정도도 또한 집착의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한편 집착을 갖는 경우,
그 상태를 성취해 얻은 이후에도 다시 그것을 잃을까봐 불안 걱정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 정도도 역시 그 상태에 집착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또 집착하게 되면 집착하는 것만을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적절히 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하는 만큼 그것의 성취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심지어 악한 수단을 취하기 쉽게 된다.
그래서 악해지는 원인이 된다.
많은 악행은 그 바탕에 탐욕과 그에 대한 집착이 바탕이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른 이의 몇푼의 재산을 노리고 다른 사람을 해친다고 할 때
그 원인은 바로 그런 돈에 대해 그가 가진 탐욕과 집착인 것이다.
그 악행의 정도도 그 집착의 정도에 비례한다.
만일 그 악인이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서
그것을 얻거나 얻지 않거나 관계없이 지낼 수 있었다면
그가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려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반대로 집착은 나쁜 것이다.
선한 뜻에 집착을 가질 때도 앞에 나열한 집착의 독은 흘러 나온다.
심지어 선한 뜻에 집착하여 그것을 위해서는 악을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악을 행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외에도 역시 선한 뜻에 집착할 때에는
그는 그 반대의 상태에 강한 불쾌 고통을 느끼고
또 반대의 상태에 대해 강하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젖어 살게 된다.
결국 집착을 하면 그것이 선하거나 나쁘거나, 그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얻는 과정이거나 얻은 이후거나
모두 독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선한 뜻을 추구할 때에도, 집착을 일으켜 가지면 안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에 대해서도 집착은 같은 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이 반야바라밀다는 ... 일체상지에 대한 집착과 보리·열반에 대한 집착까지도 소멸시킨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01 권 현솔도파품]
● 앞에서도 말했듯 삶에서 좋은 것이 있을 때 그 좋은 것만을 얻을 수 있고 나쁜 것을 얻지 않을 수 있다면
사실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경우에서는 좋음으로 인해 나중의 나쁨 또는 다른 이의 나쁨을 얻는 경우가 있다.
○ 그래서 악한 데 좋다고 느끼는 경우는
우선 그것의 나쁜점 더러운 점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 또는 장기적으로 많은 나쁨을 주는데 당장 좋다고 느끼는 경우 등도 마찬가지다.
○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 당장은 좋더라도,
그것이 다른 이에게, 또 나중에 나쁨이 있다면 그것의 나쁜 점을 보아야 한다.
또 반대로 다른 선한 것에 더 좋은 것이 많음을 보아야 한다.
● 또 한편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게 되거나, 집착을 갖는 경우에는 그로 인해 여러가지 나쁨이 얻어진다.
그러니 좋고 좋은 것을 얻으려면 이런 나쁨을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뜻이 선하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탐(貪)해 집착하면,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집착이 일으키는 독이 있음을 보고,
그런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는 결국 그것이 선하고 좋고 것이더라도, 그에 대한 집착은 다른 나쁨 독을 만들게 됨을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러운 욕구에 대해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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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과 집착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 우리가 A라는 어떤 상태에 대해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 탐욕을 갖고 집착하게끔 된다.
예를 들어 세상에 둘도 없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그는 그 상대가 너무 좋기에 탐욕을 일으키고 또
그 상대를 꼭 차지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갖게 된다.
꼭 가깝게 두어 감각하려 하고
소유하려 하고,
마음이 그에 얽매이는 상태가 된다.
○ 그런데 집착을 갖지 않는 상태는 어떤가.
어떤 A가 좋기는 좋지만, 그 A가 아닌 상태, 그 A가 없는 상태도 역시 괜찮다, 좋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앞과 같은 집착의 상태를 떠나게 된다.
○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B가 너무 싫고 고통스럽다.
그 B는 예를 들어 사고나 병을 당해 몸이 고통을 받거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하는 상태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B에 집착하고
다시 B아닌 상태에 대해 앞에서 말한 A에 대해 가졌던 마음 상태를 갖게 된다.
즉 B아닌 상태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B의 상태에 대해서는 지극히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며,
다시 이 상태나 이상태를 일으킨 상대에 대해 분노하여 파괴하거나 해치려는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 그러나 또 이런 경우에 집착을 갖지 않는 상태는 어떤 경우인가.
B가 너무 싫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B가 아닌 상태도 역시 또한 비슷하게 싫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는 또 앞과 같이 B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얽매이여 싫어하는 상태를
떠나게 된다.
○ 만일 세상에 A와 B가 있는데
A는 너무 좋은 것이고
B는 너무 싫은 것이라고 느낀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그 A와 B는 너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그 집착의 강도를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이것이 해결되는가.
너무 좋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갖는 다른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은 중화될 수 있다.
또 너무 싫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반대로 그것이 갖는 다른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은 역시 중화될 수 있다.
그래서 너무 좋아 집착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갖고 있는 숨겨진 나쁜 점,
그것을 가질 때 결과로서 반드시 가질 수 밖에 없는 다른 나쁜 점,
그것을 달리 나쁘게 보게 되는 상태에서 찾아지는 나쁜 점,
그것보다 더 좋은 것과 비교할 때 찾아지는 나쁜 점,
다른 더 좋은 것들과 비교할 때 찾아지는 나쁜 점,
그것 대신에 있었을 좋은 점과 비교하여 찾아지는 나쁜 점,
유사한 다른 좋은 것들이 그것에는 없다는 나쁜 점,
이미 있는 나쁜 점,,,,등을 찾아
너무 좋아하여 집착하는 것을 그것이 나쁘고 싫다고 여김으로써
그 집착을 떨쳐 낼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너무 싫어하여 집착을 반대로 갖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원리는 같다.
그것이 갖고 있는 숨겨진 좋은 점,
그것을 가질 때 결과로서 반드시 가질 수 밖에 없는 다른 좋은 점,
그것을 달리 좋게 보게 되는 상태에서 찾아지는 좋은 점,
그것보다 더 나쁜 것과 비교할 때 찾아지는 좋은 점,
다른 더 나쁜 것들과 비교할 때 찾아지는 좋은 점,
그것 대신에 있었을 나쁜 점과 비교하여 찾아지는 좋은 점,
유사한 다른 나쁜 것들이 그것에는 없다는 좋은 점,
이미 있는 좋은 점,,,,등을 찾아
너무 좋아하여 집착하는 것을 그것이 나쁘고 싫다고 여김으로써
그 집착을 떨쳐 낼 수 있게 된다.
결국 A나 B나 좋고 나쁨의 차이를 줄일 때
좋은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독을 일으키는 병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꼭 이루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을 이루면 더 좋지만, 그것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고 좋다는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부정관은 어떠한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 생명에 대하여 가장 강한 집착을 갖는다.
더 나아가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성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집착을 바탕으로
다른 외부 물질 상태 등에 대해 집착을 갖는다. 부나 명예나 지위 권력들에 대한 욕심이 모두
이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체나 타인의 신체나 그 안에 숨겨진 더러운 면을 찾아
더러움을 보고 그에 대해 가졌던 집착을 떨쳐 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법이 바로 부정관인 것이다.
● 부정관을 극단으로 행하면, 오히려 제일 처음에서 본 것과 같은 부작용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부정관이 너무 심해서
모든 것을 싫어하고,
나아가 오히려 고통과 두려움에 싸여 산다면,
사실은 또 다른 병을 일으켜 가진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는 역으로 반대의 자비관을 행해서
그런 상태를 벗어나야 할 필요도 있게 된다.
이 부정관의 수행은 어디까지나 탐욕과 집착에 대해 대치하여 이를 중화시켜 치료하는 수행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정관은 한편
현실에서 갖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탐욕이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것을 일단 끊고
그 상태에서 다시 자신과 타인 그리고 모든 생명을 위해
좋고 좋은 상태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전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과 모든 생명을 위해서 좋고 좋은 서원을 갖고 실현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근본 장애가 될 것인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된 미망으로 탐욕과 집착을 갖고 얽매이는 마음이 바로 그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고 자신의 상처나 고통에 연연하는 마음으로는
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한 서원을 갖고 실천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부정관은 자신과 모두에 대해 더러움을 보고 탐욕을 버리기 위함이나,
그것은 또 한편 반대로 모든 생명에 대해 깨끗하고 원대한 서원을 그 대신 반대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전제도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살피게 되는 자비관 내지 대자대비대희대사라는 사무량심과 관계가
된다. 관계되는 부분에서 이어 살피기로 한다.
● 끝으로 만일 부정관을 잘 닦지 않아서
자신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끊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경우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자신의 뜻을 성취하던 성취하지 못하던 관계없이
늘 집착으로 인한 독에 의해 고통받고 살아가게 된다.
더 나아가 그 집착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잠시의 좋음을 위해 긴긴 나쁨을 받거나
타 생명에게 악을 행하여 자신과 타 생명 모두 고통에 빠뜨리게 된다.
탐욕을 끊지 못하면서,
갈증을 느끼면서 갈구하는 상태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어도 곧바로 다시 고통의 상태에 빠지는 상태는
바로 아귀의 상태이다.
또 실제 윤회의 과정에서 탐욕이 치성하면 아귀고를 받게 됨을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아귀는 배고픈 귀신을 말한다.
몸은 큰 데 목구멍은 작아서
음식을 먹고 싶어서 갈증을 일으키고 찾아다니지만, 쉽게 얻지 못하고
그러다 간신히 음식을 얻어 목으로 삼키는 순간
목에서는 불이 일어나 타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편도선염에 걸려서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삼키면 찢어질 것처럼 아파하던 때가 한 때 있었는데
아귀의 상태가 사실 바로 그런 상태인 것이다.
탐욕을 끊지 못하고 헤매이고 돌아다니면
뜻을 성취하거나 성취하지 못하거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아귀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본다.
● {최초 주제도입으로 의문제기- 논의할 주제를 처음 제시 하는 부분}
○ {간단한 결론제시-함축적 결론,격언적 제시, 부분}
▼ {독자나 상대방 입장에서 주제가 도출되는 내용}
▽ {독자나 상대방 입장에서 주제가 도출되는 자세한 과정 내용}
▲ {주제 결론의 객관적인 장단점}
△ {사례나 비유 이야기 형식의 글}
■ {주제에 대한 부가적 설명 도입}
□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의 실질적 내용}
★ {논증 또는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
☆ {실질적 논증 부분}
∴ {최종 결론}
[자세한설명] {백과사전이나 일반 논문 내용} [설명끝]
자비관과 자비희사-4 무량심
[주석] {인용한 책 참고 논문 등} [주석끝]
<--- Korea-tipitaka-dic --->
부정관
[Kor]부정관[San]a?ubhabh?van?[Tib]mi sdug pa la rab tu brtson pa[Eng]the meditation on the uncleanness of the human body
[mean]5정심관(停心觀)의 하나. 몸이 깨끗하지 못함을 관함으로써 탐심(貪心)을 버리는 수행. 자신의 몸이 깨끗하지 못함을 관하는 방법으로써 9상(想)이 있음.[syn]동}부정상(不淨想).
<--- Unheo_Dongguk_univ_Buddhism_v24 --->
부정관
●부정관 ◀不定觀▶
5정심관(停心觀)의 하나. 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육신의 부정한 모양을 관찰함. 구상(久想).((운허_동국역경원사전))
<--- 陳義孝佛學常見辭彙-edited --->
부정관
【不淨觀】五停心觀之一, 卽觀察自己和他人的身體皆汚穢不淨, 可治貪欲. →1167
<--- fk-ks-v10 --->
부정관
【不淨觀】 p992-中≫梵語 a-?adh?-sm?ti 巴利語 asubh?nupassin. 又作不淨想. 爲五停心觀之一. 卽觀想自他肉體之???齷齪, 以對治貪欲煩惱之觀法. 人的屍體隨時間而變化爲醜惡之形狀, 故在諸經典中皆擧有多種不淨之觀屍法, 以治貪欲之心, 今列擧如下:
(一)據禪法要解卷上載, 若淫欲多者, 應修習二種不淨觀. 卽:(1)觀死屍臭爛不淨, 取此不淨之相, 至閑靜處以自觀不淨. (2)雖眼不見死屍, 然從師受法而憶想分別, 自觀身中充滿髮?毛?涕?淚?汗?垢?痰?음等三十六種不淨物. 同書又擧出修習不淨觀能對治衆生對於色?形容?威儀?言聲?細滑?人相等六種欲望之執著, 且將不淨分爲惡厭之不淨與非惡厭之不淨二種. 對於執著前五種欲望者, 令觀惡厭之不淨;對於執著人相者, 則令觀白骨人相. 又觀死屍爲不壞, 能斷除威儀?言聲二種欲望, 觀死屍爲已壞, 則悉斷六種欲望.
(二)據大毘婆沙論卷四十所擧, 隨觀行者之意樂, 而有樂略?樂廣?樂廣略三種之別. 又於此三種觀法之過程中, 各明示初習業位?已熟修位?超作意位等三位, 及其觀行之次第. 擧樂略觀爲例, 卽:(1)先往塚間觀察死屍之靑瘀等相, 復以勝解力移屬自身, 卽觀想自身靑瘀乃至骨鎖, 於骨鎖中, 次第觀想足骨?足骨骨?脛骨?膝骨??骨??骨?腰骨?脊骨?脅骨??骨?臂骨??骨?腕骨?手骨?肩骨?項骨??骨?齒骨???等, 凡此種種, 一切皆稱初習業位. (2)於骨鎖中, 先觀足骨?足骨骨等, 乃至後觀??, 復於其中除半觀半, 復除一分, 唯觀一分, 凡此種種, 一切皆稱已熟修位. (3)以勝解力觀察如此之不淨相, 遂繫念於眉間, 湛然而住, 復轉此念入身念住, 輾轉乃至入法念住, 凡此種種, 一切皆稱超作意位.
(三)據俱舍論卷二十二載, 修不淨觀可對治顯色貪?形色貪?妙觸貪?供奉貪等四種貪. 卽:(1)緣靑瘀等之相以修不淨觀, 可對治顯色之貪. (2)緣死屍被鳥獸所食等之相以修不淨觀, 可對治形色之貪. (3)緣蟲?等之相以修不淨觀, 可對治妙觸之貪. (4)緣死屍不動等之相以修不淨觀, 可治供奉之貪. 此外, 若緣骨鎖以修不淨觀, 則因骨鎖中無四貪之境, 故能對治上述之四貪.
(四)據大乘義章卷十二?卷十三, 將不淨觀分爲厭他身而觀他不淨與厭自身而觀自不淨二種. 前者觀他身中有九相, 卽:(1)死相, (2)脹相, (3)靑瘀相, (4)膿爛相, (5)壞相, (6)血塗相, (7)蟲?相, (8)骨鎖相, (9)離壞相(分散相). 然大智度論中缺死相而加燒相. 後者觀自身中有五不淨, 稱爲五種不淨. 卽:(一)種子不淨, 肉體係由因緣而形成, 故內(煩惱?業)?外(父母之精血)之種子不淨. (二)住處不淨, 於母胎中, 十月不淨. (三)自體不淨, 此身由四大之不淨所成. (四)外相不淨, 此身之九孔常流不淨. (五)究竟不淨, 死後棄置塚間爛壞, 亦永久不淨. 同書又擧出人之色貪有二種, 卽:(1)愛自身, 可以觀五不淨對治之. (2)愛他身, 可以觀九相對治之. 其中, 愛他身中有四種欲, 卽:1.威儀欲, 可以九相中之死相對治之. 2.形色欲, 可以靑瘀?膿爛?血塗等三相對治之. 3.處所欲, 可以脹?壞?蟲??分散等四相對治之. 4.細觸欲, 可以骨鎖相對治之. 上述之九相係於人之死屍起九種之觀想, 故又稱九想. 南傳佛敎則認爲有十種觀想, 稱爲十不淨. 此外, 天台四敎儀集註亦擧出:種子不淨?受生不淨?住處不淨?食?不淨?初生不淨?擧體不淨?究竟不淨等七種不淨. 蓋不淨觀與數息觀, 共稱爲入道之二甘露門. 不淨觀以無貪之善根爲自性, 於三界之中, 緣欲?色二界, 通於欲界?中間靜慮?四靜慮?四近分等十地, 竝以此十地爲依地, 以所依之欲界身而起之不淨觀, 與勝解作意相應, 此卽是有漏觀, 相當於四念住中之身念住之位. 又於八解脫與八勝處中, 以不淨觀爲初禪及二禪之觀法. [中阿含卷二漏盡經?卷二十八諸法本經?增一阿含經卷五?大般涅槃經(北本)卷三十六?坐禪三昧經卷上?廣義法門經?大品般若經卷一?大智度論卷十九?卷二十一](參閱?七種不淨?114??九想?150)
삼십육물
●삼십육물 ◀三十六物▶
우리의 몸을 구성한 물체를 외상(外相)ㆍ신기(身器)ㆍ내함(內含)의 셋으로 나누고, 다시 그 중에서 각각 12종으로 나눔.
(1) 외상의 12: 발(髮)ㆍ모(毛)ㆍ조(爪)ㆍ치(齒)ㆍ치(?)ㆍ누(淚)ㆍ연(涎)ㆍ타(唾)ㆍ시(屎)ㆍ요(尿)ㆍ구(垢)ㆍ한(汗).
(2) 신기의 12:피(皮)ㆍ부(膚)ㆍ혈(血)ㆍ육(肉)ㆍ근(筋)ㆍ맥(脈)ㆍ골(骨)ㆍ수(髓)ㆍ방(肪)ㆍ고(膏)ㆍ뇌(腦)ㆍ막(膜).
(3) 내함의 12:간(肝)ㆍ담(膽)ㆍ장(腸)ㆍ위(胃)ㆍ비(脾)ㆍ신(腎)ㆍ심(心)ㆍ폐(肺)ㆍ생장(生臟)ㆍ숙장(熟臟)ㆍ적담(赤痰)ㆍ백담(白痰).
『남본열반경』 제22권에 있음.((운허_동국역경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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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물
【三十六物】 p516-下≫指構成人身之三十六種要素. 然關於數目, 多有異說. 據大明三藏法數卷四十八所擧, 三十六物分爲外相?身器?內含三類:(一)外相十二物, 髮?毛?爪?齒???淚?涎?唾?屎?尿?垢?汗. (二)身器十二物, 皮?膚?血?肉?筋?脈?骨?髓?肪?膏?腦?膜. (三)內含十二物, 肝?膽?腸?胃?脾?腎?心?肺?生臟?熟臟?赤痰?白痰. 雜阿含經卷四十三則列髮?毛?爪?齒?塵垢?流涎?皮?肉?白骨?筋?脈?心?肝?肺?脾?腎?腸???生臟?熟臟?胞?淚?汗?涕?沫?肪?脂?髓?痰?음?膿?血?腦?汁?屎?溺等三十六種. 南本涅槃經卷二十二(大一二?七四九中):?見凡夫身, 三十六物不淨充滿.?故?不淨觀?, 卽是觀三十六物不淨(自體不淨). [增一阿含經卷二十五?大品般若經卷五?坐禪三昧經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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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부정관의 문제점
어떻게 반야바라밀다가 뭇 악을 꺾고 모든 선을 자라게 하느냐 하면,
이 반야바라밀다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무명 내지 순수한 큰 고통의 가리움[障蓋]과 수면(隨眠)과 얽매임[纏垢]과 결박(結縛) 등을 소멸시키며,
나라는 소견과 유정이라는 소견 내지 보는 것이라는 소견이며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과 항상하다는 소견[常見]과 없다는 소견과 있다는 소견 내지 갖가지의 나쁜 소견 갈래며
간탐과 파계(破戒)와 성냄과 게으름과 산란함과 어리석음이며 항상하다는 생각·즐겁다는 생각·나라는 생각·깨끗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그 밖의 온갖 탐냄·성냄·어리석음·난 체 및 의식과 소견의 행들을 모두 소멸시키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물질에 대한 집착 내지 의식에 대한 집착도 소멸시키고
또한 일체상지에 대한 집착과
보리·열반에 대한 집착까지도 소멸시키느라.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01 권 5. 현솔도파품]
이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이 따라 기뻐하고 회향하면서 반야바라밀다와 더 나아가서 내지 일체상지를 수행한다면, 곧 생각과 마음과 소견의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따라 기뻐하는 마음과 회향할 바의 위없는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05 권 9. 수희회향품]
[주석끝]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1-11-금-25-[47weeks 329 days]-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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