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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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_대승불교_종교적진리와실천

불기2565-07-09_사분율-k0896-016

선현 2021. 7. 9. 11:56



®





『사분율』
K0896
T1428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사분율』 ♣0896-016♧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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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四分律 卷第十六 下
K0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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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율』 ♣0896-016♧






◎◎[개별논의] ❋본문


● 법장부 계율 사분율






◆vhfz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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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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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lpech - Fais Un Bebe



♥단상♥무유정법과 인과이론-2

무유정법과 인과이론이란 제목으로 인과에 대해서 살핀다.
그런데 인과론은 의외로 살필 논점이 많다.
한번에 이것을 다 적으려면 지치게 된다.
또 과거에도 이런 내용을 산만하게 적은 적도 있다.
그래서 일부 내용은 중복된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씩 나누어서 연재물로 써나가기로 했다.
과거에 신문에 연재소설란이 있었다.
신문을 보면서 거의 보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또 한 두번씩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형태로 조금씩 생각날 때마다 이어 쓰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현실에서 자신이 어떤 바람직하고 좋은 상태로 되기를 원한다.
더불어 세상도 그런 좋은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삶이란 그런 노력이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잘 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변화해가야 한다.

자신부터 현실에서 구호가 필요한 상태에 처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이런 가정을 해보자.
자신부터 전염성이 강한 <나> 병에 걸려 있다고 하자.
세상사람들은 망집에 바탕해 매번 나만 강조하면서
자신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자신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불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나> 병이다.
거의 대부분 욕계 중생이 이런 <나> 병에 걸려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 곳곳에서 다른 이들과 시시비비를 일삼고 갈등을 일으킨다.
그 극단에는 전쟁이 있다.
이 <나>병의 전염성이 대단히 강하다.
거의 대부분 세계 중생이 이 <나>병에 걸려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생계도 잘 해결하지 못하고 가난에 찌들어 있다.
절대적으로 생계자체가 곤란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 대부분 가난은 상대적 빈곤 문제다.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덜 풍요롭게 살고
무한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아귀처럼 갈증을 일으키면서
현실에서 허덕이는 증세다.
그런데 이 상대적 빈곤이 일으키는 부작용이 대단히 강하다.

또 그런 가운데 자신이 번뇌에 묶여서 자유롭지 않고
매 순간 번뇌의 부림을 받으면서 종처럼 묶여 사역당한다.

노예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주인이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그런 고통을 당하지는 않게 된다.
그래서 그런 구조로 매순간 묶여서 무언가를 억지로 행하는 상태가 노예의 상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비록 신분은 자유롭지만, 그 실질은 대부분 이와 같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해서 자유롭게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 주체의 마음에 들어간 내용 자체가 자신의 내용이 아니다.
대부분 욕계내 마 파순이 넣어준 내용들로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이런 번뇌에 묶여서 스스로 사역을 당하고 또 다른 생명을 그처럼 묶어 사역시켜 나간다.
이렇게 행하면 결국 마파순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된다.

현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잘 성취한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은 노예가 아니고 자유롭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태가 바로 마파순과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다.
그래서 이를 타승이라고도 표현한다.
자신이 계를 지키지 않고 원하는대로 행하는 것은 결국 마파순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마파순이 이기게 되는 상태라는 뜻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성취하는 것이 왜 자신의 성취가 아니고 마파순의 성취가 되는가.
그것은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이 상황을 비유를 들어 이해해보자.
돼지 축사가 있다고 하자.
어떤 숫돼지가 축사안의 암퇘지들을 마음대로 취해서 돼지새끼를 수없이 낳는다고 가정해보자.
숫돼지가 마치 과거 황제가 된 듯 그렇게 행세하여 숫돼지는 대단히 좋은 상태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누가 가장 좋다고 여기겠는가를 생각해보자.
숫돼지보다는 그 축사를 경영하는 주인일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양봉업자가 로이얄젤리를 주고 여왕벌을 만들어서 벌들을 낳게 한다고 하자.
또 그 각 벌들은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꽃가루를 채취한다고 하자.
이 모두는 벌들이 자유롭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꿀벌통에 집도 짓고 꿀을 가득 채웠다고 하자.
이것을 여왕벌도 꿀벌들이 좋다고 하겠지만, 사실 가장 이를 좋아할 이는 따로 있다.

그외 낙타나 곰의 사례도 다 마찬가지다.

곰이 자신이 꾀를 부려 재주를 피운다고 하자.
그 경우에도 좋아하는 이는 사육사나 관중이다.

낙타가 짐을 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고 오아시스를 찾아 물을 먹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이를 좋아하는 이는 이를 부리는 카라반이다.

현실에서 치자부다 현상이 발생한다.
어리석은 이가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하고 많은 것을 매고 세상을 돌아다니려 한다.
이 현상이 곰이나 낙타 벌의 상태와 같다.
그렇게 움직이는 그 본 바탕에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소원이 있다.
그래서 그 주체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그처럼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언뜻보면 그 주체의 뜻대로 행하고 성취하기에 그 주체가 그 좋음을 얻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착시현상이다.
잠깐 그 주체가 그것을 차지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장구하게 그것을 차지하게 되는 이는 그가 아니다.
욕계에서 장구한 수명을 누리는 마파순의 차지다.
그리고 곰이나 낙타 벌의 역할을 한 주체들은 잠깐 그것을 만들어 놓고 차지하고는
생사과정에서 더 이상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생사과정에서 그것을 하나도 못 가져간다.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하고 삶을 의미없게 마치는 것이다.

낙타나 곰 벌의 사례를 놓고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기 힘들게 된다.

그런 가운데 심하면 죄를 범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질병-가난-노예-죄수의 상황이
극복하기 힘든 생사고통의 내용이 된다.

결국 생사현실에서 이런 상태를 극복하고 벗어나와야 한다.
또 다른 중생도 그런 상태를 벗어나오게 해야 한다.
또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하려면 그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상태를 벗어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 부분부터 인과관계 문제가 관련된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된다.
이 내용이 곧 인과관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인과 내용에 대해서 각 입장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그 입장 차이는 현실에서 제각각 다른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각 입장마다 현실 문제에 대해서 달리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부작용이 심하다.

이미 그 내용을 대강 살폈다.

그런데 무엇이 각 입장의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무엇이 왜 엉터리인가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살피려면
현실에서 하나의 단면을 놓고 먼저 그 정체부터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을 부딪혀 손뼉소리를 낸다.
이런 경우를 놓고 보자.

여기서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이 문제부터 잘 살펴야 한다.

또 이를 위해 처음 그 현실 한 단면에서
무엇이 손바닥이고 무엇이 손뼉소리인가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직전 직후를 놓고 이 관계를 잘 살피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인과판단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천둥소리는 번개가 만들어 냈다는 식으로
엉터리 판단을 행한다.

마치 밤은 낮이 만들어 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다.
또는 배나무에 배가 떨어진 것은 배나무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도 잘못 판단한다.

이들이 무언가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인과관계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법정에서 행하는 인과판단은 훨씬 더 엉터리다.
위에서 말하는 판단을 모두 생략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또 엉터리 판단을 행하게 된다.

위 문제에 그것이 다 들어 있다.

손바닥을 부딪혀 손뼉소리를 낸다. 이 현상을 놓고 설명해보자.

왼손과 오른손이 부딪혀야 손뼉소리가 난다.

그런데 손뼉소리가 좋은 내용이라고 하자.
그려면 그 경우 왼손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왼손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그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 좋은 내용은 모두 왼손 자신 때문에 얻은 것이다.
그러니 왼손 자신이 그 이익을 모두 차지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손뼉소리가 이제 나쁜 내용이라고 하자.
그려면 그 경우 왼손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오른 손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그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 나쁜 내용은 모두 오른 손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그 피해는 모두 오른 손이 부담하고 자신에게 그 피해를 배상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다.


이 논리를 따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형식대로 오른 손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법정에서 문제된다고 하자.
누가 정당하게 그 이익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가.
또는 누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수없이 현실에서 제기된다.

법정에서는 물리학적 조건을 살피고 인과설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다.
권총으로 사람을 상해했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물리적으로는 권총알이 관통해서 상해를 입힌 것이다.
그러나 권총이나 총알 또는 권총 제조사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는 재판관은 없다.

그래서 주된 관심은 사람이다.
또 결과를 발생시킨 모든 조건을 다 나열해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을 사회적 상당 인과관계설 이라고도 칭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그 가운데 특정인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반대로 다른 이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더 나아각 다른 이는 오히려 정반대로 이익을 귀속시킨다.
이런 현상이 문제가 된다.

물리적으로 손뼉소리가 나게 된 데에는
왼손과 오른 손이 함께 개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왜 이 가운데 왼손에게만 책임을 묻고
또 반대로 오른 손에게 이익을 귀속시키게 되는가.
이런 것이 구체적 현실에서 문제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온갖 가해 피해관계를 놓고 이 문제를 살피면
같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이미 이것을 황진이 사건을 놓고 살폈던 적도 있다.
황진이가 지족선사에게 다가가 유혹을 한다.
그래서 지족선사가 황진이에게 매료당해 껴안으려 하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황진이가 이것을 미투운동 형태로 세상에 소문을 냈다.
그래서 지족선가가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매장되었다.

이 간단한 하나의 사건에 누가 지옥에 가야할 주체라고 보는가.
이것이 1심 2 심 3 심 마다 다 판단이 달라졌다.


왼손 오른손의 문제 성격이 여기에도 관련된다.

그래서 판단이 어렵다.

첫 1 심에서는 일반인 상식처럼 지족선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지족선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제 2 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제 2 심에서는 황진이에게 그 사건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이유가 다음과 같다.
평소 지족선사가 여성을 희롱하는 일들이 없고 수행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황진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황진이는 동네에서도 그런 유사사건이 많았다.
예를 들어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말라죽는 일들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그 사건은 황진이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고
지족선사는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


그래서 미투운동과는 운동방향이 정반대인 아베크 무아(無我) avec moi 운동가들의
뜻대로 판결이 났다.


그러자 황진이가 다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다시 제 3 심이 열렸다.
황진이도 사정이 그렇다고 주장했다.
황진이도 같이 지내는 여자 기생들과 심지어 옷을 다 벗고 목욕을 한다해도
평소 아무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네 총각이나 지족선사의 경우에만 그런 특이 반응이 일어난 것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제 3 심에서는 양쪽의 엇비슷한 주장을 다 받아들여 공동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 판결에서는 손뼉 소리가 나려면 왼손 오른손 어느 한 손만으로는 안 되고
양 손이 다 함께 있어야 소리가 난다는 이론이 그 근거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양쪽 다 불만을 갖게 했다.


그래서 양쪽이 다시 해결방안을 찾았다.
그래서 이후 Un 산하 국제형사 및 사법재판소에 다시 사건을 민형사적으로 제소했다.
그리고 황진이는 따로 여성 인권 침해 문제등으로 국제인권심판소에도 심판을 청구했다.


그러자 지족선사 측 변호사가 관할권 없음을 주장해서 사건이 모두 계류중이다.
종교 수행자가 관련되는 한 세속 재판부는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다시 황진이가 불교내 계율심판소에 재판을 걸었다.
종교 수행자가 세속인을 희롱했다는 취지다.


그래서 처음 근본 설일체 유부 계율심판소에서 다시 지족선사가
계율을 어겨 책임이 있는 것으로 심판을 내렸다.
또 법장부 사분율 계율심판소에서도 연이어 같은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지족선사가 상급 대승계 범망 계율심판소에 심판을 청구했다.
그러자 다시 책임없다는 취지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 판격취지는 대강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려면
결국 여인을 접촉해서 여인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여인이 접근한 취지에 부응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제도가 가능하다.
그래서 당시 지족선사가 그런 가운데 자세를 취한 것 뿐이다.
그런데 다만 황진이가 이중적인 자세로 즉 꽃뱀과 같이
교묘하게 행했기에 문제가 된 것 뿐이다.
그래서 이는 황진이가 그런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데에
책임이 있다.
지족선사는 당시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을 취한 것 뿐인데
다만 황진이라는 여성이 이중적인 의도를 갖고 접근하여
구체적으로 상황에 잘 들어맞지 않았을 뿐 큰 책임이 없다.
이런 취지의 판결이다.


그리고 황진이가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수행자에 접근해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고
이로 인해 세간에서 수행자를 비난받게 하고
더 나아가 불교 전반에 대해 훼손을 가한 책임이 크다.
따라서 무간지옥 직행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다시 황진이가 상급 패잔소인
여래 심판소에 재판을 재심을 신청했다.


그래서 가섭여래 재판소에서 판결이 나왔다.
그 현실 상황에 우선 원고 피고에 대한 인정신문과정에서
당사자적격을 갖춘 이들이 없음이 먼저 문제되었다.
즉 그 현실 상황에 지족선사라는 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황진이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또 당연이 그런 주체들의 행위도 얻을 수 없다.
다만 망집에 빠져 활동한 캐릭터들만 꿈처럼
당시 있다고 여겨졌을 뿐이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다음 판결문이 주어졌다.


일체중생성청정,
종본무생무가멸
즉차신심본시환
환화지중무죄복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 중생은 성(?) 깨끗하다.
본래부터 생겨나는 것이 없고 멸할 것이 없다.
이 몸과 마음은 본래 환이다.
환 속에서는 죄와 복을 얻을 수 없다.


결국 원고 피고에 해당하는 이가 생사현실에 없다는 판단이 먼저 내려졌다.
그리고 본안에서는 설령 캐릭터가 당시 있었다해도
모두 본래 innocent하다는 무죄 판결을 함께 받았다.


이것으로 사태가 진정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가섭여래 재판부는
양 당사자 측이 이 판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서로 화목하게 조화롭게 보리심을 바탕으로
수행해서 생사의 묶임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생사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황진이가 당시 가한 피해는 지족선사에게 치명적이었다.
직업적으로 기생 업무에 종사한 황진이가 꽃뱀형태로 접근하여 농락당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수행자로서의 명예가 회복불능한 상태로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또 황진이는 달리 생각한다.
자신이 비록 기생신분이지만, 적어도 지족선사만은 수행자로서 자신을 점잖게 대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 달리 고결한 수행자마저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여 인격적 모독과 수치심을 깊게 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깊게 받았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쌍방 당사자 측들은 이런 바탕에서 서로 미움과 원망을 갖고
이후 500 년간 상호 보복과 비난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현재도 여전히 같은 유형의 사건을 현실에서 빈번하게 대하는 것이 그 사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미투 운동가와 아베크 무아 운동가들은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피켓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양상이 심하다.




물론 법정의 판단은 물리 실험실의 인과판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역시 인과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완전히 인과판단을 떠나면 결국 불합리한 억지가 된다.

그래서 결국 이를 인과판단의 일반적 문제와 함께 잘 살펴야 한다.

어떤 이가 점집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당신은 태어난 날짜가 이런 날이니
앞으로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고 잘 안 될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부적을 사서 집에 붙여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 지내고 굿도 해야 한다.
그래서 천만원을 내라.
이것을 안 하면 앞으로 1 년안에 죽을 것이다.

이렇게 종합적인 처방을 제시받았다고 하자.
여기에 영향을 안 받는다면 모르지만 대부분 받게 된다.

이런 내용도 결국 인과이론의 이해와 관련이 된다.


처음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되고자 하는 상태가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도 역시 인과이론의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문제들이 모두 인과이론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것을 엉터리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매 경우 엉터리로 판단하고 엉터리로 행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엉망이 된다.

법정에서 엉터리로 인과판단을 하면,
애꿎은 이들이 엉터리로 고통을 받게 된다.
또 엉터리로 엉뚱한 이들이 반대로 이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다른 경우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문제를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서양철학자들이 논의하는 인과이론을 검토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엉터리임을 보게 된다.
그러나 또 대부분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 문제되는 한 단면과 그 직전 직후를 놓고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

과연 천둥소리는 번개빛이 낸 것인가.
이것은 손뼉소리는 자신이 눈으로 보는 왼손바닥과 오른 손바닥이 낸 것인가.
이 문제와 성격이 같다.

이 상황에서 그가 설령 눈을 감아 번개빛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도 천둥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인과관계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 판단은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얻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이 상황을 대하면
그렇게 여겨지는 것 뿐이다.

다만, 이들 내용이 전혀 관계 없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이 상황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각 내용은 서로간에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이들의 관계는
같은 상황에서 함께 얻게 되는 관계일 뿐이다.
즉 (동시) 부대 상황의 관계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이외 인과론에 덧붙여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론에
사전 결정론, 필연론, 우연론 등이 있다.
이들 내용도 마찬가지다.
엉터리다.
이런 내용이 엉터리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를 통해 곧 운명론 숙명론에 빠진다.

그리고 마치 최면에 걸리듯 이런 엉터리 이론에 영향을 받고 묶이게 된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계획하고 노력하며 자신 뜻대로 다 행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엉터리 자세를 취하고 현실에 임한다.
즉, 행위는 자신이 행하면서 그 책임이 문제되면 운명에 그 책임을 떠 넘기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엉터리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 다른 엉터리 입장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은 과거에 행한 업 때문에 정해져 나타난다.
또는 모든 것은 신의 뜻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이런 주장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인과론과 무유정법이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컴퓨터 전자게임을 놓고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쉬울 수 있다.


전자게임 화면을 본다고 하자.

어떤 위치에서 어떤 부분을 클릭하고 버튼을 누르면
어김없이 보물 아이템이 얻어진다고 하자.
또 반대로 다른 곳에서는 어김없이 캐릭터 주인공이 손해나 부상을 입게 된다고 하자.

매번 반복해봐도 사정이 같다.
이것이 인과론과 관련이 된다.
물론 이는 프로그래머가 그렇게 프로그램을 짜 놓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화면 하나를 놓고 잘 살펴보자.

그 내용이 현실에 있는 내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물론 비슷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현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더 살펴보면 다음내용까지 말하게 된다.

자신이 게임에서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화면 부분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켜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철수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화소일 뿐이다.
그런데 그 부부을 묶어 대하면 그가 그 부분이 철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뿐이다.
이 관계와 이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런 화소가 그런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그 화소가 있는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화소부분이 그런 내용인 것도 아니다.

이들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프로그래머가 짜 놓은 내용을 또 잘 이해해야 한다.
일정한 부분을 클릭하면 일정한 내용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런 관계가 이들 내용이 엉터리이고 가짜임도
알려준다.

즉 이들 내용은 그런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자체는 게임을 하는한 무량겁을 두고 반복해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내용 때문에 그 내용이 가짜암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다른 영역에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같은 성격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하나도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화면에 반복해 진짜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그 게임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바로 생사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실에서 이 두 측면을 취해 이중적으로 임하게 된다.

우선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온갖 생사, 생멸 문제가 사정이 다 그렇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사고통이나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한편,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의 측면에 임해야 한다.

또 그 안에서는 중생제도를 위해서
그 캐릭터가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중생제도를 위해서 그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안에서 수행이 필요하다.
마치 게임화면이 엉터리지만, 그 안에서 일정한 아이템을 얻으려면
열심히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서 매 경우 범부가 망집에 바탕해 행하게 마련인 행위를 반복한다고 하자.
그러면 또 그에 따라 어김없이 생사현실에서 3 악도에 처하게 된다.
즉 예를 들어 그 주체가 움직이게 하는 캐릭터는 축사 등에 갇혀서 활동하게 된다.
하나하나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해도 현실내용은 그런 사정으로 그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 관계가 무량겁에 걸쳐 이어진다.

즉 생사현실에서 업을 행하면 그에 따른 과보를 무량겁에 걸쳐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게임화면의 사정과 같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이들 내용 하나하나 그 일체가 가짜이고 실답지 않음도 밝혀진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무유정법'이라는 구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이 그렇게 생사에 묶인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이 비유를 통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7/2565-07-09-k0896-016.html#2333
sfed--사분율_K0896_T1428.txt ☞제16권
sfd8--불교단상_2565_07.txt ☞◆vhfz2333
불기2565-07-09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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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catvāri-āryasatyāni 【팔】cattāri-āriyasaccāni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함.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불교의 강격(綱格)을 나타낸 전형(典型)으로서 유력(有力)한 것. 제(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 (1) 고제(苦諦). 현실의 상(相)을 나타낸 것이니, 현실의 인생은 고(苦)라고 관하는 것. (2) 집제(集諦). 고(苦)의 이유근거(理由根據) 혹은 원인(原因)이라고도 하니, 고의 원인은 번뇌인데, 특히 애욕과 업(業)을 말함. 위의 2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 (3) 멸제(滅諦). 깨달을 목표. 곧 이상(理想)의 열반. (4) 도제(道諦).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 위의 2제는 오(悟)의 인과. 이 사제설(四諦說) 자신에는 아무런 적극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지만, 후대에 이르면서 매우 중요시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체계를 포괄(包括)하여 조직적으로 취급한 것이 있다. 고제는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ㆍ5온(蘊) 설(說)을, 집제ㆍ멸제는 연기설(緣起說)을, 도제는 8성도(聖道) 설을 표하는 것. 그리고 고제ㆍ집제는 12인연의 순관(順觀)에, 멸제ㆍ도제는 역관(逆觀)에 각각 해당함.

답 후보
● 사제(四諦)

사종열반(四種涅槃)
사중금(四重禁)
사향사과(四向四果)
사홍서원(四弘誓願)
살생(殺生)
삼고(三鈷)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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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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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분율_K0896_T1428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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