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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뒤바뀐 것인가[전도의 의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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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뒤바뀐 것인가[전도의 의미]

선현 2012. 4. 19. 14:23



®

 

 

 

[ 요약 ]

○ 무엇이 뒤바뀐 것인가

 

 

 

[ 경전인용부분]

● 무엇이 뒤바뀐 것인가..[ 수능엄경 ]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켜 보이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모다라(母陀羅: 印, 封, 結印, 手印) 손을 보아라.

   이 손의 모양을 '바로'라고 하겠느냐, '거꾸로'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양을 '거꾸로'라고 하겠으나,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 모르겠습니다." 

● 무엇이 거꾸로 인가..

.....[중략]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顚倒]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더 잘못 보고 있느니라.

  분명히 알라. 너의 그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다 아는 지혜의 몸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몸이라고 한다.

  네 몸을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아라. 네 몸을 여래의 몸에 비하여 뒤바뀌었다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느냐."
.....[중략]

   부처님께서 자비한 마음을 내어 아난과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色]과 마음[心]과 모든 인연과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心所使]과 온갖 인연 경계의 법[所緣法]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모양'이라고 설해왔느니라.

  네 몸과 마음은 다 이렇게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정밀하고 심오한 마음 가운데 나타난 현상인데,

  어째서 너희들은 본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보배처럼 밝고 묘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이냐. 
 

  미혹한 어둠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 가운데서 어둠이 맺혀 색(色)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몸으로 여겼으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는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모양을 심성(心性)으로 삼았느니라.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 마음으로 여겨서는 헷갈려 몸[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

  안으로 색신(色身)과 밖으로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가    온통 다 묘하고 밝은 참 마음 가운데 물체임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오직 한 물거품의 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

  바닷물 전체[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瀛渤]를 끝까지 다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아래로 내린 손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니,

  이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느니라. 


 

 

///

 

간단히 말해 우리가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 일부와 외부 세상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본 내용이다. 즉 우리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물이다. 
여기서 무엇을 착각하는가. 마음안의 내용물을 마치 그것이 외부 대상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자신이 본 몸"의 모습이 그런 마음에 들어온 외부대상을 상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그런 몸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심(唯心)이란, 그 모든 것이 사실 마음 안의 내용물들임을 의미한다. 

물론, 마음에 그런 내용을 맺히게 작용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외부와 자신의 모습에 상응해 
실재하는 무언가들이 그렇게 존재하리라 추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실재의 내용이 무엇인가? 결론은 
그것이 공하다는 것이고 그 실재의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안 내용물을 외부로 알고 자신이 본 자신의 몸을 자신으로 알고 사는 것이 근본적 착각의 시작이다. 미혹이고 뒤바뀜이다. 

이제 이 내용들을 보고 얻은 정신은 이들 내용물은 아니다. 이들 내용물을 담은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용물은 변하고 쭈그려지고 들어오고 나가고 변화하지만, 그 그릇[=정신]은 내용물이 있던 없던 그대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일컫는 내용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인 내용물 가운데, 감각한 내용물들을 가리켜 일컫는다. 
흙, 물, 불, 바람, 그런 요소들이 바로 물질로 생각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은 마음안에 들어와 있는 내용물인 것이다. 
또한 이들이 차지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공간을 허공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이는 이렇게 정신이 받아들인 내용물인 물질적 요소가 변화하여 잠시 만들어 내고 
육체가 사라지면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을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신은 그런 내용물의 변화와 관계없는 것이고 오히려 이런 변화와 관계없이 생멸을 떠나 존재하고, 
오히려 바로 이런 내용물[요소]를 담아 받아들여 놓은 것이다. 

 

세상의 모습이 수없이 바뀌어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성한 흙, 물, 불, 바람,,분자 원자와 같은 요소자체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는다.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 요소와 같이, 이들 요소를 담아 받아들인 정신도 사실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안의 내용물이 끝없이 변화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이들의 모습을 담는 정신은 
-- 그 정신이 본 자신의 몸의 변화와 없어짐과 관계없이 - 일정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수능엄경에서 부처님이 그와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음 부분이다. 

 

 

[ 경전인용부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이 보는 정기의 성품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것은 변할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 속에 생사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저 말가리(末伽梨)들의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가." 

 

 

///

 

○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표준의 내용이라 알고 있으나 사실은 뒤바뀌어진 상태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신다. 

 

 

[ 경전인용부분]

"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오직 한 물거품의 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 
  바닷물 전체[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瀛渤]를 끝까지 다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아래로 내린 손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니, 
 이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느니라. "


 

이 상황은 어떤 상황을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인가?

우선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자신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정신이라 생각하는가..

 

한 사람이 지금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본다..
이때 보여진 세상의 모습은 다 외부의 것이라 생각하며 제외해 버린다. 
그리고 그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느낌 그리고 생각하는 생각 관념들 분별 의식 등만을 오직 자신의 정신적 내용이자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 눈을 떠 보게 되고 얻는 자신의 모습만을 "자신"이라 생각하고 
다시 그 자신안에 앞에 말한 자신의 정신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정신이 기능한다고 여긴다. 

 

이것이 현실의 사람들의 생각의 표준적인 내용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자신의 정신이 기능하여 그 세상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안에 모두 받아들여 보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와 같이 뒤바뀐 생각을 하고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백천(십만)의 큰 바다를 다 버리고 한 물거품만을 자신이며 자신의 정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앞의 비유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한번 미혹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앞처럼 뒤바뀌어 인식한 정신을 바닷물 전체로 지목한다. 
그리고 오히려 넓은 바다를 다 물거품으로 보는 미혹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일까?

 

우선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이 이 세계의 모습을 담아 보고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그 정신을 어디에 귀속시켜 버리는가. 
바로 앞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에 그것을 넣어 버린다. 
그렇게 전체 바닷물에 비교하면 물거품에 해당하는 한 부분에 넣어 버린다. 
그리고 이제는 나머지 전부를 오히려 물거품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은 그리고 자신이 본 외부물질들이 오히려 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현상으로 여기게 된다.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상태이다. 
그런데 세상의 표준은 어떤가? 
바로 이와 같이 뒤바뀌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생각이고 
표준인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며 가련한 자라고 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현실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표준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내용과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뒤바뀌어져서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자신이 정상이고 표준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그 가운데 또 한번 뒤바뀌고 미혹된 생각을 일으켜 사는 모습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그 미혹에는 단순히 이런 사실에 관한 판단 뿐만 아니라, 
다시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가치에 대한 판단, 그리고 그 실현방안에 대한 판단들이 
모두 뒤바뀌어 일어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극과 고통은 사실은 이런 뒤바뀜, 전도,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뒤바뀐 꿈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문제이고 더 나아가 그 꿈도 악몽이기에 문제인 것이다. 

////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2-04-18 오후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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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의견]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2-04-18 오후 09:38    

prajna 님이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마음안의 내용물이라는 말씀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가상이며 현상이라는 의미인데, 
문제는 우리는 그런 가상인 현상만 얻을 뿐이며, 그런 현상을 얻게 하는 실재는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상만을 절대시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는 얻지 못하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없습니다. 

 

만일 가정하여, 이 현상과 다른 실재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실재를 존중하고 그 실재의 내용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므로 현상은 실재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우리의 삶에 준다고 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바라는 좋음이나 가지가지 희망의 성취는 사실 이런 현상에서 바탕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희망의 성취는 희망의 내용을 한 번 갖고, 그것과 일치하는 현상을 얻고 그리고 그 희망의 내용을 한 번 다시 한번 인식하면서, 
자신의 희망과 일치하는 현상에서 좋음을 얻는 단순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희망과 일치하는 현상은 마음안의 내용물이지만, 그러나 마음안의 내용물일 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의 사람의 고민이 일어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안의 내용물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희망들인 경우, 그렇게 희망에 일치하는 현상을 얻는 과정을 생략한 채 
단지 희망의 내용만 그린다고 해도 비슷한 만족 좋음을 얻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과 같은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현상의 내용이더라도 우리는 음식을 섭취해야 하루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안의 내용물인 음식의 내용을 얻고 그것을 섭취해야 살아가는데, 
그것은 마음안의 내용물을 섭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서 그런 현상의 내용을 얻어야, 실재에서도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 
우리의 현상이 지속되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삶이 모두 실재가 아니라는 바탕에서는 그런 생존의 계속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삶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집착은 바로 이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문제도 사실 사정이 같습니다 
만일 나 자신이 메뚜기로 출발하였다면 아마도 암메뚜기를 바라보고 좋음을 얻었을 것이고 
바퀴벌레로 태어나 출발했다면, 역시 암바퀴벌레를 바라보고 좋음을 얻었을 지도 모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출발하기에, 역시 여성을 보고 좋음을 얻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하튼 그렇게 좋음이 출발하고 
그것에 집착하여 삶에서 많은 희망을 갖고 추구해나게 됩니다. 
좋음의 문제가 그렇듯 싫음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이 출발이 미스테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존재 자체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 현실의 상황을 부정한다면, 
반대로 어떤 다른 실재의 내용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교에서는 결국 얻지 못하고 공하다...로 결론이 제시됩니다. 

 

결국 이 의미는 사람이 현실을 가상으로 부정하고 실재를 구하게 되더라도, 
그 실재에 해당하는 내용은 끝내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는 ~~ prajna 님이 말하는 표준 ~~ 어떻게 보면 바람직하지 않고 옳지도 않은 현실의 내용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 현실에서는 단지 살아가는 동안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가치있는 상태로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 궁극적으로는 실재의 내용은 아닙니다. 

 

좋음은 어떻게 보면 꿈 속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꿈과 같은 것이어서, 
허망하기로 말하면, 허망한 가운데 만들어진 또 하나의 허망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그것 이외에 의지하고 추구할 바가 달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재를 역시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상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현상이 실재가 아님을 의미할 뿐 
실재 그 내용을 달리 제시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현실이 악몽이면 악몽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메뚜기라면, 메뚜기대로 바퀴벌레라면 바퀴벌레대로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그렇게 그 상태에서 좋음을 주는 것을 좋다고 여기며 추구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여하튼 궁금합니다...어떻게 해야 밥도 해결하고 더 나아가 가장 좋은 상태를 얻을 수 있는지...현실에서도 그리고 내생에서도 그리고 실재의 차원에서도..

 

[ 답변 ]

Prajna Citta 2012-04-19 오후 12:42 New 수정 삭제 신고

 

LITTLE 님 말씀대로 현상은 마음안 내용물이며, 그 현상을 나타나게 한 실재는 얻지 못하고 공합니다.

그래서 LITTLE 님 말씀과 같은 입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사람은 살아가면서, 오직 현상의 내용만을 얻게 되고, 실재의 내용은 얻지 못하기에, 현상만을 절대시하면서 살아가게 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비록 실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얻지 못하는 공한 실재의 내용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또 우리가 얻는 현실의 내용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차이를 일으키는 것인가?  이런 점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실재나 공은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효용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오래 전에 이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답변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 보니 표현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종전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지만, 조금 수정해 보았습니다.

DISK    d:\G\08\budr\budr-0020.htm 

[web]   http://blog.paran.com/buddhism007/45787543

위 글에도 자세히 밝혔지만, 실재가 공함을 인식하고 현상이 실재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은

그 실재의 내용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예를 들어 지도가 잘못되면, 목표를 세우는 데에도 잘못이 있게 되고,

가는 방법을 정하는데에도 잘못이 있고, 가는 과정에서나, 결과가 어떻게 얻어지던 그 결과에 대해서도

또 잘못된 평가를 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실이 실재인가, 아닌가, 또 실재는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등의 논의는 단순한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과정에 매우 중요한 의미 차이를 갖는다고 봅니다.

 

또한 현실이 실재가 아니라는 점은, 현실의 가지가지에 집착을 갖고 그 집착으로 인해 많은 번뇌와 고통을 겪는 상태에

좋은 약을 주는 효과를 갖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생을 사는 과정에서 현실에서 많은 것에 집착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고통의 문제는 이 집착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가 대하는 현실이 실재인가, 아니면 가상적 현상에 불과한가는 단순히 이론적 철학적 문제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면서 받는 번뇌와 고통은 그런 이론과 관계없이 현실을 살아가는 이가 받아 가지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정말인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그것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런 번뇌와 고통의 근본원인이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 집착은 다시 잘못된 분별 -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이 집착의 병을 낫게 하는데, 큰 효용을 갖는다고 보게 됩니다.

 

LITTLE 님께서, 가정하여, 이 현상과 다른 실재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실재를 존중하고 그 실재의 내용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집착하여 추구하던 이는, 현실이 실재가 아니라고 할 때,

이제는 그 실재를 향해 그 집착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실재는 찾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집착으로 인한 병은 여전히 낫지 않게 됩니다.

단지 현실에 대한 집착이 실재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 것만을 의미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실재가 공한데, 그 공에 대해 다시 분별하고 집착하면 그 병이 더욱 크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공병이라고 할만한데, 현실에 대한 집착이 이제 실재나 공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현실은 가상이니 무시하고 대신 실재가 중요하니 공한 실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에 집착하자..이런

가르침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모든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을 끊어 없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고통을 끊게 하는데 잘못된 집착과 분별을 끊는 것이 요구되고,

그 과정에서 현실이 실재가 아니며,

실재는 공하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은 그 자체가 추구해 얻을 목적상태라기 보다는

우리가 현실에서 번뇌와 고통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과정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에 관해서는 =>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063649

 

 

Prajna Citta 2012-04-19 오후 12:45 New 수정 삭제 신고

 

////

○ 한편, 현상은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고 하여 불교에서 부정되거나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공한 실재만 강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현상은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습니다. 현상의 바탕은 공한 실재이기도 합니다. 
현상이 무엇을 바탕으로 일어나는가, 바로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공한 실재는 우리가 무엇을 기초로 추리하게 되는가, 바로 이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을 추리해 생각합니다. 

공한 실재를 우리가 대하여 얻는 내용은 바로 현실이고, 
현실은 그런 의미에서 공한 실재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하는 표현은 결국 이처럼 현상과 공한 실재의 관계를 파악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현실을 매 생에서 메뚜기의 존재로 살아가던, 아니면 사람으로 살아가던, 
중요한 것은 그 생마다,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잘못된 분별과 집착을 벗어나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매 생마다 강한 집착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현재의 존재에 대한 애착입니다. 
생존에 대한 집착은 반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기도 하고,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러 조건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현실의 삶에서 스스로 고통을 받고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고 더 나아가 악을 행하는 관계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람들이 밥을 먹고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이를 죽이기도 하고 고통을 가하게도 됩니다. 
또 비록 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들을 위해 
그렇게 다른 이에게 고통을 가하고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도 그와 같은 고통에 반대로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바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집착부터 벗어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이유들입니다. 
 


P 진리를 고루고루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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