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진(東晋) 시대 동진의 사마(司馬)씨는 건강(建康)에 도읍하고 있었다.또한 남진(南晋)이라고도 한다. 원제(元帝) 건무(建武) 원년 정축(丁丑, 317)으로부터 공제(恭帝) 원희(元凞) 2년 경신(庚申, 420)에 이르기까지 무릇 11제(帝) 104년 동안 승려와 속인들 열여섯 명이 번역한 경(經)ㆍ율(律)ㆍ논(論)과 신구집(新舊集)의 실역(失譯) 경전 등은 총 168부 468권이다.85부 336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83부 132권은 궐본이다.
사문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3부 14권. 경 사문 지도근(支道根)2부 7권. 경 사문 축담무란(竺曇無蘭)61부 63권. 경(經)ㆍ계(戒)ㆍ집(集) 사문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5부 118권. 경ㆍ논과 교수법(敎授法) 사문 가류타가(迦留陁伽)1부 1권. 현성집(現聖集) 사문 강도화(康道和)1부 3권. 경 사문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13부 125권. 경ㆍ율ㆍ논ㆍ집 사문 담마(曇摩)1부 2권. 율요(律要) 사문 비마라차(卑摩羅叉)2부 5권. 율잡사(律雜事) 사문 석법현(釋法顯)7부 26권. 경(經)ㆍ계(戒)ㆍ논ㆍ집 사문 기다밀(祇多蜜)33부 45권. 경 거사(居士) 축난제(竺難提)2부 5권. 경 사문 축법력(竺法力)1부 1권. 경 사문 석숭공(釋嵩公)3부 3권. 경ㆍ집 사문 석퇴공(釋退公)1부 1권. 경 사문 석법용(釋法勇)1부 1권. 경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40부 48권. 그 중의 2부 3권은 구집(舊集)이요, 38부 45권은 신집(新集)에 덧붙여 있다.
(1)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대관정경(大灌頂經) 12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長房錄)』에는 “9권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잡록(雜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 1권『축도조록(竺道祖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었다. 공작왕잡신주경(孔雀王雜神呪經) 1권『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이상은 3부 14권이다.처음의 1부 12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2부 2권은 궐본이다.
사문 백시리밀다라는 중국말로는 길우(吉友)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며, 국왕의 아들이다. 그는 마땅히 대를 이어야 했으나, 나라를 아우에게 양보하였으니, 아무도 모르게 태백(太伯)43)의 전례를 따랐다. 이미 마음을 깨달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서, 드디어 사문이 되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타고난 자태가 높고 밝으며, 풍채[風神]도 뛰어나서, 직접 그를 대하면, 곧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총명함과 변재로 볼 때 깨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서진(西晋) 영가(永嘉) 연간(307~310)에 처음 중국에 와서 강좌(江左)를 지나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 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서, 그를 벗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ㆍ광록(光祿) 주백인(周伯仁)ㆍ태상(太常) 사유여(謝幼璵)ㆍ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가 일대의 명사(名士)들인데, 그를 만나면 종일토록 탄복하며 가슴을 열고 교분[契]을 맺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백시리밀다라는 허리띠를 풀고 엎드려 누워서 대하였고, 깨달음에 대해서 신통하게 알아서 말[悟言神解]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백시리밀다라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잠시 변망지가 그를 보려 왔다. 백시리밀다라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며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백시리밀다라는 대답하였다. “왕공(王公)의 풍류와 도[風道]는 다른 사람의 따르는 바가 되고, 변망지는 사물의 이치와 법도를 따르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입니다.” 제공(諸公)들은 이에 그 정신이 깨끗하고 넉넉한 것에 탄복하였고, 모두가 그의 적절한 대응을 칭찬하였다. 환정위(桓廷尉)가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위하여 표제[目]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백시리밀다라는 탁랑(卓朗)44)이라고 할만하다”고 하자, 이에 환정위는 감탄하고 매우 탄복하면서, 탁랑이 표제(標題)로서 극히 합당하게 여겼다. 대장군 왕처충(王處冲)은 그 당시 남하(南夏)에 있었는데, 왕도ㆍ주백인 등 여러 공(公)들이 모두 백시리밀다라의 기량을 중히 여긴다는 말을 듣고,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시리밀다라를 만나고 나서는 기뻐하였고, 달려가 한 번 얼굴을 대할 때에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하였다.
왕공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일컬어 말하였다. “외국사람으로 (공경할 만한 이는) 그대 한 사람만 있을 뿐이요.” 백시리밀다라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만일 내가 그대들[諸君]과 같았다면, 오늘날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사람들은 적절하고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하였다. 백시리밀다라는 성품이 고상하고 대범하였다.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공(公)들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때에는 비록 통역을 통하기는 했으나, 신기하게 그 뜻을 깨달아, 그가 전하는 것을 다 알았다.
그의 타고난 빼어남은 보통사람의 생각[常情]으로는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술(呪術)을 잘하여, 가르치는 바가 모두 영험이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좌법사(高座法師 : 법사의 존칭)라고 불렀다.
원제(元帝) 때(317~322)에 『대관정경』 등 3부를 번역하였으며, 또 제자 멱력(覓歷)에게 휼륭한 소리[高聲]가 나는 범패(梵唄)45)를 가르쳐 주어서,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해지게 되었다.
나이 80여 세인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입적하였다.
여러 공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시리밀다라는 언제나 석자강(石子崗)의 동쪽에 있으면서 두타행(頭陀行)46)을 하였다. 그리고 생을 마친 후에는 여기에 장사지냈다.
성제(成帝, 326~342)는 그의 풍류와 도[風道]를 그리워하여 그를 위해 무덤에 찰주(刹柱)47)를 세웠다.
후에 관우(關右)의 사문이 건강(建康)에 와 머물면서 비로소 무덤이 있는 곳에 절을 세웠다. 진군(陳郡)의 사곤찬(謝琨贊)이 절 짓는 일을 완성하고, 지난 일들의 자취를 따라 훤히 밝혀서, 절의 이름을 고좌사(高座寺)라고 하였다
(2) 지도근(支道根) 아촉불찰제보살학성품경(阿閦佛刹諸菩薩學成品經) 2권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다. 두 번째 번역이다. 한(漢)나라 때 지참(支讖)이 번역한 것과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祿)』에 보인다. 방등법화경(方等法華經) 5권함강(咸康) 원년(335)에 번역되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네 번째 번역되었다. 축법호(竺法護)의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2부 7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지도근은 법미[味]를 깨닫고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불도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성제(成帝) 함강 원년 을미(乙未, 335)에 『아촉불찰제보살학성품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장방록』 등 목록에는 모두 “『아촉불경(阿閦佛經)』이라 하였고, 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다”라고 하였는데, 태강년은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때여서, 함강 연간(335~342)과는 서로 60여 년의 차이가 있다. 같은 한 사람이 양조(兩朝) 때에 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시기가 너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이는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일 것이다. 대부분 함강 연간으로 되어 있다.
(3) 축담무란(竺曇無蘭)
채련위왕상불수결호묘화경(採蓮違王上佛授決號妙華經) 1권또한 바로 『채련위왕경(採蓮違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受決經)』과는 동본이다. 다린니발경(陁隣尼鉢經) 1권또한 『다린발주경(陁隣鉢呪經)』이라고도 한다.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서는 “『다린발경(陁隣鉢經)』 외에 또 『지구신주경』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마니라단경(摩尼羅亶經) 1권또한 『마니라단신주경(摩尼羅亶神呪經)』이라고도 한다. 현사발타소설신주경(玄師颰陁所說神呪經) 1권목록에서는 “환사(幻師)라고 하였고, 소설(所說)이라는 글자도 없다. 혹은 발(跋)자를 쓰기도 하며, 또한 파타(波陁)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고록(古錄)』에서는 “『환왕발타경(幻王颰陁經)』이다”라고 하였다. 적지과경(寂志果經) 1권『장아함경(長阿含經)』 제17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철성니리경(鐵城泥犁經) 1권『중아함경(中阿含經)』 제12권에서 나왔다. 『오천사경(五天使經)』과는 동본이다. 아뇩풍경(阿耨風經) 1권진나라 언어에 의거하여 순서가 매겨졌으며, 『중아함경』 제2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범지알라연문종존경(梵志頞羅延問種尊經) 1권또한 『알파라연경(頞波羅延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3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니리경(泥犁經) 1권혹은 『중아함니리경(中阿含泥犁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5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계덕향경(戒德香經) 1권혹은 『계덕경(戒德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니려경(四泥黎經) 1권혹은 『사대니리경(四大泥犁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고, 승우는 “실역(失譯)이다”라고 하였다. 『증일아함경』 제4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국왕불리선니십몽경(國王不犂先尼十夢經) 1권혹은 선니(先泥)라고 쓰기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51권에서 나오는 이역이다. 수말소표경(水沫所漂經) 1권일명 『하중대취말경(河中大聚沫經)』, 또는 『취말비경(聚沫譬經)』이라고도 한다. 『오음비유경(五陰譬喩經)』과 동본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옥야경(玉耶經) 1권일명 『장자예불설자부무경경(長者詣佛說子婦無敬經)』, 또는 『옥야녀경(玉耶女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속달경(阿遬達經)』과 같은 동본이다.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1권처음 번역되었다. 일명 『제천오고경(諸天五苦經)』, 또는 『오도장구경(五道章句經)』, 또는 『정제죄개오락불법경(淨除罪蓋娛樂佛法經)』이라고도 한다. 자애경(自愛經) 1권혹은 『자애부자애경(自愛不自愛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구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심경(中心經) 1권혹은 『중심정행경(中心正行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대중심경(大中心經)』, 또는 『소중심경(小中心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서는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조사하여 보았으나 없었다. 견정경(見正經) 1권일명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이라고도 한다. 대어사경(大魚事經) 1권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 1권혹은 바로 『칠몽경(七夢經)』이라고도 한다. 가조아나함경(呵鵰阿那含經) 1권일명 『하조경(荷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가(苛)자를 쓰기도 한다. 신세경(新歲經) 1권 비구청시경(比丘聽施經) 1권일명 『청시비구경(聽施比丘經)』이라고도 한다. 불반니원마하가섭부불경(佛般泥洹摩訶迦葉赴佛經) 1권또한 『가섭부불반열반경(迦葉赴佛般涅槃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으며, 이 이하는 궐본이다. 독우경(犢牛經) 1권일명 『독자경(犢子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었다. 『유광경(乳光經)』과 같은 동본이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1권세 번째 번역되었다. 길우(吉友)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다. 칠불소결마유술주경(七佛所結麻油述呪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 두 경본을 거듭하여 실었는데, 어떤 이는 이본(異本)이라고도 한다. 대신모결서주경(大神母結誓呪經) 1권 이원법원신주경(伊洹法願神呪經) 1권 해일액신주경(解日厄神呪經) 1권 육신명신주경(六神名神呪經) 1권 단지라마유술신주명(檀持羅麻油述神呪經) 1권 마유술주경(麻油述呪經) 1권 마니라단신주안마경(摩尼羅亶神呪按摩經) 1권 의왕유루연신주경(醫王惟樓延神呪經) 1권혹은 『아난소문의왕유루연신주경(阿難所問醫王惟樓延神呪經)』이라고도 한다. 용왕주수욕경(龍王呪水浴經) 1권 십팔용왕신주경(十八龍王神呪經) 1권 청우주경(請雨呪經) 1권 지우주경(止雨呪經) 1권 친수경(嚫水經) 1권 환사아이추신주경(幻師阿夷鄒神呪經) 1권 주수경(呪水經) 1권 약주경(藥呪經) 1권 주독경(呪毒經) 1권 주시기병경(呪時氣病經) 1권 주소아경(呪小兒經) 1권 주치경(呪齒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다시 한 경본의 이름을 등재하였는데, 이 경과 동본이다. 표제에는 “이본(異本)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충치경(虫齒經)』, 또는 『우치경(齲齒經)』이라고도 한다. 주아통경(呪牙痛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다시 한 경본의 이름을 등재하였는데, 이 경과 동본이다. 표제에는 “이본(異本)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치통경(齒痛經)』이라고도 한다. 주안통경(呪眼痛經) 1권 오안문경(五眼文經) 1권이 경은 섭도진(聶道眞)이 번역한 『구오안법경(求五眼法經)』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이욕우바새우바이계문(離欲優婆塞優婆夷戒文) 1권또한 『구행이십이계문(具行二十二戒文)』이라고도 한다. 죄업보응경(罪業報應經) 1권『죄업응보교화지옥경(罪業應報敎化地獄經)』과는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팔사경(八師經) 1권두 번째 번역되었다. 평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 1권일명 『불사가왕경(弗沙迦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의족경(義足經) 2권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이는데, 또한 다르게 번역되었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십선십악경(十善十惡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오록』에서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치선법경(治禪法經) 1권 범천책수경(梵天策數經) 1권『구록』에서는 “『제천사경(諸天事經)』이다”라고 하였다. 제천지경(諸天地經) 1권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태원(太元) 6년(381)에 승순(僧純)ㆍ담마지(曇摩持)ㆍ축승서(竺僧舒)의 3가(家) 경본을 합하여, 이 1권으로 만들었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마땅히 두 번째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삼백육십계삼부합이(三百六十戒三部合異) 2권서문에는 대비구(大比丘)라는 글자가 덧붙어 있다. 태원 6년(381) 6월 20일에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승려들을 집합시켜 자세히 거듭 교정하였다. 『구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61부 63권이다.『불반니원마하가섭부불경』 이상의 24부 24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독우경』 이하의 37부 39권은 결본이다.
사문 축담무란은 중국말로는 법정(法正)이라 한다. 서역 사람이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6년 신사(辛巳, 381)로부터 태원 20년 을미(乙未, 395)에 이르기까지 양도(楊都)의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채련위왕상불수결호묘화경(採蓮違王上佛授決號妙華經)』 등의 61부를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장방록(長房錄)』에 보인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다시 48경이 있고, 또한 “법정(法正)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 경들은 따로 파생된 것으로,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며, 혹은 위경[僞]인지 의심이 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아래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구호신명경(救護身命經)또한 『구호신명제인병고액경(救護身命濟人病苦厄經)』이라고도 한다. 『주록(周錄)』에서는 정경(正經)에 편입되어 있으나, 『구록』에서는 “위경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구록(舊錄)』에 의거하여 편집한다. 제천문여래경계불가사의경(諸天問如來警戒不可思議經) 견수세계경(見水世界經)이상의 2경은 모두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용왕결원오룡신주경(龍王結願五龍神呪經) 대장군신주경(大將軍神呪經)이상의 2경은 『관정경(灌頂經)』에서 나왔다. 무오아경(無吾我經)『보초경(普超經)』에서 나왔다. 미란경(彌蘭經)혹은 미련(彌連)이라 쓰기도 하고, 또는 『미련경(彌蓮經)』이라고도 한다. 마천국왕경(摩天國王經)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미란경』 등 이하의 3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현겁경(賢劫經)』에서 나왔다. 서문에는 “『현겁경』에서는 2천1백의 여러 도무극(度無極)48)을 설명하며, 구루손불(拘樓孫佛)49)을 초조首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천불명경(千佛名經)』은 따로 번역한 경본이 있는데, 구나제불(拘那提佛)50)을 초조首로 삼고 있다.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안공(安公)은 “『율경(律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는 “태원(太元) 21년 병신(丙申, 396) 6월에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지었다”라고 하였다. 삼십삼천원관경(三十三天園觀經) 비구성취오법입지옥경(比丘成就五法入地獄經) 학인란의경(學人亂意經)이상의 3경은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위비구설대열지옥경(佛爲比丘說大熱地獄經) 석제환인예목련방광경(釋提桓因詣目連放光經) 목련견대신중생연철전신경(目連見大身衆生燃鐵纏身經) 견일중생거체분예도신경(見一衆生擧體糞穢塗身經) 중생정유철마성화치연경(衆生頂有鐵磨盛火熾然經) 나바조위응소착경(羅婆鳥爲鷹所捉經) 십법성취악업입지옥경(十法成就惡業入地獄經) 사행법경(蛇行法經) 비구욕우천자방광경(比丘浴遇天子放光經) 천어수라욕투전경(天於修羅欲鬪戰經) 천제석수계경(天帝釋受戒經) 비구문불석제환인인연경(比丘問佛釋提桓因因緣經) 사천왕안행세간경(四天王按行世間經) 불견범천정경(佛見梵天頂經) 제석자심전승경(帝釋慈心戰勝經) 천신금보경(天神禁寶經) 아육왕공양도량수경(阿育王供養道場樹經) 권행유증경(勸行有證經) 계상응법경(戒相應法經) 선사만족경(禪思滿足經)『불위비구설대열지옥경』 이하의 20경은 모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 야계경(野鷄經) 별미후경(鱉獼猴經) 고호오경(蠱狐烏經)혹은 조(鳥)자를 쓰기도 한다. 제자명과경(弟子命過經) 여타경(驢駝經) 구살라국오왕경(拘薩羅國烏王經)혹은 라(羅)자가 없기도 한다. 공작경(孔雀經) 부부경(夫婦經)『야계경』 등 이하 8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군우천두경(群牛千頭經) 집수행사경(集修行士經) 폭상경(暴象經)『군우천두경』 등 이하 3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지옥중생상해경(地獄衆生相害經)『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나왔다. 적취오유경(赤嘴烏喩經) 아난다원라운모경(阿難多洹羅云母經)『적취오유경』 등 2경은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가려 뽑抄은 경이다.
(4)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두 번째 번역이다. 혹은 58권으로 되어 있다. 융안(隆安) 원년(397) 11월 10일에 동정사(東亭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그 2년(398) 6월 25일에 마쳤다. 담마난제(曇摩難提)가 역출한 경과 동본이며, 사문 도자(道慈)가 받아썼다. 『축도조록(竺道祖錄)』에 보인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5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융안 원년(397) 정월에 나왔다. 담마난제가 번역한 경본과는 약간 다르며, 축도조가 받아썼다. 혹은 42권, 또는 33권인지 일정하지 않다. 또한 60권으로 된 것도 있다. 『축도조록』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 4권혹은 『아비담심(阿毗曇心)』이라고도 한다. 논(論)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존자(尊者) 법승(法勝)이 지었다. 태원(太元) 16년(391)에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혜원(慧遠)법사를 위하여 역출하였으며, 도자(道慈)가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태원 16년(391)에 여산에 있으면서 혜원법사를 위하여 역출하였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담마난제가 역출한 경과 대동소이하다. 혹은 3권이라고도 하는데, 『별록(別錄)』에서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바로 삼법도(三法度)라 하여 논(論)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혹은 경론(經論)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교수비구니법(敎授比丘尼法)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여산에 있으면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5부 118권이다.앞의 4부 117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담승가제바는 중국말로는 중천(衆天)이다. 혹은 제화(提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음(音)이 잘못된 까닭이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도(道)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멀리까지 명철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여 다 암송하였다. 특히 『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을 잘하여 그 섬세한 뜻까지 꿰뚫었다. 그는 언제나 『삼법도론[三法]51)』을 읽으며, 밤낮으로 그 뜻에 감탄하고, 그 의미를 음미하였다. 그것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곳집[府]으로 삼았다. 사람됨이 빼어나고 밝으며, 사물을 보는 통찰력이 뛰어났고,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쓰고,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진(苻秦)의 건원(建元) 연간(343)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서 널리 교화를 펼치며 논(論) 2부를 번역하였다. 『진록(秦錄)』에 모두 다 있다. 뒤에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6년 신묘(辛卯, 391)에 강좌(江左)에서 거닐면서 교화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법사가 묘전(妙典)52)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널리 경장(經藏)을 모으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자리를 마련[側席]해 놓고,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악(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곧 그 해에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 등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승가제바는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梵文)을 손에 들고, 입으로는 진(晋)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화려함은 버리고 실질을 보존하여 그 본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대분이 그 문장이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원년 정유(丁酉, 397)에 건강(建康)으로 오니, 진나라 조정의 왕공(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위군(衛軍) 동정후(東亭候) 낭야(瑯琊) 왕순(王珣)살펴보건대 『고승전』ㆍ『승우록』ㆍ『장방록』 등에는 다 같이 왕순이라 말하였고, 『중아함경』 서문에서는 왕원림(王元琳)이라 하였는데, 원림은 왕순의 자(字)이다은 평소에 믿음과 지혜가 있어 정법(正法)을 지키면서 정사(精舍 : 절이나 사원)를 건립하고 널리 공부하는 무리를 불러들였다. 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여 그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자,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종치(宗致)53)는 이미 극히 섬세하고 오묘[精妙]하였고, 말의 뜻은 명석하여 깊은 뜻까지 떨쳐냈으므로, 온 대중들이 다 함께 기뻐하면서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 해 겨울에 왕순은 의학사문(義學沙門) 석혜지(釋慧持) 등 40여 인을 모집하여 놓고, 다시 승가제바를 청하여 그 절에서 『중아함경』과 『증일아함경』 두 아함(阿含)을 번역하였는데, 계빈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범본(梵本)을 잡고, 승가제바는 진나라 말로 통역하였다. 그 다음 여름에야 비로소 끝마쳤다. 예주(豫州) 사문 도자(道慈)가 붓으로 받아썼고, 오(吳)나라 이보(李寶)와 당화(唐化)가 함께 기록[書]하였다. 승가제바는 여산과 건강의 두 곳에서 5부 118권의 경을 함께 번역해 내었다. 승가제바는 중국과 서융(西戎)54)을 차례로 돌아다녀 풍속을 모두 다 알았으며, 말과 행동은 조용하면서도 기민하였고, 농담[談笑]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와 교화의 명성과 칭찬이 들리지 않는 데가 없었다. 뒤에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5) 가류타가(迦留陁伽) 십이유경(十二遊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강량루지(畺梁婁至)가 번역한 경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가류타가는 중국말로는 시수(時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널리 깨우쳐 주는 방편이 있었으며, 도를 마음속에 품고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7년 임진(壬辰, 392)에 『십이유경』 1부를 번역하였다.
(6) 강도화(康道和) 익의경(益意經) 3권두 번째 번역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주사행(朱士行)의 『한록(漢錄)』에서는 “2권이다”라고 하였고, 번역한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상의 1부 3권은 궐본이다.
사문 강도화는 계덕(戒德)55)에 위의(威儀)가 있었고, 온 중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1년 경신(景申56), 396)에서 『익의경』 1부를 번역하였다.
(7)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60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원래는 50권인데, 뒷사람이 나누어서 60권으로 만든 것이다.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범본을 얻어 와서, 의희(義凞) 14년(418) 3월 10일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해서, 원희(元凞) 2년(420) 6월 10일에 끝마쳤다. 법업(法業)이 받아썼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출생무량문지경(出生無量門持經) 1권혹은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이라고도 한다. 여산(廬山)에서 번역하였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의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따로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을 기재하였는데, 그것은 착오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1권혹은 바로 『여래장경(如來藏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원희 2년(420)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하였다. 축도조의 『진세잡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10권혹은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또한 『승우록』에서도 보인다. 또한 송(宋)나라 때도 나왔다.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혹은 30권으로 되어 있다. 범본은 법현(法顯)이 마갈리국(摩竭提國)에서 가져와서, 의희 12년(416) 11월에 투량사(鬪場寺)57)에서 법현과 함께 역출하였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승우가 법현의 목록에도 기재한 것은 그와 함께 번역한 것에 의거했을 뿐이다. 승기비구계본(僧祇比丘戒本) 1권또한 『마하승기계본(摩訶僧祇戒本)』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도량사에서 번역하였다. 『보창록』에 보인다. 승우가 법현(法顯)의 목록에도 기재한 것은 승우와 법현이 함께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두 군데 모두 기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2권일명 『유가차라부미경(庾伽遮羅浮迷經)』이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이다. 여산(廬山)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부정관경(不淨觀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의 「수행방편」에는 무릇 17품(品)이 있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발원경(文殊師利發願經) 1권혹은 게(偈)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원희 2년(420)에 투장사(鬪場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경의 후기(後記)에 “외국의 사부대중四部衆58)이 예불(禮佛)할 때에 이 경을 많이 외우면서 발원하고 불도를 구한다”라고 하였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송(宋)나라 영초(永初) 2년(421)에 도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여덟 번째의 번역이다. 안세고(安世高)ㆍ지참(支讖)ㆍ지겸(支謙)ㆍ승개(僧鎧) 등이 번역하여 낸 경본과는 동본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 1권또한 바로 『본업경(本業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정행품(淨行品)」이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대주입장록(大周入藏錄)』에는 “경본이 있다”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궐본되었다. 일단 다시 기재하여 둔다. 정육바라밀경(淨六波羅蜜經) 1권『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방편심론(方便心論) 1권법업(法業)과 함께 역출하였다. 『고승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과거인과경(過去因果經) 4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상은 13부 125권이다.『문수사리발원경』 이상 8부 116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신무량수경』 이하 5부 9권은 궐본이다.
사문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부르며, 본래의 성은 석(釋)씨이다.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59)의 후예이다. 조부(祖父) 달마제바(達摩提婆)중국말로는 법천(法天)이다는 일찍이 북천축(北天竺)에 장사하러 갔다가, 그대로 거기에 눌러 앉아 살았다. 아버지 달마수리야(達摩修利耶)중국말로는 법일(法日)이다는 젊어서 일찍 죽었다. 각현은 세 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외로이 살았다. 5년 동안 살다가 어머니마저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종조부(從祖父)60) 구마리(鳩摩利)는 각현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게다가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가엾이 여겨서, 다시 데려와서 도를 닦게 하여 사미가 되게 하였다. 17세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경전을 익히고 암송하였는데, 대중들은 모두 한 달 걸리는 것을 각현은 하루 만에 외워버렸다.
▸ 그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각현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삼십일에 필적할 정도구나.”◂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대부분 통달하였다.
젊어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일찍이 함께 수학했던 승가달다(僧伽達多)와 함께 계빈(罽賓)에 유학하여 같은 장소에서 수년을 보냈다. 승가달다는 비록 각현의 재주와 똑똑함에 감복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에 대해 다 알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각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으므로 승가달다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각현이 대답하였다. “잠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미륵보살님께 예경을 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을 마치자 문득 사라졌다.
이에 승가달다는 각현이 성인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의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 여러 번 각현의 신통한 변화를 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구하여 물은 뒤에야, 비로소 각현이 불환과(不還果 : 阿那含)61)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각현은 언제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고, 두루 각 나라의 풍속을 모두 관찰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서쪽으로 와서 계빈에 이르렀는데, 법과 대중들이 청정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고, 이에 개연(慨然)62)히 동쪽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우리 동료들은 모두 도를 구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으나,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일으킬 인연이 없구나.” 그리고는 곧 계빈국의 대중들에게 물었다. “그 어느 분이 동토(東土)에 교화를 널리 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였다. “불타발타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축국의 나가려성(那呵黎城)에서 출생하여 석가세존의 성과 도학(道學)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미 경론(經論)을 통달하였고, 어려서부터 대선사 불대선(佛大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전부터 계빈에 있었습니다.” 다시 또 지엄에게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불타발타라 그 사람뿐입니다.” 그러자 지엄이 간절히 요청하였고, 각현은 마침내 딱하게 여기며 허락하였다. 이에 대중을 버려두고 스승을 하직한 채 양식을 싸 가지고 동쪽으로 갔다. 걷고 달린 지 3년 동안을 추위와 더위를 연이어 겪었다. 이미 총령(葱嶺)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고, 그 나라의 군주들은 멀리 떠나는 교화자(敎化者)63)를 공경하고, 모두 마음을 기울여 물자를 바쳤다. 교지국(交阯國)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갔다. 배가 한 섬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각현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 선장이 말하였다. “길을 떠난 사람들은 하루의 시간이라도 아낍니다. 순풍을 만나기 어려우므로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2백 리쯤 나아갔으나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불어서 배가 도로 그 섬으로 향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신이(神異)함을 깨닫고, 모두 스승으로 섬겼으며, 배의 진퇴를 그에게 묻곤 하였다. 뒤에 순풍을 만났으므로 동행하던 배들이 모두 출발하였으나, 각현은 말하였다. “움직여서는 안 된다.” 선장은 곧 멈추었다. 그런데 이미 앞서 출발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그 후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선박들을 모두 출발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기꺼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각현이 스스로 일어나서 밧줄을 풀어 배 한 척만 출발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해적들이 쳐들어 와서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탈을 당하였다. 얼마 후에 청주(靑州)의 동래군(東萊郡)에 이르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크게 기뻐하면서 함께 법상(法相)을 논하여,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들어내어 깨달아 얻은 것이 많았다. 그로 인하여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당신의 해석은 보통 사람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구마라집이 답하였다. “저의 나이가 많기 때문이지, 어찌 반드시 강의가 훌륭하다고 칭찬함이겠습니까?” 구마라집은 매양 의심스러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물어서 결정하곤 하였다. 당시 후진(後秦)의 임금 요흥(姚興)은 오로지 경법(經法)에 뜻을 두어서, 3천여 승려에게 공양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승려들이 궁궐에 왕래하면서 성대하게 인사(人事)를 하였으나, 오직 각현만은 선정을 닦으면서 대중과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흣날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제 고향에서 배 다섯 척이 함께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제자는 그 말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렸다. 관중(關中)의 기존 승려들은 모두 각현이 미미한 일을 나타내어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또 각현이 장안에 있으면서 선의 가르침[禪業]을 크게 홍포하자, 사방에서 선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이르렀다. 다만 배움의 감화됨에 깊고 얕음이 있었고, 법을 얻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 경박하고 위선된 무리로 인하여 교활하게 속이는 일도 있었다. 어느 한 제자가 약간의 관행(觀行)64)을 닦고서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아나함(阿那含)65)의 과(果)를 얻었다.” 각현이 아직 가까이하여 조사하고 묻기도 전에 마침내 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서, 대단한 원망과 비방을 받고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각현의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름을 감추고 잠적해 버렸으며, 어떤 이는 야밤에 담을 넘어 달아났으므로 반나절 사이에 대중들이 거의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각현은 평안을 유지하면서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기존의 승려 승략(僧䂮)과 도항(道恒) 등이 각현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당신이 얻은 법을 설하시지 않았는데, 당신이 전에 다섯 척의 배가 온다고 예언한 것은 허황되고 사실이 아닙니다. 또 문도들이 속이고 미혹하게 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은 이미 계율에 위배되므로 도리로 보아 함께 머무를 수 없소. 응당 여기에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떠나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나의 몸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 떠나고 머무는 것이 매우 쉽소. 다만 품고 있는 뜻을 다 펴지 못한 것이 유감이며 그것을 억울하게 여길 뿐이오.”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인과 함께 떠났는데, 그의 정신과 뜻은 차분하고 침착하였으며, 처음과 같이 얼굴빛이 다르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대중들은 모두 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승(僧)ㆍ속(俗)의 전송하는 사람들이 수 천여 명이었다. 요흥(姚興)도 각현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하면서 도항(道恒)에게 말하였다. “불현(佛賢 : 覺賢)사문은 도(道)를 마음에 품고 이곳으로 와서 머물러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선양하고자 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아직 말은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어찌 말 한 마디 허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요흥은 칙명을 내려 각현의 뒤를 급히 뒤따라가게 하였으나, 각현은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진실로 은혜로운 임금의 뜻은 알겠지만, 칙명은 받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문도들을 이끌고 밤에도 길을 걸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악(廬岳) 사문 혜원(慧遠)은 평소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하고 있던 터라, 이에 사람을 보내어 관내로 들어오게 하면서 글을 써서 빌고 청하였다. 뒤에 여악에 이르자, 기뻐하며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이 대하였다. 혜원은 각현이 배척당한 것은 그 잘못이 문인(門人)에게 있으며, 다섯 척의 배를 예언한 것과 같은 것은 단지 그 설(說)이 자기 생각에 있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므로, 계율에 대해서는 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자 담옹(曇邕)을 파견하여 요흥과 관중(關中)의 대중 스님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배척한 사건을 해결하였다. 혜원은 각현에게 여러 편의 선경(禪經 : 선종 관련 경전)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각현은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거처하는 일에 있어 안락을 구하지 않았다. 여산에서는 1년 가량 머물고, 다시 서쪽 강릉(江陵)으로 갔는데, 마침 외국의 선박이 들어왔다. 물어 보니 과연 천축에서 온 다섯 척의 배로, 각현이 예시했던 그대로였다. 그때 온 나라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다투어 와서 예를 올리고 받들어 보시하는 이도 있었으나, 각현은 모두 받지 않았다. 대신 각현은 발우를 들고 탁발을 다니되 귀천을 묻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태위(太尉)로 있던 시절에 장사(長史) 벼슬을 하였는데,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돈(劉敦)을 토벌할 때 수행하여 강릉에 주둔하고 있었다. 각현은 제자 혜관(慧觀)과 함께 원표에게 나아가서 걸식을 하였다. 원표는 평소 불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야박하게 대접하여 미처 배불리 먹지 못하고 물러났다. 원표가 말하였다.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하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단월(檀越 : 시주자)께서 보시하는 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든 음식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원표는 즉시 좌우에게 호령하여 음식을 더 올리게 하였으나, 역시 다 없어져 버렸으므로, 원표는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는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이 어떤 사람이오?” 혜관이 말하였다. “덕행과 도량이 고매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원표는 몹시 탄복하고 기이하게 여기고서 태위(太威)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태위는 청하여 만나보고는 매우 숭앙하고 공경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양함이 빠짐이 없었다. 얼마 후에 태위는 도읍으로 돌아갔다.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각현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진실해 중국의 풍속과는 같지 않았다. 그리고 뜻이 운치가 있고 맑고 원대하여 평소 깊숙한 이치를 지니고 있었다. 양도(楊都)의 법사 승필(僧弼)은 덕망이 높았던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기를 “투량사(鬪場寺)의 선사(禪師)는 매우 위대한 인품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바로 천축국의 왕으로서 어찌 품격이 우아한 사람[風流人]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가 칭송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闐國)에서 『화엄경(華嚴經)』 범본(梵本) 3만 6천의 게(偈)를 얻었으나, 아직 번역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의희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각현을 초청하여 역장(譯匠)66)으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쥐고 사문 법업(法業)ㆍ혜엄(慧嚴) ㆍ혜의(慧義) 등 1백여 명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해 내었다. 문장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한문(漢文)과 범문(梵文)을 회통시켜 신묘하게 경전의 요체를 들어내었다. 그러므로 도량사에서는 아직까지도 화엄당(華嚴堂)이 남아 있다. 또 사문 법현(法顯)은 천축에서 얻은 『승기율(僧祇律)』의 범본을 각현에게 부탁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각현은 안제(安帝) 융안(隆安) 2년 무술(戊戌, 398)로부터 송(宋)나라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에 이르기까지, 양도(楊都)와 여산(廬山)의 두 곳에서 『화엄경』 등 총 13부를 번역하였다. 모두 그 그윽한 이치를 궁구하고, 신묘하게 문장의 뜻을 다 드러냈다. 각현은 송나라 원가(元嘉) 6년(429)에 입적하였다. 춘추는 71세였다.또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다시 각현이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을 번역하여 내고, 곧 『생무량문지경(生無量門持經)』을 번역해 내었다”라고 하였는데, 이 두 경을 다 기재한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두 경은 지겸(支謙)이 먼저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와 구별하기 위하여 신(新)자를 덧붙인 것이다. 또한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과 『본업경(本業經)』이 있는데, 이 두 경은 모두 『화엄경』의 별품(別品)이다. 각현은 이미 대품(大品)을 번역해 내었으므로, 따로 번역하였다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이 경은 그 『본업경』과 동일한 경이다. 주(周)의 『입장록(入藏錄)』에는 아직 그 경본이 보이지 않으므로, 우선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이 한 경만을 두고, 『본업경』은 삭제하여 싣지 아니한다.
(8) 담마(曇摩)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처음 번역되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이며 궐본이다.
사문 담마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법(法)이라 한다. 율학(律學)을 잘 하였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4년 경자(庚子, 400) 3월 2일에 양도(揚都)에서 상서령(尙書令) 왕법도(王法度)의 정사(精舍)에 있을 때, “사문 석승준(釋僧遵) 등의 20여 대덕들이 『잡문율사』를 번역해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이 책 첫머리의 서문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책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물건을 서로 지니는 관계[互相交涉]와 차별 범위[分齊]가 너무도 다르니, 모름지기 잘 지켜야 함을 밝히고 있다.
(9) 비마라차(卑摩羅叉) 십송율비니서(十誦律毗尼序) 3권또한 『십송율서(十誦律序)』라고도 한다. 지금은 『십송률(十誦律)』의 마지막 뒤의 3권에 합하여 들어가 있다. 장방은 『비니송(毗尼誦)』 주(注)에서 “이것이 십송(十誦)이고, 뒤는 선송(善誦)이다”라고 하였는데 틀린 것이다. 그 선송에는 4권이 있으며, 이것은 십송 중의 제10송(誦)이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중율요용(眾律要用)』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5권이다.앞의 『십송율비니서』 3권은 현재 그 책이 있으며, 뒤의 『잡문율사』 2권은 궐본이다.
사문 비마라차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구안(無垢眼)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침착하고 고요하면서 지기[志]가 있었고, 어릴 적에 출가하여 도를 실천하면서 고행(苦行)에 힘썼다. 눈이 푸른 사람이므로, 당시 또한 청안율사(靑眼律師)라 하였다. 먼저 구자국[龜茲]에 있으면서 율장(律藏)을 널리 폈으므로,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鳩摩羅什)도 그 당시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구자국이 멸망하자, 오전(烏纏)으로 몸을 피하였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경장(經藏)을 크게 넓힌다는 말을 듣고, 또 비니(毘尼 : 계율의 총칭)의 수승한 품류[勝品]를 다시 중국에 두루 미치게 하고자, 석장(錫杖)을 짚고 유사(流沙)를 지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요진(姚秦) 홍시(弘始) 8년(406)에 관중(關中)에 도달하자, 구마라집은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고 대하였으며, 또한 서로 멀리서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자, 또 안제(安帝) 의희 연간(405~418)에 관좌(關左)로 나아가 돌아다녔다. 수춘(壽春)에 머물면서 석간사(石澗寺)에 있었는데, 계율을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므로 비니(毗尼)를 널리 퍼지게 하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률(十誦律)』 58권 맨 뒤의 1송(誦)은 수계하는 법[受戒法]과 모든 선을 이루는 법[諸成善法事]을 밝혔으므로, 그 뜻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선송(善誦)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 뒤에 선송을 고쳐서 비니송(毗尼誦)이라 하였는데,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다시 3권의 『율서(律序』를 지어 뒤에다 두게 되었으므로, 총 61권으로 된 것이다.『고승전(高僧傳)』과 『장방록』에서는 “앞의 58권을 펼쳐, 61권이 되었다”고 한 것은 조금 자세히 살피지 못해서이다. 그 『비니서(毗尼序)』 3권은 혹은 근래의 경본에 편성하여 제9송(誦)에 두었고, 뒤의 제10송(誦)은 전권(前卷)의 제55ㆍ56ㆍ57권에 해당한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이제 그 옛 『십송률』을 조사하여 보면 제10송은 후권에 있으며, 제59권으로부터 61권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제 옛 책古本에 의거하여 바르게 한다. 얼마 후에 남쪽 강릉(江陵)으로 나아가 신사(辛寺)에서 하안거[夏坐]하면서 『십송률』을 열어 강의하였고, 이미 중국말을 통하였으므로 잘 이해하며 받아들였다. 이 무위(無爲)의 신묘한 경본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에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구하는 이들이 마치 수풀처럼 모여들어, 조목[條]에 밝고, 금계[禁]를 아는 이의 수효도 역시 많았다. 율장(律藏)이 중국에 크게 넓혀진 것은 이 비마라차의 힘이었다. 뒤에 『잡문율사』 2권을 내었는데,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고승전』에서는 “도량사의 혜관이 종지(宗旨)를 깊이 묶어서, 그 제정한 금계禁를 기록하여 경(輕)ㆍ중(重)으로 2권을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내자, 승니(僧尼)들이 읽고 탐구하며 경쟁적으로 베껴 전하였다. 당시 어리석은 사람들이 공손치 못한 말로 “비마라차의 촌스러운 말을 혜관이 재치 있게 기록하니, 온 장안 사람들이 베껴 쓰느라 종이가 옥(玉)같이 귀해졌다”라고 하였다. 이 『잡문율사』는 곧 도량사의 혜관이 교수를 받으면서 의심이 있으면 그 일에 따라 물었고, 비마라차가 결단하여 준 것을 듣고는 곧 그것을 기록하여 2권으로 만들어 세상에 유행시킨 것이므로, 따로 범본(梵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마라차가 번역하고, 담마(曇摩)가 출간하였다는 것 역시 이 목록을 지은 이들이 착오로 기재한 것이다. 또 비마라차는 덕을 기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시끄러움을 버리고 세속을 여의었다. 그 해 겨울 다시 수춘(壽春)의 석간사(石澗寺)로 돌아왔다가 그 절에서 입적하였으니, 나이는 77세였다.
(10) 석법현(釋法顯)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경(經)의 기록에서는 “『방등대반니원경(方等大般泥洹經)』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번역이다. 의희 12년(416) 10월 1일에 도량사에서 각현(覺賢)과 함께 번역하기 시작하여, 보운(寶雲)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14년(418) 정월 2일에 끝마쳤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초분(初分) 「유행경(遊行經)」의 이역(異譯)이다. 여러 목록에서 모두 “법현이 『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을 번역해 내었다”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곧 앞의 『대반니원경』에 방등(方等)의 글자를 붙인 것이며, 이 경은 소승(小乘)의 열반문(涅槃文)이다. 법현의 번역과 같기 때문에 이 글자를 넣어 구별한 것이다. 잡장경(雜藏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귀문목련아귀보응경(鬼問目連餓鬼報應經)』과 같은 동본(同本)이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기비구니계본(僧祇比丘尼戒本) 1권또한 『비구니바라제목차승기계본(比丘尼波羅提木叉僧祇戒本)』을 각현(覺賢)과 함께 번역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1권또한 『법현전(法顯傳)』이라고도 한다. 법현 자신이 천축을 왕래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지은 것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부진(苻秦)의 승가제바(僧伽提婆)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은 “법현과 각현이 함께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불유천축기(佛遊天竺記) 1권『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7부 26권이다.앞의 5부 12권은 현재에 보인다. 뒤의 2부 14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현은 본래의 성(姓)이 공(龔)씨이며,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은 세 형이 있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차례로 죽었다. 그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하여 법현이 넷 살 되던 해에 바로 출가시켰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집에서 머물렀는데, 병이 위독해져서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찰로 돌려보냈더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으므로, 절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자, 숙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티끌같은 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숙부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서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자,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지만, 장사(葬事)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일찍이 동학(同學) 수십 인과 함께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그때 굶주린 도둑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沙彌)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둑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고 가난하게 지내는데, 지금 다시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아마도 내세(來世)에는 가난이 더욱 심해질까 염려되오. 빈도(貧道)67)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하여 말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고 바로 돌아와 버렸더니, 도둑들은 곡식을 그대로 두고 갔고, 수백 인의 여러 스님들은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大戒]를 받고는 지조와 행실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의궤(儀軌)68)가 바르고 엄숙하였다. 늘 경율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3년(399)에 동학(同學)인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사하(沙河)를 건넜는데,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돌아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와 달을 보면서 동서를 분간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여러 번 뜨거운 바람[熱風]이 불고 악귀(惡鬼 : 악한 귀신)를 만나서, 꼭 죽을 지경이었다. 법현은 모든 걸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에 총령(葱嶺)에 이르렀는데, 총령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고, 악룡(惡龍)이 혹독한 비바람을 토하여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하였으며, 깎아지른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것들을 7백여 군데나 건넜다. 또 조교(弔橋)69)를 건너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씩이나 하였으니, 모두가 한(漢)나라 때 장건(張騫)이나 감부(甘父)도 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는데,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자,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신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다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은 천명(天命)이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혼자 힘으로 나아가,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무릇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리하여 북천축(北天竺)에 이르렀고, 차츰 중천축국(中天竺國)에까지 왔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가 안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는데, 어두워져서 그 절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법현이 기사굴산(耆闍崛山)70)으로 나아가려 하자, 그 절 스님이 충고하였다. “길이 매우 험준하여 고생스러운 데다가 흑사자(黑師子)들이 많아 자주 사람을 잡아먹는데, 무슨 일로 가려고 하는가?”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71)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고, 내쉬는 숨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만, 어찌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여기까지 와서 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스님을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따라온 두 스님은 무서워하여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가 버렸다. 법현만 혼자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며 우뚝이 옛 자취를 생각하고 감상하니,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는 듯하였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흑사자가 와서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염(念)하였다. 그러자 사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를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우면서 말하였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 읽기[誦經]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곧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자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오는데 길이 다하여 완전히 막혀 있고, 덤불이 우거지고 날짐승ㆍ길짐승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다만 한 좁은 길로만 통할 수 있었다. 미처 1리(里) 남짓 가지도 못하였는데,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였고, 용모와 복장은 거칠고 소박하였으나, 정신과 기력[神氣]는 걸출하고 고상하였다. 법현은 비록 그의 운치가 고매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또 한 젊은 도인을 만나게 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늙은 그 노인은 누구입니까?” 젊은 도인이 대답하였다. “두타(頭陁) 제자 대가섭(大迦葉)72)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산 앞까지 갔지만, 돌 하나가 굴 입구를 가로질러 막고 있었으므로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공경을 드리고 나서 떠났다.지금 생각하면 법현이 답사한 곳은 바로 계족산(鷄足山) 대가섭파(大迦葉波)가 입적한 곳이었고, 부처님께서 옛날에 사셨던 취봉산(鷲峰山)이 아니었다. 또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정사(精舍) 안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항상 대중 스님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누구든지 모두 믿으면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사(龍舍)를 짓고 아울러 복식(福食)을 베풀었다. 매번 여름 안거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화(化)하여 한 마리 작은 뱀이 되는데, 양쪽 귀는 모두 흰 빛이었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구리 쟁반에 낙(酪 : 우유)을 담아 그 안에 놓아두고,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문안하듯이 하면, 곧 용으로 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하는데,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中天竺)에 이르렀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巴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고,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ㆍ『잡아비담심연경(雜阿毗曇心綖經)』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이 『방등니원경』은 곧 6권이며,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의 범본(梵本)이다. 경의 후기(後記)에 준하면 『방등대반니원경(方等大般泥洹經)』이라 하였으나, 아니다. 3권이면 『방등니원경』이다. 법현은 그 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워서, 비로소 자신이 직접 글을 베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경상(經像)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지나온 자취를 뒤돌아보니, 오직 자기 혼자뿐이었으므로, 마음속에 늘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서 한 상인(商人)이 진(晋)나라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백단선(白團扇)을 공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애달프고 구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율(彌沙塞律)』ㆍ『장아함경(長阿含經)』ㆍ『잡아함경(雜阿含經)』과 잡장(雜藏)의 경본을 얻었는데,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경들이었다. 그 사자국에는 부처님의 치아[佛齒]가 있었는데, 매년 3월이 되면 그 나라의 왕이 미리 10일 전에 흰 코끼리를 장엄하고, 신분이 높고 말을 잘 하며, 지혜 있는 신하 한 명에게 왕의 의상(衣裳)을 입고, 코끼리 위에 올라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시던 45년 동안에 설법하여 제도한 사람은 한량없는 [億數]데, 중생들의 인연이 다하여 열반에 드신 것이다. 그로부터 1497년 동안 세간에서는 오랫동안 어두워졌으니, 가히 중생들은 불쌍하구나.” 그로부터 10일 후에 부처님 치아를 무외정사(無畏精舍)에서 모시고 나오자, 향과 꽃을 모두 마련하여 저마다 와서 공양하였다. 그때가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凞) 원년(405)이었다. 계산하면 의희 원년 태세(太歲) 을사(乙巳)로부터 지금의 개원(開元) 18년 세차(歲次) 경오(庚午, 730)까지는 곧 1822년이 된다. 이윽고 상인들의 큰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큰 폭풍을 만나 배가 파괴되어 물이 들자,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고 두려워서, 즉시 모은 여러 물건들을 버렸다. 법현은 상인들이 경상(經像)마저 던져 버릴까, 두려워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염하였고, 중국 대중 스님들에게도 귀명(歸命)하게 하였다. 그리고 배를 바람에 맡겨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되지 않았다. 그렇게 90여 일을 가서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달포 만에 한 밤중에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고, 배에 벽락이 쳐서 온 배 안의 사람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을 탔기 때문에 우리들이 낭패(狼狽 :실패)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온 대중을 다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단월(檀越)73)이 성난 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그렇지 아니면 마땅히 죽음을 보게 될 것이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들을 공경하고 있소.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에게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오.” 상인들은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식수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고갈되어, 오직 바람에 내맡긴 채 바다를 떠내려갔다. 뜻밖에 언덕에 다다랐는데, 명아주풀[藜藿菜]74)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은 알았다. 다만 어느 곳인지는 아직 헤아릴 수 없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에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 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 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은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며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 사문이 멀리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경상(經像)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는 법현에게 더 머물며 겨울나기를 청하였지만, 법현이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한 바를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건강(建康)에 이르러 도량사에서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에게 가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등 6부를 번역하고, 『유천축전(遊天竺傳)』 1권도 지었다. 법현은 이미 『대반니원경』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어 유포시켜, 교화하고 함께 보고 듣게 하였다. 성명은 알 수 없는 어떤 한 집이 양도(楊都)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는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1부를 베껴 써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 : 경을 모시는 방)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는데,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이 일어나서, 그의 집에까지 미쳤다. 재물이 모두 타버렸지만, 오직 『대반니원경』 만은 온전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양도(楊都)에 함께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춘추는 86세였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11) 기다밀(祈多蜜)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1권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십주품(十住品)」의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여래삼매경(寶如來三昧經) 2권혹은 1권75)이다. 일명 『무극보삼매경(無極寶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이다. 『무극보경(無極寶經)』과 동본(同本)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지도경(大智度經) 4권다섯 번째 번역이다. 지참(支讖)의 『도행경(道行經)』과 『대반야경(大般若經)』 제4회(會) 등과는 동본이다. 『승우록』과 『축도조록』에 보인다. 보문품경(普門品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법호(法護)의 『보문품(普門品)』과 『보적경(寶積經)』 「문수보문회(文殊普門會)」와는 동본이다. 『승우록』과 『축도조록』에 보인다. 아술달경(阿述達經) 1권『보적경(寶積經)』 「무외덕회(無畏德會)」와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안세고(安世高)의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과 『보적경』 「선주의회(善住意會)」 등과는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축도조의 『진록(晋錄)』에 보인다.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 1권법호(法護)의 『미륵본원경(彌勒本願經)』과 『보적경』 「미륵소문회(彌勒所問會)」와는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지경(十地經) 1권법호(法護)의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유마힐경(維摩詰經) 4권엄불조(嚴佛調)의 『고유마경(古維摩經)』과 같은 동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이다. 장방은 “『남래신록(南來新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소희망경(無所悕望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상액경(象腋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부광경(浮光經) 1권혹은 유광(乳光)이라고 쓰기도 한다. 『독자경(犢子經)』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여래독증자서삼매경(如來獨證自誓三昧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안세고의 『자서삼매경(自誓三昧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현관경(普賢觀經) 1권일명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도혜록(道慧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영락경(瓔珞經) 12권일명 『현전보경(現前報經)』이라고도 한다. 축불념(竺佛念)의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과는 동본이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은 “『남래신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조명삼매경(照明三昧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선경(禪經) 4권장방은 “『남래신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법몰진경(法沒盡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정재경(菩薩正齋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위혁장자육향배경(威革長者六向拜經) 1권혹은 위화(威華)라고 쓰기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지만경(指鬘經) 1권혹은 지계(指髻)라고 쓰기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소욕치환경(所欲致患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오개의결실행경(五盖疑結失行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분위경(分衛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23부 45권이다.처음의 2부 3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대지도경(大智度經)』 이하의 21부 42권은 궐본이다.
사문 기다밀은 혹은 기밀다(祇蜜多)라고도 하며, 중국말로는 가우(謌友)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식견과 성품이 화통하고 민첩하며, 총명함과 활달함이 크고도 넓었다. 또 널리 교화하는 일에 뜻을 두고, 멀리 돌아다님에 꺼림이 없었다. 진(晋)나라 때(265~316)에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등 2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는 모두 “기다밀은 진나라 때에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그가 어느 황제 대(代)에 번역하였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만일 함락(咸洛)이 아니었으면, 이는 강남(江南)의 일부였을 것이다.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장방(長房)은 “그 이외에도 모두 『잡별제록(雜別諸錄)』에 나타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보시녀경(寶施女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과 『마조왕경(摩調王經)』『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이 있으나, 이미 이 경들은 따로 파생된[別生] 경이므로,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12) 축난제(竺難提)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 3권원희(元凞) 2년(420)에 번역하였다. 세 번째로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축법호(竺法護)의 『대선권경(大善權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38회(會)에 해당한다.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陁羅尼呪經) 1권또한 바로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위혁장자육향배경(威革長者六向拜經) 1권진(晋)ㆍ송(宋) 연간에 광주(廣州)에서 번역되었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시흥록(始興錄)』과 『보창록(寶唱錄)』에서 보인다. 이상은 3부 5권이다.앞의 2부 4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거사(居士) 축난제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희(喜)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도(道)에 뜻을 두어 게으름이 없었고, 실천이 원대하면서 능히 편안하였다. 깊은 이치까지 깨달아 알았으며, 이에 말은 진(晋)나라의 속담[俗]까지 훤하게 통하였다. 공제(恭帝) 원희 원년 기미(己未, 419)에서 송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 등의 3부를 번역하였다.
(13) 축법력(竺法力) 무량수지진등정각경(無量壽至眞等正覺經) 1권일명 『낙불토락경(樂佛土樂經)』, 또는 『극락불토경(極樂佛土經)』이라고도 한다. 일곱 번째의 번역이다. 『정도록(正度錄)』에 보인다. 세고(世高)ㆍ지참(支讖)ㆍ지겸(支謙)ㆍ승개(僧鎧)ㆍ백연(白延)ㆍ법호(法護) 등의 번역한 경본과는 동본이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축법력은 서역 사람이다. 업행(業行)이 맑으면서 고상하고, 지혜와 도[智道]가 높고 우뚝하였다. 중국말에 잘 통하여서, 경의 미미한 데까지 신묘하게 설명하였다. 공제 원희 원년 기미(己未, 419) 2월에 『무량수지진등정각경』 1부를 번역하였다.
(14) 석숭공(釋嵩公) 일난경(日難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이 경은 『월난경(越難經)』인데, 마지막에 설한 것이 조금 다르다. 『조록(趙錄)』과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평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 1권또한 『불사왕경(弗沙王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이다. 『조록』과 『시흥록』에 보인다. 가섭결집계경(迦葉結集戒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조록』과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숭공은 혹은 고공(高公)이라고도 한다. 진(晋)나라 말엽에 『일난경』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서 진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15) 석퇴공(釋退公)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 1권일명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 또는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석퇴공은 『가섭금계경』 1부를 번역하였다. 진(晋)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16) 석법용(釋法勇) 불개해범지아발경(佛開解梵志阿颰經) 1권『장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조록(趙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용은 『범지아발경』 1부를 번역하였다. 진(晋)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역시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17)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2권혹은 『나선경(那先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 보인다. 현성집(賢聖集)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다라니장구경(陁羅尼章句經) 1권승우는 “장(章)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승우의 『실역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이다.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대승경(大乘經)인데 궐본이다. 이상은 2부 3권이다. 『장방록(長房錄)』 등의 동진(東晋)의 실역(失譯)은 총 53부 57권이다. 이제 제외한 2부 3권 외 나머지 51부 54권도 다 같이 『장방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혹은 후한(後漢)의 『실역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는 것과 번역한 사람[譯人]이 있는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 등은 아래에 자세하게 나열해 둔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삼세삼천불명경(三世三千佛名經)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오십삼불명경(五十三佛名經) 팔부불명경(八部佛名經)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 칭양백천불명경(稱揚百千佛名經) 남방불명경(南方佛名經) 멸죄득복불명경(滅罪得福佛名經) 비구제금율경(比丘諸禁律經) 마하승기율비구요집우바리문불경(摩訶僧祇律比丘要集優波離問佛經) 사미위의비구니십계경(沙彌威儀比丘尼十戒經) 수십선계경(受十善戒經) 사미니계경(沙彌尼戒經) 현자오계경(賢者五戒經) 우바새위의경(優婆塞威儀經) 파야득경(波若得經) 관세루탄경(觀世樓炭經) 반주삼매염불장경(般舟三昧念佛章經) 유가삼마사경(庾伽三摩斯經) 선요가욕경(禪要呵欲經) 칠불소결마유술주(七佛所結麻油述呪) 왕룡주독경(王龍呪毒經) 우치주(齲齒呪) 칠불안택신주(七佛安宅神呪) 안택주(安宅呪)이상의 29부 29권은 후한(後漢)의 『실역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으나, 여기에 다시 기재한 것은 중요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삼귀오계대패호신주경(三歸五戒帶佩護身呪經) 칠만이천신왕호비구주경(七萬二千神王護比丘呪經) 십이만신왕호비구니주경(十二萬神王護比丘尼呪經) 백결신왕호신주경(百結神王護身呪經) 궁택신왕수진좌우경(宮宅神王守鎭左右經) 총묘인연사방신주경(塚墓因緣四方神呪經) 복마봉인대신주경(伏魔封印大神呪經) 마니라단대신주경(魔尼羅亶大神呪經) 소오방룡섭역독신주경(召五方龍攝疫毒神呪經) 범천신책경(梵天神策經) 보광경(普廣經)이상 11부 11권은 모두 백시리밀다라(白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대관정경(大灌頂經)』 제1권에서부터 제11권까지이다. 유교삼매경(遺敎三昧經) 2권혹은 『유교삼매법률경(遺敎三昧法律經)』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의 법거(法炬) 번역이다. 『위록(僞錄)』에도 역시 기재되어 있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송나라 지엄(智嚴)의 번역이다. 『위록(僞錄)』에도 역시 기재되어 있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혹은 바로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고도 한다. 이미 일찍이 두 번 번역되었는데, 한 경본은 있고, 한 경본은 궐본이다. 선정방편차제법경(禪定方便次第法經)후한(後漢) 안세고(安世高)의 번역이다. 칠불신주(七佛神呪)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현자오복경(賢者五福經)서진(西晋) 백법조(白法祖)의 번역이다. 마니라단신왕주안마경(摩尼羅亶神王呪案摩經)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다. 축담무란(竺曇無蘭)의 번역이다.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송나라 구나발타라의 번역이다. 우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송나라 저거경성(沮渠京聲)의 번역이다. 삼귀오계신왕명경(三歸五戒神王名經)『관정경(灌頂經)』에서 간추려서 뽑은 경(抄經)이다. 정의삼매경(定意三昧經)『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에서 나왔다. 이하는 새로 이 목록에 덧붙인다. 결정비니경(決定毗尼經) 1권일명 『파괴일체심식경(破壞一切心識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 「우바리회(優波離會)」와는 동본인데, 번역이 다르다. 승우는 “여러 목록에서 모두 돈황(燉煌)에서 번역되었다 하였으나, 나타나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역인전(譯人傳)』에는 “진(晋)나라 때에 나왔으나, 어느 황제 때에 나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도간경(稻芉經) 1권『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과 같은 동본이다. 조립형상복보경(造立形像福報經) 1권『작불형상경(作佛形像經)』과 동본이다. 보은봉분경(報恩奉盆經) 1권『우란분경(盂蘭盆經)』과 동본이다. 사자분신보살소문경(師子奮迅菩薩所問經) 1권 화취다라니주경(華聚陁羅尼呪經) 1권이상 두 경은 동본인데, 번역을 다르게 하여 나왔다. 육자주왕경(六字呪王經) 1권『육자신주왕경(六字神呪王經)』과 동본이다. 선법방편다라니경(善法方便陁羅尼經) 1권 금강비밀선문다라니경(金剛秘密善門陁羅尼經) 1권이상의 두 경은 동본인데 번역을 다르게 하여 나왔다.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 3권 칠불소설신주경(七佛所說神呪經) 4권첫 권에는 『칠불십일보살설대다라니신주경(七佛十一菩薩說大陁羅尼神呪經)』이라 하였다. 살라국경(薩羅國經) 1권혹은 『살라국왕경(薩羅國王經)』이라고도 한다. 반니원경(般泥洹經) 2권혹은 『니원경(泥洹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장아함경』 초분(初分) 『유행경(遊行經)』의 이역이다. 여러 장록(藏錄)속에 1권이라 한 것은 오직 이 상권(上卷)을 말한 것이며, 하권(下卷)이 빠졌다. 연본치경(緣本致經) 1권『중아함경』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고래세시경(古來世時經) 1권『중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범지계수정경(梵志計水淨經) 1권『중아함경』 제2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삼귀오계자심염리공덕경(三歸五戒慈心厭離功德經) 1권『중아함경』 제39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전유경(箭喩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식시획오복보경(食施獲五福報經) 1권일명 『시색력경(施色力經)』ㆍ『복덕경(福德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24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만원자경(滿願子經) 1권승우의 『실역록』에 진(晋)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편입시켰다. 『잡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마등녀해형중육사경(摩鄧女解形中六事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마등가사두간경(摩登伽舍頭諫經)』과 같은 동본이다. 아귀보응경(餓鬼報應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목련설지옥아귀인연경(目連說地獄餓鬼因緣經)』이라고도 한다.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과 같은 동본이다. 득도제등석장경(得道梯橙錫杖經) 1권표제에는 “『득도제등경(得道梯橙經)』 「석장품(錫杖品)」 제12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바로 『석장경(錫杖經)』이라고도 한다. 승호경(僧護經) 1권혹은 『승호인연경(僧護因緣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인연승호경(因緣僧護經)』이라고도 한다. 호정경(護淨經) 1권 목환자경(木槵子經) 1권혹은 환(患)자를 쓰기도 하고, 또는 이 환(檈)자를 쓰기도 한다. 무상처경(無上處經) 1권 노지장자인연경(盧志長者因緣經) 1권 오왕경(五王經) 1권 사미십계법병위의(沙彌十戒法幷威儀) 1권또한 『사미위의계본(沙彌威儀戒本)』이라고도 한다. 사미니이계문(沙彌尼離戒文) 1권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 1권 오백문사경(五百問事經) 1권 아육왕비유경(阿育王譬喩經) 1권표제에서는 “『천존설아육왕비유경(天尊說阿育王譬喩經)』이다”라고 하였다. 『고경록(古經錄)』에서는 “부처님을 천존(天尊)이다”라고 불렀으므로 곧 불설(佛說)과 같은 말이다. 찬집삼장급잡장전(撰集三藏及雜藏傳) 1권또한 『찬삼장경급잡장경(撰三藏經及雜藏經)』이라고도 한다. 미륵작불시사경(彌勒作佛時事經) 1권『승우록』에는 사(事)자가 없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과 같은 동본이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도수삼매경(道樹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사아매경(私阿昧經)』과 동본이다. 『지민도록(支敏度錄)』에 보인다. 이상은 38부 45권이다.마지막의 2부 3권은 궐본이고, 그 밖의 모두는 다 같이 현재 경본이 있다.
앞의 36부 42권은 다 같이 『입장록(入藏錄)』에 보이는 경본인데, 그 번역한 사람[譯主]을 알지 못한다. 모든 『실역록(失譯錄)』에서는 “궐본이다”라고 하였으나,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시일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진(晋)나라 말기(末期)에 편집하였으니, 빼거나 없어지[遺漏]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앞의 구실역경(舊失譯經) 2부 3권까지 합하면 총 40부 48권인데, 이는 모두 동진(東晋)의 실원(失源)이라 할 것이다.
6) 전진(前秦) 시대 부진(苻秦)의 부(苻)씨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또한 전진(前秦)이라고도 한다. 부건(苻健)시호(諡號)는 명제(明帝)이다 황시(皇始) 원년 신해(辛亥, 351)로부터 부등(符登)시호가 없다 태초(太初) 9년 갑오(甲午, 394)에 이르기까지, 무릇 5군주(君主) 44년을 지나는 동안에 사문 6인이 번역한 경(經)ㆍ율(律)ㆍ논(論) 등은 총 15부 도합 197권이다. 그 중에서 7부 65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8부 132권은 궐본이다. 장방(長房)은 황시(皇始) 원년 갑인(甲寅, 354)으로부터 연초(延初) 원년 정유(丁酉, 397)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쓴 연력(年曆)이 같지 않고, 2년씩의 차이가 있다. 그 후 안공(安公)의 『증일아함경』 서문에 준하여 그 갑자(甲子)을 헤아려보면, 『장방록』의 착오다.
(1) 담마지(曇摩持)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혹은 『십송대비구계(十誦大比丘戒)』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비구니대계(比丘尼大戒) 1권또한 『십송비구니계(十誦比丘尼戒)』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교수비구니이세단문(敎授比丘尼二歲壇文) 1권혹은 니(尼)자가 없기도 하다. 승순(僧純)이 구자국(龜茲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어와 축불념(竺佛念)이 말을 통역하고, 혜상(慧常)이 받아썼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담마지는 혹은 시(侍)라고 하였는데, 중국말로는 법혜(法慧) 또는 법해(法海)라고도 한다. 서역 사람이다. 율장(律藏)을 잘 지녔어, 계경(契經)76)의 미묘한 곳까지 알았다. 부견(苻堅)시호(諡號)는 장렬천왕(莊烈天王)이다. 건원(建元) 3년 정묘(丁卯, 367)로부터 4년 무진(戊辰, 368)에 이르기까지 장안(長安)에서 『십송비구계본』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축불념(竺佛念)이 말을 통역하고, 혜상(慧常)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의 『승계(僧戒)』 서문에는 “축불념이 그 범문을 베끼고, 도현(道賢)이 말을 통역하였으며, 혜상이 받아썼다”라고 하였다. 그 『비구니계(比丘尼戒)』는 『승우록(僧祐錄)』에는 “진(晋)나라 간문제(簡文帝, 371~372) 때에 사문 승순(僧純)이 서역 구이국(拘夷國)에서 범본을 얻어 관중(關中)으로 와서 축불념과 담마지와 혜상으로 하여금 함께 번역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가 『장방록』 등의 목록을 살펴보면, 모두 혜상을 그 번역한 이譯主로 삼았고, 담마지와 축불념은 함께 도와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진나라 승려秦僧 혜상(慧常)은 원래 천축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며, 혜상이 비록 함께 번역해 내었다 하더라도, 『비구니계(比丘尼戒)』의 범본을 잡은 이는 바로 담마지요, 축불념은 번역할 말을 전한 사람이며, 혜상은 붓으로 받아 쓴 것이다. 그 승계(僧戒)와는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면, 이것은 별도의 표제(標題)로 되어 있다. 혜상은 본말(本末)의 일을 여러 번 생각하여 교정한 것이므로 분명히 혜상은 번역을 도왔던 사람이요, 담마지가 번역한 주(主)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재한 것이다. 담마지의 기록에는 혜상을 따로 거론하지도 않았다.
(2)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 사아함모초해(四阿含暮抄解) 2권또한 『사아함모초경(四阿含暮抄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구마라불제는 중국말로는 동각(童覺)이라 한다. 서역 사람이다.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18년 임오(壬午, 382) 8월에 업사(鄴寺)에서 『사아함모초해』 1부를 번역하였는데, 그해 겨울 11월에 끝마쳤다. 구마라불제가 범본(梵本)을 잡고 축불념(竺佛念)ㆍ축불호(竺佛護)가 중국[秦] 말로 통역하였으며, 사문 승도(僧導)ㆍ승예(僧叡)ㆍ담구(曇究)가 받아썼다.
(3) 승가발징(僧伽跋澄) 존바수밀보살소집론(尊婆須蜜菩薩所集論) 10권혹은 『바수밀경(婆須蜜經)』이라고도 하는데, 혹은 12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建元) 20년(384) 3월 5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7월 13일에 끝마쳤다. 승가발징과 담마난제(曇摩難提)와 승가제바(僧伽提婆) 3인이 범본을 잡고, 축불념이 통역하여 전하였으며,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비바사론(鞞婆沙論) 14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비바사아비담(鞞婆沙阿毗曇)』, 또는 『광설(廣說)』이라고도 한다. 혹은 15권, 또는 19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19년(383) 4월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8월 말에 끝마쳤다. 담마난제가 범문을 기록하고,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여 전하였으며, 민지(敏智)가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승가라찰소집경(僧伽羅刹所集經) 3권혹은 『승가라찰집(僧伽羅刹集)』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20년(384)에 시작하여 11월 30일에 마쳤다. 축불념이 번역의 말을 전하고,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승우록』에서 보인다. 장안(長安) 석양사(石羊寺)에서 번역하였다. 또한 불호(佛護)가 번역의 말을 전하였다고도 한다. 이상은 3부 27권이다.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승가발징은 혹은 발등(跋橙)이라고도 하며, 중국말로는 중현(衆現)이라고도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의지가 강하고 굳세[毅然]면서도 깊고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이름난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닦고 익혀 자세하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여러 전적(典籍)을 널리 보았고, 특히 여러 경전을 잘 암송하였으며, 『비바사론(毗婆沙論)』은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비바사론(毗婆沙論)』은 곧 『비바사론(鞞婆沙論)』이니, 이는 『대비바사론(大毗婆沙論)』이 아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뜻을 품고, 풍속을 관찰하며 널리 교화하였다. 부견의 건원(建元) 말엽(384)에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유포되지 못하였고, 선수(禪數)의 학문이 매우 성하였는데, 그가 장안(長安)에 이르게 되자, 모두가 그를 법장(法匠)77)이라 일컬었다. 부견의 비서랑(秘書郎) 조정(趙政)은 자(字)는 문업(文業)이었다. 그는 학식이 넓고 재주가 있으면서 불교의 큰 법을 숭앙하였다. 일찍이 외국에서는 『비바사론』을 존숭하여 익히며, 승가발징이 이를 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4사(四事)78)로써 예배 공양하면서 범문(梵文)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승가발징은 건원 17년 신사(辛巳, 381)로부터 21년 을유(乙酉, 385)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덕망이 있는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존바수밀보살소집론』 등 3부를 번역하였는데,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과 외국 사문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여 전하였고, 사문 민지(敏智)ㆍ혜숭(慧嵩)과 비서랑 조문업(趙文業)이 받아썼다. 안공(安公)과 법화(法和)가 마주하여 함께 교정하였다. 승가발징은 계덕(戒德 : 계를 지니는 공덕)이 바르고 높았으며,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났다. 관중(關中)의 승려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고 본받았다. 그 후에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불도라찰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덕업(德業)이 순수하고, 경전을 두루 보아 해박하였으며, 오랫동안 중국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중국말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가 범문(梵文)을 널리 번역하였으므로 그때 세상에서 크게 칭찬 받았다.『승우록』 등의 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비바사론(鞞婆沙論)』을 승가제바(僧伽提婆)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안공이 지은 논의 서문을 준하면, “승가발징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그 논의 서문에 의거해 바로 잡는다. 『승우록』 등의 여러 목록에서는 다시 “승가발징은 『잡아비담비바사론(雜阿毗曇毗婆沙論)』 14권을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비바사론(鞞婆沙論)』이 이것이다.
(4) 담마비(曇摩蜱) 마하반야바라밀초경(摩訶般若波羅蜜鈔經) 5권혹은 초(鈔)자가 없기도 한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반라야(般羅若)』, 또는 『수보리품(須菩提品)』, 또는 『장안품(長安品)』이라고도 한다. 차례대로 여섯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도행소품명도경(道行小品明度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예(僧叡)의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5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비는 중국말로는 법애(法愛)라고 한다. 인도 사람이다. 인물됨이 밝고 민첩하며, 중생을 널리 깨우쳐 주는 일에 뜻을 두었다. 부견(苻堅) 건원(建元) 18년 임오(壬午, 382)에 『마하반야바라밀초경』 1부를 번역하였다. 불호(佛護)불호는 곧 불도라찰(佛度羅刹)이다가 번역하여 전하고, 혜진(慧進)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안공(安公)이 교정하였다. 『공전(共傳)』에는 “『대품방광광찬(大品放光光讚)』과 같은 경본이다”라고 한 것은 의혹이 있을까 두려워 찾아보아도 자세하지 않다.
(5) 승가제바(僧伽提婆) 아비담팔건도론(阿毗曇八揵度論) 30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한다. 또는 20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가전연아비담(迦旃延阿毗曇)』, 또는 『아비담경팔건도(阿毗曇經八揵度)』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발지론(發智論)』과는 동본이다. 건원 19년(383) 4월 20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10월 20일에 끝마쳤다. 『승우록』에 보인다. 아비담심(阿毗曇心) 16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3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말년(384)에 낙양(洛陽)에서 번역되었다. 승예의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46권이다.앞의 1부 30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6권은 궐본이다.
사문 승가제바혹은 제화(提和), 또는 (僧迦楴婆)라고도 하는데, 대개 이 말들은 범어의 음을 중국 음으로 말했을 뿐이다는 중국말로는 중천(衆天)이라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성(姓)은 구담(瞿曇)씨이다. 부견 건원(建元) 19년 계미(癸未, 383)에 장안(長安)에 왔다. 사문 법화(法和)가 청하여 번역을 하게 하였다. 19년(383)에서부터 건원 말년(384)에 이르기까지 『아비담팔건도론』 2부를 번역하여 내었다.그의 『비바사론(鞞婆沙論)』 14권은 안공(安公)의 서문에 준거하면, 이 논은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번역한 것이므로, 이제 여기에서는 삭제한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여 전하고, 혜력(慧力)과 승무(僧茂)가 붓으로 받아썼으며, 법화(法和)가 그 뜻을 정리하였고, 안공(安公)이 서문을 지었다. 뒷날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6년(391)에 여산(廬山)에서 있다가, 건강(建康)으로 가서 다시 경론(經論)을 번역하였다. 그 자세한 것은 『진록(晋錄)』에 나타난 바와 같다.
(6) 담마난제(曇摩難提) 중아함경(中阿鋡經) 59권건원(建元) 20년(384)에 나왔다. 이는 맨 첫 번째의 번역이다. 축불념(竺佛念)이 받아썼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增壹阿鋡經) 50권첫 번째의 번역이다. 건원 20년(384) 갑신(甲申) 여름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389) 봄까지 40권을 마쳤다. 축불념이 번역하여 전하고, 담숭(曇嵩)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이 지은 경의 서문에서는 “『승예록(僧叡錄)』ㆍ『승우록(僧祐錄)』ㆍ『보창록(寶唱錄)』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고 한 것이 보인다. 승우가 “33권 및 24권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착오일 것이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삼법도(三法度)』라고도 하며,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진(晋)나라 때의 승가제바(僧伽提婆)가 번역하여 낸 것과는 조금 다르다. 『장방록』에 보인다. 승가라찰집(僧伽羅刹集) 2권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700년 뒤에 승가라찰(僧伽羅刹)이 지었는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의 건초(建初) 6년 신묘(辛卯, 391)에 안정성(安定城)에서 상서령(尙書令) 요민(姚旻)을 위하여 2월 18일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25일에 마쳤다.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여 전하고, 겸하여 서문도 지었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이 경은 마땅히 후진(後秦)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다수의 의견에 따라 여기에 덧붙인다. 이상은 5부 114권이다.앞의 4부 113권은 궐본이고, 뒤의 1부 1권만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난제는 중국말로는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도거륵국(兜佉勒國) 사람이다. 어려서 세속을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가 일찍 갖추어졌다. 경전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일하고 정밀하게 공부하고, 삼장(三藏)을 두루 보았다. 『중아함경』과 『증일아함경』 두 아함을 암송하였으며,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정리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추앙하고 탄복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보았고,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홍법(弘法)의 근본 요체는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한다.” 그 때문에 멀리 유사(流沙)79)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와서, 부견의 건원 20년(384)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학업이 이미 뛰어났고 도에 대한 명성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부견은 깊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면서 후하게 공양을 베풀었다. 이보다 앞서 중국에는 여러 경 중에 아직 4아함(四阿含)이 없었는데, 부견의 시신(侍臣)인 무위태수(武威太守) 조정(趙政)이 깊이 법장(法藏)에 뜻을 두어, 이에 안공(安公)과 함께 경을 번역하여 낼 것을 청하였다. 조정은 장안성(長安城) 안에서 의학승(義學僧)들을 모아 두 아함의 범본(梵本)을 베껴내고서야, 비로소 번역을 시작하였다. 축불념이 번역하여 전하고,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담마난제는 부견 건원 20년 갑신(甲申, 384)으로부터 요장(姚萇) 건초(建初) 6년 신묘(辛卯, 391)에 이르기까지 『중아함경(中阿含經)』 등 5부를 번역하였다. 담마난제는 그 후에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생을 마친 곳은 알 수 없다.
------------------ 43) 주(周) 태왕(太王)의 아들 구오(句吳)를 가리킨다. 44) 탁월하고 맑게 환하다는 뜻이다 45) 여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46) 깨닫음을 향해 용맹 정진하는 모습을 말한다. 47)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도 한다. 48) 생사의 경지를 벗어나 피안에 도달하여 크게 깨닫는 일이다. 구경(究竟)ㆍ도피안(到彼岸) 또는, 단순히 도(度)라고도 풀이한다.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한다. 49) 과거칠불(過去七佛)중 4번째 부처님으로, 현재 현겁(賢劫)나타난 부처님이다. 50) 과거칠불(過去七佛)중 5번째 부처님으로, 현재 현겁(賢劫)나타난 부처님이다. 51) 바소발다(婆素跋陀, Vasubhadra)가 지은 책인데, 동진(東晋) 시대(391)에 승가제바(僧伽提婆) 번역한 4아함의 의의를 3진도(眞度)의 체계로 분류하여 해석하고 있다. 52) 원묘(圓妙)한 경전이라는 뜻으로 『법화경』을 말한다. 53) 한 종파의 핵심적 교의를 뜻하면, 종지(宗旨)와 같은 뜻이다. 54) 중국 서쪽에 살던 이민족을 말한다. 55) 계를 지키는 공덕을 뜻한다. 56) ‘경신(景申)’은 ‘경신(庚申)’과 같은 말이다. 원본의 한자를 그대로 쓴다. 57) 투량사(鬪場寺)가 바로 도량사(道場寺)이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에 의거해 양주(楊州) 투량사(鬪場寺)로 기록하는 것이 옳다. 58)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또는 비구ㆍ비구니ㆍ사미ㆍ사미니를 말한다. 59) 인도 가비라국의 왕으로, 정반왕의 아우이다. 60) 할아버지의 형제를 말한다. 61) 범어로는 anāgāmin하며, 아나함(阿那含)은 음역이다. 성문(聲聞) 4과 중의 제3번째이며, 욕계(欲界)에서 죽어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에 나고는 번뇌가 없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62) 억울하거나 의분으로 몹시 분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63)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는 사람을 말한다. 64) 관(觀)은 바르게 아는 것이며, 행(行)은 인(因)과 과(果)에 두루 통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을 관하고 실천하는 수행을 뜻한다. 65) 앞의 불환과(不還果)와 같다. 66) 번역하는 사람의 우두머리, 즉 대장을 뜻한다. 67) 덕(德)이 적다는 뜻으로, 중이나 도사(道士)가 자신을 일컫는 겸칭이다 68) 밀교(密敎)에서 염송(念誦)ㆍ공양(供養)의 의식에 대한 규칙을 뜻한다. 69) 양 둔덕에 줄 따위를 건너 지르고 거기에 매단 다리인데, 懸橋(현교)을 말한다.. 70)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솟아 있고, 석존이 설법하던 곳으로 이름난 산이다. 71) 기사굴산(耆闍崛山)의 번역이다. 72) 부처님의 10대 제자인데,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항상 적은 것에도 만족하며 몸과 마음을 수행(修行)하는 데 제일인 제자(弟子)로 두타제일(頭陀第一)이 일컫는다. 73) 시주(施主)자, 즉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74) 비름과의 한해살이 풀이다 75) 『고려대장경』에는 ‘2권(二卷)’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맞지 않다. 『신수대장경』에 따라 ‘1권(一卷)’으로 번역하였다. 76) 위로는 진리에,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부합하다는 뜻으로, ‘불경’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77) 법문(法門)의 장인(匠人)으로 학덕을 갖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78) 공양하는 네 가지. 즉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湯藥)이나,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소향(燒香)니나,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소향. 등을 말한다. 79) 몽고의 큰 사막을 말한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entrance-to-the-city-of-pompeii-with-the-existing-factories-outside-the-door
Artist: Giovanni-Battista-Piranesi
Giovanni Battista (also Giambattista) Piranesi ( 4 October 1720 – 9 November 1778) 이탈리아 예술가로 피라네시 (Piranesi)는 베니스 공화국의 일부인 트레비조 (Treviso ) 근처의 모글리아노 베네토 (Mogliano Veneto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 Andrea는 그를 라틴어 와 고대 문명에 소개했으며 나중에 삼촌 마테오 루체시 (Matteo Lucchesi)의 견습생이 되어, 역사적인 건축물을 설계하고 복원하는 Magistrato delle Acque 의 수석 건축가였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Battista_Piranesi Title : entrance-to-the-city-of-pompeii-with-the-existing-factories-outside-the-door Info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_semperflorens_1
Description Français : Begonia semperflorens Date 15 September 2012, 15:21:07 Source Own work Author Dinkum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mtrak_California_Zephyr_Green_River_-_Floy,_Utah
Deutsch: Von Amtrak betriebener nach Westen verkehrender California Zephyr vor den "Book Cliffs", zwischen Green River und Floy, Utah. Der Zug wird von zwei General Electric P42DC gezogen.
English: Westbound California Zephyr, operated by Amtrak, in front of the Book Cliffs, between Green River and Floy, Utah, USA. The train is hauled by two General Electric P42DC locomotives.
Français : Le California Zephyr, un train de voyageurs américain de la compagnie Amtrak, passe devant les Book Cliffs, entre la rivière Green et Floy, en Utah (États-Unis). le train est tracté par deux locomotives General Electric P42DC.
Date 14 June 2010
Source Own work: https://www.bahnbilder.ch/picture/6533
Author Kabelleger / David Gubler (https://www.bahnbilder.ch)
Camera location 38° 57′ 22.11″ N, 109° 59′ 32.63″ W Heading=90° Kartographer map based on OpenStreetMap. View this and other nearby images on: OpenStreetMap - Google Earth 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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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is ,Portugal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올려지는 노래를 반복해 듣다보니, 환청이 들리는 듯 하다. 노래를 반복해 들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경전에서 이런 말이 있다. 한번 생사시마다 2 리터의 피를 흘린다고 하자. 지금까지 생사를 거칠 동안 흘린 피를 모두 모은다고 하자. 이것이 많겠는가, 바다의 양이 많겠는가. 이런 질문을 부처님이 하신다. 결론은 바다 양보다 더 많다고 한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바다는 유한하다. 그런데 생사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매순간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사실 자신의 본 정체가 아니다. 그런데 매순간 이런 내용을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하는 기제가 있다. 표면에서 이렇게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데에는 일정한 근본 정신의 구조와 기제가 작용한다. 이런 정신구조와 기제를 '[ ]/' 이렇게 일단 표시해보자. '[ ] 안에 매번 스스로 자신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담긴다. 그것을 죽 이으면 이번 생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겼떤 내용들이 나열되게 된다.
[ 1]/ [ 2]/ [ 3]/ [ 4]/ .. [ 9]/
이런 형태로 매순간 임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1,2,3,4....9 를 자신의 모습들로 여긴다. 예를 들어 노인이 된 어떤 이는 갓난아이때 모습1 - 어릴 때 모습2 - 소년일 때 모습3 - 장년일 때 모습4 - 노년이 된 모습9 이런 내용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 다름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위와 같은 관계로 매 순간 얻어진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얻게 한 [ ]/ 정신 구조와 기제는 이런 내용과 관계없이 무량겁에 걸쳐 이어진다. 이는 수학에서 무한을 증명하는 방식과 사정이 같다. 생전 생후의 과정에서 이 관계가 달라질 사정이 없다. 그런 상태로 무한히 이어진다. 그런 사정 때문에 일일히 바다물 양과 비교하지 않아도 쉽게 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그간 관자재 연구원의 부단한 개입으로 숙왕화님과 다음 생에도 남매관계로 지내게 될 듯 하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영국에서 경전의 번역사업도 하고 또 과학적으로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방안을 연구할 생각이다.
사실 대부분 부처님 가르침은 현실 한 단면을 붙잡고 살피면 모두 과학적으로 살필 수 있다.
별이 가짜 별임을 깨닫고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늘날 누구나 별이나 달을 보고 그것이 가짜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연구가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꾸준히 연구를 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본인이 연구하는 연구실이 싸구려 값싼 동네에 위치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듯한 소리를 노래에서 듣게 된다.
그리고 다시 파산상태를 대표하는 연구원을 거론한다. 그리고 복 성취를 바란다라고 끝맺는다. 좋은 말인 듯 하지만, 이런 말들을 노래에서 듣게 되니 우울해진다.
원래 경전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무량한 복덕을 쌓아도 곧 무량한 겁에 걸쳐 다 소진되게 된다. 그래서 꾸준히 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현실 예금 잔고와 사정이 같다.
한편, 그런 사정으로 하루에 보시하지 않고 식사를 하지 말라는 말도 경전에 보인다.
인과 문제를 살피는 것은 생사현실 안의 이런 사정을 잘 살피기 위해서다.
♥단상♥무유정법과 인과이론-6
인과문제는 불교에서 이를 통해 그런 인과를 살필 대상이나 내용이 없음[승의제]를 이해함에 목적이 있다.
그렇지만, 망집을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혹(번뇌)- 업- 고통이라는 생사과정의 인과의 지배를 그대로 받게 된다. 그래서 이 해결을 위해서는 생사현실에서 다시 인과를 잘 살펴야 한다.
손을 부딪히니, 손뼉소리가 난다. 이런 사례를 하나 놓고 우연론과 필연론의 대립을 살펴보자.
a => b 로 어떤 현상이 변화한다고 하자. 이 경우 우연론은 이런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관계를 무수히 관찰한다면 a => b 의 관계가 늘 있는 것은 아님을 주장한다. 즉 때로는 a => c a => d a => e 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가운데, 구체적 경우에서 a => b 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연론은 이와 반대로 주장한다.
a => b 의 관계가 늘 반드시 있다. 그래서 a => c a => d a => e 등이 가능하지 않다. 결국 구체적 경우에서 a => b 로 나타난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에 그렇게 나타난 것 뿐이다.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한 순간에서의 변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간단히 말해서 우연론은 a => b 로 나타나게 되는 그 순간 상황에서도 사실은 a => c a => d a => e 등이 가능한 가운데 구체적으로 a => b 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필연론은 이 경우에도 이와 반대 주장을 한다. a => b 로 나타나게 되는 그 순간 상황에서도 a => c a => d a => e 등의 다른 경우는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반드시 나타날 내용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은 언뜻보아 다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이 논의에 엉터리 주장이 들어 있다. 무엇이 엉터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두 엉터리 이론에 빠져서 최면에 걸리지 않게 된다.
이 두 내용은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 주장이 옳지도 않다. 그러나 그 주장을 받아들이면 이후 그 주장을 받아들인 이의 태도 자세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망집을 일으키면 망집에 영향받아 업을 행하고 고통을 겪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어떤 내용이 사실이 아닌데 왜 영향을 미치는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경우도 있다.
본래 어떤 경우에도 승의제 차원에서는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 문제가 된다. 망집을 일으키면 엉뚱한 내용으로 각 경우를 대한다.
즉 망집이 계속 영향을 미쳐 매 경우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은 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방에 금이 묻혀 있지 않다. 그런데 금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방을 파기 시작한다. 방에 있지도 않은 금이 그를 그렇게 행위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어느 경우나 그가 생각한 내용들은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망집을 일으켜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처음 보통의 방을 대했다 그리고 금이 묻혀 있다고 잘못 여겼다. 그 다음 그는 방을 팠다. 그렇다면 이후 그는 그 연장선에서 파혀진 방을 연이어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어느 경우나 그가 생각한 내용들은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을 꿈을 놓고 이해해보자. 꿈에서 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수영을 했다.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금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고 하자.
그러나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이와 전혀 관계없다. 그렇지만 꿈에서는 바다에 빠져서 수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영을 해서 섬에 도착한 것이다. 섬에 도착해서 금을 얻은 것이다.
망집을 일으킬 때 그것이 영향을 미쳐 생사고통을 받게 함도 이와 마찬가지다.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인데도 생생하고 실답게 겪게 되는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연과 우연이란 관념도 그런 망집을 증폭시킨다.
우선 필연론과 우연론을 주장하는 이는 자신이 증명불가능한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 주체는 아무리 관찰해도 무량한 기간을 관찰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 주장은 마치 그런 주장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처럼 전제한다.
사실은 이들 관찰자는 단 두 순간을 놓고도 양 순간의 내용이 같고 다름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 사정은 그가 감각현실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난다는 현상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 내용을 문제삼을 때 자신이 어떤 영역의 무엇을 문제삼는가를 먼저 확립해야 한다.
그래서 문제삼는 내용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자. 즉 자신이 종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자.
글씨로서 종이인가 하면 그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머리속으로 떠올리는 관념 내용으로서 종이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자신이 문제삼는 것은 감각한 현실 내용으로서 종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인과를 살필 때도 이 감각현실을 문제삼는다.
문제는 이 경우 다음 순간에 문제삼는 것도 감각현실이다. 그런데 감각현실 자체는 다음 순간에 이전 내용이 그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 관찰자는 무엇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는가. 그것은 사실은 관념내용이다.
그래서 원래 문제삼는 내용은 두 순간도 비교하기 곤란하다.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계적인 일이다.
결국 우연론자나 필연론자는 둘 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내용을 전제로 한 가운데 주장을 펼친 것이다. 이것이 이 두 입장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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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