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스스로 일체지라고 명언함에 두려움 없다는 것은, 곧 사문 구담은 실로 일체 법을 깨달아 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마군과 범천과 사문과 바라문이 말하되, ‘사문 구담은 온갖 법을 깨닫고 알지 못했다’라고 한다면, 이는 여실히 설하는 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일체 법을 모두 깨달아 알았기에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범부의 법ㆍ성인의 법ㆍ성문의 법ㆍ연각의 법ㆍ부처의 법ㆍ보살의 법ㆍ유학(有學)의 법ㆍ무학(無學)의 법ㆍ세간의 법ㆍ출세간의 법ㆍ선법ㆍ불선법ㆍ유루법ㆍ무루법ㆍ유위법ㆍ무위법이 있으니, 이와 같은 법을 깨달았기에 바르게 깨달은 분[正覺]이라 하는 것입니다. 평등이라 말함은 공함을 보는 평등이니 법이 진실하기 때문이요, 상(相)이 없는 평등이니 모든 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요, 원하는 바 없는 평등이니 삼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요, 나지 않는 평등이니 태어남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요, 행이 없는 평등이니 행함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요, 나옴[出]이 없는 평등이니 나옴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요, 이르는 곳이 없는 평등이니 이르는 곳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요, 진실된 평등이니 3세(世)가 없기 때문이요, 해탈의 평등이니 무명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요, 열반의 평등이니 생사가 없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문 구담은 일체 법을 모두 깨닫고 알아 두려움 없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크게 연민하는 마음으로 무리 가운데서 사자후를 내어 청정한 법 바퀴를 굴리니, 온갖 세간의 하늘이나 인간이나 마군이나 범왕(梵王)이나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이와 같이 법 바퀴를 굴린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일체지라고 명언함에 두려움 없음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번뇌가 다했음을 명언함에 두려움 없음[漏盡無畏]이란, 사문 구담은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으니, 그러므로 ‘나는 번뇌가 이미 다하였다’고 외쳐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군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이 말하되, ‘사문 구담은 아직 모든 번뇌가 다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여실히 설하는 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으니, 모든 애욕의 번뇌[欲漏]ㆍ존재의 번뇌[有漏]ㆍ무명의 번뇌[無明漏]ㆍ견해의 번뇌[見漏]에서 마음이 해탈을 얻고 모든 습기가 멸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문 구담은 모든 번뇌[漏]가 이미 다하여 두려움 없는 경지[處]에 이르러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내며 법 바퀴를 굴리는 것으로, 온갖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군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으로서 이처럼 법 바퀴를 굴린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사문 구담의 번뇌가 다했음을 명언함에 두려움 없음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의 도를 장애하는 원인을 설함에 두려움 없음[障道無畏]이란, 사문 구담은 모든 애욕의 법[欲法]이 능히 성스러운 도를 장애함을 알며, 그러므로 ‘애욕은 능히 도를 가로막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군ㆍ범왕ㆍ사문ㆍ바라문이 말하되, ‘이 모든 애욕의 법이 도를 장애하지는 못하리라’라고 한다면, 이는 여실히 설하는 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여실히 도에 장애되는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도를 장애하는 법이란, 이른바 10불선업(不善業)으로서 능히 성스러운 도를 장애합니다. 사문 구담은 여실히 알아 두려움 없는 경지에 이르러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내어 법 바퀴를 굴리나니,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마군ㆍ범왕ㆍ사문ㆍ바라문으로서 일찍이 이와 같이 법 바퀴를 굴린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도를 장애하는 원인을 설함에 두려움 없음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괴로움을 다하는 도를 설함에 두려움 없음[盡苦道無畏]이란, 사문 구담이, ‘성스러운 도를 닦고 익히면 능히 괴로움을 다하리라’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군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이 말하되, ‘성스러운 도를 닦을지라도 끝내 모든 괴로움을 다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여실히 설하는 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이미 위없는 해탈을 증득하여 모든 괴로움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일컬어 참되고 성스러운 길이라 하겠습니까? 이른바 1승(乘)입니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사마타(舍摩陀)와 비바사나(毘婆娑那)입니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공삼매(空三昧)ㆍ무상삼매(無相三昧)ㆍ무원삼매(無願三昧)입니다.
다시 일곱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른바 4념처(念處)에서 8정도(正道)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결정코 참되고 성스러운 길[畢竟眞實聖道]이라 합니다. 필경의 도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잡지도 않고 놓지도 않으며, 바르지도 않고 삿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 이것을 일컬어 참되고 결정코 바른 길이라 합니다. 사문 구담은 여실히 알고 두려움 없는 곳에 이르러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내어 청정한 법의 바퀴를 굴리니, 온갖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라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으로서 일찍이 이와 같이 여법하게 바퀴를 굴린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괴로움을 다하는 도를 설함에 두려움이 없음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끝내 이와 같은 4무외의 지혜를 성취하여 능히 사자후를 내었던 것으로, 그러므로 나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게송을 말했다.
구담은 사자와 같아서 대중에 두려움 없음을 말하니 세간에 같을 이 없거늘 하물며 뛰어날 이 있으리.
구담이 증득한 모든 법 여실하여 허망치 않으니 이처럼 실답게 보았기에 사자 왕의 설법을 내네.
만약에 어떤 이가 말하되 구담의 말은 바르지 못하고 구담은 능히 볼 수 없다 하면 이 같은 말은 옳지 못하리.
상(相)을 보지 않음으로써 천인(天人) 가운데 있으면서 자재하게 사자후를 내며 묘하고 두려움 없는 소리를 내네.
구담은 번뇌가 이미 다하여 이미 번뇌 없는 몸을 얻고 천상과 인간의 세간을 초월하니 그러므로 같을 이 없다고 하네.
구담은 중생들을 위하여 도에 장애하는 법을 말하되 온갖 것 모두가 여실하니 그러므로 허망한 말이 아닐세.
구담은 정진하여 취함을 말하되 스스로가 증득한 그대로를 말하니 그러한 법을 닦는 이에게 모든 장애 존재하지 않네.
구담은 이와 같이 알고 뛰어나고 두려움 없는 곳에 이르며 두려움 없고 묘한 즐거움 얻어 구담은 안온하게 머무네.
청정하고 바른 법의 바퀴를 굴리니 다른 이가 일찍이 굴리지 못했고 세간 사람이 능히 굴리지 못하나 오직 양족존(兩足尊)만이 할 수 있다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마침내 불공법(不共法)을 성취하였습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떤 것이 여래의 불공법인지요?” “대왕이시여, 사문 구담의 불공법이란, 이른바 일체의 허물이 없음이니, 일컬어 불공법이라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몸으로 짓는 일[身業]에 과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허물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입으로 짓는 일[口業]에 과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허망함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뜻으로 짓는 일[意業]에 과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가지 상(相)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공양을 얻을지라도 높은 마음을 내지 않고, 헐뜯음을 만날지라도 낮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심(定心)을 여의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항상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과 버리는 마음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고 어리석음을 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성스러운 버림이라 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자 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대자대비로 법을 설하여 인간을 제도하며 적정한 곳에 머물러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하여 쉬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가운데 큰 괴로움을 받되, 피로하고 싫다는 생각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억념하여 쉬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그것은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애초에 도를 얻었을 때 온갖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중생의 마음을 두루 관찰하고, 그런 뒤에 그들을 위해 설법하되 다시 관찰하지 않고도 앞의 생각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쉬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3세 가운데 억념하기를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탈을 쉬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자연히 깨달아 2승(乘)이 남에게서 듣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쉬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걸림 없는 지혜를 얻고 온갖 뜻과 온갖 글과 온갖 글귀를 알아 한 구절의 법에 대해서도 한량없는 겁에 걸쳐 그 뜻을 설명해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신업(身業)은 지혜로써 근본 지혜를 삼아 전전(展轉)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의 신업은 지혜를 따라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온갖 구업(口業)은 지혜로써 근본 지혜를 삼아 전전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의 구업은 지혜를 따라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온갖 의업(意業)은 지혜로써 근본 지혜를 삼아 전전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의 의업은 지혜를 따라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과거세를 알되 가로막힘 없고 걸림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전생 일을 아는 신통[宿命明]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세를 알되 가로막힘 없고 걸림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천안의 신통[天眼明]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세를 알되 가로막힘 없고 걸림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번뇌가 다하는 신통[漏盡明]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정수리[頂]를 볼 수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그지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능히 그를 이기는 자가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모든 하늘ㆍ인간ㆍ성문ㆍ벽지불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각각 자기 앞에 있음을 봄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의 몸은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이는 착한 마음을 냄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모든 공덕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설법하는 소리가 받아들이는 자에게 알맞게 들림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그 밖의 말은 들어도 무익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내는 말이 청정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항상 입으로 의롭지 못한 말을 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과 부드러운 말을 듣는 이가 모두 환희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마음이 평등하여 원친(怨親)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소리를 듣는 이가 싫어하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말씨가 미묘하기 때문입니다. 대중 속에 있어도 두려움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온갖 지혜의 장애[智障]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언설에 겁내거나 약해지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마침내 4무외(無畏)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뜻을 쫓아 말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온갖 중생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적정(寂靜)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을 따르는 무리들은 수순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이가 번뇌를 여의고 모든 불선(不善)을 제거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항상 그의 몸이 약 나무[藥樹王] 같기를 서원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이가 싫어하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체 법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몸을 움직여 되돌아봄이 마치 코끼리와 같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살펴보는 모습[視]이 마치 용왕(龍王)과 같아 위의가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4중(衆) 가운데 있어도 능히 사자후를 냄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열 가지 힘을 구족하여 대중의 의혹을 잘 결단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최상의 공양을 받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위없는 복밭[福田]이기 때문입니다. 공덕이 다함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이 닦는 모든 행은 과보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하늘과 인간과 마왕과 범천의 무리들이 무너뜨릴 수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낱낱 마디 안에 나라연(那羅延)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기(授記)한 일이 헛되고 어긋나지 않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모든 근(根)과 부림[使]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행을 아는 것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일체 법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닌 바 지혜에 의혹의 흐림이 없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3세를 잘 알아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번뇌의 습기가 다했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번뇌의 원인을 능히 정화해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간의 하늘ㆍ인간ㆍ마군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의 무리 중에서 스승[師首]이 됨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온갖 법상에 통달했기 때문입니다. 얻은 바가 법신(法身)임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그 수명에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거나 듣거나 친히 다가가면 큰 이익을 얻음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좋은 법을 성취하여 3업(業)이 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자는 역죄(逆罪)를 범하는 일임을 일컬어 불공법이라 하니, 왜냐하면 사문 구담은 위없고 뛰어난 선근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사문 구담은 마침내 이와 같은 불공법을 성취하였던 것으로, 그러므로 나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게송을 말했다.
구담은 허물이 없고 일체의 습기 없으며 모든 생각이 청정하니 이 지혜로운 임보다 나을 이 없네.
일체에 다른 모습 없으니 마음으로 잊거나 잃지 않으며 버리는 마음은 무작(無作)이 아니니 모든 바람 하나도 줄지 않네.
정진하여 게으름 없고 억념하여 잊지 않으며 지혜 해탈에서 물러나지 않고 바른 견해 잃거나 줄어드는 일 없네.
지혜는 가히 움직이지 못하며 몸과 입의 업도 그러하니 지혜로써 근본을 삼아 이와 같이 항상 전전하네.
항상 그 지혜에 허물이 없어 과거세에도 그러하였고 미래와 현재도 그러하니 어디서나 허물이 없다네.
구담은 지혜로운 임으로 이와 같은 모든 공덕 밖에 또다시 뛰어난 특성[法] 있으니 지주(地主)는 가히 헤아릴 수 없으리.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여래께서 성취하신 이와 같은 공덕 장엄의 몸은 영원한 것인지요, 아니면 덧없는 것인지요? 또한 이와 같은 공덕은 다함이 있는지요, 아니면 다함이 없는지요?” “대왕이시여, 사문 구담은 이 같은 공덕에 머물러서 생사의 경계를 다하신 최후의 몸이니, 이는 영원히 머무는 몸이지 덧없는 것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구담을 무상(無常)과 동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그와 같이 영원한 몸은 어떻게 관찰하는 것인지요?” “대왕이시여, 스스로가 자신의 법성(法性)의 몸을 보듯이 사문 구담의 법신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관찰합니다. 곧, ‘그 몸은 색(色)이니, 색과 같이 가히 볼 수가 없는 까닭이다, ’ ‘그 몸은 마음이니, 마음과 같이 가히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 ‘그 몸은 횃불이니, 암흑을 여의는 까닭이다, ’ ‘그 몸은 용맹하니, 뭇 악(惡)을 조복시키는 까닭이다, ’ ‘그 몸은 힘이니, 굴복하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 ‘그 몸은 어긋남이 없으니, 본성이 평등한 까닭이다, ’ ‘그 몸은 공이니, 보고 들음을 여의는 까닭이다, ’ ‘그 몸은 상(相)이 없으니, 각관(覺觀)을 여의는 까닭이다, ’ ‘그 몸은 바람이 없으니, 삼계를 벗어나는 까닭이다, ’ ‘그 몸은 한 모습이니, 다른 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 ‘그 몸은 허공과 같으니, 모양의 닮음이 없는 때문이다, ’ ‘그 몸은 태어남이 아니니, 인연을 쫓아 나는 까닭이다, ’ ‘그 몸은 멸하지 않으니, 본래 태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 ‘그 몸은 머무르지 않으니, 3세(世)가 아닌 까닭이다, ’ ‘그 몸은 방향[方]이 없으니, 방향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 ‘그 몸은 중생이 아니니, 일체 중생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관찰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이와 같이 관찰함을 일컬어 영원한 몸[常身]을 보는 일이라 하고, 법신을 보는 일이라 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이와 같이 관찰함을 일컬어 바른 관찰[正觀]이라 하니, 이와 다르게 관찰한다면 일컬어 삿된 관찰[邪觀]이라 합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찌하여 태어나지 않으면서도 인연을 쫓아 난다고 하는 것인지요?”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법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나 인연을 쫓아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떤 것이 인연을 쫓아 나는 것인지요?”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인연을 쫓아 난다고 함은 곧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를 쫓아 나는 것입니다. 또한 계(戒)를 쫓아 나고 정(定)을 쫓아 나고 혜(慧)를 쫓아 나며, 해탈을 쫓아 나고 해탈지견을 쫓아 나며,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쫓아 나며, 보시를 쫓아 나고 지계를 쫓아 나고 인욕을 쫓아 나고 정진을 쫓아 나고 선정을 쫓아 나고 지혜를 쫓아 나며, 해탈ㆍ삼매를 쫓아 나며, 방편바라밀을 쫓아 나며, 여섯 가지 신통을 쫓아 나며, 3명(明)을 쫓아 나며, 네 가지 걸림 없음을 쫓아 나며, 10력(力)을 쫓아 나며,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쫓아 나며, 온갖 착하지 못한 법을 끊고 온갖 착한 법을 모음을 쫓아 나며, 실다운 지혜를 쫓아 나며, 불방일을 쫓아 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한량없이 청정한 공덕을 쫓아 법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담의 몸은 공덕이 다하는 일이 없는 까닭에 법의 몸이 다하는 일은 없습니다.”
▸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생겨나는 법[生法]에는 다함이 있거늘 어찌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다함이 없는 것인지요?” “대왕이시여, 본래 나지 않는 까닭에 다함이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떤 것이 본래부터 나지 않음인지요?”
대왕이시여,
▸ 법신은 나지 않건만 본래부터 있는 까닭에, 또한 인연으로 나는 까닭에 난다 합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이와 같은 인연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니, 만약에 행하고자 하는 이는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어디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요?”
▸ “대왕이시여, 모든 공덕으로서 도를 돕는 행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계행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계행으로써 시초를 삼습니다. 만약에 계를 지니지 못한다면 병든 여우의 몸조차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공덕의 몸을 얻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계행이 청정함으로써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며, 법의 종자를 끊지 않고 법의 성품을 분별하고 승(僧)의 종자를 끊지 않고 무위(無爲)의 도를 닦게 되는 것입니다. 청정한 계를 지니고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 까닭에 공덕에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일체의 계와 선(善)은 모두 다함이 없는 것인지요, 아니면 다함이 있는 것인지요?” “대왕이시여, 일체가 다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상속이 단절되는 까닭에 다함이 있으며, 단절되지 않는 까닭에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무엇이 상속의 단절이며, 무엇이 상속의 단절이 아닙니까?”
“대왕이시여, 청정한 계는 상속되어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까닭에 공덕이 다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의 계행은 생을 받는 곳에서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고, 인간 가운데에서 10선(善)으로 얻은 과보는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고, 욕계 모든 하늘의 복스러운 과보와 공덕은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고, 색계 모든 하늘의 선(禪)과 한량없는 마음은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고, 무색계 모든 하늘에 드는 모든 선정은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으며, 일체의 성문이나 유학ㆍ무학의 계행은 열반에 들 때에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고, 벽지불의 계행은 큰 연민의 마음이 없어 끊어지는 까닭에 다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보살의 계행은 보리에 이르러 큰 연민을 이루는 까닭에 공덕이 다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러한 계 가운데서 온갖 범부ㆍ2승(乘)의 모든 계행을 내니, 마치 종자가 다함이 없기에 과보 역시 다함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보리의 종자는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그 법신은 어떠한 법에 의지하여 이처럼 관찰하는 것인지요?” “대왕이시여, 마땅히 일체 중생의 번뇌의 몸에 의지하여 관찰해야만 합니다. 또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중생 가운데 의지하여 관찰해야 하며, 네 가지 뒤바뀐 견해를 지닌 중생 가운데 의지하여 관찰해야 하며, 음(陰)과 계(界)와 여러 입(入:處)에 의지하여 관찰해야 하며, 지옥ㆍ축생ㆍ아귀 내지는 아수라 등의 여러 몸 가운데 의지하여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몸들이 곧 여래장(如來藏)이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온갖 번뇌와 모든 티끌의 창고[藏] 속에는 여래의 성품이 담연(湛然)히 채워져 있으니, 마치 돌 속의 금과 같으며, 장작 속의 불과 같으며, 땅 밑의 물과 같으며, 우유 속의 낙(酪)과 같으며, 깨[麻] 속의 기름과 같으며, 종자 속의 싹과 같으며, 창고 속의 보배와 같으며, 틀[模] 속의 모양[象]과 같으며, 뱃속의 태(胎)와 같으며, 구름 속의 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번뇌의 몸 가운데 여래장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차니건자는 거듭 게송을 말했다.
구담은 법성(法性)의 몸이니 묘한 빛이 항상 담연하며 청정하고 항상 적멸하니 그 모습 마치 허공과 같네.
이와 같은 법성의 몸은 중생과 동등하여 차이가 없거늘 이 경계는 깊고도 깊어 2승은 알지 못하네.
그때에 엄치왕(嚴熾王)은 대살차니건자에게 여래의 불가사의한 공덕과 법신에 관한 말씀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일으켰으니, 뛸 듯이 즐겁고 벅찬 마음으로 한량없는 환희의 마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한량없이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한량없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한량없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었다. 또한 대살차니건자에 대하여 불가사의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가히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가히 존중할 만한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가히 공경할 만한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깨달음의 길을 잘 아는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일체지자(一切智者)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피안(彼岸)에 이른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잠에서 깨어난 분[寤寐]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염(念)을 주는 분이라는 마음을 내었으며,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는 마음을 내었다.
이와 같은 가지가지 불가사의한 마음을 내고 나서는 백천만 아승기(阿僧祇)의 가치가 있는 영락(瓔珞)과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가 있는 묘한 옷을 가져와 살차니건자에게 받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거룩하고도 거룩하십니다, 살차(薩遮) 대사이시여, 이와 같이 뛰어나고 크고 방편이 교묘한 법문을 말씀해 주시다니 말입니다. 살차 대사이시여, 대사께서 말씀하신 법은 일체지자의 지혜[一切智智]를 잘 수순하시니, 이 법은 능히 일체지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대사의 설법은 능히 모든 세간의 흐름[流]을 제도하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온갖 번뇌의 때를 씻어내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온갖 질투의 문을 부수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모든 나쁜 갈래의 괴로움을 건지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좋은 방편으로 온갖 큰 교만의 산을 무너뜨리며, 대사의 설법은 온갖 세간의 애욕의 큰 바다를 모두 말려 버리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온갖 무지(無智)의 숲을 비추며, 대사의 설법은 능히 때를 잃지 않고 받을 때를 잃지 않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살차니건자가 엄치왕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실로 그렇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의 위의는 중생을 교화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느 하나의 법도 능히 대승의 법문을 수순하지 못함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법도 능히 일체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법도 능히 온갖 번뇌를 끊지 못함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법도 세간의 온갖 허물을 내 보이지 않음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법도 열반의 위없는 공덕을 내 보이지 않음이 없으며, 어느 하나의 법도 보살의 위없고 뛰어난 행을 내 보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보살마하살들이 행하는 온갖 행은 모두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하니, 곧 그 둘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살차니건자가 이 법문을 말할 때에 엄치왕은 크게 견고한 불퇴전의 보리심을 얻었다. 또한 왕의 열여섯 왕자는 환희심으로 뛸 듯이 기뻐하는 경계[歡喜踊躍境界]의 신심을 얻었고, 8천 명의 천자는 부처님의 장엄 삼매를 뵙는 삼매[觀佛莊嚴三昧]를 얻었고, 엄치왕의 권속과 대살차니건자의 권속들 1만 3천 명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그리고 저들 중생들은 각각 몸에 입었던 최상의 옷을 벗어 살차니건자에게 받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지금 위없는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은 살차 선남자(善男子)를 뵌 까닭에 이 일체지혜의 뛰어나고 묘한 법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9. 예여래품(詣如來品)
그때에 엄치왕 및 권속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차 선남자여, 대사께서는 지금 여래의 처소에 가서 세존을 뵈옵고 세존께 예배하고 공양드리셔야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 불ㆍ세존께서는 저희들의 동산[園]에서 대중들을 위해 미묘한 법을 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차니건자가 말했다. “좋습니다, 대왕이여. 부처님을 뵙고자 하였더니 지금이 바로 그 때인가 합니다. 나라 안에 있는 성읍(城邑)의 소왕(小王)과 모든 취락의 주인[主]들과 대신ㆍ왕자ㆍ장자ㆍ거사ㆍ왕의 부인ㆍ후궁ㆍ궁녀 및 왕의 큰 권력 있는 신하 등 이 같은 대중들이 모두 함께 같은 마음이 되어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갑시다.” 여기에서 엄치왕은 나라 안의 일체의 성읍 내지 취락의 주인들에게 칙령을 내리기를, ‘각기 거느리는 무리와 집안의 권속들을 모두 장엄시켜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오라. 만약에 여래께서 계신 곳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목숨을 끊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라 안에 있던 일체의 선남자ㆍ선여인 및 젊은 남녀들은 왕의 칙령을 듣고는 살차 대사와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몸소 공양을 올리기를 원했다. 그리고는 환희의 마음을 내며 각각 비단으로 꾸미고 단장하고는 온갖 종류의 향기로운 꽃과 바르는 향ㆍ가루 향ㆍ화만(華鬘)ㆍ번기[幡]ㆍ일산을 준비하고, 온갖 종류의 풍류를 잡으면서 울사연성(鬱闍延城)에서 나와 대로에서 엄치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에 엄치왕은 7보(寶)의 노끈으로 얼기설기 얽은 수레[輦輿]를 타고 셀 수 없이 많은 금병ㆍ은병에다 가지가지 꽃을 꽂아 양쪽에 두었다. 왕은 큰 힘을 일으켜 대왕의 세력을 시현하고, 대왕의 신통을 부리고, 대왕의 분신(奮迅)을 지었다. 코끼리ㆍ말 수레를 탄 이와 걷는 이들은 대왕을 위하여 익살과 음악을 지었으며, 갖가지 번기와 당기[幢]와 꽃과 일산을 세우고 8천 가지 묘한 소리를 내는 북을 치며, 가지가지로 노래하고 춤추면서 대살차니건자와 대신ㆍ왕자와 큰 권력을 지닌 부인ㆍ후궁 및 소왕ㆍ장자ㆍ거사들 내지 문지기ㆍ궁지기 등 9만 8천만 인이 함께 어울려 앞뒤를 에워싸고 동산으로 나아가 부처님 계신 곳으로 향했다.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서는 정수리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돌았다. 대살차니건자와 모든 권속들도 정수리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부처님 주위를 한량없이 백천 둘레 돌고는 물러나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일심으로 합장한 채 오로지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묵연히 앉아 있었다.
10. 설법품(說法品) ①
그때에 혜명(慧命) 사리불(舍利弗)은 대살차니건자가 부처님 앞에 자리를 잡고는 일심으로 합장한 채 오로지 부처님만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이 살차니건자는 무슨 일로 부처님을 찾아왔을까?’ 이와 같이 생각하고는 대살차니건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부처님 처소에 오셨는지요? 부처님을 뵙기 위함이십니까, 아니면 가르침을 듣기 위함이십니까?” 그러자 살차니건자가 혜명 사리불에게 말했다. “대덕(大德) 사리불이여, 내가 지금 부처님을 찾아온 것은 부처님을 뵙기 위함도 아니며 가르침을 듣기 위함도 아닙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나는 지금 일체 법을 위해 부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덕 사리불이여, 색(色)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땅의 성질[地性]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물의 성질ㆍ불의 성질ㆍ바람의 성질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나를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중생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수명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인간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짓는 이[作者]를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내 것[我所]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보이는 일[所見事]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상(相)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무상(無相)을 보기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대덕 사리불이여, 일체의 상을 보지 않음을 일컬어 여래를 본다고 하며, 견해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물[物]을 보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 여실히 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실제(實際)가 실제 아닌 줄로 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눈을 싫어하고 색을 싫어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귀를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코를 보지 않고 냄새를 맡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며, 혀를 보지 않고 맛을 모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며, 혀를 보지 않고 맛을 모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며, 몸을 보지 않고 촉감[觸]을 보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며, 의법(意法)을 보지 않고 의법을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살차 대덕이시여, 만약에 그 같은 특징[相]이라면 여래를 볼 수 없거늘 어떻게 불ㆍ세존을 본다 하는 것입니까?” 살차니건자가 대답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집안[家]을 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성씨[姓]를 보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모양[相]인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모양이 아닌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법인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법 아닌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실다운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실답지 않은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관찰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관찰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억념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억념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분별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함이 있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함이 없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만물이 있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만물이 없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화합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이별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색인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인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취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생겨나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으며, 생겨나지 않는 까닭에 여래를 본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혜명 사리불은 대살차니건자에게 물었다. “살차 대덕이여, 만약에 그처럼 봄을 일러 여래를 본다고 한다면 살차 대덕께서는 어떻게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까?”
살차니건자가 대답하였다. “대덕 사리불이여, 나는 색을 보지 않고 여래를 보며, 또한 색을 여의지 않고 여래를 봅니다. 나는 색을 부수지 않음을 일러 여래를 본다 하며,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을 보지 않음을 일러 여래를 본다 하며, 수ㆍ상ㆍ행ㆍ식을 여의지 않음을 일러 여래를 본다 합니다. 나는 수ㆍ상ㆍ행ㆍ식을 무너뜨리지 않음을 일러 여래를 본다 합니다. 나는 여래께서 세간에 포섭됨을 보지 못하며, 여래께서 출세간에 포섭됨도 보지 못합니다. 나는 여래께서 음(陰)에 포섭됨을 것을 보지 못하며, 여래께서 계(界)에 포섭됨을 보지 못하며, 여래께서 입(入)에 포섭됨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오직 여래께서 일체의 음성과 언어를 여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와 같이 해서 여래를 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알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일으키지도 않고 내 보이지도 않으며, 나지 않고 자라나지 않으며,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희론하지 않고 형상을 짓지 않으며,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며, 만물을 짓는 것도 아니고 만물을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보호하지도 않으며, 마음을 지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자연히 보는 것도 아니며, 관찰하여 보는 것도 아니고 관찰하지 않고 보는 것도 아니며, 옳은 말로써[可語] 보는 것도 아니고 옳지 못한 말로써 보는 것도 아니니, 일체의 언어와 이름과 글귀와 음성을 여읨을 일컬어 여래를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와 같은 특징[相]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해서 부처님을 뵈오며, 나 역시 이와 같이 해서 여래를 뵙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살차 대덕이여, 만약에 그와 같이 해서 여래를 뵙는다면, 대덕께서는 어떻게 여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대덕 사리불이여, 내가 만약에 법상(法相)과 법상 아닌 것을 일으키면 곧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덕 사리불이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이름과 글귀와 언어의 말씨와 소리에서 법을 설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법상ㆍ비법상을 짓는 것은 아니니, 왜냐하면 일체의 법상을 여의는 까닭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살차 대덕이여, 그대가 부처님을 찾아온 것은 법을 위해 온 것이 아닌지요?” “대덕 사리불이여, 나는 법을 위해서도 아니요, 법을 위하지 아니해서도 아닌 까닭에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덕 사리불이여, 무릇 법을 위한다고 하지만, 일체 법을 위하지 않음을 일컬어 법을 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법을 위하여 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이 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부처라 하며, 이 법을 보지 않음을 일컬어 법이라 하며, 생(生)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승(僧)이라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법을 위함은 괴로움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며, 괴로움의 원인[集]을 여의기 위해서가 아니며, 도를 닦기 위해서가 아니며, 멸을 증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욕계를 초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색계를 초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무색계를 초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열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그대는 이와 같은 법에 의지하여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법을 위하여 부처님께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혜명 사리불이 대살차니건자에게 물었다. “살차 대덕이여, 지금 그대는 어떠한 법에 의지하여 그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대덕 사리불이여, 나는 지금 한 법에도 의지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계(法界) 가운데에는 의지처[依]가 없으니, 의지처를 얻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두 가지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살차 대덕이여, 그대는 지금 6도(道)의 가고 옴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까?” 살차가 대답했다. “대덕 사리불이여, 내가 만약에 저러한 6도의 모양[相]을 본다면 마땅히 가고 옴이 있을 것입니다. 곧 나에게 만약에 생(生)이 있다면 마땅히 생을 받을 것이요, 물러남[退]이 있다면 마땅히 물러날 것이요, 감이 있다면 마땅히 갈 것입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일체 법이란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일이 없으며, 가거나 물러나거나 생겨나는 일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살차니건자여, 만약에 그와 같다면 여래께서는 무슨 까닭에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태어나고 늙고 죽으며, 또한 물러나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셨겠습니까?” “대덕 사리불이여, 여래는 6도에 집착하는 중생에 의거해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6도에 의지하는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대덕 사리불이여, 불법 가운데 가거나 오거나 물러나거나 생겨나는 일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실로 훌륭하십니다, 살차 대덕이여. 살차 대덕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이 대승을 행하는 이는 뜻을 알고 글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살차니건자가 물었다. “대덕 사리불이여, 그대는 어떤 것이 뜻이며, 어떤 것이 글자라고 아는지요?” 사리불이 말했다. “선남자여, 나는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대덕께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어떤 것이 뜻이며, 어떤 것이 글자입니까?” 그러자 살차니건자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대덕 사리불이여, 이른바 뜻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不可說]을 가리키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름함을 글자라 합니다. 이른바 뜻이란 말할 수 없는 것[不可語]을 가리키며, 그 말을 설명함을 글자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뜻이란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이름하며, 그 이름을 설명함을 글자라 합니다. 이른바 뜻이란 움직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희론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일으키지[生] 못하고 모으지 못하며, 물건이 아니고 실제가 아니며, 나가 없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취할 수 없고 의지할 수 없어서 일체의 의지처인 언어와 이름을 여읜 것입니다.
이른바 글자란, 사유하고 재고 헤아리고 관찰한 것을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을 일컬어 글자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뜻이란, 뜻이 걸림 없음[義無礙]입니다. 이른바 글자란, 법에 걸림 없고[法無礙], 말에 걸림 없고[辭無礙], 즐거이 말함에 걸림 없는 것[樂說無礙]을 일컫습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이것을 일컬어 뜻과 글자의 간략한 설명이라 합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살차니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살차여. 만약에 어떤 선남자가 설법을 하려거든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할지니, 그대가 설명했듯이 이 같은 법문을 말해 주어야 하리라.” 그때에 대중 가운데 3천 명의 천자(天子)가 대살차니건자의 말을 듣고 무생법인을 얻었으며, 2만 명의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다.
▸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생겨나는 법[生法]에는 다함이 있거늘 어찌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다함이 없는 것인지요?” “대왕이시여, 본래 나지 않는 까닭에 다함이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어떤 것이 본래부터 나지 않음인지요?”
대왕이시여,
▸ 법신은 나지 않건만 본래부터 있는 까닭에, 또한 인연으로 나는 까닭에 난다 합니다.”◂
왕이 물었다. “대사이시여, 이와 같은 인연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니, 만약에 행하고자 하는 이는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어디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요?”
▸ “대왕이시여, 모든 공덕으로서 도를 돕는 행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계행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계행으로써 시초를 삼습니다. 만약에 계를 지니지 못한다면 병든 여우의 몸조차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공덕의 몸을 얻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하나니, 계행이 청정함으로써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며, 법의 종자를 끊지 않고 법의 성품을 분별하고 승(僧)의 종자를 끊지 않고 무위(無爲)의 도를 닦게 되는 것입니다. 청정한 계를 지니고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 까닭에 공덕에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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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gbj1932
◈Lab value 불기2565/04/23
○ 2020_1002_123928_nik_ar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ophile Steinlen-l-aisne-devastee-1918-1
Artist: Theophile Steinlen https://en.wikipedia.org/wiki/Théophile_Steinlen Title : l-aisne-devastee-1918-1 Info
현금이 바닥날 때 좋은 점이 있다. 참된 친구를 판별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장삿꾼 형태의 친구는 대부분 멀어진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상황에서는 친구뿐 아니라 형제 자매도 멀어진다. 거의 가까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장삿꾼은 가까이 있어도 어느 경우나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세상에는 장삿꾼이 가득하다.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다. 이 상황에서 보시 수행을 하면 그 가치가 훨씬 크다. 자신도 어려운데 보시를 하기에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다.
현금이 바닥나는데는 사정이 있다. 받아야 마땅한 현금은 받지 못한다. 그러나 줘야 할 현금은 다 지급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금수입과 무관한 수행만 행하면 곧바로 그렇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처리 방안이 있다.
모든 것을 보험처리하는 방안이다. 보험금이란 것은 장래를 념두에 두고 일정 손해를 미리 부담하는 행위다. 현재 보는 손실은 그런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그 손해가 최대 손해고 더 이상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한다. 다음에는 더 이상 그런 손해를 맺을 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만 행하면 된다. 일일히 계산을 하면서 장삿꾼처럼 당장의 이해 손실을 따질 필요가 없다.
원래 삶이란 공수래 공수거인 상태다. 본인이 평생에 걸쳐 어떤 현금 수입을 위해 무언가를 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욱 이 말은 실감에 와 닿는다. 더욱이 생사현실안의 시공간 여행에서 현재 보이는 것은 하나도 지니고 가지 못한다. 당장 눈만 감는 상태가 되어도 그것을 실감한다. 눈으로 보던 것을 이 상태로 지니고 가지 못한다. 그래도 평소 눈으로 대하는 세상 내용이 중요하다. 요즘 노안 때문인지 가까운 모니터 글씨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그리고 당장 안경 찾을 돈 정도만 남겨두었다. 그 나머지는 이번에 숙왕화님과 함께 프니 불자연 재단에 증여했다.
현재 숙왕화님이 생사 시공간 여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생사의 기로에 있다.
그런데 사실은 숙왕화님보다 본인 상태가 더 안 좋다. 그래서 함께 조금 장래를 멀리 내다 보면서 임하기로 했다. 물론 상황이 좋으면 다시 EXTENDED mode 로 넘어갈 수도 있다. 여하튼 그러다보니 자금이 바닥났다.
그러나 일단 늘 3 일 남겨 두었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연구실에서 묘하게 이상한 벌레를 만나게 된다. 본인에게 무언가 삶에 힌트나 교훈을 주려고 그러는 것일까. 매번 그런 경험을 반복하니 이는 일종의 징크스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간 작업한 글을 올려 놓은 사이트가 문제가 많다. 지금까지는 사이트 이용자가 모두 다 같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 본인의 경우만 그런 장애를 겪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본인에게만 이상한 체크 장치가 추가 되어 있다.
이 사이트에 있는 페이지를 오류를 수정하고 내용을 보충해가야 한다. 그런데 이 체크 장치로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일단 사이트 측에 사정을 문의하고 시정 조치를 구했다. 매번 사이트에서 작업 환경을 어렵게 만든다. 그 이유나 사정도 알기 힘들다. 다만 작업하는데 평소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날은 저물어가는데 갈 길은 멀다. 마음만 급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최근에 살핀 보리류지의 자세도 떠올린다. 60 세에 출가 수행을 시작한다. 122 세 무렵에 외국어인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중국에서 34 년간 역경사업을 한다. 그리고 장수사라는 절에서 156 세에 삶을 마친다.
과거 기록이라 오늘날 현실에서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에서 122 세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이렇게 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낮추어 50 , 60 세에 중국에 왔다고 해도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
그 원동력은 결국 중생제도의 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멀리 외국에서 번역사업을 할 일이 아니다.
현재 이 자리에서도 가능하다. 구글 번역기만으로는 힘들지만, 틈틈히 노력해 봐야 할 일이다.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Buddhism in South Africa [san-chn]
āśraya-viśuddhi 所依淸淨 [san-eng]
bravīmi $ 범어 I am speaking [pali-chn]
parivīmaṃsati 思量 [pal-eng]
sandhuupaayati $ 팔리어 sa.m + dhuup + aayaemits smoke. [Eng-Ch-Eng]
羅剎 Raksa 羅剎 living in the Ghost Path. Like Yaksa, they are evil and violent, but inferior to Yaksa. [Muller-jpn-Eng]
蓋 カイ cover, hide, conceal [Glossary_of_Buddhism-Eng]
CANDALA☞ “The lowest class in the Indian caste system, beneath even the lowest of the four formal castes. Its members are fishermen, jailers, slaughterers, and so on.” Yoko: 201 #0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