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수행자가 허공정(虛空定)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색(色)은 갖가지 온갖 괴로움의 도구[苦具]이니, 마치 채찍과 몽둥이나 가르고 잘라서 살해하는 것이나 배고픔ㆍ추위ㆍ늙음ㆍ병듦의 괴로움 등이 모두 색으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색을 버리고 떠나 허공처(虛空處)를 얻을 수 있다.
【문】수행자는 지금 색을 몸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답】모든 번뇌는 색을 인연으로 하고 또한 색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번뇌들을 멸하였기 때문에 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닦아 익혀서 색을 파괴하고 법을 허공처럼 관하면 색을 떠날 수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제4선의 5음(陰)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겨야 하며,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관하면 제4선의 5음을 떠날 수 있다.
▸ 그 밖의 나머지 음(陰)들도 색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색이 결국에는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자가 색을 관하여 조각조각 부수고 찢으면 색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치 몸을 나누면 머리ㆍ발ㆍ어깨ㆍ팔 등 각각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몸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머리[頭]는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수염ㆍ머리털ㆍ뼈ㆍ살 등 여러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눈[眼]은 4대(大)와 4진(塵)ㆍ신근(身根)ㆍ안근(眼根) 등 열 가지 것[十事]이 백색과 흑색 등의 살덩어리로 합쳐져 이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각각 나누어 구별하면 곧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땅[地] 등의 여러 부분도 각각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안근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색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답】4대 및 4대로 만들어진 정색(淨色)이 화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이 색이 제거되면 눈은 없는 것이다. 또 이 정색은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유대(有對)1)이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있고,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없는 것이다. 또한 능히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눈[眼]이라고 하니, 만약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색을 제거하면 눈은 없다. 만약 눈이 없는데 색을 볼 수 있다면 귀[耳]도 또한 마땅히 눈이 될 것이다. 만약 눈이 색법(色法)이라면 일체의 색법에는 처소가 있고 부분[分]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할 수 있으니, 만약 분별할 수 있다면 눈[眼]이 많게 될 것이다. 만약 4대로 지어진 뭇 미진(微塵)이 눈이라면 하나의 눈이 될 수 없으며, 만약 모두가 다 눈이 아니라면 역시 하나의 눈도 없다. 만약 미진이 눈이라면 이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 미진에 색이 존재하면 곧 시방(十方)이 있게 되므로 미진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만약 색이 아니라면 눈이라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진의 체(體)에는 결정적으로 네 가지 분(分), 즉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이 존재한다. 그런데 눈은 결코 이 네 가지 것[四事]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은 내입(內入)에 속하고, 그 네 가지는 외입(外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미진이 눈이 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여러 가지 것들[衆事]이 화합하여 색을 보는 것을 가명(假名)으로 눈이라 하는 것이니, 정해진 실체는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귀ㆍ코ㆍ혀ㆍ피부ㆍ살ㆍ뼈 등도 또한 이와 같이 논파(論破)될 수 있으니, 이것은 내신상(內身相)을 깨뜨린 것이다. 외색(外色)인 궁전ㆍ재물ㆍ처자 등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분별하여 논파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나타(羅陀)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부터 마땅히 색을 깨뜨려 흩어지게 하고 색을 무너뜨려 찢어서 색이 존재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을 색을 떠난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만약 비구가 색을 떠나려고 한다면 일체의 색상(色相)을 넘어서고[度] 일체의 대상(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상[異相]을 생각하지 않아서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을 말하며, 일체의 대상을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대상이란 유대(有對)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색(色)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相)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무대(無對)2)인 색을 말한다. 또한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홍색ㆍ자색 등 여러 가지 색상을 말하며, 유대(有對)를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유대란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네모나고 둥글고 멀고 가까운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체 색상을 떠나면 허공처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몸의 내부가 허공과 같다는 마음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입ㆍ코ㆍ목구멍ㆍ눈ㆍ귀ㆍ가슴ㆍ배 등이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색은 온갖 번뇌가 되고, 공(空)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까닭에 마음이 즐거워 허공과 같게 된다. 만약 마음이 색에 속하는 상태에서 공(空)이 되게 하면, 마음이 점차 유연해지고 몸 가운데서 허공이 점점 광대해져 스스로 색신(色身)을 연뿌리의 구멍처럼 보며, 그것을 익혀 계속해서 이로움을 얻으면 몸이 다하여 공해져서 다시는 색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외색(外色)도 또한 그러하여,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이 허공과 같아 똑같이 하나의 공이 된다. 이때 마음은 허공을 반연하여 한량없고 가없어 문득 색에 대한 생각[想]을 떠나 편안하고 즐거워지니,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는 새가 병이 깨지면 그 속에서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라도 저촉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과 같다. 이를 초무색정(初無色定)이라 이름한다. 수행자가 허공 가운데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기고,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임을 알아,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하면 곧 공(空)의 연(緣)을 떠나니, 왜 그런가 하면 이 마음이 생각하는 허공이 속임이고 허망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는 다시 없어지니, 그 병통은 바로 이 허공이 식(識)을 좇아서 있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른바 식이 진실하다 할 것이니, 단지 식만 관하고 공연(空緣)은 버린다. 식을 관하는 것을 익힐 때는 점차 식상(識相)이 서로 이어져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이나 등불의 불꽃과 같다.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식은 그 식이 서로 이어져서 가없고 한량없다.
【문】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식처(識處)가 가없고 한량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식은 능히 멀리 있는 것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없고, 가없는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가없다. 또한 먼저 허공이 가없음을 반연하니, 만약 가없는 허공을 깨뜨린다면 식도 마땅히 가없을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능히 식을 크게 하여 마침내 가없음에 이르게 하니, 이를 가없는 식처(識處)라 이름한다. 【문】이 식처는 4음(陰)을 갖추고 있는데, 왜 단지 식처만을 말하는가?
【답】일체의 내법(內法)은 식이 그 주인이며, 모든 심수법(心數法)은 모두 식을 따라 속하니, 만약 식을 말한다면 곧 나머지 것들도 말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욕계 가운데서는 색음(色陰)이 주인이고, 색계 가운데서는 수음(受陰)이 주인이며, 허공처(虛空處)와 식처(識處)에서는 식음(識陰)이 주인이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상음(想陰)이 주인이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는 행음(行陰)이 주인이다.
또한 세 가지 법, 즉 신법(身法)ㆍ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은 욕계나 색계에서는 몸[身]이 주인이니, 마음이 몸을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마음의 힘[心力]만 홀로 작용한다. 마음[心法]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공(空)을 반연함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반연함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2처(處)가 있으니,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이다. 다만 처음에 색을 깨뜨렸기 때문에 허공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며, 허공을 깨뜨렸기 때문에 오직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심수법에도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상(想)이고, 둘째는 행(行)이다.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2처가 있으니, 상무소유처(想無所有處)와 행비상비비상처(行非想非非想處)이다.
또한 식을 반연하기 때문에 허공처를 떠날 수 있으니, 이렇기 때문에 비록 다른 음(陰)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식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식처를 얻은 다음에는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해 식이 병통이 됨을 관해야 하니, 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식은 허깨비이고, 허망된 속임수이며, 온갖 인연에 속하므로 자재하지 못하다고 관하니,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멸하며, 식은 정(情)에도 머물지 않고 연(緣)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머무는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식상(識相)은 이와 같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식은 허깨비[幻]와 같다”고 하셨으니, 수행자가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면 식처를 떠날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5욕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색도 또한 이와 같으며, 색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허공 역시 그러하다. 허공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식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한 속임수인데, 중생들이 미혹되어 집착해서 법들[諸法]이라 한다. 공하여 무소유(無所有)한 것이 마음이 편안한 처소[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곧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간다.
【문】허공처와 무소유처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전자는 마음속 생각[心想]이 허공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마음속 생각이 무소유를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차별이 된다. 수행자가 무소유처에 들어가면 예리한 근기[利根]를 지닌 사람은 이 가운데 수ㆍ상ㆍ행ㆍ식이 있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둔한 근기[鈍根]를 가진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또한 무소유처를 떠나는 인연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으니, 유견(有見)ㆍ무견(無見)ㆍ비유견비무견(非有見非無見)이다. 유견은 욕계로부터 식처에까지 이르며, 무견은 곧 무소유처이며, 비유견비무견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무견은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하니,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가 비록 미세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데, 어찌 하물며 무소유처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무소유처를 떠나야 한다. 【문】예컨대 불법(佛法) 가운데 또한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실재한다면 어찌하여 사견(邪見)이므로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불법 가운데서는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실재가 아니라고 한 것이니, 무소유처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애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중생은 정해진 과보를 받은 다음에 업의 인연을 따라 다시 온갖 과보를 받게 되니, 이런 이유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비슷하지만 그 실제는 각기 다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의 상지(想地)는 모두 거칠어서 근심스러우며,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다. 무상지(無常地)는 곧 어리석은 곳[癡處]이다. 지금 적멸(寂滅)의 미묘한 제일처(第一處)는 이른바 비상비무상처(非想非無想處)이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면 무소유처의 상지를 떠나 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게 된다. 【문】이 가운데서는 유상(有想)인가, 무상(無想)인가? 【답】이 가운데서는 유상이다. 【문】만약 유상이라면, 어째서 단지 아래의 7지(地)를 상정(想定)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지(地) 가운데 상(想)은 미세하지만 날카롭지 못하여 상의 작용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음속으로 이 처(處)를 비유상비무상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본래의 명칭을 따라 이를 비유상비무상처라고 이름하신 것이다.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이 가운데 4음(陰)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의 안온한 처소라고 하면서 증상만(增上慢)을 내니, 그 수명이 8만 겁이 지난 뒤에는 다시 여러 갈래[諸趣]에 떨어진다. 이 가운데 4음이 비록 미세하며 깊고 오묘하더라도 예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능히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달아 안 다음에는 환난을 싫어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 또한 화합하여 된 법이고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이어서 허망한 속임수이고 실재하지 않으니,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이다. 또한 이것은 나중에 인연을 생하므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환난이기 때문에 마땅히 4제(諦)를 배워야 한다.’ 【문】그 밖의 다른 지(地)를 버릴 때는 왜 4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앞에서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ㆍ고ㆍ공ㆍ무아라고 말한 것은 4제를 간략히 설한 것이요, 다만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지(地)에서는 막음[遮]도 없고 어려움[難]도 없으니, 범부의 유루도(有漏道)도 능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간의 정상(頂上)은 오직 성인만이 무루도(無漏道)를 배워서 마침내 넘어설 수 있다. 비유컨대 노끈으로 새의 다리를 묶어 놓으면 처음에는 비록 날아가려고 하지만 노끈이 다하는 곳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범부인(凡夫人)도 역시 이와 같아서 비록 그 밖의 다른 지를 넘어서더라도 마왕(魔王)이 놀라지 않지만, 만약 유정지(有頂地)3)를 넘어서면 마왕이 크게 놀라니, 마치 노끈이 끊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지를 떠날 때는 4제를 설하지 않은 것이다. 유정지는 삼계의 중요한 문이니, 이 중요한 문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4제를 배워야 한다. 【문】4제란 무엇인가? 【답】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이다. 고(苦)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괴로움[身苦]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心苦]이다. 집(集)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부림[使]이고, 둘째는 번뇌에 얽매임[惱纒]이다. 멸(滅)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도(道)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定)이고, 둘째는 혜(慧)이다. 또한 고제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고제이고, 둘째는 고성제(苦聖諦)이다. 고제란 번뇌의 모습[惱相]이기 때문에 이른바 5수음(受陰)4)을 고제라고 이름한다. 고성제란 지견(知見)이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고성제라고 한다. 집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집제이고, 둘째는 집성제(集聖諦)이다. 집제란 생겨나는 모습[出生相]이니, 이른바 애(愛) 등의 온갖 번뇌를 집제라 이름한다. 집성제란 그 온갖 번뇌를 끊기 위하여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집성제라 한다. 멸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멸제이고, 둘째는 멸성제(滅聖諦)이다. 멸제란 적멸의 모습[寂滅相]이니, 이른바 4사문과(沙門果)5)를 멸제라 한다. 멸성제란 증득하기 위하여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멸성제라 한다. 도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제이고, 둘째는 도성제(道聖諦)이다. 도제란 벗어나 이르는 모습[出到相]이니, 이른바 8정도(正道)를 도제라 한다. 도성제란 닦기 때문에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도성제라고 한다. 또한 진리[諦]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이다. 총상의 고(苦)는 5수음(受陰)이고, 별상의 고(苦)는 색음(色陰) 및 수ㆍ상ㆍ행ㆍ식의 음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집(集)이란 나중에 받을 몸을 능히 생겨나게 하는 것이고, 별상의 집이란 애(愛) 등의 온갖 번뇌와 유루업(有漏業) 및 5수음의 인연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멸(滅)이란 나중에 받을 몸의 애(愛)가 다하는 것이고, 별상의 멸이란 89가지 번뇌가 다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도(道)란 8성도(聖道)를 말하며, 별상의 도란 고법인(苦法忍)6)에서부터 무학도(無學道)7)에 이르기까지를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4제를 통달하지 못하면 5도(道)를 윤회하게 되니, 생사를 왕래하여 끊임이 없을 때 이 인연 때문에 수행자는 늙음ㆍ병듦ㆍ죽음 등의 모든 고뇌가 모두 몸이 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비유컨대 모든 초목이 다 땅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경에서 설하기를, “시방의 중생은 몸이 있는 까닭에 모두 괴로움을 받으며 또한 몸을 받아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독을 먹으면 잘생겼든 못생겼든 모두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죽음과 괴로움이 의지할 바가 없으리니, 마치 사나운 바람이 큰 나무를 꺾어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만약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러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받는 근본임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마치 허공이 바람의 근본[本]이고, 나무가 불의 근본이며, 땅이 물의 근본이듯이, 몸은 괴로움의 근본이다. 또한 땅[地]은 항상 견고하고[堅相], 물[水]은 항상 축축하며[濕相], 불[火]은 항상 뜨겁고[熱相], 바람[風]은 항상 움직이듯이[動相], 몸과 마음은 항상 괴로움[苦相]을 가지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몸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늙음ㆍ병듦ㆍ죽음ㆍ배고픔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바람ㆍ비 등의 괴로움이 항상 몸을 따르며, 또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걱정ㆍ두려움ㆍ성냄ㆍ질투 등의 괴로움이 항상 마음을 따른다. 만약 현재의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거의 괴로움도 또한 그러하고, 현재와 과거의 몸이 괴로움이라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니, 비유컨대 지금 현재의 곡식의 종자가 곡식을 생산하는 것을 보면, 과거나 미래에도 또한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으며, 또한 현재 불이 뜨겁다면 과거나 미래의 불도 또한 뜨거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이전에도 괴로움이 없었고 지금도 괴로움이 없으며 나중에도 괴로움이 없을 것이니, 삼세의 고통은 모두 몸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제(苦諦)를 관해서 이와 같이 마음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인연은 오직 애(愛) 등의 모든 번뇌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하늘[天]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시간[時]으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자연(自然)히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만약 번뇌를 떠나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세간은 모두 애욕 등의 번뇌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짓는 것은 모두 욕심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니, 온갖 번뇌가 괴로움의 인연이다. 또한 애욕의 물[愛水]로 말미암아 몸을 받으니, 만약 애욕의 물이 없으면 몸을 받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른 흙은 벽에 붙지 않지만 물이 그것과 잘 섞여 화합되면 벽에 붙는 것과 같다. 또한 온갖 번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받는 것도 갖가지로 똑같지 않으니, 가령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성냄이 많은 자는 성냄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으며,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어리석음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번뇌가 엷은 자는 번뇌가 엷은 형태의 몸을 받는다. 지금의 과보가 다름을 보기 때문에 옛날의 인연이 각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내세에도 번뇌를 따라 몸을 받음이 이와 같이 각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을 따라 몸을 받으니, 만약 성내지 않았으면 독사의 모습을 받지 않으며, 일체의 나머지 모습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하기 때문에 애(愛) 등의 온갖 번뇌가 일체 괴로움의 인연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 다하면 괴로움이 없어져 열반을 얻는다. 열반이란 욕심을 떠난 것을 말하니, 온갖 번뇌가 끊어져 항상하여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도 없고, 원수와 만나는 괴로움도 없어, 항상 즐거워 물러나지 않는다. 수행자가 열반을 얻어 멸도(滅度)할 때에는 도무지 가는 곳이 없으니, 이를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불을 밝힌 등불에 기름이 다하면 불이 사라져 그 불빛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멸제(滅諦)라고 한다. 열반을 얻는 방편도(方便道)의 정분(定分)에 세 가지가 있고, 혜분(慧分)에 두 가지가 있으며, 계분(戒分)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이 계 가운데 머물러 정과 혜를 닦는다. 이른바 4제 가운데서 혜가 능히 결정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하며, 정견을 따라 법을 깨달음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사유(正思惟)라 하니, 이들을 혜분의 두 가지라고 한다. 정정(正定)ㆍ정념(正念)ㆍ정정진(正精進)을 정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을 계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청정한 계에 머물기 때문에 온갖 번뇌의 싹이 자라나지 못하고 그 세력이 쇠약해지니, 마치 때가 아닌 때에 종자를 심으면 싹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온갖 번뇌의 세력이 다가오더라도 정분(定分)으로 막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큰 산이 물을 막으면 물이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주술로써 독사를 제어하면 비록 독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정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혜(慧)는 온갖 번뇌의 근본을 뽑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여름에 물이 갑자기 범람하면 물가 언덕 위에 있는 모든 나무를 휩쓸어 뽑아 버리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이 3분(分) 8정도(正道)를 행하면 진정 바른 길[正路]로 곧장 나아갈 수 있어서 능히 괴로움의 바탕[因]을 멸하고, 마침내 편안하고 항상 즐거운 무위(無爲)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방편으로 처음에 그 수행문[門]을 익히려면 열 가지 일[十事]이 있다. 첫 번째는 마음이 전일하여 바른 것이니, 갖가지 외부의 일[外事]이 다가와 파괴하려 해도 마음을 바뀌게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네 방향에서 바람이 일어나도 산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질박하고 올곧은 것이니, 스승이 설하는 법을 들으면 그 장단(長短)을 보지 않아서 마음이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가르침을 따라 의심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빽빽한 삼림에 들어가서 곧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쉬우나 굽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삼계라는 빽빽한 삼림은 곧은 자는 벗어나기가 쉬우나 굽은 자는 벗어나기가 어렵다. 불법(佛法) 가운데서는 곧은 것만 사용하고 굽은 것은 버린다. 세 번째는 부끄러워함[慙媿]이니, 이것은 제일가는 최상의 의복이며 가장 오묘한 장엄이다. 부끄러워함은 온갖 악한 마음을 감아 제어하니, 부끄러움이 있으면 진실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나 만약 부끄러움이 없다면 축생과 다를 바가 없다. 네 번째는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이니,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다. 이는 마치 세간에서 방일하면 온갖 이로운 일을 잃으며, 수행자가 방일하면 열반의 이로움을 잃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방일함을 원수나 도적처럼 여겨야 하며, 마음이 항상 그것을 멀리 떠나야 한다. 반면에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은 마치 군왕이나 부모, 스승처럼 여겨서 마땅히 준수하고 계승하여 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 번째는 멀리 떠남[遠離]이니, 이 멀리 떠남을 바탕으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5욕을 가까이하면 온갖 정(情)이 개발되니, 먼저 몸이 취락(聚落)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다음으로는 마음이 세간의 일을 멀리 떠나 그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 번째는 욕심을 적게 내는 것[小欲]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음으로 많이 구하지 않아야 하니, 많이 구하기 때문에 많은 고뇌에 떨어진다. 일곱 번째는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이니, 어떤 사람이 비록 욕심을 적게 내더라도 좋은 물건에 애착하면 도심(道心)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만족하게 여길 뿐이다. 여덟 번째는 마음이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든 단월(檀越)이든 선지식[知識]이든 친척이든 그들에게 안부를 묻거나 환영하거나 환송하는 등 많은 일을 치르게 되면, 이와 같은 등의 일이 도를 훼손하고 그르치기 때문에 그런 일에 매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홉 번째는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등을 즐기기 위해 좋은 때나 좋은 날을 가려 길흉을 선택하는 따위의 일체 세간의 일에 대해 모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야 한다. 열 번째는 인욕(忍辱)이다. 수행자가 도를 구할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일을 참아야 한다. 첫째는 모기와 등에가 물거나 쏘는 것이고, 둘째는 뱀이나 도룡뇽 따위의 독을 가진 것들이 무는 것이다. 셋째는 악독한 짐승이고, 넷째는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때리고 던져 해를 가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질병의 고통이다. 일곱째는 배고픔이고, 여덟째는 갈증이다. 아홉째는 추위이고, 열째는 더위이다. 이와 같이 괴로운 일들을 수행자는 참아서 이런 일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고, 항상 이런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병의 모습을 알면 병의 인연을 알 수 있고, 병을 치료하는 약을 알 수 있으며, 간병인을 구해 병자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면 머지않아 차도가 있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진실로 괴로움의 모습[苦相]을 알면 괴로움의 인연을 알 수 있고, 괴로움이 다하는 도(道)를 알 수 있으며, 훌륭한 스승과 동학(同學)을 얻음을 알 수 있으니, 이와 같으면 머지않아 안온한 적멸을 얻을 것이다. 【문】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어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오직 상지(上地)만이 존재하여 번뇌[結使]가 미세하고 엷어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가 상응하지 못하니, 4제(諦)를 관함이 마치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답】비단 유정(有頂)의 지위에 있는 이를 위해 설할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의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다만 무색계의 4음(陰)을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관하여 그것들을 병ㆍ부스럼ㆍ화살과 같다고 여긴 것이니, 마음속에 들어가면 무상ㆍ고ㆍ공 ·무아는 모두 인연으로 허망하게 속여 지은 법이다. 열반을 훌륭하고 오묘하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며 인연으로 지은 법이 아니므로 진실하여 허망되지 않다고 관하여 3독(毒)8)과 3쇠(衰)9)를 멸하고,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멸하며, 항상 4음 및 그 인연을 꾸짖는 것을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라고 한다. 또한 열반과 열반도를 찬탄하는 것을 진제(眞諦)와 도제(道諦)라고 한다. 수행자가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으면 마음이 유연해진다. 만약 5신통을 구하려 한다면, 제4선에 의지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만약 초선과 2선과 3선에 의지하면 비록 얻을 수는 있으나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얻는다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초선에서는 각관(覺觀)이 선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고, 2선에서는 기쁨[喜]이 많기 때문이며, 3선에서는 즐거움[樂]이 많기 때문에 선정과 서로 위배된다. 4여의분(如意分)10)은 모두가 선정의 모습[定相]이니, 오직 제4선에서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숨을 내쉬거나 들이쉼도 없어서 모든 성현이 흔쾌하게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무는 바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제4선에 의지하여 4여의분을 닦아야 한다. 4여의분이란 이른바 욕정행법성취여의(欲定行法成就如意)ㆍ정진정(精進定)ㆍ심정(心定)ㆍ사유정행법성취여의(思惟定行法成就如意)이니, 이에 의지하여 머무르면 어떤 일도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문】욕정행법성취여의란 무엇인가? 【답】욕(欲)이란 구하고자 하는 일이며, 정(定)이란 일심(一心)의 상태로서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는 것을 말하며. 행법(行法)이란 믿는 생각[信念], 교묘한 지혜[巧慧], 기쁨과 즐거움[喜樂] 등이 욕정(欲定)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욕(欲)을 주인으로 삼아 정(定)을 얻기 때문에 욕정이라 한다. 정진정ㆍ심정ㆍ사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수행자는 욕(欲)을 관(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도록 해야 하고, 안으로 많이 거두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많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여 유연하고 평등하고 조화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니, 이는 마치 거문고[琴]를 탈 때 그 완급을 조절하며 곡에 따라 연주하는 것과 같다. 정진(精進)ㆍ심(心)ㆍ사유(思惟)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수행자가 나는 것을 배워 날고 싶어하면 이를 욕(欲)이라 하지만, 온갖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모아 행법을 돕는다면 이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마음은 능히 몸을 들어올리거나 몸을 떠날 수도 있으며, 마음이 거칠고 무거우면 수면이나 도거(掉擧) 등의 번뇌에 매인다. 마음이 경쾌해지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는데, 이를 심(心)이라 한다. 욕(欲)ㆍ정진(精進)ㆍ심(心)에 관해 그 다소를 헤아려 능히 몸을 들어올리되, 아직 안과 밖의 여러 색미(色味)를 파괴하지 않은 것을 사유라 한다. 4여의분에 의지하면 일체의 공덕을 갖출 수 있으니, 어찌 하물며 5신통이겠는가? 【문】5신통에서는 무엇이 먼저 생기는가? 【답】그에 따라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이 먼저이다. 【문】만약 그러하다면 왜 변화신통이 처음에 존재하는가? 【답】5신통은 대부분 중생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마치 혜해탈아라한(慧解脫阿羅漢)이 이미 아라한을 얻고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말한 것과 같다. “중생들 가운데 둔한 근기를 가진 많은 이들은 도(道)에 관한 일을 믿지 않고 불법(佛法)을 경시한다. 내가 어려운 일인 누진신통(漏盡神通)을 얻었으니, 어찌 신통력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지 않아서 죄에 떨어지도록 하겠는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대비로써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시니, 나도 불제자로서 마땅히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도우리라. 그러나 많은 중생들은 나타난 일로써 이익을 얻으므로 신통변화로 귀하든 천하든 모든 대중들을 감동시켜 조복하지 않음이 없게 하리라.” 그 밖의 신통력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므로 변화신통이 처음에 있는 것이다. 【문】하늘의 몸[天身]은 불의 요소[火大]가 많기 때문에 몸에 광명이 있고 또한 허공에 빨리 오를 수 있다. 귀신은 바람의 요소[風大]가 많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빠르며 걸림이 없다. 용의 몸[龍身]은 물의 요소[水大]가 많기 때문에 마음속 생각으로 물을 만들고 또한 변화하여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땅의 요소[地大]가 많기 때문에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으니, 어떻게 날 수 있는가? 【답】인간의 몸은 땅의 종류여서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기 때문에 신통력을 구해 배워도 천상이나 귀신처럼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땅은 비록 무겁지만 물의 힘이 있기 때문에 땅이 움직일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마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다. 비유컨대 원숭이는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져도 몸을 다치지 않으나 사람은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치게 되니, 원숭이는 마음의 힘이 가볍고 빠르고 강하기 때문에 손상됨이 없는 것이다. 마땅히 몸의 신통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니,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뜰 수 있다면 비록 깊은 물에 있더라도 가라앉지 않으니, 마음의 방편력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사람의 몸이 비록 무겁더라도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이 허공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문】이와 같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답】만약 수행자가 제4선에 머물러 4여의분(如意分)에 의지하여 일심으로 생각을 거두어서, 몸의 곳곳이 텅 비어 마치 연뿌리의 구멍과 같다고 관하면 몸이 가볍고 빠른 모습을 취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익혀서 그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합해진다. 이는 마치 철과 불이 화합하는 것과 같다. 몸의 거칠고 무거운 모습을 소멸하면 단지 가볍고 빠른 몸만 있게 되니, 이것과 욕ㆍ정진ㆍ사유 및 이를 돕는 행법이 화합하면 욕 등의 선행력(善行力) 때문에 몸이 곧 그것을 따른다. 마치 불과 철이 화합하면 가볍고 부드러워져 사용되는 것과 같다. 또한 색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색(色)은 이 몸 가운데서 몸과 화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니, 마치 사람이 약을 먹으면 마음이 명료해져 몸이 곧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색계의 4대로 만들어진 색이 밝고 깨끗해지면, 이 몸에 있기 때문에 눈이 밝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도약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더욱 공교로워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새가 나는 방법을 배우면 점점 더 멀리 날 수 있는 것처럼, 신통도 이와 같아서 처음 얻었을 때에는 한 길[丈]이나 두 길에 불과하지만 점차 더 멀리 날 수 있다. 이 신통변화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이 마치 새가 날듯이 허공을 나는 것이고, 둘째는 먼 거리를 가깝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에 나타나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대로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손가락을 튀기는 짧은 동안에 60념(念)이 있는데 한 생각 사이에 무량 아승기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넘어설 수 있어서 생각에 따라 곧 이른다. 이 신통력을 사용하면 몸이 자재함을 얻어 한 몸이 많은 몸으로 되고 많은 몸이 한 몸으로 될 수 있으며, 큰 것이 작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될 수 있으며, 무겁기는 수미산과 같고 가볍기는 기러기 털과 같으니, 이와 같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 또한 보살이 이러한 몸의 신통력을 얻으면 한 생각 사이에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건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의 중생들은 보살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지만 보살은 본래의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법을 설하여 교화하지만 이곳에서도 또한 중지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천인(天人)이 항상함[常]에 집착하여 뒤바뀐 경우에도 신통력으로 제도할 수 있다. 삼천대천국토가 타는 모습을 나타내면 중생들은 삼천대천국토가 불에 타 파괴되는 모습을 보지만 국토는 손상됨이 없다. 어떤 중생이 마음속으로 교만한 생각을 낼 때, 금강저(金剛杵)를 지어 나타내 손에 쥐고 금강저에서 불이 나오게 하면,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귀의하고 예경한다. 또 어떤 사람이 전륜성왕의 몸을 즐겨 집착하면, 곧 전륜성왕의 모습을 나타내어 그를 위해 법을 설해 주며, 혹은 석제환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마왕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성문ㆍ벽지불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는 등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몸을 나타내며 법을 설한다. 보살은 어떤 경우에는 허공에서 결가부좌한 채로 몸에서 사방으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아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혹 중생들이 현란한 색상으로 장엄한 것을 좋아할 때는 삼천대천국토를 7보로 장엄하고, 깃발[幢幡]과 화개(華蓋)와 온갖 종류의 기악(伎樂)이 있는 곳에서 법을 설하기도 한다. 혹은 삼천대천국토를 한 바다의 물로 만들어 청색 연꽃과 붉은 꽃으로 물 위를 덮어 그 위에서 법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 범음(梵音)으로 법을 설하여 널리 여러 나라에서 들을 수 있게 하고, 어떤 때는 중생들이 그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단지 법을 설하는 음성만 들을 수 있으며, 혹은 건달바의 몸을 지어 기악과 음성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 법을 설하고, 혹은 용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번개와 천둥을 쳐 법을 설하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방편으로 신통변화를 나타내서 중생을 열어 인도한다. 【문】신통으로 변화시킨 온갖 사물은 어찌하여 허망하지 않은가? 【답】수행자는 먼저 모든 법이 허망하여 허깨비와 같고 지어낸 것과 같다는 것을 아니, 비유컨대 진흙을 주물러 마음대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름에도 눈이 내리게 하고 겨울에도 꽃이 피게 하며 강의 물을 흐르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또 선인(仙人)이 진노하면 호랑이ㆍ이리ㆍ사자 등을 돌[石身]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신통의 정력(定力)이 사물을 변화시키지 못하겠는가? 또한 일체의 사물 가운데는 각기 기분(氣分)이 있는데, 그 기분의 성질을 취하여 신통력이 그것을 넓히면 그 밖의 다른 것은 숨어 사라진다. 경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비구가 신통력으로 마음의 자재함을 얻어서 큰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땅으로 만들고자 하면, 곧 그 나무가 모두 땅이 된다”고 하였으니, 왜 그런가 하면 나무에는 땅의 성분[地分]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불과 바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금이나 은 등의 갖가지 보물을 만들려고 하면 마음대로 모두 만들 수 있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깨끗한 성분[淨分]이 있기 때문이다. 【문】사물의 변화가 이와 같다면 조화에 본말(本末)이 없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허공 가운데서 4대가 미진을 만들어 내며, 마음의 힘[心力]이 있기 때문에 미진들을 화합하여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비유컨대 사람이 죽어서 혹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혹은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죄와 복의 인연 때문이듯이, 미진을 화합하여 변화시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사물이 신통에 의해 변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만약 수행자가 천이(天耳)를 구하고자 하면, 또한 제4선(禪)을 근본으로 삼아 4여의분(如意分)을 닦아야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그 마음을 부드럽게 조절하고 이어서 대중들의 음성을 염두에 두고 갖가지 소리의 양상을 취하여 들은 소리에 대해 항상 상념(想念)한다. 만약 마음이 다른 것을 연(緣)하면 거두어 다시 돌아오게 하며, 항상 일심(一心)으로 생각을 닦으면 곧 귀 가운데서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을 얻으리니, 이것을 천이(天耳)를 닦아 익힌다고 한다. 이 천이로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이른바 천상의 소리, 인간의 소리, 용의 소리, 아수라(阿修羅)의 소리, 건달바(乾闥婆)의 소리, 전다라(旃陀羅)의 소리, 마후륵(摩睺勒)의 소리, 축생과 아귀의 소리, 지옥 고통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크거나 작은 소리 등을 다 들을 수 있다. 보살은 선정[定]의 마음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되 상(相)을 취하지 않아서, 법으로 진실된 법[眞法]을 삼고 가장 높은 것으로 삼으며, 깊은 뜻에 의지하고 언어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깊은 뜻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공(空)하고 무상(無相)이며 무작(無作)이라는 것을 알아 삿된 견해를 내지 않으며, 뜻에 대해서도 또한 뜻을 얻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또한 얻는다는 관념[相]도 없으니, 이것은 깊은 뜻에 의지한 것이지 언어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행자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경이란, 만약 능히 뜻에 의지한다면 일체의 모든 경이 다 요의(了義)이다. 뜻[義]은 결국 공하여 그 모습[相]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모든 경은 다 요의이다. 만약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모든 경에 대해 다 불요의(不了義)이니, 왜냐하면 깊은 지혜가 없어 음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음성의 실상도 또한 깊은 뜻에 들어가면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를 분별요의경(分別了義經)이라 하니, 요의경 아님이 없다. 또한 수행자는 지(智)에 의지하되 식(識)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이 식상이 인연 화합에 의해 생기는 것이어서 자성이 존재하지 않고 색도 없고 무대(無對)이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어, 허망하기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상(識相)에 대해 이와 같이 알면, 식이 곧 지가 되니, 그러므로 지를 의지하되 식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자는 비록 다시 식을 내더라도 식이든 지이든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식이 상(相)과 같다는 것을 알면 식이 곧 지상(智相)이 되니, 이 지상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 또한 수행자는 법을 의지하되 사람은 의지하지 않아야 하니, 왜냐하면 만약 불법 가운데 실재로 사람이 존재한다면 청정하여 해탈을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지만, 단지 세속을 수순하기 때문에 사람이 있고 나[我]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한다. 법성(法性)이란 무생성(無生性)이다. 이 무생성이라는 것은 결국 공하다는 것이며, 결국 공한 것은 이를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로써 법을 설하지만 법 가운데는 언어가 없고, 언어 가운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곧 언어의 모습[語相]이 없으니, 일체의 언어는 언어의 모습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보여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것을 불법(佛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천이(天耳)로 모든 불법을 들을 수 있으며, 사람이든 법이든 집착된 견해를 내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 상[二相]이라고 분별하면 불법(佛法)이 아니며, 만약 두 가지 상이 없다면 이것이 불법이다. 수행자는 천이의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극히 깊은 법을 들을 수 있고 이로써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천이신통(天耳神通)이라고 한다. 만약 수행자가 타심지(他心智)를 얻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마음을 관해야 한다. 마음의 생상(生相)ㆍ주상(住相)ㆍ멸상(滅相)을 취하고, 또한 마음의 더러운 상[垢相]ㆍ깨끗한 상[淨相]ㆍ안정된 상[定相]ㆍ어지러운 상(亂相) 등을 알며, 또한 마음이 반연하는 바의 더러움과 깨끗함, 가까움과 멂, 많고 적음 등을 관하여 스스로 안팎의 마음의 상[內外心相]을 취한다. 그런 다음에는 중생의 색을 관한다. 즉, 탐욕하는 모습의 마음, 분노하는 모습의 마음, 교만한 모습의 마음, 인색한 모습의 마음, 질투하는 모습의 마음, 걱정하는 모습의 마음, 두려워하는 모습의 마음, 언어와 음성이 갖가지로 짓는 모습의 마음 등을 취해 이렇게 생각한다. ‘부처님도 나의 마음과 같다. 생겨날 때, 머무를 때, 멸할 때 그도 또한 이와 같다. 스스로 마음이 반연하는 바를 알 수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나의 마음에 이와 같은 색상(色相)과 언어가 짓는 상(相)이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심상(心相)을 닦고 배워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타심통(他心通)을 얻는다. 이때는 단지 다른 사람의 마음[心]과 심수법(心數法)을 반연한다. 마치 눈이 밝은 사람이 깨끗한 물속에 있는 고기를 바라보면 크거나 작거나 잘 생겼거나 못생겼거나 모든 물고기들을 다 볼 수 있으니, 비록 물이 덮고 있더라도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보는 데 걸림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하는 능력[他心通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비록 몸으로 마음을 덮고 있더라도 그 마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미 타심통을 얻었으므로 혹 대중들에게 법을 설할 때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알아 이 중생들이 얼마나 깊은 마음으로 어떤 법을 행하고, 어떤 인연이 있으며, 어떤 모습을 기뻐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다 안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도 또한 청정할 수 있음을 아니, 마치 깨끗한 거울에는 모든 색(色)이 길든 짧든 네모이든 둥글든 거칠든 미세하든 본래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하면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이니, 거울은 비록 분별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으니,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일정한 상(相)이 없으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심법과 심수법도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만약 중생들 가운데 음욕이 많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그 마음을 알아서 음욕을 떠날 수 있는 법을 설해 준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마음의 실상은 물듦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들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작지 않음을 알며, 벽지불도(辟支佛道)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중간 정도가 아님을 알며, 만약 대승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을 평등하게 따라서 법을 설해 주되 또한 심상(心相)을 분별하지 않으니, 비록 삼승(三乘)을 분별하여 법을 설하더라도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다. 법성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하는 바를 다 안다. 비록 자기 스스로 마음을 수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더라도 그 마음과 이 마음 사이에 거스름도 없고 따라감도 없으며, 또한 일체 중생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져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만약 심성(心性)을 알면 법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 타심지로 중생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면 해로움이 없다. 이를 타심지신통(他心智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숙명(宿命)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지금 겪고 있는 일과 종전에 겪은 일을 깨달아 알고, 계속해서 어제 밤과 어제 낮 그리고 며칠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와 같이 한 달, 그리고 올해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하니, 비유컨대 길을 갈 때 도착한 곳에 이르러 경유한 곳을 사유하여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정력(定力)을 잘 닦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와 태에 들어 있을 때를 기억할 수 있고, 어느 곳에서 죽어 이 태(胎)에 들어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으며, 1세(世), 2세, 3세, 나아가 백 세, 천만무량억 세를 알 수 있다. 숙명지(宿命智)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 동안 겪어온 일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생각해 알 수 있으므로, 숙명의 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은 성자(姓字)를 지니고, 이와 같이 태어나서, 이와 같은 수명을 누리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었다.” 또한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말해 줄 수 있으니, 수행자는 숙명력(宿命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과거 세(世)에 지은 죄와 복의 인연을 안다. 이른바 성문의 인연, 벽지불의 인연, 불(佛)의 인연을 심었는지를 알아서 그 인연에 따라 법을 설해 준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宿命智)의 힘 때문에 스스로 모든 부처님께서 심으신 선근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하지 않은 것까지 잘 알아 지금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한다. 수행자는 과거의 모든 법이 소멸할 때 떠나간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미래세에 모든 법이 생길 때 좇아 온 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비록 과거세가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시작이 없다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비록 미래세에 중생이 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을 관하더라도 치우친 견해[邊見]를 내지 않는다. 수행자는 숙명을 생각할 때 모든 선근을 늘리고 무량한 세(世) 동안 지은 죄의 인연을 멸하니, 왜냐하면 일체의 법에는 새로운 모습도 없고 옛날의 모습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은 다음에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과 겪어 온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관하되,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관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마음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일체의 중생들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일으키며, 일체의 법이 다 지은 모습[作相]이라는 것을 알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천만억 무량 겁 동안 생사를 왕래한 것이 모두 허망하여 진실이 아니듯이, 일체 중생들이 생사를 왕래한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4대(大)와 4음(陰)이 없다면 이것이 곧 진실한 것이니, 4대와 4음도 결국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로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일찍이 전륜성왕이 누리던 즐거움도 무상(無常)하여 마멸되었고, 석제환인이 누리던 즐거움도 또한 무상하여 마멸되었다. 모든 국토의 청정한 장엄과 모든 불보살의 오묘한 색과 법륜을 굴리는 것도 다 무상한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것이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어 멀리 여읜다. 수행자는 숙명지에 의지하여 무상공(無常空)에 들어가 일체 모든 법이 다 공하여 무상(無常)하지만 중생들이 뒤바뀐 소견 때문에 집착함을 관하고,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행하면 점차적으로 대비(大悲)를 성취할 수 있으며, 대비를 얻고 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생각하시고 그 공덕을 찬탄하시니, 이를 숙명신통(宿命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천안(天眼)을 구하고자 하면, 맨 처음에 밝은 빛의 상[明光相]을 취하니, 이른바 등불ㆍ밝은 구슬ㆍ해ㆍ달ㆍ별자리 등을 취하는 것이다. 이런 밝은 상(相)을 취한 다음에는, 만약 낮이면 눈을 감고 밤이면 생각을 다른 데 두지 않고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밝은 상에 둔다. 항상 밝음에 생각을 두고 닦아 익히면서 마음을 밝음에 매어 두고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며, 만약 마음이 달아나면 다시 거두어들여 마음을 한곳에 둔다. 이때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이 이 눈 안에 있게 되니, 이를 천안이라고 한다. 이 천안은 4대로 되었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하며, 또한 모든 현성의 청정한 눈이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 천안을 얻고 나면 모든 산과 나무와 철위산(鐵圍山)과 수미산 및 모든 국토가 도무지 막고 가리지 못하니, 눈을 장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시방의 무량 아승기 부처님들과 장엄된 국토를 볼 수 있다. 그때 수행자는 일체의 부처님들이 한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며, 또한 한 부처님을 일체의 부처님으로 보니, 법성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듯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자신의 모습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습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을 청정하게 보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두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에 있는 중생들이 지옥에 있든 축생이든 아귀이든 인간이든 천상이든 무색자(無色者)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나고 죽음과 좋고 나쁨을 모두 다 볼 수 있다. 또한 시방 6도(道) 중생의 업의 인연과 그 과보를 모두 아니, 이 중생은 선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고, 이 중생은 선하지 못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3악도(惡道) 가운데 태어남을 아는 것이다. 수행자는 천안 가운데서 지혜력(智慧力)을 얻었기 때문에 비록 중생을 보더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일체의 법에는 중생의 모습[相]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업과 과보가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또한 일체법의 무업(無業)ㆍ무과보(無果報) 가운데 들어가며, 비록 천안으로 일체의 색을 보더라도 지혜력이 있기 때문에 또한 색상(色相)을 취하지 않으니, 이 색은 모두 다 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막혀 있든 막혀 있지 않든, 가깝든 멀든, 위든 아래든, 못 보는 것 없이 다 볼 수 있으니, 수행자는 색계 제천(諸天)의 청정하고 은미한 형상을 볼 수 있으나 저들은 수행자를 보지 못하며, 나아가 대천(大天)에 이르러도 또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 신통의 뜻은 마하연에서 신통의 뜻을 설하는 가운데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 범어로 sa-pratigha이며 무대(無對)의 반대 개념이다. 대(對)란 애(礙)의 의미이다. 유대(有對)란 법에 애(礙)가 있다는 뜻이다. 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장애(障礙)와 구애(拘礙)이다. 5근(根)ㆍ5경(境) 및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 등 제법(諸法)은 장애를 받으면 생기지 않으며, 소연(所緣)으로 취해지는 대상인 경계도 구애되면 다른 경계로 변화하지 못한다. 이를 유대라 한다. 2) 범어로는 spratigha이며 극미(極微)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 무장애법(無障礙法)을 말한다. 12처(處) 가운데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根)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境) 등 10처에는 장애가 있으므로 유대라고 하며, 의(意)와 법(法) 두 가지 처에는 장애가 없으므로 무대(無對)라고 한다. 3) 무색계의 제4천(天)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은 삼계 9지(地) 가운데 최상지(最上地)이다. 따라서 최상의 절정이므로 유정지(有頂地)라고 하는 것이다. 4) 5취온(取蘊)이라고도 한다. 여기서의 수(受) 또는 취(取)는 번뇌의 다른 명칭이다. 즉, 번뇌로 말미암아 생기거나 번뇌를 생기게 하는 유루(有漏)의 5온을 5수음, 또는 5취온이라 한다. 5) 성문이 도를 닦아 얻는 결과로서 수다원과(須陀洹果)ㆍ사다함과(斯多含果)ㆍ아나함과(阿那含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를 말한다. 6) 고제(苦諦)의 입장에서 말하면 고법인(苦法忍)으로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여 고제에 의해 미혹된 번뇌를 끊고 고제의 이치를 증득한다. 7) 무학위(無學位), 또는 무학지(無學地)라고도 한다. 진제(眞諦)의 이치를 다 증득하고 일체의 번뇌를 다 벗어나 도를 배우는 일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다시는 뛰어난 과[勝果]를 닦아 배울 필요가 없는 경지로 아라한과를 지칭한다. 8)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뜻한다. 9) 3독(毒)의 이명(異名). 참고로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은 6쇠(衰)라고 한다. 10) 37도품 가운데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 다음의 세 번째 행법으로 4신족(神足) 또는 4여의분(如意分)이라고도 한다. 욕구[欲]ㆍ심념[心]ㆍ정진[勤]ㆍ관조[觀] 등 네 가지 법의 힘으로 갖가지 삼마지[定]을 낳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물을 놓고 각 주체마다 달리 대한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대하는 물과 사람이 대하는 물이 다르다. 이 사정에 대해 아귀가 대하는 물과 하늘이 대하는 물이 다르다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란 조각상이 있다. 이것을 함께 구경해도 각기 바라보는 각도나 모습이 다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들이는 느낌이나 값도 다르다. 사막에서는 금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일반인은 수도물처럼 여기고 공수병 걸린 개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수행자가 앉아서 정려 수행을 닦아 나간다고 하자. 그러면 닦는 정도에 따라 매번, 욕계, 색계 무색계의 상태로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사정으로 그런가를 이해해야 한다.
○ 격자이론과 정려 수행
선법요해에서 색계에서 무색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우선 색을 다 제거해 없애라는 요구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 그 밖의 나머지 음(陰)들도 색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색이 결국에는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자가 색을 관하여 조각조각 부수고 찢으면 색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치 몸을 나누면 머리ㆍ발ㆍ어깨ㆍ팔 등 각각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몸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머리[頭]는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수염ㆍ머리털ㆍ뼈ㆍ살 등 여러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눈[眼]은 4대(大)와 4진(塵)ㆍ신근(身根)ㆍ안근(眼根) 등 열 가지 것[十事]이 백색과 흑색 등의 살덩어리로 합쳐져 이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각각 나누어 구별하면 곧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땅[地] 등의 여러 부분도 각각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는 결국 과거에 설명한 격자이론과 관련된다. 어떻게 보면 위 설명은 상식과 어긋나는 내용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합쳐서 대하면 그 각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그렇게 나누어보면 얻어지지 않지만, 그 당시만 잠깐 숨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몸을 나누면 몸이 없는 것과 같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그 경우 몸이 잠시 숨어 있다가, 나중에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이것을 은현의 관계라고도 이해한다.
집을 생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체로 묶어서 보면 집이다. 그러나 창틀만 붙잡고 이것이 집인가라고 물어보자. 그러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집에서는 누어 잘 수 있다. 그러나 창틀에서는 누어 잘 수도 없다.
이 경우 집이 잠시 없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지만, 다시 전체를 묶어 대하면 펑하고 집이 나타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기에 집이 있다고 다시 여기고 대한다.
각 부분마다 성품과 모습이 함께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반복한다. 그래서 이렇게 대하고 저렇게 대할 때마다 일정한 성품이 숨었다가 나타나는 활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잘못 여겨진다. 과연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여기는 자신이 돈 상태인가. 이것을 잘 검토해야 한다.
격자이론을 위한 그림 세트가 있다. 이것을 놓고 위 내용을 잘 이해해보자.
[img90]
격자란 위 그림처럼 각 부분을 잘게 나누어 보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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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91] 08pfl--image/grid_01.jpg
처음 현실에서 문제되는 A 가 있다고 하자. 그 A 가 어디 있는가를 물어볼 때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위 그림처럼 표시해보자. 안경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이다. 또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외부 세상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놓고 위와 같이 표시해본다.
위 상태에서 A 아닌 것을 다시 그림으로 표시해보자. 즉 손으로 가리켜보려 해보자. 이 때 그 상태를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우선 단순히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img92]
08pfl--image/grid_02.jpg
그런데 다음 경우도 함께 고려해보자. 빨간 도형부분들은 과연 A 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img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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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제를 제기한 가운데 A 가 아닌 부분은 처음처럼 검은색으로 칠을 해보자. 위 도형에 해당하는 부분은 하나씩 붙잡아 검은 색으로 칠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만나게 된다.
○ grid_04.jpg [img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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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으로 A 라고 가리킨 영역 전체가 모두 검은 색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 A 가 있다고 여긴 그 영역에는 본래 그런 것이 없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정이 그렇다. 그러나 다시 처음 부분으로 돌아가 대하면 그 상황에서 또 다시 A는 여전히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 상황처럼 묶어 대하면 그 부분은 여전히 A 인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
둘 다 취하다보면 이 때는 숨고 이 때는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게 된다.
망집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첫 단면을 붙잡고 잘 이해했어야 한다. 처음에 그처럼 상을 취하여 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 부분에서 이 정신현상이 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망집이 증폭되는 현상이 끝이 없게 된다.
여하튼 현실에서 각 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이 A 라거나 b 라는 등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 때마다 그 부분은 그런 모습과 성품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망상분별 현상을 시정해야 한다. 그것이 생사의 기로다.
참고로 문수보살님의 아라바자나 다라니 가운데 나가 이와 관련된다. 일체언설이나 모습 성품을 그런 부분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 내용이 가리킨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 일 부분을 붙잡고 그런 내용이 있다고 망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래서 일정부분에서 상을 취해 임하면 그로 인해 생사를 겪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후 바로 이런 자세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생사를 극심하게 겪게끔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증상이 증폭되고 악화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면 결국 3 악도에 처하고 묶이게 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작용이 점차 없어진다. 그리고 생사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여기지고 보인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진짜 인것처럼 잘못 여겨진다. 그러나 매 경우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사정이 있다. 이런 망상환자를 다시 구하는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망상환자는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나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이 사정을 이해한 이가 망상환자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상황에 같이 임해야 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수행자는 2 중적이 된다. 한 측면으로는 망상환자의 상황을 이해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는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망상환자가 기대하는 온갖 무량한 복덕과 무량한 지혜를 오히려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는 방안이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는 망상 세간에 들어가는 생멸문과 이를 벗어나는 해탈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야 한다. 그래야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중생을 이끌고 끝내 중생을 해탈문에 들어서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의 경계에서 2 중적인 측면을 취해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의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안인 수행이 요구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부분은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관계없다. 망상환자도 그 상황은 좋다고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누구나 극히 고통으로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망상 증상 때문에 일어난다. 본래 그런 것을 그 상황에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망상분별에 바탕헤 그 부분을 그렇게 취하고 대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 상황을 평안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론상,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 [생사즉 열반] 임을 이해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수행자가 2 중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수행자도 대부분 힘들다.
즉 생사현실에서 극한 고통에 대면할 때 평안하게 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성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손톱을 뽑아야 한다고 하자. 뽑아도 공하고 뽑지 않아도 공하다. 본래 그 상황에 그가 집착하는 몸이나 손톱을 얻을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손톱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손톱을 하나 뽑게 되면 그 상황에서 감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명소리를 지르게 마련이다.
결코 평안하게 임하기 힘들다.
그리고 생노병사 과정 각 부분이 다 사정이 그렇다. 그러나 앞의 사정을 이해한다면 이를 다 그 이론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그런 부분을 남겨 두면 안 된다.
그것을 극복하면 이로 인해 생사현실 일체가 모두 극락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를 행하려면 당장 힘들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처했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연기 신청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 정려 수행이 도움이 된다. 이는 일단 그런 상황에서 색계나 무색계 하늘로 도피하는 방안이다.
여기서는 색계에서 무색계 정려 수행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처음 색계 정려 수행부터 잘 행해야 한다.
이후 단계는 처음 단계를 계속 반복해 집중해 나아가면 된다. 그래서 첫 단계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조금 도가 지나친 고통을 대하는 경우는 연기신청을 하고 정려나 사마디(삼매) 수행에 들어가면 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수행자는 생사현실을 대하고 안인 수행을 성취해야 한다. 매번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대할 때마다 그렇게 하늘로 피하는 방안만 의존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매번 고행만 반복하는 수행은 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인 수행이란, 이런 내용을 이론상 이해하고 상을 취하지 않고 대하는 것이 방안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앞과 같이 손톱 하나만 생으로 뽑아내는 상황에 처해도 당장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수행자들이 결국 보리심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한다. 그런 가운데 이 부분을 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높은 수행단계로 넘어가려면 끝내 이 부분을 잘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무생법인을 증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상태가 되어야 무량한 방편 지혜를 무량행문으로 닦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안인 수행을 성취하려면 기본적으로 무상해탈삼매를 잘 닦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수행자가 현실에서 아상, 인상 등 상을 취하고 임하면 수행자 자격이 박탈된다. 수행자가 아니고 일반 범부 상태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범부의 상태에서는 안인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안인을 성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호간에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곧 지옥에 각 주체가 들어가 묶이는 기본 원인이다. 그래서 끝없이 고통을 서로 주고 받는 관계가 된다. 수행자가 안인을 성취하지 못하고 생사현실에 임하면 결국 수행자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또 수행자가 아니고 단순히 범부가 생사고통에 묶이는 것과 같게 된다.
이런 상태의 수행자에게는 방편지혜가 그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 즉 다른 중생도 해치고 그로 인해 자신도 해치는 결과에 처하게 된다. 그 과정이 일반 범부사이에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특히 악취공견을 취해 임하는 수행자는 그 폐해가 더욱 극심하게 된다. 본래 공하여 차별이 없어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업을 계속 극심하게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 폐해가 훨씬 심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반야부 경전 니리(지옥)품에서 자세히 제시한다. 공을 잘못 취해 함부로 생사현실에 임하면 그로 인해 더 신속하게 지옥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가 안인을 성취하는 과정에서는 무상해탈 삼매 뿐 아니라, 공해탈삼매나 무원무작해탈삼매 방안이 다 도움이 된다.
즉 자신이 대하는 극심한 생사고통이 본래 꿈과 같음을 잘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생사현실에 임하면 매순간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동시에 행하는 분별도 명료하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고 진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은 하나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관계가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의 사정과 같다.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
즉, 아무리 꿈에서 그 내용이 생생해도 그 내용은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대부분 꿈을 깨면 이해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다시 꿈만 대하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꿈을 꾸는 상황에서조차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꿈에서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바위에 깔린다 해도 무방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 이와 같은 상태를 생사현실에서도 얻어야 한다.
즉, 생사현실만 놓고 대할 때는 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것이 본 바탕에서 얻지 못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집착하고 매순간 대하게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본 바탕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 안에서 그 생사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겪는 생사고통도 잘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생사현실만 대하면서 이에 집착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하면 자연히 감각현실과 관념을 함께 얻는 상태에 처하게끔 된다. 아무리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도 그렇게 생각된다. 경전에서 눈병에 걸려 허공에 보이는 꽃이라는 비유와 상황이 같다. 자신이 눈병에 걸려서 그런 꽃 모습이 보이는 것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래도 그런 꽃 모습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 자연스레이 2 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다시 무상해탈 삼매를 잘 닦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분별을 동시에 행하면 이 두 내용을 접착시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관념분별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그런 부분에 그런 관념내용이 있다고 여긴다. 또 그런 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바위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손으로 감각현실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경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평소 그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대할 때 그런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각 주체는 이 두 지위를 혼동한다. 그래서 그처럼 망상분별을 행한다.
즉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을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고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는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온갖 소원을 일으키고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후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상황도 그 성격이 위와 같다.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 그는 그 상황에서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겪어 나간다.
그런데 이 전 과정의 어느 한 단면에도 그가 있다고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다만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는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게 된다.
따라서 매순간,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여겨져도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일으키게 되는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본 바탕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 까지 함께 이해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즉 현실에서 얻는 이들 모든 내용이 본 바탕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침대에 누어서 꾸고 있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앞처럼 평안히 잘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의 측면을 99% 취하고 생사현실의 측면을 1 % 정도 취해 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무상해탈 삼매를 동시에 잘 행해야 한다.
한편, 생사현실에서 그런 극심한 고통은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할 때 처하게끔 된다. 그래서 미리, 무원무작해탈 삼매를 잘 행하면 대부분의 생사고통은 예방되게 된다. 따라서 무원무작해탈 삼매까지 잘 행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망집에 바탕해 소원을 일으키고 업을 행해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계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다른 상대가 집착하는 내용을 침해나는 형태가 된다. 그래서 서로간에 가해와 피해를 중복해 쌓아가는 형태가 된다. 이것이 결국 업의 장애를 쌓게 한다. 또 이로 인해 그 각 주체가 서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려면 무상해탈삼매와 함께 무원무작해탈삼매를 함께 잘 닦아야 한다. 이는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일체의 소원과 업을 모두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들 때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이를 서원으로 바꾸어 임하게 된다.
이는 본래 망집에 바탕해 갖는 소원을 서원 형태로 바꾸어 임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안락하고 풍요롭게 평안히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자.
이를 이제 서원의 형태로 바꾼다고 하자. 이 경우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아야 한다고 임하게 된다. 또 지금뿐만 아니라, 장래 오래오래 좋아야 한다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측면뿐 아니라, 다른 측면을 포함해 두루두루 좋아야 한다고 임하게 된다.
그래서 모두 안락하고 풍요롭고 평안하게 건강하게 지내면서 이를 통해 우선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다시 끝내 보리를 깨닫고 망집을 제거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또 자신처럼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다시 더 나아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기까지를 바라게 된다.
그런 경우 당장 그런 소원을 위해 매끼 식사때부터 자세가 달라진다.
처음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입장에서 매 끼 식사 때마다 다음 자세를 취하게끔 된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물고기나 축생을 살해해 식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임한다. 그런 가운데 매 순간 그런 자세로 임하게 된다. 그러면 각 생명간에 가해와 피해관계가 누적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수행자는 이후 중생제도를 위해 매 상황에서 보리심을 바탕으로 사홍서원을 일으키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 차이가 크다.
결국, 생사현실에서 이런 모든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공해탈삼매, 무상해탈삼매, 무원무작해탈삼매를 잘 성취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계, 정, 혜 3 학과 6바라밀행을 기본적으로 잘 닦아야 한다.
만일 수행자가 이런 기본 수행을 잘 행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기본적으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업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경우 약간의 생사고통을 겪게끔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 안인 수행을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또 한편,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좀 더 높은 단계에 이르려면 또 일정 시기에 이런 안인 수행을 잘 성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퇴전위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에 처해 이전 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선배 수행자가 그런 취지에서 일부로 이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일반 범부가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와 외관이 같다. 그리고 마 파순이 수행자를 방해하고 해를 끼치는 관계와도 외관이 같다. 또 범부들이 생사현실에서 그런 업을 행해 각기 지옥에 들어가 묶이는 상태와도 외관이 같다.
그리고 이런 업을 행하면 그런 과보를 받는 것 자체는 수행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다만 문수보살과 같이 높은 수행단계를 성취한 수행자는 중생제도를 위해 그 스스로 지옥에 처해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행하게 되는경우가 있다. 즉 높은 단계의 수행자는 무생법인을 잘 성취해 생사현실의 극한 상황에서도 모두 다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과보를 초래하는 그런 방편까지도 중생제도를 위해 취할 수 있게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상태가 아니면 곤란하다. 그런 경우는 수행자 자신부터 생사고통에 묶여 구호를 받아야 할 입장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 범부가 함부로 업을 행해 지옥에 처하는 것과 그 실질이 다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수행자를 마파순이 괴롭힌다는 경우는 그 실질 사정은 앞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정이 『유마경』 등에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vtxw4016
◈Lab value 불기2565/06/13
○ 2020_0907_140414_nik_ar47.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tsushika-Hokusai-title-page-is-decorated-with-a-lot-of-flowers.jpg!HD
Artist: Katsushika-Hokusai https://en.wikipedia.org/wiki/Hokusai Title : title-page-is-decorated-with-a-lot-of-flowers.jpg!HD Info
음악공양을 올리는 시설에 문제가 발생했다. 스피커 한쪽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스피커와 단자 사이에 대략 6 개 정도의 연결 부분이 있다. 처음 입력단자 연결 부분에 3 부분, 출력단자에서 3 부분 그래서 각 부분을 점검해보게 된다. 음원의 좌우 출력 - 연결단자 - 입력단자, 앰프에서의 좌우 출력단자 - 출력단자 - 스피커 연결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점검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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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스피커 선이 끊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냥 연결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안 된다. 끊어진 선이 합선을 일으켜서 안 되는가 생각도 해보게 된다.
결국 다른 부분을 다 점검해도 별 이상이 없다. 서로 좌우를 바꾸어도 여전히 한 쪽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분해를 해보았다. 분해를 해서 살펴보려니 어떤 부분이 이상인지 알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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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_0613_122719_can_ct4.jpg
결국 다시 결합시켜 놓고 좌우 밸런스 부분을 만져본다. 그랬더니, 소리가 전혀 안 나던 한쪽에서 조금 소리가 난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자 제품이 오래되면 단자 부위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때 사용하는 특수 약을 오래 전에 구입한 적이 있다. 이 약품을 분사해주면 녹 등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간 오래된 전자제품을 많이 수리해 사용해왔다.
그러나 이를 단자 접속부분에 분사해 넣어야 한다. 그런데 밖에서는 그 부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재 분해를 했다. 그래서 분사해 넣었다.
○ 2021_0613_121617_can_ct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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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무 오래되서인지 여전히 접촉부위가 원할하지 않다. 어떤 때는 한쪽이 들리기도 하고 들리기도 한다. 이제는 그렇지 않던 쪽까지 함께 그런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는 또 양쪽이 잘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전자제품이 오래되어 자율신경을 획득한 것으로 보게 된다. 사용자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제멋대로 소리를 냈다 안 냈다 하기 때문이다.
이 음악공양시설은 보염여래님과 과거 칠불을 위한 공양시설이다. 보염여래님은 천불의 부모님이다. 서방에 계신 여래님이다. 그리고 과거 칠불은 비바사여래- 시기여래 - 비사부여래- 구류손 여래 - 구나함여래 - 가섭여래 -석가모니 여래다.
그런데 오래 음악공양을 올리다보니 드디어 공양시설마저 자율신경을 획득한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왼쪽 스피커가 갑자기 소리를 내다 안 내다 하고 또 오른쪽 스피커도 갑자기 소리를 내가 안 내다 한다. 또 어떤 때는 양쪽에서 소리를 잘 내기도 한다.
인공지능을 획득한 음악공양시설이 된 듯 하다. 축하해야 할 일인가?
그래도 쉴 때 이 곳에 올라가 쉬게 된다. 그러면 그 때마다 매번 수행에 도움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오늘은 수행이 상황에 맞지 않게 지나치면 공연히 남들에게 돈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이런 노래를 듣게 된다.
원래 수행이란, 자신도 좋고 다른 중생도 좋게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행하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 필요한 방편을 취해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각 경우마다 다 사정이 다르다. 시장에 사람들이 10 명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그 각 인마다 그 자리에 그렇게 모여 있게 된 배경이나 맥락이 하나같이 다 다르다.
그래서 유마힐거사 같은 경우는 그런 맥락을 미리 잘 파악하지 못하면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힘듦을 제시한다.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것을 가장 잘 파악하고 제도해나가는 것이 부처님이다.
그렇지 못하면 매 경우 엉뚱한 방안을 잘못 취하게 된다. 그러면 우선 그 상대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행자 자신도 그 고통을 되돌려 받게 된다. 때로는 수행자 자신도 그런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부터 안인 수행이 잘 성취되지 않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그러면 그 경우는 수행자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를 받아야 할 범부의 상태다.
또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방안은 다른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데에도 도움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할 때는 각 경우에 맞추어 방편을 잘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는 수행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들 때문에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에 있어서는 그 완성에 장구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