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경전에서 “유위법에는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발생에 의해 발생하고, 머묾에 의해 머물며, 소멸에 의해 소멸한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3상(相)에는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3상은 유위(有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무위(無爲)이면서 유위를 짓는 것인가? 둘 다 맞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이 유위라면 3상이 있을 것이네. 만일 발생이 무위라면 어찌 유위의 상이라 하겠는가? (1)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발생ㆍ머묾ㆍ소멸의 3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상반된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발생은 발생하는 법(法)과 상응하고 머묾은 머무는 법과 상응하고 소멸은 소멸하는 법과 상응한다.
법이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상반되는 법들이 일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은 유위법일 수가 없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문】 만일 발생이 유위법이 아니고 무위법이라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답】 만일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겠는가? 왜냐 하면, 무위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법이 멸한 것이기에 무위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상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無法]는 법(法)을 위해서 상을 지을 수가 없다. 마치 토끼의 뿔ㆍ거북이의 털 따위가 법을 위해 상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발생은 무위법이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3상(相)은 모여 있든 떨어져 있든 상을 띠는 일[所相]이 있을 수 없네. 어떻게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3상이 있겠는가? (2)
또 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각각 유위법을 위해 상(相)을 짓든, 한데 뭉쳐서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든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각각이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동일한 장소에 어떤 상은 있고 어떤 상은 없을 것이다. 발생할 때는 머묾과 소멸이 없고, 머물 때는 발생과 소멸이 없으며, 소멸할 때는 발생과 머묾이 없다. 만일 한데 뭉쳐서 상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서로 상반되는 법(法)인데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하겠는가? 만일 3상에 다시 3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과 머묾과 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한이 되네. 없다면 유위가 아니네. (3)
만일 발생ㆍ머묾ㆍ소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에 다시 발생이 있게 되고 머묾이 있게 되고 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3상은 다시 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한이 된다. 만일 다시 (유위의) 상이 없다면, 이 삼상은 유위법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 유위법을 위해 상을 짓지 못할 것이다. 【문】 그대가 3상이 무한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발생한 발생의 발생[生生]은 그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4)
법(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3상은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답】
만일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5)
만일 이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은 그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6)
또 만일 근본 발생이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발생의 발생의 법(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문】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전에도 아니고 후에도 아니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7)
만일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의 발생이) 아직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만일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도 아직 있지 않은데 어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8)
또 만일 이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근본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근본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문】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하네. (9)
등불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올 때 사물들을 밝게 비추고 자기도 비추듯이, 발생도 이와 같이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고 자기도 발생하게 한다.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네.(10)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미치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밝음과 어둠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이 없다면 비춤도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 이 등불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비추지 않는다. 또한 이미 발생했을 때도 비추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
【답】 어떻게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발생하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 없네. (11)
‘등불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란 반은 이미 발생했지만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등불 자체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등불은 어둠에 미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도둑을 마주쳤을 때 쫓아낸다고 하듯이. 만일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곳에 있을 때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애리라. (12)
만일 등불이 힘을 갖고 있어서 어둠에 다다르지 않고서도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타고 있는 등불이 모든 곳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이곳의 어둠에든 모든 곳의 어둠에든) 두 곳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일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13)
만일 등불이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 또한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일 어둠이 등불과 상반되는데도 자기를 덮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면, 등불 또한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의 인연을 타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어째서 발생하는 작용을 하겠는가? (14)
이 발생이 스스로 발생하고 있을 때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가?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법(法)이 없는 것인데 법이 없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므로 다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이미 만들어진 것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면, 이 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있지 않다. 그대는 앞에서 발생은 등불처럼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발생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감과 옴에서 이미 답했네. (15)
또 ‘발생’이란, 뭇 연이 화합해서 발생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는 지음[作]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지음이 없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으며,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없이 발생을 얻을 수도 없다. 어떻게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겠는가? 이것은 「감과 옴」1)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발생한 법(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개되면 무한이 된다. 마치 이미 지어진 것이 다시 지어지듯이. 또 이미 발생한 법이 다시 발생한다면 어떤 발생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이 발생[生相]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발생한 것을 발생하게 한다면,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발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발생이라 말한다면, 법(法)은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대는 앞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확정되지 않는다. 또 마치 이미 탄 것은 다시 타지 않고 이미 간 것은 다시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일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발생의 연(緣)과 화합할 것이다. 만일 발생의 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이 발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발생한다면, 지음[作法]이 없이 짓게 되고, 탐욕이 없이 탐욕을 내게 되고, 증오가 없이 증오하게 되고, 무지[癡法]가 없이 무지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모두 세간의 법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세간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이 모두 모든 범부를 생기게 할 것이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보리(菩提)가 지금 보리의 괴멸하지 않는 법을 생기게 할 것이며,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데 지금 번뇌를 생기게 할 것이며, 토끼 등은 뿔이 없는데 지금 모두 (뿔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도 발생하지 않는다. 【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緣]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짓는 자[作者]가 없고 시간이 없고 장소 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연이 있고 지음이 있고 짓는 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다면 화합하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들은 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답】 만약 법에 연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장소 등이 있어서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미리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없어도 발생하지 않고 (미리) 있으면서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가지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이미 발생한 부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으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답한 바와 같다. 또 만일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발생이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발생의 과실이 있다. 하나는 ‘발생한다’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 할 때의 발생이다. 둘 모두 옳지 않다. 어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生法]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발생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궁구해 보아도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발생하지 않고, 지금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이 성립하지 않고, 발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머묾과 소멸도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ㆍ머묾ㆍ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답했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나는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거나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답】 그대가 비록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緣)들이 화합하는 그때에 발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16)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 하러 다시 연들이 화합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가? 뭇 연(緣)이 다 갖추어졌든 다 갖추어지지 않았든 모두 발생과 동일하게 타파한다.
만일 법(法)이 뭇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면 이는 적멸[寂滅性]이네. 그러므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네. (17)
뭇 연(緣)에서 발생한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적멸이다. 적멸이란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는, 상(相)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고 희론이 소멸해 있는 것이다. 뭇 연(緣)이란 실을 연해서 베가 있고 왕골을 연해서 돗자리가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만일 실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베 자체에 확정된 자성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에서 나와 베가 있으며 삼에서 나와 실이 있다. 그러므로 실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고 베에도 확정된 자성이 없다. 불[燃]과 장작[可燃] 같은 것도 연들이 화합해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성(自性)이 없다. 장작이 있지 않기에 불도 있지 않다. 불이 있지 않기에 장작도 있지 않다. 모든 법(法)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발생하는 법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다. 아지랑이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발생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 이 둘은 모두 적멸이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발생[生相]을 성립시키고자 할지라도 모두 희론이지 적멸인 것은 아니다. 【문】 삼세의 구별이 확정되어 존재한다. 미래세의 법(法)은 발생의 인과 연들을 얻으면 발생한다. 그런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만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法)이 있기에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 법이 미리 이미 있는데 어찌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18)
만일 미래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있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미리 있는 것인데 어디에 다시 발생을 쓰겠는가? 법이 (미리)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문】 비록 미래세에 있어서 현재의 상(相)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현재의 상이기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답】 현재의 상은 미래세에는 없다. (현재의 상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세의 발생이 발생하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현재의 상이) 있다면 미래세의 법이 아니라 현재세의 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현재세의 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두 가지2) 모두 발생이 없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또 그대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또한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며 이것이 발생할 것을 갖는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이 있어서 이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19)
만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발생하게 하며 다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이 발생을 어떤 것이 다시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발생이 있어서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무한이네. 발생을 발생하게 하는 것 없이 발생이 있다면 법(法)은 모두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네. (20)
만일 발생이 다시 발생한다면 발생은 무한이다. 만일 이 발생이 다시 발생하게 하지 않아서 스스로 발생한다면, 모든 법들 또한 다 스스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존재하는 법(法)은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치는 앞에서 설명했네. (21)
무릇 발생이 있다 하면, 존재하는 법(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발생이 있든가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시 발생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법(法)이 소멸하는 때라면 이때에는 발생하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2)
또 만일 멸상(滅相)의 법이라면 이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두 상(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이니, 법(法)이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하나는 생상(生相)이니, 법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다. 두 상은 상반되는 법이므로 동시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문】 만약 멸상의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는 법이 발생할 것이다. 【답】 모든 유위법은 찰나찰나에 소멸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법이란 없다. 유위법 없는, 확정된 자성의 무위법은 없다. 무위법은 단지 이름[名字]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문】 만약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답】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네. 지금 머물고 있는 법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23)
아직 머물지 않은 법(法)은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묾[住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머문 법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머묾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이 있기에 머묾이 있다. 만일 머묾이 이미 있었다면 다시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물고 있는 것도 머물지 않는다. 이미 머문 것과 아직 머물지 않은 것 없이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머묾을 구해 보아도 머묾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겠는가?
만일 법(法)이 소멸하고 있을 때라면 이것은 머물지 않네.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네. (24)
또 만일 멸상의 법이라면 이 법에는 주상(住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한 법에 상반되는 두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멸상(滅相)이고 또 하나는 주상(住相)이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주상과 멸상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멸상의 법(法)에 주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문】 만일 법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머물고 있을 것이다. 【답】 소멸하지 않는 법은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는 모든 법(法)들은 모두 늙음과 죽음의 상(相)을 갖고 있네. 존재하는 법이 늙음과 죽음이 없이 머물고 있는 것은 정녕 볼 수 없네. (25)
모든 법은 발생할 때 무상(無常)이 항상 좇아다닌다. 무상에 둘이 있다. 늙음과 죽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에는 항상 늙음과 죽음이 있기에 머물고 있을 때가 없다.
머묾은 자기에 의해서 머물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머물지 않네. 발생이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26)
또 머무는 법(法)이 있다면 자기에 의해서 머무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연(緣)들에서 발생한다. 만일 머무는 법(法)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유위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머묾이 자기에 의해서 머문다면 법(法)도 자기에 의해서 머물 것이다.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머묾도 그러하다. 만약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면, 머묾에 다시 머묾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한이 된다. 또 다른 법(法)에서 다른 것[異相]이 생기는 것을 본다. 다른 법을 연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다른 것은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 머문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문】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소멸할 것이다.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네. 지금 소멸하고 있는 법도 소멸하지 않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27)
이미 소멸한 법(法)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도 소멸하지 않는다. 멸상(滅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멸하고 있는 것도 소멸하지 않는다. 둘 없이 다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소멸하는 법(法)에는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일 법이 머문다면 이것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만일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네. (28)
또 만일 법이 머문다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상(住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는 법이 소멸한다면 두 상이 있게 될 것이다. 주상(住相)과 멸상(滅相)이다. 그러므로 머묾 속에 소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법이 머물지 않는다면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주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상이 없다면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을 것인가? 또
이 법은 이때에,
이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이 법은 다른 때에,
다른 때에 있는 대로 소멸하지 않네. (29)
법에 멸상이 있다면 이 법은 자기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다른 상태에 의해서 소멸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일 때에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일 때 있는 대로 우유의 상태가 정해져서 머물기 때문이다. 우유가 아닐 때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유가 아니라면 우유가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법들의 생상을 얻을 수 없네. 생상이 있지 않으니 멸상도 있지 않네. (30)
또 앞에서 궁구한 바와 같이 모든 법(法)의 생상(生相)은 얻을 수가 없다. 그때에 멸상이 없다. 발생을 타파했기에 발생이 없다. 발생이 없는데 어떻게 소멸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면, 이제 다시 설명해서 인과 연들을 파괴하는 것을 타파하겠다.
만일 법(法)이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없네. (31)
법이 존재할 때 멸상을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어떻게 한 법에 존재와 비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치 빛과 그림자는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에는 소멸이 없네. 마치 제2의 머리가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32)
또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멸상이 없다. 마치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처럼.
법은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네. 자기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듯이. (33)
또 앞에서 생상(生相)에 관해 말할 때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물은 뭇 연(緣)에서 발생한다. 손가락 끝이 자기를 만질 수 없듯이, 그렇듯이 발생은 자기로부터 발생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이 발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체(自體)가 없다. 자체가 없기에 다른 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소멸 또한 그와 같다. 자기에 의해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34)
또 그대는 앞에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있기에 유위법이 있으며 유위법이 있기에 무위법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치에 맞게 궁구해 보건대 3상(相)은 얻을 수가 없다. 어떻게 유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 상(相)이 없는 법(法)은 없다고 말한 바와 같다. 유위법이 없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위의 상은 발생하지 않음ㆍ머물지 않음ㆍ소멸하지 않음이다. 유위의 상이 그쳤기에 무위의 상이라 한다. 무위 자체에는 별도의 상이 없다. 이 세 가지 상3)에 의지해서 무위의 상이 있는 것이다. 가령 불[火]에는 뜨거움의 상이 있고 땅[地]에는 단단함의 상이 있고 물[水]에는 차가움의 상이 있지만 무위는 그렇지 못하다. 【문】 만일 이 발생ㆍ머묾ㆍ소멸이 필경 있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논서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는가?
【답】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이 말한 바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그 상(相)이 또한 이와 같네. (35)
생상과 주상과 멸상은 확정된 것[決定]이 없다. 범인(凡人)은 탐착(貪著)해서 확정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인들께서는 연민을 품고 그 전도(顚倒)를 그치게 하고자 다시 그 탐착된 이름[名字]을 갖고서 말한다. 말[語言]은 동일하지만 그 의도[心]가 다르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기에 논박이 있을 수 없다. 마치 환영이나 화작(化作)된 것과 같으니, 그 유래하는 바를 물어 따질 수 없으며, 그 속에 슬픔과 기쁨의 표상[想]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실체를 구할 수 없다. 건달바성과 같은 것은 해가 떠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 그저 실체가 없이 이름을 쓰는 것일 뿐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범부는 분별해서 있다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구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8.행위와 행위자를 관찰하는 장[觀作作者品]12偈
【문】 지금 분명히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고 행위 수단(所用作法)이 있다. 세 가지가 결합해서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作者]와 행위[作業]가 있다. 【답】 이제까지 매 장에서 모든 법을 타파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3상(相)을 타파하는 경우를 보자. 3상이 있지 않기에 유위가 있지 않고, 유위가 있지 않기에 무위가 있지 않다. 유위와 무위가 있지 않기에 모든 법이 있지 않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유위라면 유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고 만약 무위라면 무위를 다룰 때 이미 타파되었다. 다시 묻지 않아야 하는데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이 깊어 다시 묻고 있다. 이제 다시 답하겠다.
실재하는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네. (1)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행위가 실재할 것이니,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행위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니, 또한 행위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없네. 이 행위에는 행위자가 없네. 실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지음이 없네. 행위자에게 또한 행위가 없네.(2)
만약 먼저 행위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행위자 없이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한다면 다시 행위가 있지 않을 않을 것이다. 또 행위 없이 행위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행위자와 실재하는 행위에는 지음[作]이 있을 수 없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와 실재하지 않는 행위에도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본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어도 지음이 없거늘, 하물며 행위자가 있지 않고 행위가 있지 않은 경우이겠는가?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고 또한 행위가 실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지고 말리라. (3)
또 만약 먼저 행위자가 실재하고 행위가 실재하는데 그대가 행위자에게 지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원인이 없는 되리라. 행위를 떠나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를 떠나 행위가 있는 것이니,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문】 만약 인연에 의존하지 않고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것이네.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는 것이네. (4)
만약 지음 등이 없다면 죄와 복이 없네. 죄와 복 등이 없으니 죄와 복의 과보(果報)도 없네. (5)
만약 과보가 없다면 또한 열반도 없네. 모든 있을 수 있는 지음이 모두 공허해서 결과가 없게 되네. (6)
만약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진다면 모든 법들은 원인이 없고 결과가 없는 것이 된다. ‘발생하게 하는 법’을 원인이라 하고 ‘발생하는 법’을 결과라 하는데 이 둘이 없게 된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행위자가 없고 행위 수단이 없다. 또한 죄와 복도 없다.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과보 및 열반의 도(道)가 없다.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 【문】 만약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일으킨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하나가 없어도 행위를 일으킬 수 없는데 하물며 둘 다 없음이겠는가? 마치 화인(化人)이 허공으로 집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저 말[言說]이 있을 따름이지 행위자와 행위는 없다. 【문】 만약 행위자가 없고 행위가 없다면 지음[所作]이 있을 수 없다. 이제 행위자가 있고 행위가 있으니 지음[作]이 있을 것이다.
【답】 실재하면서 실재하는 않는 행위자가 두 행위를 할 수 없네.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네. (7)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한 곳에 둘이 있지 않다. 존재는 확정된 것[決定]이고 비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것[不決定]이다. 한 사람 한 사물에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있겠는가?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8)
또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행위가 존재한다면 또한 지음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행위자가 존재하는데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한다면 행위자가 다시 무엇을 짓겠는가? 만약 행위가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다면 죄와 복 등의 인연과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존재하는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존재하는 행위을 하지 않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라고 말한 것이다.
행위자는 실재하는 행위를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9)
또 실재하는 행위는 이미 타파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도 타파되었다. 지금은 일시에 모든 것을 타파하고자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자는 세 가지의 행위를 짓지 않는다. 이제 세 가지의 행위자 또한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하지 못하네. 그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네. (10)
행위자가 실재하든, 실재하지 않든,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든 행위를 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세 가지 과실의 이유를 든 것과 같이 여기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위자와 행위를 구해 보아도 모두 얻을 수 없다. 【문】 만약 행위가 없고 행위자가 없다면 다시 원인이 없는 것에 떨어질 것이다. 【답】 이 행위는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다. 가명(假名)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말하는 바와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에 의존해서 행위가 있네. 행위를 성립시키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이 밖에 다른 것이 없네. (11)
행위에 미리 확정된 것[決定]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의존해서 행위를 일으키고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가 있다. 행위자 또한 확정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존해서 행위자라고 하는 것이다. 둘이 화합하기 때문에 행위와 행위자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화합에 의존해서 생긴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공(空)하고 공하기에 발생하는 것[所生]이 없는 것이다. 그저 범부가 기억하고 표상해서 분별하는 대로 행위가 있고 행위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행위가 있지 않고 행위자가 있지 않다.
행위와 행위자와 같이 취착(取著)과 취착하는 자도 타파되네. 그리고 모든 법들도 이와 같이 타파되네. (12)
또 행위와 행위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확정되지 않으며 확정된 것이 없기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이,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이와 같다. ‘취착(取著)’이란 5온(蘊)의 몸[身]을 말한다. ‘취착하는 자’란(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이렇듯이 사람을 떠나 5온이 있지 않으며 5온을 떠나 사람이 있지 않으니, 단지 뭇 연(緣)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9. 선행하는 존재를 관찰하는 장[觀本住品]12偈
【문】 어떤 이가 말한다.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
이와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데 이것을 선행하는 존재[本住]라고 하네. (1)
만약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누가 안[眼] 등의 법을 소유하겠는가? 그러니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2)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根)’이라고 한 것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명(命) 등의 모든 근(根)들을 이름한 것이다.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이라고 한 것은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ㆍ상(想)ㆍ사(思)ㆍ억념(憶念) 등 심법과 심소법을 이름한 것이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서 안(眼) 등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어서 이 선행하는 존재에 의존해서 안(眼) 등의 모든 근이 증장(增長)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신(身)과 안[眼] 등의 모든 근은 무엇에 의존해서 증장할 수 있겠는가?”
【답】 만약 안(眼) 등의 근과 고(苦)ㆍ낙(樂) 등의 법을 떠나 앞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3)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에 의해 말할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일까? 바깥의 법(法)인 물단지ㆍ옷 등은 안(眼) 등 근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안의 법은 고(苦)ㆍ락(樂) 등의 근에 의해 알 수 있다. 경전에서 “괴멸하는 것[可壞]이 색(色)의 특징이고, 느끼는 것[能受]이 수(受)의 특징이고, 인식하는 것[能識]이 식(識)의 특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대가 안(眼)과 이(耳), 고(苦)와 낙(樂) 등을 떠나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엇에 의해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말할 수 있는가? 【문】 어떤 논사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보며 눈짓하는 것, 수명, 사유, 고(苦)와 낙(樂), 증오와 애정, 움직임 등이 ‘나[神]’의 특징이다. 만약 ‘나[神]’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등의 특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답】 만약 이 ‘나’가 있다면 몸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치 벽 속에 기둥이 들어 있듯이. 만약 (‘나’가) 몸 바깥에 있다면 마치 사람이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몸 안에 있다면 몸은 괴멸할 수 없을 것이다. ‘나’가 항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몸 바깥에 있어서 몸을 덮는 것이 갑옷과 같다면 몸은 보이질 않을 것이다. ‘나’가 세밀하게 덮고 있기 때문이다. 또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몸이 괴멸하는 것을 실제로 본다. 그러므로 고와 낙 등을 떠나 앞서서 여타의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팔을 잘라냈을 때 ‘나’는 움츠러들어 안에 있어서 잘라낼 수 없다고 말한다면 머리를 잘라냈을 때도 움츠러들어 안에 있기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고와 락 등을 떠나 앞서서 ‘나’가 있다고 한다면 말만이 있는 것일 뿐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또 만약 몸이 크면 ‘나[神]’도 크고 몸이 작으면 ‘나’도 작은 것이 등불이 크면 밝음도 크고 등불이 작으면 밝음도 작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몸을 따르는 것이기에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몸을 따르는 것이라면 몸이 없을 때 ‘나’도 없을 것이다. 마치 등불이 사라지면 밝음도 사라지듯이.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안(眼)과 이(耳), 고(苦)와 락(樂) 등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을 떠나 앞서서 별도의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가령 중풍[風狂病]에 걸린 사람이 의지대로 하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나’가 모든 행위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중풍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를 떠나서 따로 하는 짓이 있는 것이리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궁구해 보아도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과 고(苦)와 락(樂) 등의 법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굳이 말한다면 이런 일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을 떠나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안과 이 등이 있을 것이네. (4)
만약 선행하는 존재가 안과 이 등의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법(法)을 떠나 앞서서 있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근과 고와 락 등의 법도 선행하는 존재를 떠나 있을 것이다. 【문】 둘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선행하는 존재를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다.
【답】 법(法)에 의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며 사람에 의해 법이 있다는 것을 아네. 법 없이 어떻게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 없이 어떻게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5)
‘법(法)’이란 안(眼)과 이(耳), 고와 낙 등이다. ‘사람’이란 선행하는 존재이다. 그대가 법이 있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있기에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이제 안과 이 등의 법이 없이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이 없이 어찌 안과 이 등의 법이 있겠는가?
모든 안(眼) 등의 근(根)에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眼)과 이(耳) 등의 근(根)들이 각각 다르게 분별하는 것이네. (6)
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낙 등의 모든 법에는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실재하지 않는다. 안(眼)이 색에 의존해서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인과 연들이 화합하기에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이 있다는 것을 알지,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게송에서 ‘모든 안 등의 근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네.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이 각각 분별하는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안(眼) 등의 모든 근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 등 하나하나의 근이 어떻게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7)
만약 모든 안과 이 등의 모든 근(根)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지금 하나하나의 근이 경계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에는 사유 작용이 없기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안과 이 등의 모든 근을 떠나 다시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있다. 【답】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의 근 속에 각각 인식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 한 인식하는 자가 근들 속에 있는 것인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와 같은 근들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네. (8)
만약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이 자는 한 ‘나[神]’이다. 이와 같이 안 등의 근들에는 앞서서 선행하는 존재가 있어서 색(色)ㆍ성(聲)ㆍ향(香) 등을 고유하게 인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혹은 눈[眼]으로 소리[聲]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여섯 감관[六向]을 갖고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듣는 것과 같다. 만약 듣는 자와 보는 자가 같다면 안 등의 근(根)으로 의지하는 대로 보거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많을 것이네. (9)
만약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상이하다면, 볼 때 또한 들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보는 자를 떠나서 듣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鼻)ㆍ설(舌)ㆍ신(身)에 있어서도 ‘나[神]’는 일시에 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인데 ‘나’는 많을 것이다. 모든 감관[根]이 일시에 대상[塵]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
안과 이 등의 모든 근과 고와 락 등의 모든 법을 발생하게 하는 대(大)들 그 대(大)들에도 ‘나’가 있지 않네. (10)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안(眼)과 이(耳) 등의 근들과 고(苦)와 낙(樂) 등의 법들을 떠나 별도로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타파된 것이다. 이제 안과 이 등의 원인인 4대(大)의 경우를 보면, 이 4대에도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 【문】 만약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에 선행하는 존재[本住]가 있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 안과 이 등의 근들과 고와 락 등의 법들은 있을 것이다.
【답】 만약 안(眼)과 이(耳) 등의 모든 근과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안(眼) 등도 있지 않을 것이네. (11)
만약 안(眼)과 이(耳)나 고(苦)와 락(樂) 등의 모든 법S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이 안과 이 등이 있겠으며 무엇을 연(緣)으로 해서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과 이 등도 있지 않다.
안(眼) 등에는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네. 지금도 후에도 다시 있지 않네. 삼세(三世)에 있지 않으니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이 없네. (12)
또 선행하는 존재[本住]를 사유하고 궁구해 보아도 안(眼) 등보다 이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삼세에 있지 않다면 발생이 없고 적멸해 있는 것이므로, 논박이 있을 수 없다. 선행하는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눈 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가운데 희론이 사라졌으며 희론이 사라졌으니 모든 법들이 공하다.
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16偈
【문】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있다. 마치 불과 장작이 있듯이. 불은 취착하는 자이고 장작은 취착 즉 5온[蔭]이다.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이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이 한 법(法)4)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두 법5)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문】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有]’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답】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불은 태우는 것[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作]은 행위[業]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 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作]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문】 왜 불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을 때 사람의 노력도 공허하다고 하는가? 【답】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말한다면 그 때는 장작이 있을 뿐인데 어떤 것으로 장작을 태우겠는가? (4)
만약 먼저 장작이 있어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불을 떠나 따로 장작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하겠는가?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문】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답】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문】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답】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법[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定]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도 아니네.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12)
또 이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장작도 이와 같아서, 불에 의존하는 것과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장작은 불이 아니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14)
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불과 장작을 말하는가? 【답】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듯이 취착에 의존해서 취착하는 자가 있다. ‘취착’이란 5온을 말하고, ‘취착하는 자’란 사람을 말한다. 불과 장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의 있음과 법(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品)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나[我]’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색(色)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 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11. 최초의 궁극을 관찰하는 장[觀本際品]8偈
【문】 최초의 궁극[本際]은 있지 않다. 경전에서 “중생은 생사 윤회한다.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생이 있고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가?
【답】 위대한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 최초의 궁극은 얻을 수 없네. 생사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1)
성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5신통(五神通)9)의 외도(外道),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 셋째는 신통(神通)을 얻은 대보살이다. 부처님은 세 부류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최초와 최후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최초와 최후가 없다면 중간은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시작과 끝이 없는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에는 전도 후도 동시도 있지 않네. (2)
중간과 최후에 의존해서 최초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중간에 의존해서 최후가 있는 것이다. 최초와 최후가 있지 않은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생사에는 최초와 중간과 최후가 있지 않다. 그래서 전과 후와 동시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태어남이 전에 있고 늙음ㆍ죽음이 후에 있다면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게 되고 태어남이 없이 늙음ㆍ죽음이 있게 되리라. (3)
만약 늙음ㆍ죽음이 전에 있고 태어남이 후에 있다면 이것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되리라. 태어나지 않은 것에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 (4)
태어나고 죽는 중생에게 만약 전에 태어남이 있고 잠시 늙음이 있고 후에 죽음이 있다면,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물[法]의 태어남에는 늙음ㆍ죽음이 있고 늙음ㆍ죽음에는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늙음ㆍ죽음이 없이 태어남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태어남에 의존하지 않고서 늙음ㆍ죽음이 있게 된다.10) 만약 전에 늙음ㆍ죽음이 있고 후에 태어남이 있다면 늙음ㆍ죽음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태어남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늙음ㆍ죽음이 있겠는가?11)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은 전과 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함께할 수 없네. 태어날 때 죽음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은 다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네. (5)
만약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라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태어날 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法]은 태어날 때에는 있고 죽을 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태어날 때 죽음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생긴다면12)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소의 뿔이 동시에 나오기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전과 후와 동시 이것이 모두 옳지 않은데 왜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있다고 희론해서 말하는가? (6)
그러므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사유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그대는 지금 왜 태어남ㆍ늙음ㆍ죽음을 탐착(貪著)하고 희론(戱論)해서 확정된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가?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
느낌과 느끼는 자 등의 모든 법들, (7)
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최초의 궁극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들도 모두 최초의 궁극이 없네. (8)
또 ‘모든 법들’이란 이른바 원인과 결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 느낌[受]과 느끼는 자[受者] 등을 말한다. 모두 최초의 궁극[本際]이 없다. 비단 생사에만 최초의 궁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보여 주고자 생사에는 최초의 궁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12. 고를 관찰하는 장(觀苦品)10偈
어떤 이가 말한다.
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고(苦)를 말하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 (1)
어떤 이는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자기가 짓는 것이면서 타자가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는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다.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란, 중생은 뭇 연(緣)에 의해 고(苦)에 이르게 되고, 고를 싫어해서 멸하고자 하지만 고의 진정한 연들을 알지 못해서 네 가지 오류13)를 범하므로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옳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온(蘊)이 있기에 저 온(蘊)이 발생하는 것이네. (2)
만약 고(苦)를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란 자성(自性)에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세(前世)의 5온[蔭]에 의존해서 후세의 5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자기가 짓는 것일 수 없다. 【문】 만약 이 5온이 저 5온이 된다면 이것은 타자가 짓는 것이다.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타자에 의해 고(苦)가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네. (3)
만약 이 5온이 저 5온과 다르고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실이 천과 다르다면 실을 떠나서 천이 있고 실을 떠나서 천이 있지 않다면 천은 실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듯이 저 5온이 이 5온과 다르다면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고 이 5온을 떠나서 저 5온이 있지 않다면 이 5온은 저 5온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고(苦)가 타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 자기가 고(苦)를 짓는다면 개체[人]마다 자기가 고를 짓고 자기가 고를 받을 것이다.
【답】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어떤 개체가 있기에 그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4)
만약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면, 5온의 고를 떠나 어디에 따로 개체가 있기에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일까? 이 개체를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체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개체가 스스로 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고(苦)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받는 일이 있겠는가? (5)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면, 5온이 없으니 이 개체가 이 사람이 받는 일은 없다.
만약 고를 다른 개체가 지어서 이 개체에게 주는 것이라면 고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있기에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6)
또 만약 다른 개체가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고 말한다면, 5온의 고 없이 어떻게 다른 개체가 있기에 고를 지어서 이 개체에게 준다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그 상(相)을 말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짓는 고(苦)가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자가 짓는 고가 성립하겠는가?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네. (7)
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자가 고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기와 타자[此彼]는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그 타자에게 고를 짓는다면 또한 자기가 고를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파했다. 그대가 자기가 고를 짓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고(苦)는 자체가 짓는 것이 아니네. 사물[法] 자체가 사물을 짓는 것이 아니네. 타자는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가 고를 짓겠는가? (8)
또 자체가 고(苦)를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가령 칼이 스스로를 벨 수 없듯이 사물[法]은 자체가 법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고(苦)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고 없이 타자의 자성이 있다면 타자가 고를 지을 것이다. 타자 또한 고인데 어떻게 고가 고를 짓겠는가? 【문】 만약 자기가 짓는 것과 타자가 짓는 것이 옳지 않다면 양자가 짓는 것이리라.
【답】 만약 자기나 타자가 고(苦)를 짓는 것이라면 양자가 고를 짓는 것이리라. 자기나 타자가 짓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겠는가? (9)
자기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과실이 있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랴? 원인이 없다면 많은 과실이 있다. 행위와 행위자를 타파하는 장에서 말한 바와 같다.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든 바깥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10)
또 불교에서 5취온[聚陰]을 고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어떤 외도의 사람들은 고수(苦受)를 고(苦)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단 고에 대해서만 네 가지의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물들인 대지ㆍ강ㆍ산ㆍ나무 등 모든 법들에 대해서도 (네 가지의 주장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13. 행을 관찰하는 장[觀行品]9偈
【문】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네. 모든 행(行)들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기에 이는 속이는 것이네. (1)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속이는 것[虛誑]은 허망하게 취한 것[妄取相]이다. 제일의 진실(眞實)은 열반이니, 허망하게 취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까닭에 모든 행(行)들은 속이는 것이며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속이는 것은 허망하게 취한 것이라면 이 중에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주고자 하셨네. (2)
만약 허망하게 취한 것은 속이는 것이라면 이 행들 중에서 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 공성의 이치(空義)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 모든 행(行)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모든 행(行)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모든 행들은 발생하고 소멸해서 머물지 않아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모든 행들이란 5온이다. 행에서 생긴 것이기에 5온은 행이다. 이 5온은 다 허망해서 확정된 상[定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면 갓난애 때의 색(色)은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기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이 아니다.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은 어린애[童子] 때의 색이 아니다. 어린애 때의 색은 청년[壯年]일 때의 색이 아니다. 청년일 때의 색은 노년일 때의 색이 아니다. 색과 같은 것은 찰나찰나 (생멸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을 분별할 수 없다. 갓난애 때의 색은 기어다니는 애 때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은가, 다른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과 같다면, 오로지 이 갓난애 때의 색이 있을 뿐이어서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의 색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 가령 진흙덩어리 같은 것은 항상 진흙덩어리여서 결코 물단지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이 항상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갓난애 때의 색이 걸어다니는 애 때의 색과 다르다면, 갓난애는 걸어다니는 애가 되지 않을 것이고 걸어다니는 애는 갓난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두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애[童子]ㆍ소년(少年)ㆍ청년ㆍ노년의 색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혈연 관계[親屬法)를 상실해서 아버지가 없게 되고 자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직 갓난애만이 아버지를 얻게 되고 여타의 것 즉 기어다니는 애에서부터 나아가 노년까지는 (상속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문】 색이 확정돼 있지 않다고 하지만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고 난 후 상속해서 다시 발생해서 나아가(=어린애ㆍ소년ㆍ청년) 노년의 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답】 갓난애의 색이 상속해서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나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했다면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장작과 불이 있다 하더라도 불이 소멸했을 때는(꺼졌을 때는) 상속하지 않는다. 만약 갓난애의 색이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갓난애의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상주하는 본체[本相] 또한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문】 나는 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머묾이 없이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기에 상속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답】 만약 그렇다면 확정된 색이 있고 (색들이 거듭해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가지의 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또한 상속이 없다. 이렇듯 모든 곳에서 색을 구해 보아도 확정된 상[定相] 없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일 따름이다. 가령 파초나무[芭蕉樹]는 실체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껍질과 잎이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이는 색의 상(相)을 구할 때 찰나찰나 소멸하기 때문에 다시 실체의 색[實色]을 얻지 못하므로 색의 형체[色形]나 색의 상[色相]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유사하게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령 등불과 같은 것에서 확정된 색[定色]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고자 하더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색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다.14) 수(受)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가 여러 가지로 관찰해 볼 때 순차적으로 서로 유사하게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별해서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치 물의 흐름이 상속(相續)하는 것과 같다. 그저 거칠게 지각해서[覺] 세 가지 수(受)가 몸에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受)도 색과 동일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5) 상(想)은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발생한다. 이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름[名字相]을 분별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想)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먼저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와 같다. 형체에 의지해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 형체가 있지 않다면 그림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에는 확정된 자성이 없다. 만약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형체 없이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뭇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상(想)도 이와 같다. 단지 바깥의 이름[名相]에 기인해서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존재할 따름이다.16) 식(識)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과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에 의지해서 발생한다. 눈[眼] 등의 근(根)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식도 상이하다.17) 이 식은 색에 있는가, 눈에 있는가, 그 중간에 있는가? 확정되지 않는다. 단지 발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고 이 사람을 인식하고 저 사람을 인식한다. 이 사람을 아는 인식은 저 사람을 아는 인식과 같은가, 다른가?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안식과 이식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다고도 말하고 다르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확정된 구별이 없다. 단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지해서 눈[眼] 등을 구별하는 것이기에 공하고 자성이 없다. 마치 마술사[伎人]가 구슬 하나를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내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본래의 구슬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듯이, 식(識)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할 때 본래의 식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러므로 식은 머묾[住]이 없기에 자성이 없다. 속이는 것[虛誑]이어서 환영과 같다.18) 모든 행(行)도 이와 같다. 모든 행이란 신행(身行)과 구행(口行)와 의행(意行)이다. 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것들인가? 중생을 뇌란(惱亂)하게 하는 탐착(貪著) 따위를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라 한다. 중생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말과 탐착하지 않음 등을 청정한 것[淨]이라 한다. 어떤 때는 감소하고 어떤 때는 증가한다. 청정한 행(行)은, 인간[人]이나 욕천(欲天)이나 색천(色天)이나 무색천(無色天)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청정하지 않은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에서 과보를 받고 나면 감소한다. 감소했는데 다시 짓기 때문에 증가라 한다. 그러므로 행들은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묾[住]이 없다. 마치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하게 병을 잘 다스리면 낫지만 잘 다스리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행은 이와 같아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기 때문에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세속의 언설에 의지해서 있다고 할 따름이다.19) 세제(世諦)에 의지하기 때문에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명에 의존해서 모든 행이 있고, 모든 행에 의존해서 식(識)의 집착이 있고, 식의 집착에 의존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의존해서 6입(入)이 있고, 6입에 의존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의존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의존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의존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의존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의존해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에 의존해서 늙음과 죽음[老死]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恩愛別苦]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은 고(苦)들은 모두 행(行)을 근본으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세제에 의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어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명(無明)이 그친다. 무명이 그치기에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고, 여러 가지 행이 일지 않기에 4제(諦)20)를 볼 때 끊어지는[見諦所斷] 견(見)ㆍ의(疑)ㆍ계금취(戒禁取) 따위가 끊어지고 수습(修習)을 할 때 끊어지는[思惟所斷] 탐욕ㆍ증오ㆍ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조희(調戲)ㆍ무명도 끊어진다.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분지[分]가 소멸한다. 이른바 무명ㆍ모든 행ㆍ식ㆍ명색ㆍ6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ㆍ근심ㆍ비애ㆍ고뇌ㆍ사랑하는데 이별하는 고통ㆍ미워하는데 만나는 고통 따위가 모두 소멸한다. 이것들이 소멸하기에 5온의 몸[身]이 완전히 소멸해서 다시 남는 것이 없으니 오직 공성[空]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공성의 이치를 보여 주고자 “모든 행은 속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기에 속이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기에 공하다. 이렇게 게송을 읊는다.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자성이 없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3)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비록 발생하더라도 자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갓난애가 확정되어 자성에 머문다면 결코 기어다니는 애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노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갓난애는 순차적으로 상속하고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기어 다니는 애가 현현하고 나아가 노년이 현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다른 것이 보이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약 모든 법에 다른 것[異相]이 있기에 자성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자성이 없는데 어찌 법(法)이 있겠으며 어찌 상(相)이 있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성을 논파하고자 자성이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자성이 없는 법이 있다면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데 어찌 자성이 없는 법이 있겠는가?
【문】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애에서 노년에 이르기 까지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다른 것이 있네. (4)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다른 것[異相]이 없는 것인데, 그대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 모든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 있겠는가?
【답】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을까? (5)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異性]를 얻을 수 있겠는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변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순금이 변이할 수 없듯이. 또 마치 어둠이 변이해서 밝음이 되지 않고 밝음이 변이해서 어둠이 되지 않듯이.
이 법이 변이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네. 마치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수 없고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없듯이. (6)
또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마땅히 변이의 상(相)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이 변이하든가, 다른 법이 변이하든가 이다. 이 둘은 옳지 않다. 만약 바로 이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은이가 그대로 늙은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면 늙은이는 젊은이와 다른 것이니, 젊은이가 늙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21)에 과실이 있다. 【문】 만약 법이 변이한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지금 눈에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세월이 지나 늙은이가 되는 것이 보이는 경우와 같이.
【답】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네. 우유 외에 어떤 사물[法]이 있어서 타락[酪]이 될 수 있겠는가? (7)
만약 이 법이 변이한다면 우유가 곧 타락일 것이어서 다시 인과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우유와 타락은 여러 가지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우유가 곧 타락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은 변이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법이 변이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우유 외에 어떤 사물[物]이 있어서 타락이 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이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편벽되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문】 이 법을 논파하고 다른 법을 논파해도 여전히 공한 것[空]이 있다. 공한 것이 곧 법이다.
【답】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공한 법이 있을 것이네. 공하지 않은 법이 없는데 어떻게 공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8)
만약 공하지 않은 법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한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하지 않은 법을 논파해 왔다.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지 않는데 어찌 공한 법이 있겠는가? 【문】 그대가 “공하지 않은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법도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공한 것[空]을 말한 것이 된다. 다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으니 상(相)이 없고, 상이 없으니 집착이 없다. 이와 같다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답】 위대한 성인께서 공성[空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네. 만약 공성[空]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지 못하시네. (9)
위대한 성인께서는 예순두 가지의 견해들, 무명과 애(愛) 따위의 번뇌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성[空]을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해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다. 비유하면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복용해야 치유되는데 약으로 말미암아 다시 병이 들면 치유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에서 나왔다면 물로 끌 수 있겠지만 만약 물에서 생겼다면 무엇으로 끄겠는가? 공성이 물과 같을 때 온갖 번뇌의 불을 끌 수 있다. 죄가 무겁고 탐착(貪著)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디기 때문에 공성에 대해서 견해를 내서, 공성이 있다고 말하거나 공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있음[有]과 없음[無]으로 인해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만약 공성으로 이 사람을 교화한다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원히 이 공성을 안다. 이 공성을 떠나면 열반의 도(道)가 없다. 경전에서는 ‘공ㆍ무상(無常)ㆍ무작(無作)의 해탈문22)을 떠나서 해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언설(言說)일 뿐이다’라고 한다.”
14. 합함을 관찰하는 장[觀合品]8偈
위의 근(根)을 타파하는 장23)에서 봄[見], 봄의 대상[所見], 보는 자[見者]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셋은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겠다. 【문】 왜 이 안[眼] 등 셋은 합하지 않는가?
【답】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네. 이렇듯 세 법(法)은 달라서 결코 결합할 때가 없네. (1)
봄은 안근(眼根)을 말한다. 봄의 대상[可見]은 색인 경계[色塵]를 말한다. 보는 자는 ‘나[我]’를 말한다. 이 셋은 각각 다른 곳에 있어서 결코 합할 때가 없다. ‘다른 곳’이란, ???눈[眼]은 몸 안에 있다. 색은 몸 바깥에 있다. ‘나’는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또 만약 봄[見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합해서 보는가, 합하지 않고서 보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합해서 본다면, 경계[塵]가 있는 곳마다 근(根)이 있고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고서 본다면 근(根)과 ‘나’와 경계가 각각 다른 곳에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가령 안근(眼根)은 이곳에 있기에 먼 곳의 물단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24) 보지 못한다. 【문】 ‘나’와 의(意)와 근(根)과 경계(塵)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해서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봄과 봄의 대상과 보는 자가 있다. 【답】 이것은 근을 논하는 품25)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그대가 넷이 합하기에 인식 작용[知]이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이 인식 작용은 물단지나 옷 등의 사물을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인가,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인가? 만약 이미 보고 난 후에 발생한 것이라면, 인식 작용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는데 발생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아직 합하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인식 작용이 발생하겠는가? 만약 넷이 동시에 합할 때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전에 물단지가 있으면 후에 보고 그리고 나서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라면 전과 후가 없는 것이다. 인식 작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법들은 환영과 같고 꿈과 같아서 확정된 상[定相]이 있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합할 수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 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또한 그러하네. 그 밖의 입처[入]와 그 밖의 번뇌도 또한 이와 같네. (2)
또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듯이 탐욕[染]ㆍ탐욕의 대상[可染]ㆍ탐욕을 내는 자[染者]도 합하지 않는다.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의 세 법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들음[聞]ㆍ들음의 대상[可聞]ㆍ듣는 자[聞者]ㆍ그 밖의 입처[入]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의 대상, 탐욕을 내는 자에 대해서 말한 것과 똑같이 증오ㆍ증오의 대상ㆍ증오하는 자ㆍ그 밖의 번뇌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다른 법들이 합하는 것이네. 봄 등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네. 다름[異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봄 등이 어찌 합하겠는가? (3)
또 무릇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합한다. 봄 등에서는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지 않는다.
비단 봄 등의 법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네. (4)
또 비단 봄ㆍ봄의 대상ㆍ보는 자 등의 셋에서만 다름[異相]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들에는 다 다름이 있지 않다. 【문】 왜 다름[異相]이 있지 않은가?
【답】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이 아니네. 어떤 법이 원인에서 나왔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네.(5)
그대가 말하는 다른 것[異] 이 다른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이라 한다.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는 다른 것[異]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연(緣)들에서 생겼다면 이 법은 원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원인이 괴멸하면 결과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들보와 서까래 등에 의존해서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집은 대들보나 서까래와 다르지 않다. 대들보와 서까래 등이 괴멸하면 집도 괴멸하기 때문이다. 【문】 만약 확정된 다른 법[異法]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약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는 것이리라.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네. 그러니 다름이 있지 않네. (6)
만약 다름[異]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다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異法]이 있을 것이다.26) 그러나 실제로는 다름을 떠나서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타의 것과 다름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이 있다면,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의 다른 것[異物]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다섯 손가락이란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이란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먹이란 다른 것은 물단지 등과 다름[異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 우리 학파의 경전에서는 “다름[異相]은 연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답】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그대는 “전체의 상[總相]를 분별하기 때문에 다름[異相]이 있고 다름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것[異法]이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름[異相]은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뭇 연(緣)의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름[異相]은 다른 것[異法]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지 독립해서 성립할 수 없다. 지금 다른 것[異法]에는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다른 것[異法]이 있는데 어디에 다름[異相]을 쓰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에도 다름[異相]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다름이 다르지 않은 것에 있다면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두 경우 모두27)에 없다면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름[異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법(法)과 저 법이 또한 있지 않다.
또 다른 것[異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法)이 자기와 합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이 합하는 것도 아니네. 합하는 자도, 지금 합하고 있는 것도,
합함도 모두 있지 않네. (8)
이 법(法)은 자체와 합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손가락이 자체와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법도 합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이 이미 성립했기 때문에 합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건대 합함[合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합하는 자[合者]ㆍ지금 합하고 있는 것[合時]ㆍ합함[合法]을 모두 얻을 수 없다.
1) 제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을 가리킨다. 2) 미래세의 법과 현재세의 법을 말한다. 3) 발생과 머묾과 소멸을 말한다. 4) 같은 법이라는 뜻이다. 5) 다른 법이라는 뜻이다. 6)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과 이미 성립한 것 두 가지를 말한다. 7) 불은 장작을 소유한다, 불 속에 장작이 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8) 여기서 세 가지는 불과 장작, 취착과 취착하는 자, 행위와 행위자를 말한다. 9) 9)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 10) 이상 게송 3를 풀이한 것이다. 11) 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12)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이 동시에 생긴다면’이라는 뜻이다. 13) 13)자기가 짓는 것이다, 타자가 짓는 것이다, 양자가 짓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지어지는 것이다라는 네 가지 오류를 말한다. 14) 이상 색(色)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5) 이상 수(受)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6) 이상 상(想)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7) 눈 등의 감관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인식도 상이하다. 18) 이상 식(識)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19) 이상 행(行)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20)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21) 바로 이 법이 변이하는 것과 다른 법이 변이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2) 3해탈문(解脫門)이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되는 세 종류의 선정(禪定)을 말한다. 아(我)와 법(法)의 공함을 관하는 것이 공(空)해탈문, 차별의 상(相)을 떠나는 것이 무상(無相)해탈문, 원구(願求)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무원(無願)해탈문 또는 무작(無作)해탈문이다. 23) 제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24) 근(根)과 ‘나’와 경계가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말한다. 25) 주 14)와 같다. 26) 이(異)나 이상(異相)은 ‘다름’을, 이법(異法)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적용하면 뒤의 응리여이유이법‘(應離餘異有異法)’은 “여타의 다름을 떠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겠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기 위해 “여타의 다른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27) 다른 것[異法]이나 다르지 않은 것[不異法]을 말한다.
단 하루만 뉴스를 보아도 매번 새로운 사건 사고가 발생함을 볼 수 있다. 또 수십년간 담배를 태우면서 연기를 관찰해온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단 한대의 담배만 태워도 없던 연기가 생겨남을 보게 된다. 그런 내용을 수십년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래서 이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억지로 그렇다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다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대부분 지금까지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 다시 다음처럼 엉뚱하게 방향을 잡고 임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즉 본래 생멸이나 생사, 그런 것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지금부터 아무것이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렇게 해도 무방하고 저렇게 해도 무방하다. 생사현실은 모두 차별없이 공하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종전에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일들을 더 극단적으로 심하게 해도 무방하다. 또는 악행을 극단적으로 해나가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본래 죄와 복이 모두 공하고 머물바가 없기 때문이다.
망집 상태에서는 본래 대부분 자신 마음대로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무방한 것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는 경우가 많다.
이들 내용은 일부는 맞다. 그런데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왜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수행방향을 제시하게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내용을 그간 많이 반복했다. 그런데 처음에 생사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부터 먼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함도 또 다시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부분들이 다 어려움이 많다.
○ 생멸상을 얻을 수 없음
『중론송』을 살피기전에 기초적으로 살필 부분이 많다. 이것은 과거에 『회쟁론』을 살필 때 살폈다. 그런데 과거 글들이 현재 정리 작업중이다.
과거 버전의 연구원은 대단히 길게 만연체로 글을 썼다. 그래서 문장 끊어 읽기를 잘 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또 비슷한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압축하고 체계적으로 잘 순서를 배열해야 한다.
다만 계속 정리작업이 늦어지고 있다. 그래도 이미 한 번 적은 내용은 조금은 여유가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천천히 정리해가고자 한다.
이번에는 「관삼상품」을 살핀다. 여기서 3 상은 생주멸을 말한다. 즉, 생겨난다, 머문다, 소멸한다를 의미한다. 이들은 있고 없음이란 관념을 합해 만든 관념이다.
없다가 있게 되는 것을 생겨남이라고 말한다. 있다가 계속 있는 것을 머묾이라고 말한다. 있다가 없게 되는 것을 소멸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것의 생겨남, 머묾, 멸함이 있다고 여긴다.
중관론에서는 이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런 것들은 '얻을 수 없음'은 '있고 없음'을 떠난다는 뜻이다.
다만, 이는 현실에서 이런 관념을 일으키지 못함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관념으로 가리키는 감각현실을 얻지 못함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본 바탕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먼저 『중관론』에서 밝히고자 하는 초점부터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무언가 있고 없음을 따지게 되는 3 가지 영역이 있다. 본 바탕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을 일단 # - ● - □ 이렇게 구분해 표시해보자. 실재 # - 감각현실 ● - 관념내용 □
이들은 각각 그 특성과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매 상황의 각 단면에 있다.
여기서 생주멸을 얻을 수 없음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이것을 문제삼을 때 이 내용은 관념내용 □ 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감각현실 ●을 일단 '가리킨다'.
예를 들어 꽃이 없다가 핌(생겨남)을 논의하려고 한다고 하자. 또는 연기가 없다고 '생겨남'을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우선 이런 내용은 관념적 내용 □ 이다. 관념적 내용 □ 인 경우에만 그것을 언설로 표현하고 논의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 이다.
그런데 일단, 기본적으로 그런 감각현실●에서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무상삼매해탈]
그런데 『중관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초점은 다음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 주체가 현실에서 그 마음에서 얻어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주체가 관계하지 않고도 있다고 할 본 바탕 실재가 다시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실재가 무언가가 본 주제다. 그것은 또 생사현실 내용이 꿈과 달리 실다운 것인가에 논의 초점이 있다.
그래서 우선 다음을 문제삼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관념분별을 행한다.
어떤 이가 감각현실● 을 얻는다.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관념분별□ 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는 그런 관념분별 □ 이 실답다고 여긴다. 이 말은 그 관념분별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즉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이 실답지 않음은 그 꿈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바다나 황금꿈은 꿈꿀 때 그런 상황에서는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꿈을 깨면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지 못한다. 그래서 꿈은 비록 생생하지만,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이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한다.
지금 중관론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와 같다.
생사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적어도 생사현실에서는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러나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밝히는데 논의의 초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감각현실 ● 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관념분별 □ 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그렇게 관념분별□ 을 일으켜 얻는다. 그렇지만, 그 관념분별□ 은 우선 감각현실● 에서도 얻지 못한다. 또한 본 바탕 실재 # 영역에서도 얻지 못한다.
관념분별□ 은 감각현실 ● 이 아니다. 관념분별□ 은 또한 본 바탕 실재 #의 지위에 있는 실재내용#도 아니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위 내용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관념분별□ 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감각현실● 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본 바탕 실재 #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다음이다. 관념분별 □ 은 감각현실● 안에서 얻을 수 없다. [ 무상 ] 또한 관념분별 □ 이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다. [ 불가득 공] 또한 어느 영역에서도 그 관념분별 □ 을 일으키게 한 참된 진짜 내용인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 무아, 무자성]
그래서 이 논의는 다음에 본 취지가 있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관념 분별이 있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지게 되는 그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는데 그 취지가 있다.
즉, 현실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그렇게 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 특히 본 바탕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 내용을 일정한 조건 상황에서 그렇게 일으킨 것 뿐이다. 즉 침대에 누어서 꾸게 된 바다나 황금꿈과 그 성격이 같다. 그래서 그것은 비록 현실에서 일으켜 얻지만, 그런 사정때문에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밝히려는데 취지가 있다.
즉,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려면,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관념분별 □ 이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음을 밝힘에 초점이 있다.
따라서 중관론에서는 다음을 밝히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그러한 관념분별 □ 은 본 바탕 실재 #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 내용으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 그런 관념분별 □ 을 현실에서 일으키지 못한다. (X) => 그런 관념분별 □ 을 일으키는 감각현실 ● 자체를 얻지 못한다. (X) 그런 내용은 아니다.
중관론을 제시하는 입장도 위 사정은 일반인의 사정과 같다. 즉,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처럼 그것을 실답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다른 영역, 특히 본 바탕 실재 영역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을 붙이자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고 하자.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경험한다. 이 광경을 눈으로 관찰한다고 하자.
이 경우 눈으로 보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연기와 재가 나타남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종이의 사라짐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 경우 생겨남과 멸함이 있다고 함이 오히려 상식적인 입장에 적절하다.
일반적인 경우 위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자신이 눈을 떠서 일정한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일정한 분별 □ 을 일으킨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후 그는 그가 분별한 내용 □ 이 우선 그런 감각현실 ●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그런 분별 내용□ 은 본 바탕 실재#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그런 영역에 있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여기므로 그것을 꿈과는 달리,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그 내용에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매 상황에서 업을 행하게끔 된다. 그런 망집 상태에서는 각 상황에서 도저히 그런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이후 그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근본 원인이 되는 망집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위 내용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현실에서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임하게 된다.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예를 들어 현실에서 바위가 어디 있는가. 안경이 어디 있는가. 영희가 어디 있는가.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는가. 이런 것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래서 일단 그렇게 문제되는 내용을 손으로 가리켜보기로 하자.
이 상황에서 대부분 손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앞에서 ●로 표시한 감각현실● 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한 분별내용□ 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이런 망집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망집은 실재 영역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 ● 이나 관념 □ 일체는 본 바탕 실재# 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실재 # 영역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 ● 과 분별 □ 을 얻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생사현실 내용 일체를, 꿈과 달리,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 #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 감각현실 ● 을 놓고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위와 마찬가지 구조로 제시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 ● 은 현실에서 얻는다. 또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 □도 있다.
그러나 감각현실 ● 은 관념분별 □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 상무자성 ] 또한 감각현실 ● 은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 불가득 공] 또한 어느 영역에서도 그런 감각현실 ● 을 얻게 한 참된 진짜 내용인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 무아, 무자성]
즉 감각현실 ● 이나 관념 내용 □을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내용은 현실에서 얻지만, 그것은 꿈과 같은 성격으로. 얻는 것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꿈과 같음'은 현실 내용이 본래 본 바탕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본래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다만 현실에서 그처럼 얻는 것임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일체는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 그래서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는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탐욕 분노와 같은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 그리고 다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망집]에 바탕해 업[행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 그래서 일단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 그러려면 우선 생사현실에서 만들어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성취해야 한다. =>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에서 좋은 내용을 성취할 방안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 그래서 결국 생사현실에서 수행덕목을 집착없이 원만하게 성취해야 한다. => 그러려면 그런 수행덕목도 실답지 않음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 그래서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 가운데, 수행덕목은 원만히 잘 성취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본 논의는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함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 □ 이 본 바탕실재# 에서 얻을 수 없음을 잘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분별 내용□ 이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은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우선 이에 대한 원칙적인 방안은 문제되는 각 내용을 직접 붙잡고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에서 이미 제시되어서 이를 살폈다.
그런데 『중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시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취해 재차 살피게 된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다시 고집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실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생사현실을 실답게 느끼게 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경우 이를 보충적으로 논파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동원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현실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즉 그런 내용은 꿈과 성격이 다르다. 즉, 생사현실에서만 얻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 관념분별 □ 들은 다른 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다. 특히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더 나아가 그런 관념 내용 □에는 참된 진짜 내용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래서 침대에서 꾸는 바다꿈과 같은 성격이 아니다. => 실다운 내용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자.
『중론』은 이런 상대의 주장을 논파시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일단 그런 상대 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임시적으로 일단 논의 대상으로 올려 놓는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다시 보충적으로 제시해 논파하는 것이다.
관념분별 □ 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처럼 일으켰다. 생주멸이란 관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관념분별 □ 이 실재 영역 # 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함을 살피는데 취지가 있다.
그 문제를 밝히는데는 다양한 방식이 동원될 수 있다.
우선 그런 관념이 자체적으로 서로 모순됨을 밝혀 비판할 수도 있다.
한편, 그런 내용은 자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볼 수 없는 사정을 밝혀서 이를 깨뜨릴 수도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어떤 주체가 일정한 사정에서 일정한 관념은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어떤 관념적 내용을 단순히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도 관념영역에서는 제멋대로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도깨비뿔에 붙은 바퀴 이런 것과 같다. 이들은 그런 관념영역 밖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본질적으로 희론적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와 달리, 그것을 실재한다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 각 경우 핵심적 차이는 다음이다.
우선 그 내용이 희론적으로 단순히 관념영역에서만 불러 일으킨 내용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관념영역 밖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고, 또 그처럼 얻어져야 한다. 한편,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실재 영역에서도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내용은 그런 주체나 다른 내용과 관련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그처럼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 경우라면 그 내용은 꿈과는 그 성격이 달라서,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그런 내용은 다른 일정한 내용과 관계가 되어야만 일으켜 얻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은 그런 사정으로 위와 같은 실재 영역의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일정한 내용과 관계가 된다고 하자. 그것은 그런 내용과 관계를 떠나면 얻을 수 없음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또 그렇다면 그것은 꿈과 같은 성격임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관념분별이 어떤 것과 관계되어서만 성립하는 것임을 빍혀 낸다고 하자. 그러면 그 관념분별이 실재영역에 있음을 깨뜨린 것도 된다. 그래서 상대의 그런 망집을 깨뜨리려면 먼저 상대가 주장하는 관념을 붙잡아 그런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이들은 원칙적인 방식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상대가 주장하는 관념적 내용별로 그런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조적인 방안이 된다.
생주멸 3상이 실답게 있음을 깨뜨릴 때도 마찬가지다. 『중론』에서 이것을 본생과 생생의 관계로 놓고 살펴서 깨뜨린다. 그래서 이들 관념은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하는 내용이 아님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A 라는 내용이 실재한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하자. 이는 A 라는 내용이 어떤 주체의 주관과 관계없이,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떠나서도 그대로 그처럼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A 라는 내용은 B 라는 내용이 반드시 있어야만 성립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B 라는 내용이 없으면 A가 없게 됨도 의미한다. 즉 B 가 있으면 A 가 있다. 그런데 B 가 없으면 A 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B 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A 는 'B 와의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A 는 실재 영역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관삼상론」에서 살펴는 '생주멸'을 놓고 보자. 현실에서 다양한 생활경험을 하는 가운데 생주멸에 대한 관념을 일으킨다. 이미 이 사정을 보았다.
불을 종이에 붙이니 종이는 사라지고, 연기는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서 '생주멸'이란 관념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여기서 그런 생주멸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부분부터 잘못된 망상분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곧 그런 관념분별이, 꿈과 달리, 실다운 내용임을 내세운 것이 된다. 이는 그런 내용이 관념 영역 외로, 실재 영역이나, 감각현실 영역에 그처럼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다시 그런 망집에 바탕한 업을 일으키는 배경이 된다. 그러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려면,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부분부터 근본적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은, 꿈에서는 얻지만, 현실에서 얻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일으키는 이들 관념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는 얻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생주멸이라는 관념내용을 일으킨 경우, 이에 그치지 않고, 그런 내용이 '실재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 (=실답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런 고집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론에서 논의하는 초점이다.
그런데 우선 생주멸하는 내용[=유위법]을 놓고 살펴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전제 때문에=즉, 그것을 생멸하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그런 어떤 a는 생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A 는 '생멸'을 떠나서는 제시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생멸을 말하려면, 또 반대로 그처럼 생멸하는 그 무엇 A 를 전제해야 한다. 즉, 그런 무엇, A 없이, 그냥 막연히 생주멸을 세우기 곤란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그 무엇 A 과 '생멸'이란 관념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즉, 이들 관념은 관념영역 안에서 그런 관계에서만 성립시키게 되는 내용들이다.
또 사정이 그렇다면, 이들 내용은 이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도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는 주장을 깨뜨린 것이 된다.
그런데 이제 「관3상론」에서는 다시 '생주멸' 이란 관념자체의 '실재'여부가 문제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런 '생주멸'이란 내용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도 그대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생주멸이란 내용도 앞과 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즉, 이들 내용도 그런 관계에서만 성립시킬 수 있는 관념적 내용일 뿐이다.
물론 앞처럼 살피려면 먼저 경우수를 나눠야 한다.
즉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 생멸을 떠난 내용(무위법)이라고 하는 경우도 나열해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는 자체적 모순이 발생함을 통해서 깨뜨리게 된다. 이 경우는 풀어 말하면, 생멸함이, 생멸을 떠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생멸하는 내용(유위법)이라는 경우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본생]과 그 생멸[생생...]이 다시 서로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도 그런 내용은 실재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밝히게 된다.
결국, 그런 생주멸이란 내용은 단순히 생사현실에서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그런 영역 밖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실답지 않다. => 그래서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 그런 망집을 떠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행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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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vh1271
◈Lab value 불기256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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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ophile Steinlen-l-epouvantail-bourgeois
Artist: Theophile Steinlen https://en.wikipedia.org/wiki/Théophile_Steinlen Title : l-epouvantail-bourgeois Info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uzhou_Street_in_the_Summer_Palace
https://en.wikipedia.org/wiki/File:Suzhou_Street_in_the_Summer_Palace.JPG English: Suzhou Street in the Summer Palace (Beijing, China). Author Tojan76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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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하루 종일 한증막에서 지내면 지치기 쉽다. 요즘 온도계를 보면, 체온과 거의 비슷하다. 여름과 겨울 가운데 어느 계절이 더 힘든가. 그래도 여름이 조금 낫다고 여기게 된다. 노숙하는 입장에서는 여름에는 그래도 밖에서 잠 잘 수도 있다. 그런데 겨울은 곤란하다.
나중에 시원한 거리를 다닐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 때도 오늘 너무 더워서 힘들던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덥다고 누어서만 지내는 이에게는 결코 해가 뜨지 않는다. 모 배우가 영화에서 후배 위하는 마음으로 해준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나중에 잊혀지기 쉽다. 그러면 지내기 편한 날씨가 되어도 그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다. 더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렇게 더워서 좋은날에도 그 가치를 모른다. 영하 십도 추위에 공원에서 떨며 지내던 그 상황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정이 현실 생사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3 악도에서 지내던 기억을 잊었다. 그래서 그 부작용이 심하다.
생사현실에서 이런 자세 차이가 중요하다. 생사현실을 대하는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생사현실 어느 상황에서도 지극히 평안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극심한 가난, 질병등과 같은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데 반대로 자세를 잘못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반대로 지극히 좋다고 할 상태, 건강하고 풍요를 누리는 상황조차도 고통으로 여기고 대하게 되기 쉽다.
이것이 수행에서도 문제된다. 본래 생사현실에서 생멸과 생사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면 생사현실은 곧 그런 생사고통을 떠나 있는 니르바나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생사 즉 열반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대한다고 하자. 그래서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나 생멸 고통이 생사현실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 본래 생사고통을 떠나 있는 니르바나 상태를 대하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매순간 겪게 된다. 또 그런 가운데 장구한 무량겁을 헤메 돌아다니게 된다.
이 차이가 대단히 크다. 본래 실답지 않은 내용이 어떻게 이런 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 본래 실답지 않은데 그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을 붙잡고 그것을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것 뿐이다. 그런데 그 상태로 무량겁을 지내게 된다.
이미 이전글에서 이 사정을 밝혔다. 이것을 수행과정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말처럼 그것이 쉽지 않은 배경사정이 있다. 처음 문제를 잘못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매 상황을 대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피는 『중론송』은 이 첫 문제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보조적인 가정적 항변 성격을 갖는 논의다. 즉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보충적으로 살피게 되는 논의다. 즉 망집 증상이 아주 심하고 고집이 드센 상대에게 보충적으로 제시되는 논의다. 그러나 망집 증상이 심한 상태에서는 『중론』에서 제시하는 논의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면을 붙잡고 그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잘 되면 『중론송』 논의는 모두 다 같은 취지의 결론을 여러 형태로 설명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Yuquan Shenxiu [san-chn]
catvāro yonayaḥ 四生 [san-eng]
ahaṅkāraṃ $ 범어 false ego [pali-chn]
danta-kaṭṭha 楊枝, 齒木 [pal-eng]
padhaavati $ 팔리어 pa + dhaav + aruns out or forth. [Eng-Ch-Eng]
千缽經 The Qianbo jing, 10 fasc. (T 1177A.20.724-776); an abbreviated title of the Dasheng yujia jingang xinghai manshushi^i qianbi qianbo dajiaowangjing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缽大教王經 [Muller-jpn-Eng]
優波難陀 ウパナンダ (person) Upananda [Glossary_of_Buddhism-Eng]
ARHATSHIP FOUR STAGES ☞ See also: Anagamin; Arhat; Beyond Learning Stage. Refers to four levels of Enlightenment, culminating in Arhatship. Arhats are no longer subject to rebirth in Samsara, i.e., in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Editor: na “These are the four stages of enlightenment on the Theravada path, namely, the stage of Stream-enterer (Srotapanna), the Once-returner, the Non-returner (Anagamin), and the Arhat.” Chan: 489 #0608 【book-page-40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