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최상

잡아함경_K0650-T0099-001-02 본문

근본불교_대승불교_종교적진리와실천

잡아함경_K0650-T0099-001-02

선현 2021. 7. 30. 21:08



®





『잡아함경』
K0650
T0099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잡아함경』 ♣0650-001♧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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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경』 ♣065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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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정관과 염리의 관계
○ 경전내용 요약
○ 5온과 현상의 범주
○ 불교의 기본적 진리
○ 일체에 공통된 내용
○ 개인적인 삶의 기본목표
○ 5온과 무상,고,공에 대한 의문내용
●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
● 색, 수, 상, 행, 식 분류의 의미
● 일체를 무상, 고, 공, 비아라고 보는 근거
● 무상, 고, 공, 비아를 근거로 싫어하여 떠날 이유
● 무상, 무아, 공과 수행목표
● 해탈지견의 내용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 수행의 근거
- 법문의 이해와 실천 수행의 순서문제
- 법문의 이해와 수행
● 생사고통의 해결과 수행 그리고 현실의 정체 이해의 관계
● 존재에 대한 일반적 망집-업-생사고통과 수행
-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행의 필요성- 생사고통의 제거
-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
- 생사현실의 정체와 성격
-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과정
- 현실의 정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올바른 이해
- 생사고통의 기초적 예방방안 ( 10 선법 및 인천교적인 방안)
- 3계의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 현실의 정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망집의 제거
-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잘못된 분별과 집착의 제거 [아집(我執) 번뇌장(煩惱障)의 제거 ]
- 일반 현상에 대해 잘못된 분별과 집착의 제거 [법집(法執), 소지장(所知障)의 제거 ]-
- 생사현실 일체를 부정하려는 입장과 긍정하는 입장 - 생사 즉 열반의 이론적 이해
- 생사현실내 안인성취와 생사 즉 열반의 실증
- 생사고통을 방치해도 무방하다거나 막행막식도 무방하다는 잘못된 악취 공견의 제거
- 무량행문을 통한 무량 방편지혜 구족과 중생제도

- 일체를 분류하는 여러 방식과 5 온
- 색수상행식의 총괄적 의미
- 넓은 의미의 색과 좁은 의미의 색
- 수의 의미
- 상의 의미
- 행의 의미
- 식의 의미
- 식의 다양한 의미
- 마음작용에서 기관과 작용 결과내용의 구분

● 색, 수, 상, 행, 식 분류의 의미
- 현실 일체를 포함하는 범주로서 5 온
- 자신의 구성요소로서 5 온
- 평소 눈을 떠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의 정체
-- 좁은 의미의 색
-- 넓은 의미의 색(감각현실) 가운데 일부
- 자신이 얻어낸 내용 (마음 내용)
- 5 온과 자기자신의 관계
- 5온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와 다른 일반적인 분류방식과의 관계
- 각 표현이 가리키는 부분의 공통성과 그 의미, 성격, 지위의 차이
- 물질과 정신의 분류에서 물질이 가리키는 부분과 성격 지위
- 현실에서 물질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에 대해 일으키는 잘못된 판단
- 일정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게끔 되는 배경사정
- 잘못된 신견의 방치와 생사고통의 문제
- 분별기 신견이 잘못인 사정
- 나머지 부분이 외부 세상이 아닌 사정
-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 아닌 사정
- 외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닌 사정
- 정신 밖 외부 물질이 아닌 사정
- 감각현실 등을 물질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입장 - 생리학자의 입장
- 정신적 내용으로 이해하는 입장 - 유식학적 입장
- 다른 사람이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에서의 잘못된 추리
- 철수가 스스로 자신의 몸, 외부세상, 외부대상 등으로 이해하는 부분과 판단 오류
- 일반적으로 물질로 여기는 부분에 대한 판단 오류문제
- 평소 정신 작용으로 이해하는 내용
- 감각현실을 정신작용 밖 외부물질로 이해하게 되는 사정
-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찾는 사정
- 감각현실을 내외로 구분해 물질적 요소로 이해하게 되는 사정
- 한 주체가 눈을 떠 얻어낸 내용이 정신적 내용인가 물질적 내용인가의 문제
- 감관으로 잘못 이해
- 내용을 얻는 영역이 육체인가 마음인가의 문제
- 1 의 입장에서 행하는 판단

○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가 갖는 의미차이
- 감각현실 부분을 관념으로 잘못 여기는 오류
- 감각현실 또는 관념을 대상으로 잘못 여기는 오류
- 일정한 감각내용이 다른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대상으로 잘못 이해하는 오류
- 관념을 대상으로 잘못 여기는 오류
- 실재에 대한 잘못된 판단

● 일체를 무상, 고, 공, 비아라고 보는 근거
- 일체에 대해 공통적으로 성립되는 진리 (5법인)의 성격
- 망집에 바탕한 희망과 일치하지 않는 5 법인
- 권위적 판단에 대한 맹목적 추종
- 합리적 판단에 의한 이해

○ 현상 일체가 영원하지 않다고 제시하는 근거
○ 일체를 고통이라고 제시하는 근거
○ 일체의 본 바탕 실재
- 현실 내용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본 바탕 실재의 문제
- 실재내용과 감각내용의 관계
- 실재를 찾는 문제
○ 감각현실과 실재내용의 관계
○ 비아, 또는 무아, 무자성 판단 문제
- 논의의 실익 문제
- 실체없음과 실재의 공함의 관계

● 무상, 고, 공, 비아를 근거로 싫어하여 떠날 이유
○ 마음의 해탈(심해탈)의 효용
- 생사고통의 예방과 원인의 제거
- 생사고통을 받는 과정
- 가치에 대한 잘못된 판단
- 잘못된 희망의 잘못된 방안을 통한 추구
-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의 모습
- 현실에서 가치없는 것에 대한 집착의 제거
- 집착의 근원- 자신과 생명 등
- 생사고통의 원인으로서 집착
-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
○ 수행목표와 수행방편에 대한 집착의 제거
○ 집착을 버림과 적극적 수행과의 관계
○ 마음의 해탈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의 관계


● 무상, 무아, 공과 수행목표
● 해탈지견의 내용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 수행의 근거
● 해탈지견의 내용
○ 해탈과 단견의 차이
○ 윤회
○ 윤회와 삶의 목표
○ 윤회의 증명 문제
○ 윤회의 주체와 나의 문제
○ 현실에서 생각하는 나의 정체의 문제점
○ 현실에서 자기자신으로 보는 내용의 검토
- 상일성
- 주재성
- 대상에 대한 주관
[반복]
- 다른 이 철수2!의 감각과정의 관찰
- 2! 감각결과는 2! 내부에서의 변화
- 평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의 정체
- 1 자신의 정체성 - 1 이 얻어낸 내용 일부분은 실질적 자신이 아님
○ 자신의 실재적 정체성
○ 자신의 현상적 정체성 - 자신의 정신의 위치
○ 자신의 현상적 본 정체성 - 정신과 육체
○ 정신과 육체의 관계
○ 윤회의 주체와 마음의 관계
○ 윤회의 주체로서 근본정신(아뢰야식)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 수행의 어려움과 수행의 가치의 인식 필요성
○ 수행의 목표의 가치
○ 수행의 현실에서의 가치
○ 윤회를 전제로 한 수행의 가치
[반복]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 수행의 근거
○ 무상, 고와 수행목표로서 해탈과 열반의 성격
- 무상한 것은 왜 곧 고통인가?
- 현실을 모두 즐거움으로 본다는 반대 주장
- 비관주의와 불교의 차이
○ 무상한 현상에 목표를 설정하는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 인과상 나쁨의 결과를 가져오는 좋음
- 좋음을 얻는 기간의 문제
- 좋고 좋음과 단순한 좋음의 차이
- 일시적인 좋음의 문제
- 고통의 임시적 해결과 근본적 해결방안의 문제

○ 고통과 열반의 관계
- 생멸 즉 고통이 없어진 상태로서의 열반
○ 생멸을 멸하는 방안 -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 회신멸지(灰身滅智) 니르바나의 문제점
- 일반인의 입장에서의 문제점
- 수행자의 입장에서 회신멸지 상태의 문제점

○ 생사 즉 열반의 입장과 생사현실내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의 관계
- 생사 즉 열반의 근거 1
- 생사 즉 열반의 근거 2
- 생사 즉 열반의 근거 3
- 생사 즉 열반과 생사현실내 깨달음의 필요성

○ 생멸현상에 본래 생멸이 없음
>>>>>[생멸하는 현상에 생멸이 본래 없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
- 3 가지 존재영역 - 의타기상 변계소집상 원성실상
- 감각현실 영역에 생멸을 얻을 수 없음
- 공한 실재와 현실은 서로 떠나 있지 않음
- 현실에서 실다운 생사고통은 무아 무자성, 공하여 얻을 수 없음
- 생사즉 열반과 수행의 필요성
-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
- 의타기상, 변계소집상, 원성실상의 관계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 관념과 감각현실 사이의 망상분별관계
- 실재와 관념, 감각현실의 관계
- 실체와 관념, 감각현실의 관계
- 일정 내용을 얻지 못하고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
- 귀류적 논증을 통한 이해
- 관념이 실답지 않은 사정 - 환자와 가족의 비유를 통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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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 열반과 다양한 수행목표 선택 문제
-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과 생사 즉 열반
- 생사고통의 해결과 꿈의 비유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문제점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의 잘못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잘못
- 현실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는 잘못
- 불교와 비관주의
- 불교와 단순한 낙관주의와의 차이
- 개인의 해탈에 그치고 중생제도를 외면하는 잘못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 없음에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 생사 즉 열반 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방안
○ 종교 일반의 현실부정 공상주의적 이상성과 불교
- 생사즉 열반의 2 중적인 측면- 현실 긍정과 부정
○ 현실부정적인 측면 - 깨끗하지 못한 현실의 부정
○ 현실긍정적인 측면 - 깨끗한 형태로 현실의 긍정
○ 윤리적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
○ 생사즉 열반의 현실긍정적 측면과 단순한 현실긍정과의 차이
○ 보살의 수행 목표
-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과 생사윤회 [변역생사]
- 무상한 현실내 수행의 의미 - 현실 부정과 현실 긍정과 이상추구
● 공, 비아와 수행목표의 관계
○ 공과 수행목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점
- 생사현실에서 공의 이해가 갖는 효용과 본 바탕의 관계
○ 수행에 대한 집착 제거 필요성
- 기본적 수행방안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 분량의 장단과 원본 문제
- 경전 전파 경로와 원본 문제
- 다양한 설법 방식과 원본 문제
- 다양한 전파 번역 과정과 원본 문제
- 깨달음을 주는 소재로서 경전의 가치

- 마침




=>


○ 열반과 다양한 수행목표 선택 문제

현실에 다양한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그 원인은 이렇다.

본래 실상에서는 생멸이나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한 니르바나 상태다.
그래서 본래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각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분별을 행한다.
또 그런 가운데 망상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런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따라서 본래의 니르바나 상태를 망집이 덮어 가리게 된다.
따라서 이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 본래의 니르바나 상태가 드러나게 된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이 평온하다.

그런데 어떤 이가 잠만 들면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자.
그런데 그 꿈을 깨어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꿈에서 겪은 악몽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본래의 현실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런 현실은 꿈에서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현실은 본래부터 꿈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본래부터 평온한 상태였던 것이다.

생사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멸현상이 멸하고 열반을 증득한다.
이런 경우 그 열반은 본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설산동자의 게송과 같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부분이다.

여기서 다음처럼 제시한다.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본래 실재는 2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아 청정하다거나 즐겁다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처음 생멸 현상이 문제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고통을 겪게끔 된다.
그리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다.
오염된 내용이다.
그러나 실재는 그것을 떠난 상태다.
따라서 실재는 이런 현실내용에 상대하여 청정하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안온하며 즐겁다라고 표현한다.

본래 바탕은 모두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다.
그러나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 바탕해 생사현실에 생멸과 생사가 있다고 여긴다.
이런 경우 본 바탕인 니르바나 상태를 망집이 덮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따라서 이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살펴야 한다.
그것이 곧 수행방안이다.

이 상황을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본 바탕은 깨끗하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천을 덮었다.
그리고 여기에 온갖 잘못된 내용을 적어 놓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행위한다.

그리고 이후 또 다음 천을 마련한다.
그리고 계속 잘못된 내용을 적어 나간다.
그런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본바탕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렇지만, 이는 여전히 문제된다.
그래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

이 경우 다음 3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그 천을 걷어내 깨끗한 바탕만 남긴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그런 천을 만들어 덮지 않는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또 다음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천 위에 선을 그어 잘못된 내용이라 표기한다.
그리고 본 바탕에 상응하는 깨끗하고 올바른 내용만 적어 넣는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이던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천과 그 내용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개인적인 수행 목표만을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방안으로 충분하다.

-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과 생사 즉 열반

그러나 다른 생명들의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의 해탈 열반만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함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런 경우 다시 다른 수행방안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라한과 연각, 부처의 상태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아라한과 연각은 자신의 해탈, 열반을 성취한 상태다.
반면, 보살과 부처는 모든 생명을 생사고통의 윤회에서 제도함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중생들이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 복덕과 지혜에 다시 차별이 있다.
따라서 보살과 부처를 수승한 상태로 보게 된다.
더 나아가 부처를 가장 이상적 상태로 보게 된다.
이는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하고 법신을 증득한 상태다.

따라서 수행목표는 이런 여러 상태를 나누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 방향을 찾아 나가게 된다.

자신이 병이 걸려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당장 자신의 병만 낫는 것을 목표로 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다른 이의 병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를 목표로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의사를 통솔하며 환자를 치료해가는 병원장이 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또는 의사를 가르치고 교육하는 의대 교수나 총장이 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어떤 이가 일정한 성품을 지니고 의사의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의사라고 부르게 된다.
이런 경우 의사가 되기 위해 갖출 성품이 있다.
그리고 이는 구체적 의사 개개인과는 별개로 추상적으로 따로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각 개인이 그런 상태를 증득한다고 하자.
그러면 비로소 의사가 된다.

수행도 사정이 같다.
각 개인은 처음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
그리고 수행 목표를 증득해간다.
그러나, 각 개인의 목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생사현실은 본래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가운데 일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나머지를 대상이나 외부 세계라 잘못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런 망집에 바탕해 행위해 나간다.

이처럼 처음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상태에서 수행을 행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니르바나를 얻기 위해 다음 방안들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있다.
각 주체는 일정한 근본정신구조와 기제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런 가운데 우선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분별하고 집착한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망식이 문제 된다.
이를 근본적으로 모두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한다.
그런 가운데 근본정신과 공한 실재, 진여만 남겨 둔다.
그렇게 회신멸지의 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러면 본 상태인 니르바나 상태로만 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다음 방안도 가능하다.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다.
즉, 생사현실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한다.
그래서 분별과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 그대로에서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 두 방안 가운데 어떤 방안이 나은가

자신의 고통의 소멸만을 목표로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를 더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신멸지의 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생명을 구제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중생을 구제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중생이 머무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같이 임해야 한다.
따라서 뒤의 방안이 낫다.

경전에서는 다음처럼 제시한다.
보살 일천제는 열반에 들지 않는다.

자비심을 갖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자신이 열반에 들면, 중생제도가 곤란하게 된다.

생멸하는 현상을 그대로 둔다.
그리고 그것이 본래 니르바나임을 관한다.
그리고 그에 집착을 두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부터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그런 경우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니르바나와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할 수 있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잘 해나갈 수 있다.


- 생사고통의 해결과 꿈의 비유

이는 꿈의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꿈을 꿀 때마다 악몽을 꾸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후로는 꿈에 들지 않고 늘 깬 상태로 지내는 방안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꿈을 깨어 그것이 꿈임을 알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꿈을 깨면 꿈이라는 사정을 안다.
그러나 꿈을 꿀 때는 그것을 잘 모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여전히 꿈에 들면 문제가 반복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다음처럼 노력을 한다고 하자.
그래서 꿈을 꿀 때도 그것이 꿈임을 알고 꿈을 꾸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설령 꿈을 꾸더라도 꿈을 깬 상태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생사현실의 수행도 사정이 같다.
어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그 본 바탕이 니르바나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이 꿈과 같음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한다.
이런 경우에도 그 사정을 이처럼 잘 관한다.
그리고 이를 평안히 대할 수 있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 일체를 니르바나 상태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곤란하다.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니르바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생사현실은 본래 니르바나 상태다.
그럼에도 그는 그 생사현실을 생사고통으로 대한다.
생사현실에서 비교적 평안할 때는 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생생하게 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이는 다음 비유 상태와 같다.
꿈을 깨면 꿈인 것을 안다.
그러나 꿈꿀 때는 그것을 모른다.
이런 경우와 같다.

이 어느 경우나 본 상태는 니르바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니르바나 상태에 이르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 안에서 번뇌와 집착을 없애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니르바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상태로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먼저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이후 다음 생을 받아나가지 않게 된다.

한편, 생멸 현상을 그대로 니르바나로 관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니르바나 상태처럼 여여하게 임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역시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망상분별에 바탕한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생사현실에서 번뇌와 집착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두 경우에 모두 공통된다.
즉 어느 경우나 수행을 통해 망상 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후 두 유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문제점

- 망상분별과 집착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

생사에 머물면서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한다.
그리고 수행을 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다음 자세가 요구된다.

매번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을 얻게 된다.
그리고 번번히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갖기 쉽다.
그래서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반복하여 제거한다.
그러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난 상태에 늘 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 수행을 시작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시 일반적인 상태로 물러나기 쉽다.
즉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나기 쉽다.
그간의 오래된 습관으로 인해서다. [훈습된 습기(習氣)]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꾸준히 머물러야 한다. [불퇴전위]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함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다.
즉, 생사 즉 열반이다.
이는 일체 생멸현상이 '본래' 니르바나임을 말한다.
그래서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 이 내용은 다음 사실도 함께 제시한다.
본 사정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생사 윤회를 받아나가고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사실도 함께 제시한다.

그래서 이는 생사현실이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런 수행이 필요없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생사현실이 본래 니르바나다.
그럼에도 생사 즉 열반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간다.
이런 경우 생사현실은 문제다.
따라서 생사 현실 안에서 생사현실이 곧 열반임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수행에 정진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처럼 잘못 생각하기 쉽다.

생사현실은 곧 니르바나다.
그런 사정으로 수행 노력은 전혀 필요없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원래 현실에서 살던 것처럼 그냥 살아가도 다 무방하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생사 즉 열반은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 속에 살아가도 무방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본래 생사 즉 열반이다. 그래서 본래는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생사의 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뒷 부분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제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착없이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지 않는다.

현실에서 대부분 상식적으로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분별(망상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이에 바탕하여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갖는다.

1-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한다.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 생각을 갖지 못한다.

2- 또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한다.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을 함부로 침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무방하다고 여긴다.

3- 또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이 침해되고 나쁨을 받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분노, 슬픔, 원한, 억울함, 미움과 원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상대에 보복 가해를 행하고자 하게 된다.


생사 즉 열반이란 말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라는 취지가 아니다.
그래서 이처럼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런 상태는 모두 문제 상태다.
각 생명이 이런 행위 반응을 해나간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이 고통과 악의 상태가 된다.
본래 생사가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그렇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의 가르침은 다음을 의미한다.
망집을 일으키면 이런 행위를 행하게 된다.
따라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본 바탕에서 이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갖는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이런 행위를 중지하고 끊어야 한다.
이런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다.



- 현실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함


현실에는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다.
그런 가운데 주로 좋음만을 찾아 긍정적으로 임한다고 하자.
이런 자세가 현실에서 올바른 수행이 되는가가 문제된다.

현실을 단순한 낙관주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자.
현실이 어떤 내용이던 좋게 생각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나쁜 내용 마저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다.


한편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좋은 면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또 현실을 좋게 생각할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 들어가 현실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리고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쁜 것이 있다고 하자.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다. 그래서 언젠가 사라진다. 그래서 좋다.

또 비록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라도 이를 다른 일과 비교하여 좋다고 여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더 큰 나쁨과 비교한다.
또는 또 다른 나쁨과 비교한다.
또는 그것이 없었으면 대신 있었을 나쁨 등과 비교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상태도 좋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한편, 이미 이루어진 좋음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오로지 그 측면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쁜 측면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있다.

또 앞으로 좋음을 가져다 줄 측면을 미리 내다 본다.
그리고 미리 그 성취를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성취 실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또 성취될 수 있는 원인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 않은 상태를 성취된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한편,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 있다고 하자.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도 변화한다. 그래서 좋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현실은 모두 나쁨과 좋음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이들은 좋은 측면을 찾아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방안이 된다.
이런 식으로 현실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임할 수 있다.
그리고 낙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나갈 수 있다.


올바른 수행목적과 관련하여 이상적인 기준이 있다.
보통 현실은 이런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 경우 이상적인 수행과 관련해 현실에 긍정적인 자세로 임한다고 하자.
이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내용을 긍정하며 수행에 임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다.
현재만 보면 대부분 생명이 많은 번뇌와 집착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생명은 장차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런 측면을 찾아내 강조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이와 달리 무조건 현실을 좋게 평가하려는 입장이라고 하자.
그런 단순한 낙관주의는 현실의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경우 현실의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하기 쉽다.
그리고 문제를 증가시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현재 가난한 이가 있다.
그런 가운데 물질에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언젠가는 자신도 큰 부자가 되어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낙관한다고 하자.

또는 어떤 이가 원한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원한을 갚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복수할 기회가 찾아오게되리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낙관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기본적으로 망상분별에 바탕한 것이다.
그리고 탐욕이나 분노의 번뇌와 집착에 바탕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무조건 좋은 측면만 취하는 입장은 이와 같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

단순한 현실적 낙관주의는 극단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훔쳐 가지는 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이가 피해를 보아 나쁘다.
따라서 그런 상태는 좋지 않다. 그래서 이를 중단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외면한다.
그리고 물건을 훔치는 것을 좋다고 여긴다.
또 그런 일을 행하면 체포당하고 교도소에 가게 된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하고 낙관하며 보낸다고 하자.
그런 자세는 문제가 된다.

한편, 그런 이가 붙잡혀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영원히 갇혀 있지 않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풀려날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다시 도둑질을 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세도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좋지 않은 자세가 된다.


- 불교와 비관주의

현실을 무조건 좋게 여기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나 불교에서는 현실에서 나쁨을 부각시켜 집착을 제거하려 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과는 반대된다.

현실에는 좋음과 나쁨이 섞여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이들 현실 일체를 모두 고통으로 본다. [일체개고]

즉, 나쁨은 나뻐서 나쁘다. [고고]
그리고 좋은 것도 그것이 무상하여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쁘다고 관한다. [괴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라고 하자. 그래도 이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쁘다[행고]
이처럼 본다.

이는 불교가 특별히 모든 것을 나쁘게 대하려는 입장 때문이 아니다.


현실에는 나쁨 외에도 좋음이 섞여 있다.
그래서 낙관주의 입장에서는 각 현실에서 좋음을 찾아 낼 수 있다.
즉 현실을 정반대 방향으로 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좋음은 나쁨을 그 안에 갖고 있다.
그리고 장차 나쁨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이는 불완전한 좋음이다.
그래서 이는 이상적인 목표 상태로 볼 수 없다.

이상적인 상태가 되려고 한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에 있는 나쁨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여야 한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야 한다.

현실의 문제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에 집착하여 안주한다고 하자.
더 나아가 현실에서 오로지 좋은 면을 찾아 응시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쁨이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 만족해 머물게 되면 오히려 문제다.

따라서 현실 안에 잠재된 문제점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 망상분별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불교에서는 현실 일체가 고통임을 드러내 제시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오로지 좋은 면을 찾아 응시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쁨이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즉,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여야 한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 망상분별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의 문제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에서 일부 좋은 점을 찾아낸다고 하자.
그리고 이에 집착하여 안주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문제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직시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 불교에서는 현실 일체가 고통이라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

- 불교와 단순한 낙관주의와의 차이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현실 긍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다.

한편, 현실에서 무조건 좋음을 찾고 단순히 긍정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사 즉 열반은 이런 자세와는 구별해야 한다.
즉, 단순한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이 차이는 현실에서 나쁨에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나쁨이 본래 생멸현상 안에 실답게 있지 않음을 관한다.
그리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그래서 본래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한다.
이런 수행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이에 반해 단순한 낙관주의는 다음과 같다.
좋음과 나쁨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나쁨을 외면한다.
그리고 좋음을 집착하여 찾고 구한다.
그래서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부정적인 면을 지닌다.

즉, 망상분별과 집착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이 경우에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문제를 갖는다.
즉, 집착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 갈증과 불쾌를 느낀다.
그리고 집착하는 바가 무너질까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린다.
또 집착하는 바가 무너져 사라지면 고통과 불쾌를 받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갖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쁨을 없애지도 못한다.
그런 가운데 당장의 좋음에 집착한다.
그래서 더 큰 나쁨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생사 고통을 더 증가시킨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올바로 보라는 것이다.


★★★

- 개인의 해탈에 그치고 중생제도를 외면함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사정을 관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
그로 인해 그 수행자는 이제 어떤 현실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사현실에서 다른 생명들은 여전히 그런 사정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여전히 고통을 받아 나간다.
현실에는 이처럼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다른 생명들이 고통을 제거해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끝내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수행자 자신의 입장에서는 비록 문제가 없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모든 생멸현실은 본래 생멸이 없다.
그래서 본래 니르바나다.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함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제 해야 마땅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여기기 쉽다.
또는 반대로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여기기 쉽다.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자.
그래서 어차피 차별없다면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상태를 왜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에 정진해나가는 입장이 있다고 하자.
이는 선취공견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생각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따라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악취공견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공하다.
본래 생멸이나, 생사도 얻을 수 없다.
선악의 차별도 본래 없다.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다.
일체가 다 니르바나다.
이런 사정을 깨닫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린다.

그런데 실제로 행하는 일은 기존에 행하던 습관[훈습된 습기]에 바탕한다.
그래서 평소에 집착하던 내용을 그대로 고집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이를 악취 공견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악취공견을 취하고 고집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평소 탐욕을 갖던 것을 그대로 탐욕을 갖고 행한다.
그리고 분노를 갖던 것에 그대로 분노를 일으켜 행한다.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그런 경우 그 결과로 역시 고통스럽고 악한 현실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런 현실도 니르바나의 바탕에 본래 있다.
이 점은 같다.
본래 공은 이런 경우도 그러함을 의미한다.
니르바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그가 실제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론상으로는 마찬가지다.
또 그에 따라 그 혼자만은 그 상태에서 여전히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가 지옥과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어도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생명에게는 그로 인해 고통과 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점이 문제다.

또한 악취공견을 취한 이라고 하자.
이런 경우 사실은 수행과 깨달음이 부족한 상태다.
그래서 공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공에 대하여 오직 있지 않음(차별 없음 등)이라는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갖는다.
그래서 없지 않음(같지 않음 등)의 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또한 기존의 습관[훈습된 습기]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악행을 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마음대로 행함으로 인해 지옥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마음대로 행하던 때와는 다르다.
그 상황에서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로 그 고통을 모두 받게 된다.

한편, 실재의 바탕에서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과 악도 본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실재의 바탕에서 이들이 완전히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같다고 할 수도 없다.

『유가사지론』에서는 다음처럼 제시한다.

...

세존은 비말한 뜻[密意]에 의하여 말씀하시되,
'차라리 한 종류의 나라는 소견[我見]을 일으키는 이와 같게 될지언정,
한 종류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惡取空者]와 같게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는 이는
다만 알 바의 경계에 대해서만 헷갈린 것이요,
온갖 알 바의 경계는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는 떨어지지 아니하며,
다른 법을 구하여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데도
헛되이 속지 않고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며,
법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역시 잘 이룩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느즈러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는
알 바 경계에 대해서도 헷갈리고,
온갖 알 바의 경계 역시 비방하나니,
이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 떨어지며,
다른 법을 구하거나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 데서도
헛되이 속고
역시 머물러 있으며,
법에 있어서나 진리에 있어서도 잘 이룩하지 못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지극히 느즈러짐을 낸다.

이와 같이 실제 있는 일을 덜하고 줄이는 이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과 비나야에 대하여 심히 무너지게 한다.

무엇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하느냐 하면,
어떤 사문이거나 바라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공 또한 믿어 받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공도 믿어 받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공은 저 실로 이는 없는 것이요,
여기서의 공은 이는 실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공이라고 말하나니,
만약 온갖 것이 도무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
어디서 누가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하였겠는가.
역시 이로 말미암아
여기서 곧 말하여 공이라 함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

K0570V15P0771a06L; 彼見者世尊依彼密意說言寧如一
K0570V15P0771a07L; 類起我見者不如一類惡取空者何
K0570V15P0771a08L; 以故起我見者唯於所知境界迷惑
K0570V15P0771a09L; 不謗一切所知境界不由此因墮諸
K0570V15P0771a10L; 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不爲虛誑
K0570V15P0771a11L; 不作稽留於法於諦亦能建立於諸
K0570V15P0771a12L; 學處不生慢緩惡取空者亦於所知
K0570V15P0771a13L; 境界迷惑亦謗一切所知境界由此
K0570V15P0771a14L; 因故墮諸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
K0570V15P0771a15L; 能爲虛誑亦作稽留於法於諦不能
K0570V15P0771a16L; 建立於諸學處極生慢緩如是損減
K0570V15P0771a17L; 實有事者於佛所說法毘奈耶甚爲
K0570V15P0771a18L; 失壞
K0570V15P0771a19L; 云何名爲惡取空者謂有沙門或婆
K0570V15P0771a20L; 羅門由彼故空亦不信受於此而空
K0570V15P0771a21L; 亦不信受如是名爲惡取空者何以
K0570V15P0771a22L; 故由彼故空彼實是無於此而空此
K0570V15P0771a23L; 實是有由此道理可說爲空若說一
K0570V15P0771b01L; 切都無所有何處何者何故名空亦
K0570V15P0771b02L; 不應言由此於此卽說爲空是故名
K0570V15P0771b03L; 爲惡取空者云何復名善取空者謂
...

참조 유가사지론 보살지(菩薩地) 지유가처(持瑜伽處) 진실의품(眞實義品)


따라서 이런 악취공견을 갖느니,
차라리 내가 실답게 있다는 망상분별 즉 아견을 갖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해야 한다.




- 없음에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생사 즉 열반을 깨닫는다고 하자.
즉,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망상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바탕으로 집착을 제거한다.

현실에서 관념을 세우고 분별하는 대부분이 망상 분별이다.
즉, 현실에 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의 세계(변계소집상)가 있다.
그런데 이 일체는 모두 무아, 무자성이다.(승의무자성)
생멸하는 현상에는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그리고 실재가 아니다.(생무자성)
관념에는 감각현실(자상)이 없다.(상무자성)

그 실재는 또한 공하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한다.
따라서 이 생사현실은 침대에서 꾸는 바다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이들이 실다움이 '없음'을 관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관한다고 하자.
그래서 집착을 제거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고 니르바나에 도달한다.

이처럼, 없음(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측면을 통해 그것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한다.
그리고 그에 갖는 집착을 제거한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자칫 일체가 없다는 견해에 치우치기 쉽다.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지나치게 치우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오히려 현실에서 없음의 측면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없다고 부정하기만 한다.
그리고 고요함에만 머무르려 한다.
그리고 이런 '있음'의 측면을 외면하기 쉽다.
그리고 지혜를 키우려 하지 않기 쉽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많은 수행을 외면하려 하기 쉽다.

그런데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과 관념이 나타나 존재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남아 고통받는 중생이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해 이들 생명을 구제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지혜를 키워 지혜의 장애[소지장]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을 외면하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고요함에만 빠지기 쉽다.

수행자가 온 생명을 제도하고자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회신멸지의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는 이는 문제다.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3가지 없음[3무성]에 의해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치우친다.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오로지 부정해버린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로 인한 문제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해심밀경』에서는 다음처럼 제시한다.

...
그들은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부처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널리 말하건대
내지 아직 상품(上品)의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쌓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다면,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선택할 힘과 능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말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법에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그 뜻을 말을 따라 집착해
‘일체 법은 단정코 모두 자성이 없으며,
단정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단정코 본래 고요하며,
단정코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을 것이다.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었음으로써
일체 모습은 모두 무상(無相)이라고 부정해 버리며,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비방하고 부정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는 까닭에
변계소집상도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없는 모습이라고 본다면
그는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세 가지 모습을 비방하고 부인한다’고 말하니,
비록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 가운데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가운데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까닭에,
옳은 법 가운데서 옳은 법이라 지니고
잘못된 뜻 가운데서 옳은 뜻이라고 지닌다.

그는 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킨 까닭에
복덕이 증장하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 까닭에
지혜를 잃으며,
지혜를 잃는 까닭에
광대하고 무량한 좋은 법에서 물러난다.

다시 어떤 유정이
법을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뜻이라고 하는 말을 남에게서 듣고
그 소견에 따른다면,

그는 곧 법에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것에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켜,
법을 집착하여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집착하여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라,
그들은 함께 선법(善法)에서 물러나리라.
'''
참조 해심밀경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를 통해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3 무성을 통하여 집착을 버린다.
그런 가운데 없음과 있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런데 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무상한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해 3 무성을 관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게 된다.
그러면 무상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에서 올바른 관찰을 행한다.
그리고 수행에 정진하여 지혜를 키운다.
그리고 생명을 구제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이를 실천해나갈 수 있다.

결국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생사즉 열반임을 깨닫는다고 하자.
즉 생멸하는 생사현실이 모두 그대로 니르바나다.
이런 경우 생사현실에 니르바나 상태와 여여하게 임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복덕과 지혜를 함께 갖추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간다.
그런 가운데 법신을 이루고 성불한다.
따라서 이런 목표를 갖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정진하여 나아가야 한다.


『해심밀경』에서는 각 수행으로 얻는 차별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
해탈신에 의지하는 까닭에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모든 여래는
평등하고도 평등하다고 말하며,

법신을 말미암는 까닭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며,
여래의 법신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무량한 공덕과 가장 수승한 차별이
산수(算數)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
...
K0154V10P0738c14L; 男子名解脫身由解脫身故說一切
K0154V10P0738c15L; 聲聞獨覺與諸如來平等平等由法
K0154V10P0738c16L; 身故說有差別如來法身有差別故
K0154V10P0738c17L; 無量功德最勝差別筭數譬喩所不
K0154V10P0738c18L; 能及曼殊室利菩薩復白佛言

참조 해심밀경 8. 여래성소작사품




○ 생사 즉 열반 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일체 생멸현상은 결국 멸해 없어진다.
그 안에 아무리 좋음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일체를 모두 고통으로 본다. [일체개고]
반대로 공한 실재에는 그런 생멸이나 고통이 있다 할 수 없다.
따라서 본 바탕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로 본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은 이런 전제에서 제시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색즉시공..)

또 한편, 생멸이나 고통이란 관념은 본래 실체가 없다.
그리고 실재가 아니다.
그 관념은 자상을 갖지 않는다.
또 그 관념은 감각현실에 없다.
따라서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망상분별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에는
본래 생멸과 생사, 고통이 실답게 없다.
그러므로 본래 니르바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은 일반적으로 문제다.
이는 각 생명이 일으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망집이 본래의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운다.
때문에 위 내용만으로 곧 현실 그대로를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볼 수는 없다.

생사 즉 열반을 강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생사가 모두 본래 니르바나다.
그래서 심지어 어떻게 행하던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상태다.

그래서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취할 때,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다음이다.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나기 쉽다. [퇴전]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머물기 쉽다.
- 현실의 문제 상태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려 하기 쉽다.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난다. 그러나 다른 생명의 고통을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막행막식하기 쉽다. (악취공견)
-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기 쉽다.




>>>>


이런 상태에서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
그러나 완전히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사를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 생에서의 감각현실과 관념을 일으켜 갖는다.
그런 경우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 입장에서 무엇을 목표로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본래 현실에서 행하는 생사나 고통 등 여러 관념적 분별이 모두 망상분별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는 것이 고통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대부분의 관념적 분별 판단이 망상분별의 성격을 갖는다.
때문에 현실에서 행하는 판단 가운데 망상분별이 아닌 판단은 드물다.
즉, '이런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판단' 정도만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입능가경』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느 밤에는 큰 보리를 증득하였으며,
어느 밤에는 반열반(般涅槃)에 들겠으며,
나는 그 중간에 한 자(字)도 말하지 아니했으며,
부처님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
대혜여,
어떤 것이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법에 의함인가?

저 과거의 여러 부처님·여래께서 증득하신 법이니,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더하지도 줄지도 않는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모든 경계'를 증득하여
언어(言語)로 분별하는 상을 떠나고,
두 가지 명자(名字)를 떠났노라.
...


K0160V10P0867a06L; 我何等夜證大菩提何等夜入般涅
K0160V10P0867a07L; 槃我於中閒不說一字佛言非言世
K0160V10P0867a08L; 尊依何等義說如是語佛語非語佛
K0160V10P0867a09L; 告大慧言大慧如來依二種法說如
K0160V10P0867a10L; 是言何者爲二我說如是一者依自
K0160V10P0867a11L; 身內證法二者依本住法我依此二
K0160V10P0867a12L; 法作如是言大慧云何依自身內證
K0160V10P0867a13L; 法謂彼過去諸佛如來所證得法我亦
K0160V10P0867a14L; 如是證得不增不減自身內證諸境
K0160V10P0867a15L; 界行離言語分別相離二種字故大
K0160V10P0867a16L; 慧何者本住法大慧謂本行路平坦
...

[참조 입능가경 4. 불심품(佛心品)]

부처님께서 수많은 설법을 하셨음은 중생들이 대부분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한 자(字)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이는 위와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 속에서 감각현실과 분별 자체가 나타난다.
이런 경우 관념의 내용(변계소집상)을 감각현실과 실재에 접착시킨다.
그리고 이들에 관통시킨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진짜의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한다.
즉,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한다.
그런 가운데 이를 실답게 여기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 수행자는 이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임한다.

이런 경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역시 일정한 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런 경우 이들 분별도 망상분별과 성격이 같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은 상태에서 그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망상분별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게 되는 업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중생 제도를 위해 집착을 떠나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임한다.
이런 경우 망상분별의 독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는 다음을 생사현실에서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
그래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일체의 분별판단은 실답지 않은 관념(변계소집상)에 바탕한다.
그래서 희론(戱論- 이치에 맞지 않는 실없는 말장난과 같은 논의)이다.
즉 일체 분별이 망상분별이고 희론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망상분별로 인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는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생명이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온 생명을 제도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잘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ㅑ 한다.
그래서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수행에 임한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실천해간다.

이런 사정에 대해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
선현아,
네가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제 성품이 공할진대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느냐.

만일 배울 곳이 있다면
세존은 희론(戱論)이 없는 곳에서 희론을 말하되
모든 법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 까닭이다, 이 때문이다,
내지 여래의 법이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거니와,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온갖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모든 생명이
모든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결정코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여야 하느니라.
...
K0001V04P0210c03L; 菩薩摩訶薩能證無上正等菩提善
K0001V04P0210c04L; 現如汝所言若一切法皆自性空云
K0001V04P0210c05L; 何菩薩摩訶薩於何處學若有所學
K0001V04P0210c06L; 將無世尊於無戲論而作戲論謂有
K0001V04P0210c07L; 諸法是此是彼由是爲是廣說乃至
K0001V04P0210c08L; 是如來法者善現若諸有情知一切
K0001V04P0210c09L; 法皆自性空則諸菩薩摩訶薩不應
K0001V04P0210c10L; 學一切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
K0001V04P0210c11L; 建立宣說以諸有情不知諸法皆自
K0001V04P0210c12L; 性空故諸菩薩摩訶薩定應學一切
K0001V04P0210c13L; 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建立宣
K0001V04P0210c14L; 說善現當知諸菩薩摩訶薩於菩薩
...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



『심밀해탈경』에서도 다음 내용이 나온다.
...
“이른바 성인이 성인의 소견을 알고
성인의 지혜로 성인의 지견(智見)을 아니,
증득한 바를 말할 수 없건만
그 언어가 없는 법을 말씀하려 하여
형상에 의지하여 저러한 유위ㆍ무위를 말씀합니다.
...
K0153V10P0674a08L; 說事佛子何者爲事而言不空說所謂
K0153V10P0674a09L; 聖人知聖人見聖智知聖見見無言所
K0153V10P0674a10L; 證爲欲說彼無言語法依相說彼有爲
K0153V10P0674a11L; 無爲善男子言無爲者惟是如來名
...
[참조 심밀해탈경 2. 성자선문보살문품(聖者善問菩薩問品)]



-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방안

그리고 보살은 이런 중생제도의 목적을 위해 생사를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즐겁게 잘(유희, 신통) 실천해 간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한 보살이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해나가게 된다.

즉,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행하는 분별과 행위를 중지한다.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업을 행하는 일을 중지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행해 나간다.

즉, 수행자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주로 임하게 된다.
즉, 집착없이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임한다.
제한없이 온 생명을 위하여 임한다.
1-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그들에게 베풀려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분별과 실천을 한다. [보시]
2-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쁨을 주지 않으려 한다.
이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분별과 실천을 한다. [정계]
3- 다른 생명이 자신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줄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그에 대해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이들 내용을 현실에서 좋게 해석한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는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버린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분별과 실천을 해나간다. [안인]
4 없는 선은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있는 선은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없는 악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있는 악은 키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을 꾸준히 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분별과 실천을 해나간다. [정진]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이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안에서 십바라밀다를 닦아 나간다.
즉,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수행을 해나간다.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바탕으로 임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 종교 일반의 현실부정 공상주의적 이상성과 불교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가 많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한다.
그리고 대신 천국이나 하늘, 지옥과 같은 세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인천교]

예를 들어
지옥은 고통과 두려움이 극심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다.
반대로 하늘은 즐거움과 희망이 가득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다.
그리고 각 종교는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절대자를 믿고 따른다.
그리고 선을 실천한다.
그래서 사후에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주된 목표로 제시한다.

이처럼 종교가 제시하는 하늘이나 지옥 등의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현실의 사람들이 당장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즉, 살아 있는 동안, 현실에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쉽게 인정해 받아들이기 힘들다.

때문에, 현실 내용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비현실적이며, 공상적이다.
그리고 허구의 종교적 내용이라고 여기기 쉽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가.
부처님도 현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부정한다.
한편 공상적 내용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이를 추구할 것을 제시하는 듯핟다.

불교도 물론 다른 종교와 유사하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과 같은 세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여러 초경험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그래서 3계6도의 내용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윤회설을 제시한다.
이는 또 다른 종교와는 다른 점이다.
그래서 각 생명이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세계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게 됨을 제시한다.

따라서 자칫 불교는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쉽다.
즉, 현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여러 내용을 제시한다.
그리고 생사윤회하는 3계6도의 여러 상태를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가장 좋은 상태인 하늘의 상태에 태어남을 목표로 제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현실만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불교 또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공상적 허구 내용을 제시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불교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세계를 제시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쉽게 믿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상태를 목표로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색계의 하늘 범천의 수명은 1겁을 넘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하늘 등에 태어나면 그처럼 장구한 시간동안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히려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
이런 하늘의 수명이 길다.
그러나 이런 하늘에서의 안락함도 무상하다.
그래서 결국 끝이 있다.
따라서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 목표상태는 이런 상태가 아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우선 타화자재천이나 범천과 같은 하늘의 존재도 인정하기 힘들다.
더욱이 이런 여러 세계를 생명이 윤회하며 무한히 살아감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공상적이라고 할 이런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제시한다.
한편 다시 이를 목표상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초월한 더 높은 상태를 목표상태로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한층 더 공상적인 종교라고 볼 여지도 있다.

산수로 헤아리기 힘든 1겁에 가까운 수명과 복을 받는 하늘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역시 모두 무상하다.
전체적으로 생명이 괴로움을 받고 윤회하는 과정의 일부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모두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불교는 오히려 이렇게 세계를 관하는 것을 올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누리는 수명과 복이 일반 세균이나 곤충의 삶에 비교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복이 많고 수명이 길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번뇌와 고통에서 끝내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와 사정이 같다.

현실은 무상하다.
따라서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한편, 복과 수명이 수승한 하늘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는
고통의 윤회를 끊고 해탈과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 생사즉 열반의 2 중적인 측면- 현실 긍정과 부정

그런데 이 니르바나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 긍정하는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다.

같은 현실을 놓고 한편으로는 괴로운 윤회과정이라고 제시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현실이 본래 그런 괴로움이 소멸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한다.
이는 분명 서로 이중적이고 모순되는 내용이다.

현실에 본래 니르바나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괴로움을 떠나 니르바나에 머물려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실이 본래, 그 실재가 공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무아, 무자성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본래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이 그대로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번뇌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같은 현실을 놓고 괴로움을 받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즉 생사현실이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평안하게 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지적 깨달음(혜해탈, 소지장의 제거)이 필요하다.
즉 현실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번뇌와 집착을 버리는 수행(심해탈, 번뇌장의 제거)이 필요하다.

이렇게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과 니르바나가 제시된다.

때문에 불교는 진리에 바탕한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현실을 부정한다.
그런 한편 현실을 본래 청정하고 깨끗한 형태로 긍정하는 측면을 갖는다.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가장 원대하고 올바르며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그런 가운데 서원을 실천해간다.
그래서 윤리적인 측면으로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측면을 함께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을 우선 부처님의 모습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 현실부정적인 측면 - 깨끗하지 못한 현실의 부정

부처님은 왕자의 신분에서 현실 속에서 향락을 누린다.
그래서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왕궁의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한다.
이런 왕이나 왕자의 상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세속적 상태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부정하고 떠난다.
그리고 이를 버린다.
이는 곧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관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바로 이런 측면과 직접 관련된다.


○ 현실긍정적인 측면 - 깨끗한 형태로 현실의 긍정

이후 부처님이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낡은 옷을 입고 구걸을 하면서 중생제도를 해나간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활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상태다.
그런 힘든 현실상황에서도 부처님은 가장 지극한 안온함과 행복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증일아함경』 41. 막외품(莫畏品)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석존이 빈비사라왕과 자신을 비교한다.
그리고 왕으로 향락을 누리며 지내는 빈비사라왕보다
자신이 더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현실의 왕이 수행자보다 상태가 좋다고 여긴다.
즉 왕은 향락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당시 석존은 낡은 옷을 입고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왕이 석존보다 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보기 쉽다.

그러나 빈비사라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은 한시적인 즐거움이다.
또 향락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다.
현실에서 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이란 그와 같다.
즉, 제한된 조건이 충족된 잠시간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 석존이 느끼는 즐거움은 이와 다르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부터 얻고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는 다른 나머지 모든 경우에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을 함께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석존이 누리는 즐거움은 극단적인 현실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즉 극도로 궁핍하고 악조건인 현실도 가장 안온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생사즉 열반관을 바탕으로 한다.
즉,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니르바나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현실 일체에 대하여 집착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번뇌를 끊어 해탈을 얻는다.

그래서 깨달음을 통해 집착과 번뇌를 끊는다고 하자.
그러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서도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
그래서 일체 고통과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바로 수행자가 생사현실 모두를 긍정하는 측면이다.
즉,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 처해서도 이를 모두 평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곧 불교가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갖는 요소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탐욕을 떠나면
괴로움을 끊을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3, 무지경]

탐욕을 떠나 마음이 해탈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4, 무지경2]

이런 경전 내용은 결국 앞에서 제시한 상태를 나타낸다.

즉 현상의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탐욕을 떠나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현실에서 이들이 침해될 때 겪는 괴로움을 벗어난다.
그리고 이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받는 두려움을 모두 벗어난다.
그래서 이런 괴로움을 모두 끊고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탐욕과 집착을 떠난다고 하자.
그러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을 주는 현실 상황에서도 평안히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설령 지옥에 처하더라도 그것은 지옥이 아니다.
그 역시 니르바나의 상태다.
생사 즉 열반은 이런 깨달음을 의미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4 권 만수실리본에서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
...
무간지옥에 나아가는 이도
긴 밤에 생사에 헤매는 것이 아니요
..
5무간지옥이 곧 보리요
...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이는 번뇌즉 보리라는 대승의 가르침과도 관련된다.

생사현실은 무상하고 생멸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생사현실은 모두 차별이 없이 공하다.
그리고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이런 사정을 관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올바른 관찰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자.
그래서 생멸하는 현상 자체가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는다고 하자.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을 얻는다.
그러면 굳이 생사현실을 지우고 떠나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래서 경전에서 다음 내용이 반복해 제시된다.

...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
곧 스스로 해탈지견을 증득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것이 된다.
...


그리고 이렇게 깨닫고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래서 가장 극심하고 극악한 현실 상황에서도
이를 니르바나의 상태로서 긍정해 받아들이게 된다.
즉, 그런 상태에서 최상으로 안락한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르게 된다.


이로써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한 이런 현실 긍정은 단순한 낙관주의적인 자세와는 차이가 있다.
단순한 낙관주의는 현실에서 좋은 측면만을 찾아 응시하는 자세다.
현실은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오직 좋음만 찾아내 얻어내려는 자세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올바로 관찰한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세속에서 추구하는 가치나 집착을 부정한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는 단순히 현실부정적인 면을 갖는다.
그런 가운데 이상적인 현실을 추구하여 수행한다.
불교의 현실 긍정적 측면은 이런 입장이다.



○ 윤리적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

불교는 현실 부정적인 측면을 갖는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집착을 많이 갖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대한 측면에서 나타난다.

즉,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림을 강조한다.
이는 이러한 현실의 측면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떠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현실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로 현실을 관하고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마음의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현실의 생멸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한다.
그리고 반대로 현실의 어떤 극악한 조건에서도 평온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현실부정적 측면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측면이 반대로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갖게 만든다.


처자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을 한다.
이런 상태에서도 안온하고 평안함을 얻는다.
이는 바로 그런 2 중적인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 중생 모두의 해탈과 니르바나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수행자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 상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실천된다
이는 윤리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다.



○ 생사즉 열반의 현실긍정적 측면과 단순한 현실긍정과의 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현실에 대해 올바로 관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린다.
그리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기 위해 수행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세속의 탐욕을 포기하는 부정적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생사현실을 평안하고 안온하게 받아들이는 긍정적 측면을 갖는다.
생사현실은 그런 세속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런 경우에도 이를 평안하게 받아들인다.

그와 동시에 이런 수행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향하고 실천해간다.
그래서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도 함께 갖는다.


보살은 다음 서원을 갖는다.
다른 생명을 제도하고자 한다.
함께 번뇌를 끊고자 한다.
함께 법문을 배우고자 한다.
함께 불도를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 생사 윤회를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


수행에 37도품(보리분법)의 수행이 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과 같은 8 정도를 포함한다.
한편, 6 바라밀다의 수행이 있다.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포함한다.
이들도 역시 현실 속에서 수행되는 이상추구 실천행이다.


석존 자신도 깨달음을 얻은 이후 중생제도를 위해 노력한다.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열어 보인다.
그리고 중생들이 깨닫게 한다.
그 깨달음에 들어오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많은 설법을 행한다.
그리고 적극적인 노력을 한다.
이와 수행자의 사정이 같다.

이들은 모두 이상추구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무상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이상적 상태를 추구해 간다.


처음 수행은 세속적 측면과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을 갖는다.
생멸하는 현상이 무상함을 관한다.
괴로운 것이라고 관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떠난다.


이는 괴로운 생사 윤회의 고통과 관련되는 측면이다.
즉, 어리석음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부분과 관련된다.

그러나 수행은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인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다.
즉 세계를 올바로 관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을 모두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로 긍정하여 받아들인다.
생사현실에서 기존에 집착하던 세속적 욕구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낡은 옷과 구걸로서 삶을 유지할 수도 있다.
기타 견디기 힘든 극악한 상황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에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평안하게 받아들인다.
동시에 그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이나 낙엽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친다.
동전과 낙엽이 없어도 이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황금을 얻어 황금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
그래서 황금산을 향해 달려나간다.
이런 상황과 같다.

즉,
현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동전과 낙엽)을 버린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지나친다. [현실부정적인 측면]
그러나 해탈과 니르바나(비유의 황금)를 얻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다른 생명도 얻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현실에서도 평안히 머물러 정진 노력한다.
이는 현실에서 평안히 머무르는 수행이다. [현실긍정적인 측면]
그리고 적극적인 이상 추구 실천행이다. [이상 추구실천행의 측면]

결국 하나의 수행이 이런 성격을 현실에서 동시에 갖는다.

물론 이런 수행도 역시 무상한 현실속에서 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역시 괴로운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현실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관한다고 하자.
그래서 탐욕과 집착을 버린다.
그래서 이런 수행도 그처럼 버려야 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수행목표와 수행방안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추구하고 임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수행은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 '평안히 머물' 내용이다.
그리고 '정진하여 추구해 나갈' 내용이다.

반대로 세속에서의 이기적이고 악한 집착은 이와 반대다.
즉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끊고 버려야 할'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서로 구별된다.

수행이나 현실의 생활이나, 모두 현실 안의 내용인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수행은 모두 기존의 현실의 삶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현실의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는다.
또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들은 위와 다르다.

다 같은 현실에서 이뤄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미를 서로 다르다.
이런 차이는 올바른 깨달음과 해탈에 있다.
생멸하는 무상한 현실이 괴로움이다.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
그리고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니르바나다.
이런 사정을 올바로 깨닫고 관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바탕하여 집착을 버린다.
그래서 해탈의 상태에 이른다.
이런 차이가 있다.

이런 깨달음과 해탈은 기존에 가졌던 집착을 제거해준다.
기존에 일반이 집착을 갖던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에 대해, 번뇌와 집착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집착에서 먼저 벗어나게 한다.


평소 일반적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임하기 쉽다.
즉, 나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생명에 대한 생각, 목숨에 대한 생각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킨다.
수많은 생명을 자신과 함께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가장 안온하고 평안한 해탈, 니르바나, 보리의 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이르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서원을 실천해 나간다.

여하튼 이런 모든 노력은 공상과 망상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올바른 진리 판단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세상의 정체를 올바로 관한 바탕에서 행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구극적인 니르바나를 얻게 한다.
그리고 모두 최상의 깨달음(보리)를 얻게 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원만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이상을 향하여 수행 실천한다고 하자.

이는 현실에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번뇌를 제거하고 집착을 제거한다.
그래서 이는 현실 부정적 측면으로 작용한다.

또 한편, 그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한다.
현실이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한다.
그것이 지옥이던 극락이던 모두 차별없다.
그리고 평안히 현실에 머문다.
이는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갖는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한다.
가장 올바르고 옳은 이상적인 상태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광대 무변한 서원을 세운다.
일반 생명이 집착하고 행하는 방식을 중지한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행한다.
그래서 수행방안을 실천해나간다.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바라밀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이를 이상적인 방안으로 추구하고 실천한다.
수행은 이런 성격을 함께 갖는다.


일체(색, 수, 상, 행, 식)은 무상하다.
그리고 일체는 괴로움이다.

그런 측면과 수행이 갖는 관계를 살폈다.
수행은 이를 통해 탐욕과 집착을 버린다.
그리고 해탈을 얻게 한다.

이하에서는 보살의 수행목표에 대해 자세히 보기로 한다.



○ 보살의 수행 목표

수행자가 집착을 버려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고 하자.
더 나아가 생사현실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확인해 찾아낸다고 하자.
그러면 더 이상 생멸현상을 걷어낼 필요조차 없다.
무상하고 고통스런 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깨닫게 된다.

이미 있는 생멸현상에서 그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다.
또한 이 생멸현상은 본래 생멸을 떠난 상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이런 사정을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집착을 버리고자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안에 써 넣은 잘못된 분별을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 잘못된 망상 분별을 행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
더 나아가 이런 내용이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들이 영원불변한 진짜의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런 잘못된 견해를 떠나고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그 안에 올바른 내용을 써 넣어야 한다.
즉, 자신이나 세계로 본 것은 색, 수, 상, 행, 식 일체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상하다.
그리고 고통에 귀결된다.
또 자신과 세계의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이들에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
이와 같은 올바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모든 존재는 원성실상과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각각 승의무자성과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관한다.
그리고 이런 올바른 관찰을 통해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된다.


무상한 현실 현상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그것들이 집착할 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관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올바른 관찰하면 다음 사정을 관할 수 있게 된다.
일체가 본래 생멸을 떠나고 고통을 얻을 수 없다.
현실 상태가 곧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다.

이렇게 관찰하거나, 관찰하지 않거나,
본래 니르바나인 상태다.
이런 사정은 같으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이 관찰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하자.
그러면 그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현실 안에서 얻을 수 없다.

마치 다음과 같다.
술에 취해 지갑이 옷 속에 있다.
그러나 지갑이 옷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지갑이 있어도 그 지갑의 돈을 꺼내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사정과 같다.

현실 속에서 이렇게 올바로 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지혜를 갖춘다.
그리고 현상 세계에서도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
그것이 곧 해탈지견의 내용에 해당한다.

즉 해탈을 이룬 이는
현실 상태에서 올바로 관찰한다.
그래서 곧바로 본래의 상태가 생멸현상이 없고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곧 다음과 같은 내용을 스스로 증득할 수 있다.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본래의 상태는 니르바나다.
그러나 그렇게 관할 수 없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상 분별에 따라 임한다.
그래서 자신과 세계가 자신이 생각한 내용처럼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들의 생멸현상도 그러하다고 집착을 한다.
그리고 그 집착으로 인해 행위한다.
그런 가운데 고통의 윤회를 겪는다.
이런 차이가 있다.

앞의 술취한 사람의 비유해보자.

본래 자신의 옷 속에 지갑이 들어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가 술에 취해 허공에서 헛것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 헛것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온갖 망상 속에서 고난을 겪는다.
그리고 머나먼 길을 걸어 나아간다.
이와 사정이 같다.

이 술취한 사람이 먼 훗날 술을 깨어서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술에 취해 겪은 고난은 공연한 것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옷에서 찾은 지갑은 원래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이와 사정이 같다.


모든 생명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리저리 고통을 받고 헤매는 상황에 있다.
이 생명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중생이 임하는 생사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또 중생들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보살이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에 끝내 들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는 행을 해나간다.
이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현상의 무상함과 생멸현상 그리고 윤회가 모두 고통이다.
그래도 깨달음을 바탕으로 할 경우 이는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따라서 이 사정을 잘 관한다.
또한 현상 안에서 앞과 같이 올바로 관찰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린 가운데 선을 행한다.

감각현실과 관념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그래도 그것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이와 하등 다르지 않다.

술에 취하거나 눈병이 나서 허공에서 헛것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이 술에 취하고 눈병에 걸린 것을 자각한다고 하자.
그래서 허공에 보이는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분별은 실재에 상응한 분별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 헛것에 끌려 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본래 있는 니르바나도 그로 인해 덮어 가리지 않게 된다.
이런 사정과 마찬가지다.


한편, 무상한 현상과 고통의 현상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무상과 고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상과 고통의 현실 안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상한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현상안에서는 추구하는 올바른 수행목표도 역시 집착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그 집착으로 갖는 독을 제거한다.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관념적 분별이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깨달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보살의 수행에 무슨 효용이 있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관념적 분별은 집착의 발생 원인이 된다.
그리고 업을 행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된다.
관념적 분별로 인한 행위(뜻, 말, 글, 행위,태도)는 감각현실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다음 생의 고통의 현실도 만들어내게 된다.

그래서 관념적 분별이 망상 분별인 것을 깨달야야 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리고 임해야 한다.
그런 경우 위와 같은 내용을 제거하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그런 효용을 갖는다.
그래서 중요하다.



-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과 생사윤회 [변역생사]

보살이 수행을 하고 서원을 실천해간다.
이런 과정에서 보살은 일반 생명과 같은 상황에 노출된다.
실재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도 얻게 된다 .

한편, 일반 생명이 병에 들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가운데 일반 생명이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얻는다.
그리고 고통의 생사윤회를 받게 된다.

그런데 보살도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런 가운데 보살도 이와 같은 생노병사 현상에 같이 노출된다.
그러나 보살은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는다
이런 점에 차이가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
이런 내용들이 망상분별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을 갖지 않는다.
이로써 여기에 물들지 않는다.

고통의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행위 반응방식을 벗어난다.
그런 업을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을 갖지 않고 그 반대의 수행방안을 행한다.

일반 생명들은 원치않는데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보살은 보살의 자비의 원에 의한 윤회, 즉,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임을 깨닫는 데에서 출발한다.
현실이 실답지 않다.
따라서 꿈이나 환영과 같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보살이 생사를 받고 수행을 하는 상태를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예로 들어 보자.
현실에서 영화처럼
어떤 범인이 보석을 훔치고 다른 이를 죽인다고 하자.
이들 모두가 그 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는다.
이후 이후의 내용들도 이에 바탕하여 전개된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그에 따른 과보의 현실 내용이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반대로 현실을 영화와 같다고 보는 전제에서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재물을 뺏긴 것으로 보이는 배우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 영화속 사건에 대해 물어본다고 하자.

이들은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다.
재물도 뺏겨 손해를 입은 바도 없음을 말한다.
오히려 영화에 출연해서 수익을 거두고 보람이 있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영화에 어떤 조건에 어떤 배역으로 나올 것인가를
각자 계획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별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현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영화와 같다고 말할한다.
이 내용에서
영화는 현실과 같음 -> 현실의 실다움 -> 집착을 취해 나아간다고 하자.
그러면 앞의 내용이 된다.
반대로 현실은 영화와 같음 -> 영화의 실답지 않음 -> 집착이 없음을 취해 나아간다고 하자.
그러면 뒤의 내용에 가깝게 된다.

현실의 영화배우는 이 두 측면을 다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에 가깝다.

한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이 이와 관련된다.
색의 현상적 차별과 집착을 취해 나간다.
공함의 무분별을 이와 관련시켜 망상 분별과 집착을 떠난다.
이런 자세로 임하는 차이다.

한편 이와 같이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현실은 본래 실재를 바탕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앞과 같은 방식으로 부정해 없애야 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집착을 떠난 상태에서 그동안 자신이 집착한 것들이 가치가 적은 것임을 깨닫는다.

한편 생사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다른 중생이 많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이들을 구제하고 제도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광대 무변한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추구해 나갈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행하는 방식이 있다.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업을 행한다.
그래서 고통을 겪어 나간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분별과 행위를 중지한다.
그와는 반대로 수행해 나간다.

곧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린다.
그리고 온생명을 제도하기 위하여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실천해나간다.
즉,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바라밀행을 실천해간다.
이런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생사윤회하며 수행을 해나가게 된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현실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상태가 된다.

이는 마치 연꽃과 같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런 상황과 같다.

수행자는 온 생명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끝없이 중생구제행을 실천해나가는 경우도 있다.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과 같다.
그래서, 무한한 기간에 걸쳐 중생을 구제한다.
그리고 중생들의 제도와 성불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법장비구는 왕위를 버리고 48 대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수행에 정진하여 끝내 극락정토를 만든다.
그리고 무량한 중생을 깨달음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끌어 제도시킨다.

이런 무량수불(아미타불)처럼 되는 서원을 가질 수 있다.
또는 약사유리광여래처럼 되는 서원을 가질 수 있다.
한편 문수사리보살은 수행을 통하여 보견여래가 된다.
그런데 이미 그런 상태를 성취한 보광상다공덕해왕((普光常多功德海王)여래도 계신다.


『대보적경』 제 60 권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
그때 대중 속에 있던 모든 보살이 생각하기를
‘문수사리가 얻게 될 부처님 세계의 공덕과 장엄은 아미타불의 세계와 같은 것일까’라고 하였다.
그때 세존은 그 보살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을 아시고 곧 사자용맹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개의 털을 100개로 쪼갠 뒤에
그 쪼개진 한 개의 털을 큰 바닷물 속에 넣어서 한 방울의 물을 적셔냈다면
이 한 방울의 물을 아미타불세계의 장엄에 비유할 수 있고,
남은 그 큰 바다의 물을 보견 여래의 부처님세계의 장엄에다 비유할 수 있나니,
다시 그보다 더 뛰어나느니라.
왜냐 하면 보견 여래의 부처님세계의 장엄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니라.”

그 때 사자용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종류의 부처님세계의 장엄은 3세(世)의 부처님 세계의 장엄에도 혹시 또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선남자야, 동방으로 여기서 백억의 항하강 모래만큼 많은 세계를 지나서
주최상원(住最上願)이라는 부처님의 세계가 있고
그 속에 부처님이 계신데 명호는 보광상다공덕해왕(普光常多功德海王)이시며
그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항상 보살들을 위하여 법을 연설하고 계시느니라.
...


이처럼 공덕이 장엄한 정토라고 하자.
그런 경우 질병의 고통은 적고, 그 수명은 무량하다.
성취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한없이 뛰어나다.
그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은 이런 상태에서 수행을 보다 쉽게 성취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여래가 공통적으로 법신의 상태를 증득한다.
따라서 법신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이 수행자의 수행목표가 된다.

이런 여러 수행목표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가장 기본적으로 망상 분별과 집착을 버린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번뇌로 인한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후 다음 생의 윤회 생사를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한다.
그래서 공한 실재, 진여와 근본정신만 남겨 둔다.
그리고 회신멸지의 상태로 니르바나를 얻는다.

또는 굳이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한다.
그리고 분별과 집착을 버린다.
그 상태에서 생사에 그대로 머문다.
그러나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을 계속 행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한편, 보살이 수행을 통하여 법신을 증득하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일정한 서원을 세운다.
그래서 중생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한다.
그리고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준다.
그리고 중생을 끝내 깨달음(보리)을 얻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불의 상태로 이끌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다양한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각 부처님의 서원에 따라 그 방안이나 구체적 내용이 다르다.

예를 들어 아미타불이나 약사유리광여래, 보견여래, 보광상다공덕해왕여래.... 등이 그와 같다.
그리고 무수한 여래의 상태가 그와 같다.

그래서 이런 방안이 다 좋다.
종국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효과가 같다.
그러나 뒤의 방안은 수행을 통하여 성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 상황에서나 가장 먼저 적용하여 실천할 방안이 있다.
그것이 부처님이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수행 방안이다.
그래서 이런 방안부터 잘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예를 들어 중생제도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성취할 서원을 세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미타불과 같은 여래의 상태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성취를 위해 수행 정진해 나간다.
그 중간에 아직 그와 같은 여래가 직접 되지 못한 상태일 수 있다.
그런데 아미타부처님 등과 같이 중생의 수행을 도와주는 부처님이 계신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무상한 현실에는 과거의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서원을 위한 수행도 세속에서 좋음을 추구해가는 행위와 외관이 같다.
그러나 이는 그 가치가 훨씬 크다.
그리고 이 역시 집착을 벗어나서 행해 나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집착을 갖고 좋음을 추구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는 삶의 생사 윤회고통과 관련된다.

그러나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린다고 하자.
그런 바탕에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모든 생명의 최상의 상태의 실현을 위한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추구한다고 하자.
그래서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를 피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태와 거리가 멀다.


★★★ 이하 표현교정중


- 무상한 현실내 수행의 의미 - 현실 부정과 현실 긍정과 이상추구

이상 수행의 목표와 무상, 고의 관계를 먼저 살폈다.

다시 이를 정리해보자.
일체 현상은 무상하고 고다.
일체의 생멸현상이 모두 문제상황이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에 반해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는 이런 생멸 현상과 고통을 떠난 것이다.
따라서 수행 목표 상태가 된다.

그런데 한편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생멸과 고통을 떠난 것이다.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다.

이는 일체 현상을 놓고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현상을 놓고 세속의 분별을 바탕으로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고통으로 대하게 된다.
한편, 이런 망상분별을 떠나 깨달음으로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게 된다.
그래서 이처럼 각기 다른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다.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그래서 수행은 이런 독을 제거하여 준다.
탐욕과 집착을 버려 이런 독이 제거된다.

즉, 무상하고 괴로운 현실의 독을 제거해주는 약은 다음이다.
무상하여 괴로운 현실을 무상하여 괴롭다고 올바로 관한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그에 대하여 집착을 제거한다.
그래서 해탈을 얻는다.
이런 것이 집착의 독을 해독해주는 약이 된다.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린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얻게 되는 생사 고통을 멸해 없앤다.
따라서, 역설적으로이런 활동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수행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다음 성격을 갖게 된다.
즉, 현실부정적 측면
그리고 현실긍정적 측면
그리고 이상추구실현적 측면 등이다.
이를 나누어 살폈다.

한편 일체에 대한 근본판단으로 공, 비아(무아, 무자성)의 판단이 있다.
아래에서는 이들 내용과 수행목표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pt* 끝 to k0020sf--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pt* 끝 to k0650sf-- ♠● 무상과 고의 관계성




● 공, 비아와 수행목표의 관계

한편, 이제 공과 비아, 무아, 무자성의 판단과의 관계를 살피기로 하자.

현실이 무상하고 고통의 상태다.
이에 반해 열반은 생멸을 떠나 있다.

그러나 이 현실과 열반은 공하다.
그리고 무아 무자성이다.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는 실재의 측면에서의 판단이다.
그리고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는가의 측면에서의 판단이다.

그런데 수행의 목표는 이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공과 무아, 무자성과 관련하여 수행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다.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수행 목표 상태를 성취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공,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공하지 않고 무아 무자성이 아닌 어떤 다른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다른 상태가 수행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뇌 즉 '보리(깨달음)'이라는 대승의 가르침이 있다.
번뇌의 상태도 그 실재는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다.
또는 보리[깨달음]을 얻어 번뇌를 벗어난 상태라고 하자.
이 상태도 그 실재는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다.
이런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 공과 수행목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점

일체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또는 어차피 다 공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는 악취공견을 의미한다.


이미 본래 공하다.
그래서 수행은 새로 노력하여 공한 상태를 증득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또는 수행은 공하지 않고 무아 무자성이 아닌 어떤 것을 얻자는 취지도 아니다.


일체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다.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현실상태가 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번뇌인 상태도 무아, 무자성이다.
그리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
그렇다고 그 상태 그대로 살아도 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본래 공하고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 다르지 않다.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지 못한 상태로 임한다.
그래서 일체에서 생멸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과 세계에 대해 망상 분별을 일으킨다.
또 이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겪는다.
이것은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사 윤회의 고통 속에 빠찐다.
이는 결국 잘못된 망상 분별과 그로 인한 집착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착에 바탕해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수행의 목표는 1차적으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탈과 열반의 상태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된다.



- 생사현실에서 공의 이해가 갖는 효용과 본 바탕의 관계

현실에서 집착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공, 비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일체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공과 무아 무자성이란, 본래가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상태가 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무아, 무자성의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뇌나, 고통의 상태도 그 본바탕은 역시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다.
따라서 공과 무아 무자성 자체가 그것만으로 곧바로 수행 목표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현실 안에서 깨닫는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갖던 집착을 벗어날 수 있다.
또 현실의 생멸현상과 고통이 모두 본래 실답지 않고,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일체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색, 수, 상, 행, 식 오온이 모두 공함을 관하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너느니라
...

K0020V05P1035a03L; 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時
K0020V05P1035a04L; 照見五薀皆空度一切苦厄舍利子


여기서 공함을 관하는 것이
어떻게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너는 방안이 되는가.

공함을 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의 모든 괴로움과 재앙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게 된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게 된다.
그래서 고통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공한 가운데에는 생멸과 더러움이 없음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으며[不滅]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으며[不淨]
늘지도 않고[不增] 줄지도 않느니라[不減].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 수, 상, 행, 식이 없으며, ...

K0020V05P1035a06L; 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 舍利子是
K0020V05P1035a07L; 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
K0020V05P1035a08L; 不減是故空中無色無受想行識無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한편, 수행을 하건, 하지 않건 공, 무아, 무자성이다.
그로 인해 공, 무아, 무자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는 것과 수행을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이는 다음이다.

본래 상태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망상 분별에 갇힌다.
그래서 험악한 고통의 윤회를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수행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수행을 통해 올바른 관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갖던 고통을 없애게 된다.

그 다음 보시, 계율, 인욕, 정진, 정려, 반야 등으로
복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을 행한다.
그리고 생명을 제도한다.
그래서 무량한 선을 실천한다.

현실 안에서도 본래 청정한 진여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를 얻는다.
무량한 복덕과 지혜의 광명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 차이가 있다.


이 둘의 경우가 모두 공과 무아, 무자성이다.
어느 경우나 본 바탕이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다.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생사 현실 속의 차이는 크다.

꿈을 꾸는 경우 그로 인해 현실이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다.
악몽을 꾸나 좋은 꿈을 꾸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차이가 크다.
이아 마찬가지다.

현실은 모두 다 무아, 무자성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고통이 없는 열반의 상태를 목표로 수행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함께 그 실재가 공하다.
그래서 본래 있음과 없음을 떠닌다.
그리고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것이 전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모든 것이 아주 똑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래 실재의 공한 가운데 현상의 차별적이 모습이 나타난다.
이 경우 중생이 있음에 치우친 견해를 가진다.
그래서 망상 분별과 집착에 의한 고통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를 떠나야 함을 강조하게 된다.

반대로 없음에 치우친 견해는 올바른 서원을 실천하는 수행노력을 게을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없음에 치우친 견해도 떠나야 한다.

실재의 공함은 있고 없음의 양극단을 모두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다음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공함에 대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망상 분별과 집착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일체의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너게 된다.

한편,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보살이 수행 목표를 성취해 얻어야 한다 .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究竟涅槃]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느니라.
...

K0020V05P1035a12L; 集滅道無智亦無得以無所得故菩
K0020V05P1035a13L; 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故心無罣
K0020V05P1035a14L; 㝵無罣㝵故無有恐怖遠離顚倒夢
K0020V05P1035a15L; 想究竟涅槃三世諸佛依般若波羅
K0020V05P1035a16L; 蜜多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일체가 모두 다 공하여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등의 수행을 행한다.
이를 통하여 니르바나와 깨달음을 증득한다.
이로써 부처의 상태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번뇌에 바탕하여 업(뜻, 말, 글, 행위, 태도)를 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아 나간다.

그래서 공한 실재의 바탕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일반 중생과 보살과 부처는 각기 다른 차별을 얻게 된다.



○ 수행에 대한 집착 제거 필요성


열반이나 깨달음(보리), 또는 부처의 상태가 수행목표다.
그러나 번뇌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역시 공하며 무아 무자성이다.

따라서 수행목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지금껏 가진 번뇌와 집착을 제거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행목표나 방안에 대해 집착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런 경우 집착은 일반의 경우와 동일한 문제를 갖게 된다.

처음 수행은 이런 집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수행목표나 수행에 집착은 그 자체가 문제된다.

최종 목표상태인 부처나 열반도
역시 무아 무자성임을 관히애 한다.
다른 일반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 과정에서도 번뇌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또 그래야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열반에 대해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처음 행해갈 수행을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우선 1차적으로는 무상한 현실과 고통의 윤회과정을 올바로 관한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서 무상, 고, 공, 비아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 등을 잘 이해한다.

이런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을 제거한다.
그리고 망집번뇌에 바탕한 업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로써 고통의 현실을 지우고 없앤다.
이들이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제거한다.
그래서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드러낸다.
그리고 번뇌- 업 - 고통의 관계를 벗어난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1차적 수행목표가 된다.



이후 다음이 제 2차적 수행 목표가 된다.

현실에서도 그에 상응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만들고 채워 나간다.
즉, 올바른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망상, 분별, 번뇌, '집착을 버린다.
그 상태'에서 아름답고 깨끗하고 맑고 선하며 좋고 좋은 서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추구해간다.
그리고 수행을 정진한다.
그래서 서원을 성취한다.
그리고 이를 유지해나간다.
이런 것이 제 2차적인 수행목표가 된다.

결국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올바른 진리와 가치의 판단에서 올바로 수행해 나간다.
이런 것이 바로 아라한과 보살의 번뇌를 떠난 선한 행위들이 된다.


- 기본적 수행방안

이러한 수행방안은 근본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이를 크게 보면 계율-선정-지혜의 방안[3학]이 된다.

널리 제한없이 온 생명을 대상으로 선(善)과 지혜(智慧), 행복(幸福)과 이익을 베풀고자 한다.
그리고 고통과 악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자 한다.
또 다른 이들의 악, 어리석음, 고통, 불행, 손해에 대하여 함께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깨달음과 선을 성취함에 대하여 함께 따라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외 가치 없고 쓸데없는 것은 차별없이 마음에서 제거한다.
그래서 이처럼 무한한 사랑과 슬픔, 기쁨, 버림의 마음을 일으킨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

그런 가운데 37 가지 수행방안[보리분법-깨달음의 일부를 이루는 법]을 행한다.
이런 내용이 수행방안으로 제시된다.

즉, 몸과 감수와 마음과 법(나머지 모든 것과 관념)에 대하여
그 깨끗하지 못함(부정), 고, 무상, 무아 등을 관한다. (4념처 四念處, 四念住)

한편 이미 있는 악은 더 키우지 않는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는 선을 행한다.
이미 있는 선을 키운다. (4정단四正斷, 四正勤)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희망[욕(慾)], 노력[정진(精進)], 기억[념(念),심(心)] 지혜[혜(慧), 사유(思惟)]를 갖춘다. (4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

믿음[信], 노력[진(進)] 기억[념(念)] 선정[정(定)] 지혜[혜(慧)] 5근(五根)과 5력(五力)

기억-선택-노력-기쁨-몸과 마음의 경쾌함 - 선정 - 버림으로서 평정을 얻는 상태
[념(念)- 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경안(輕安) 또는 제(除)- 정(定) -사(捨)] (7각지七覺支, 七覺分)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즉,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을 멸한 상태-그 방안[고집멸도 4 성제] 등 진리의 내용을 올바로 본다.
그리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떠나 올바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 욕설 등의 거친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올바로 말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는다.
바르지 않은 음행을 행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올바로 행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갖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삶의 방편을 올바로 취해 살아간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 번뇌와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부지런히 수행한다.
그리고 수행하고 배운 바를 올바로 기억한다.
그리고 올바로 집중하여 번뇌를 제거하고 사색하는 선정에 든다. ( 8정도八正道)


이런 37 가지 수행방안은 결국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올바른 사실과 가치에 대한 판단을 행한다. [4념처],
올바른 목표설정을 하여 올바른 서원을 갖는다. [4정근]
올바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갖춘다. [4여의족]
그리고 올바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기초와 능력을 갖춘다. [5근, 5력]
그런 바탕에서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한 방안을 수행한다. [7각지]
그리고 올바로 살기 위한 종합적인 올바른 길을 취해 수행하며 살아간다. [8정도]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생사를 곧 니르바나로 관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함을 목표로 수행을 행한다고 하자.
이런 보살의 수행방안은 크게 통상 10 바라밀다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그 구체적 내용은 각기 달리 제시된다.
일반 생명들은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업을 행해간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런 방식으로 업을 행하는 것을 중지한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해 나아간다.

일반적인 생명의 행위 반응 방식과 보살의 수행방안을 놓고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일반의 생명은 망상분별에 의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에 바탕하여

1- 자신의 좋음을 집착해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 마음을 일으켜 갖지 못한다.
2-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등을 함부로 침해한다.
그리고 나쁨을 가하게 된다.
3- 그리고 자신이 반대로 다른 생명으로부터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받고 나쁨을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평안히 참지 못한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갖는다.
그리고 상대를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대에게 해를 가하며 보복을 가하게 된다.

각 생명이 이렇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 생명이 부딪히는 곳이라고 하자.
그러면 서로의 이런 1-2-3 의 반응이 서로 얽힌다.
그래서 그 고통을 증가시키고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모기는 자신의 좋음을 위해 사람의 피를 빤다.
그러면 사람은 모기가 물면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모기를 잡아 죽인다.
이와 같다.
사람에게 좋은 것은 모기에게는 나쁨이다.
모기에게 좋은 것은 사람에게는 나쁨이다.

경기에서 어떤 한쪽이 통쾌하게 여기는 승리와 같다.
이는 다른 쪽에게는 억울한 패배가 된다.
이런 관계와 같다.

1-2-3 의 한 장면만 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의 관계는 그렇게 한쪽에게 그런 반응을 통해서
좋음을 가져다 주고 그치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이 행하는 작용-반작용의 관계는 계속 그와 같이 얽히어 반복되어 나간다.
다른 한쪽의 1-2-3 의 반응은
또 다른 한쪽의 1-2-3 의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또 그렇게 행하게 되는 1-2-3의 반응은
다시 한쪽의 1-2-3 의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1- 2-3 의 반응이 서로 오간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그것을 중지하고 그 반대로 행한다.
그런 가운데, 결국 모두가 그와 같이 행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수행방안으로 제시된다.

모두가 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도 어느 한쪽이 1-2-3의 반응을 중지하고 그 반대로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일단 앞의 고통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각 주체가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망집이 이 모든 1-2-3의 반응으로 행하게 된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수행하는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출발점으로 한다.

즉, 보살은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이 없다.
그런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다음과 같이 행한다.

1- 온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에게 재산이나 진리, 기타 다른 이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그외 좋음을 베푸는 행위를 행한다. [보시(布施)]

2-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올바른 계율을 지킨다. [정계(淨戒)-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3- 다른 생명이 자신을 침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이에 대해 망상분별에 바탕해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좋게 해석하여 이를 평안히 참는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안인(安忍)]

4- 그리고 위와 같은 보시와 계율, 인욕의 행을 꾸준히 정진해 나간다. [정진]
이로써 보살은 복덕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복덕을 바탕으로 지혜를 얻어 나가게 된다.

5- 즉, 마음을 집중시켜 번뇌를 마음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집중된 마음으로 깊이 사색하며 관한다. [정려(靜慮)]

6- 현상을 실재 진여와 관련시켜 깊은 실상을 꿰뚫어 관한다.
그리고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깊은 지혜의 수행을 행한다. [반야]
이를 통해 지혜의 장애(소지장)을 제거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7- 그리고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을 실천해 간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지가지 수단과 방편을 찾고 마련한다. [방편(方便)]

8- 자신도 번뇌를 벗어나 머무른다.
다른 생명들도 모두 번뇌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자신도 깨달음을 얻어 머무른다.
그리고 다른 생명들도 모두 그와 같이 얻게 한다.

또 그 다른 생명들도 또 다른 생명들을 대상으로 그와 같이 행해나갈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서원을 실천해간다. [원(願)]

9- 그리로 현실에서 이런 선한 행을 실천하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힘을 갖는다. [력(力)]

10- 현실의 내용과 인과에 대해 분별의 지혜를 얻는다. [지(智)]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원을 현실에서 실천하며 수행을 정진해가게 된다.

이상과 같은 10 가지 내용이 보살이 행하는 수행이다.
즉 10 바라밀다행의 기본적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바라밀다가 그것이다.

보살은 이런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한다.
따라서 이런 상태가 구극적인 목표점이 된다.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경전에는 여러 판본이 있다.
『잡아함경』의 경우를 놓고 보자.
이런 경우 한문판본, 한글번역본, 팔리어 판본과 영어판본 등
다양한 판본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느 것이 더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가 의문이 생기기 쉽다.

자신이 보는 경전이 과연 원형의 경전인가라는 의문이 있다.
이는 자신이 보는 경전에 어느 정도 신뢰를 둘 것인가 하는 의문과도 같다.
그런 의문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경전에 대해 신뢰를 두기 어렵다.
그리고 믿음을 갖기도 힘들게 된다.

- 경전 전파 경로와 원본 문제

석가모니 부처님은 북인도에서 설법을 처음 하셨다.
그런데 그 설법 원형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전파되어 기록된 판본들만 남아 있다.
그것이 오늘날 대하는 여러 경전들이다.

우선 팔리어경전이 스리랑카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한문 번역경전이 중국에 남아 있다.
따라서 스리랑카와 중국의 위치관계를 살펴보자.


경전의 전파경로

○08pfl--image\경전의전파경로.jpg


팔리어 경전은 남방 불교의 원전으로 취급된다.
스리랑카도 포함된다.
그러나 팔리어 자체가 스리랑카의 언어는 아니다.

팔리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전의 풀이를 참조하자.

팔리어
소승불교경전의 언어로서 다량의 문헌을 갖는다.
중기 인도 • 아리아어, 프라크리트어를 대표하는 언어다.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런데 불타의 교설을 설교한 성전의 게(偈) 중의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의 것으로도 추정된다.
이어서 성전의 산문,
나아가서는 그 주석이 기원후 5~6세기 이후까지 미친다.
그후도 오늘날까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헌이 남아있다.
팔리어는 소승경전을 위한 문헌이다.
본래 인도의 어느 곳의 방언이었는지에 대해서 크게 논의되고 있다.
오래된 전설에서는 마가다어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보면 중부 인도, 마디야 프라데시의 서부의 방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장 오래된 불교의 문헌은 불타의 고향인 마가다 지방의 동부 방언에서
팔리어로 번역되었다고 추정된다.
팔리어는 아소카왕 비문중 서부의 길나르의 언어와 가장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마가다어적인 요소가 지적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팔리어의 a어간의 남성 단수주격은 -o, 중성은 -am이다.
이에 대해서, 마가다어는 -e만을 가져, 그 흔적이 때로 팔리어에도 나타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리어 [Pali]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대강 지리적 위치로 보나, 그 언어적 계통으로 보나,
팔리어 경전과 한역 경전 등에서
그것만으로 어느 것이 원형의 경전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 분량의 장단과 원본 문제

A라는 원형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여기에 무언가 빠진 것이 B라고 하자.
또는 무언가가 더해진 것이 C 라고 하자.

원형이 전 세계적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어느 곳에서 발견되는 경전도 같은 형태의 A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남아 있는 여러 경전을 대하면,
그 체계나 형태가 서로 많이 다르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것은 다른 것에 비해 더해진 내용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은 빠진 내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때 더해진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빠진 것이 잘못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만일 자신이 대하는 경전만을 원본으로 단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여기에 더해진 것도 잘못이다.
그리고 빠진 것도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다른 쪽 경전을 원본으로 단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또 반대로 해석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양 해석 가운데, 어느 입장도 그것이 원본이라고 단정할 근거를 갖지는 못한다.

처음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한 이후
경전이 전해지기 까지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팔리어 경전이거나, 산스크리트 경전이거나, 또는 한역 경전이거나 사정이 엇비슷하다.

여하튼 오늘날 다른 형태로 각지에 경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경전만으로는 오늘날 그런 변형 과정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추리에 의하여 주장되는 내용일뿐이다.

결국 불교의 다양한 판본에 대해서
어느 것이 원본이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소승경전 대승경전에 관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대승경전은 후기 불교 신자들이 창작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근거가 부족한 추리에 의한 것이다.

스리랑카에 대승경전들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승경전이 인도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스리랑카에 처음 근본 경전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후 다시 대승 경전이 들어간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을 뿐이다.

이처럼 여러 판본을 놓고 어느 것이 원본인가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이 사정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놓고 가정해 생각해보면 쉽다.

삼국지는 원래 삼국의 역사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1000여년이 훨씬 경과한 후 원나라시대에 나관중이 소설화된다.
그리고 이것이 삼국지의 기원으로 알려진다.
그래도 여하튼 소설 삼국지의 원형은 나관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삼국지의 판본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때로는 초등학생용으로 짧게 줄인 판본도 있다.
그리고 만화로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가운데 어느날 모든 문명의 기초가 없어졌다고 하자.
예를 들어 세계 대지진이 일어나서 그런 일이 있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후대의 사람들이 남아 있는 판본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 판본만으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원본인가를 판단해 나간다고 하자.

이 가운데에서 짧은 것이 원본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긴 삼국지는 이 짧은 것을 늘려서 만들어 낸 위본으로 보기 쉽다.
또 그 반대는 반대다.
반대로 길게 길게 늘인 삼국지가 원본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짧은 것은 이것을 축약한 것이어서 진본이 아니라고 보기 쉽다.
이 가운데 어느 입장이 옳은가.

또 정사에 나오는 삼국지는 이런 경우에 어떤 판단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원래 있었던 삼국지 소설은 또 어떤 판단을 받게 될 것인가.

이런 예는 하나의 소설을 쓰는 사람의 입장을 놓고 보아도 사정이 같다.
어떤 경우는 소설을 쓸 때 소설가가 미리 구상한 짧은 골격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골격에 내용을 붙여 길게 늘여 써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있다.
인생의 가지가지 경험을 기록한다.
그 다음 나중에 이것을 묶고 묶어서 짧게 줄인다.
그래서 소설로 쓰는 경우도 있다.


- 다양한 설법 방식과 원본 문제

또 어떤 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것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하자.

그러나 이 내용을 가지고
초등학생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중학생을 만났을 때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다.
또는 학자들의 논문 발표회에서는 또 이와 다른 형태로 이야기한다.
그런 식으로 매번 다른 형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사람도 갓난아이를 대할 때는 그저 갓난아이를 달래는 일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늘 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현재 남아 있는 경전들이 있다.
그런데 그 형태나 내용 분량 표현 등의 문제만으로 그 선후나 원본 여부를 판단하기 곤란하다.
이는 무모한 추리가 된다.

본인은 하나의 작은 논문을 약 1년여에 걸쳐 작성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처음 출발한 논문의 골격이 있었다.
그런데 최종 완성본을 제출한 시기까지 매일 매일 내용과 형태가 바뀌어져갔음을 기억한다.
어제 본 내용을 오늘 검토해보면 또 수정해야 할 부분이 발견된다.
이런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원고를 제출할 수 있는 분량에 제한이 있다.
그래서 제출시점이 되어서는 같은 의미도 최대한 표현을 줄여 표현할 방안을 찾게 된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압축하게 된다.
그래서 최종 완성본을 제출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그 내용을 다시 살펴 보면 조금 더 수정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내용을 변경해야 할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 올려 놓은 글도 마찬가지다.
처음 글을 올린 후 4년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내용을 변경하고 바꾸어 왔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의 원고들을 다 나열해 놓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정말 원본인가를 묻는다면, 답하기 곤란하게 된다.

한 사람이 원고를 쓸 때도 이와 같은 사정이 있다.
그런데 이는 경전에서도 그 사정이 유사하다.


- 다양한 전파 번역 과정과 원본 문제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내용을 상대에 맞추어 각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설한다.
한편 그 이후 그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전파되고 번역된다.
그리고 정리된다.
이런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된다.
이런 사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번역의 경우에서는 그 변화가 훨씬 심하다.
오늘날 한문 경전을 놓고 10 사람에게 번역을 맡긴다고 하자.
그러면 동일한 내용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차이는 중국의 번역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번역본이 원본과 동일한 의미인가를 판단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승 경전 불설 비불설에 관한 논의로 미룬다.


- 깨달음을 주는 소재로서 경전의 가치

다만 경전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판본이 원본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이 경전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주는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이 이 내용을 토대로 하여 어떤 진리나 가치의 깨달음을 얻어 나가는 것이 낫다.
그래서 그런 경우 그것은 무슨 내용인가 하는 입장에서 경전을 대하는 것이 낫다.

경전의 내용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으로 믿고 그대로 외우려 노력한다.
이런 자세도 바로 그런 입장에서 요구되는 내용이다.

한편, 부처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경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느 경전을 대하던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또 이런 입장에서는 다음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경전 뿐만 아니라, 모든 색상문자가 진리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리고 모두 자신에게 그런 진리와 가치의 깨달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마침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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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 value 2014/10/07/화/09: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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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web: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167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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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추가 참조
fr https://story007.tistory.com/959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이해하는 1과 같은 내용
fr https://story007.tistory.com/959 ♥생사에 생사가 없다는 이상한 명제
fr https://story007.tistory.com/956 ♠불교에서는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fr https://story007.tistory.com/955 ♠믿기지 않는 사실- 나의 분실 사건
일부내용 *pt* to k0020sf--
*pt* to https://blog.naver.com/thebest007/220108740395

{!--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상의 목록 https://buddhism007.tistory.com/604
디스크상의 목록 ●불교 08fl--budr\budr-catalog.htm
Ш[ 관련 문서 인용 부분 ]Ш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Prajna Citta 2014/03/22/토/09:58
● 경전의 판본의 문제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4/03/22/토/09:58
♨[수정내역]♨ 2017-01-28-토-09-37 그림링크수정
▩[ 디스크 ]▩ [DISK]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k0650sf-- ♠● 경전의 판본의 문제
ж[ 웹 ]ж [web]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 ♠● 경전의 판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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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상의 목록 https://buddhism007.tistory.com/604
디스크상의 목록 ●불교 08fl--budr\budr-catalo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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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abc.dongguk.edu/Combine/Index?ccode=01&volcode=K0650001&isimg=1&isorg=1&iskor=1
https://kabc.dongguk.edu/Contents?ctype=01&dcode=K0650001001&tcode=00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 댓글 정리 내역 --
기존 사이트에서 글이 이전되어 글들이 깨져 있다.
그래서 재정리하여 붙이기로 한다.


●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2:53


* 원래 경전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조금씩 복사해 가며
공부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페이스 북 공간이 대화형태의 사이트다.
그래서 공부에는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조금 힘이 든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언제 공부하고 다시 정리할 시간이 있을까.
그래서 한 번 올릴 때, 잘 올리기로 한다.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오후 12:55

경전 내용 원문은 각 사이트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이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붙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용을 이해행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고 올바른 내용이라고 하자.
그러면 경전 내용도 외우고 더 나아가
현실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목적이다.


●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3:17

초기 불교의 근본적 진리판단과
목적상태의 설정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불교에 대해
그 목적과 기본 진리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근본적인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의문을 일으킬 만한 내용과
그에 대한 내용을 적어보기로 한다.

---
내용을 코멘트로 처음 붙였다.
그러나 수정 편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정을 마친 다음 일괄적으로 본문에 넣어 붙였습니다.
---


● 진리를 고루고루 2011/01/02 10:24

질문만 제시하고
답을 일일히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함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이런 기본적인 의문을 갖고
경전을 대하면
쉽게 그 답을 찾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경전 공부이고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Mun Tokyun 2012/09/05 01:12

오래 간만에 들러 보았다.
그런데, 역시 글이 어렵다.

세계에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런 종교들이
강력한 신을 믿고 따르자.
그러면 뜻이 이뤄진다.

이렇게 강력한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신에게 세상의 어려운 일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는 그에 반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철학적 깊이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다.
자신과 다른 모든 생명을
자비로써 선과 행복 지혜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리고 도달하게 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윤리적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매우 어려운 종교라고 생각한다.


● Prajna Citta 2012/09/05 15:34

MUN님이 개인적으로 물은 내용에 대하여 아래 부분에 답을 올립니다.
https://essay007.tistory.com/754#comment11368700

[ https://essay007.tistory.com/754#comment11368700의 내용은 수정하여 위에 반영하여 포함시키고 삭제합니다. ]
ori -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K0650sf--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tr] https://essay007.tistory.com/754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tr] 10gfl--2012-09\2012-09월_댓글보전.txt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vsbx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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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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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5763

MICHEL POLNAREFF - Kama Su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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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건도(犍度)의 하나. 비구를 치벌(治罰)하는 법을 말한 편장(篇章). 『사분율(四分律)』 제44권에 있음. 흔히 “가책건도[訶責犍度]”라 함.

답 후보
● 가책건도(呵責犍度)
간탐(慳貪)
감자왕(甘蔗王)
개자겁(芥子劫)

건도(乾度)
게(偈)
견도(見道)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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