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經)에서 마흔두 가지의 중요한 부분을 모은 것이다. 무릇 보살행문(菩薩行門)을 총 예순여섯 조항으로 갖추어 아래와 같이 열거하였다.
1. 『상액경(象牌經)』에 나오는 것
세 가지 조항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6바라밀(波羅蜜行)을 해설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6취(趣)에 나서 모든 쾌락을 받는다. 보살행(菩薩行)을 공(空)하다고 비유하였다.
2. 『설묘법결정업장경(說妙法決定業障經)』에 나오는 것세 가지 조항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보살행을 가르쳐야 선지식임을 알 수 있고, 보리(菩提)에서 물러나는 것에 관한 여러 인연들에 대해 설명하였다. 비록 법을 비방하여도 법을 귀로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불도를 성취한다. 스물네 가지 대승의 명호(名號)를 해설하였다. 3. 『유마힐소문경(維摩詰所問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항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불종성(佛種性)으로 인하여 보살행을 발기(發起)하여 수행함을 해설했다. 출가의 인연과 공덕을 해설하였다. 4. 『방광여래지경(方廣如來智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선지식이 아니면 절대로 함께 살지 말 것을 해설했다. 성문(聲聞)의 도행(道行)과 수행하는 보살의 행의 깊고 얕음을 비교하여 가늠하도록 해설했다. 5. 『승의제품경(勝義諦品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행원(行願)을 일으키면 빨리 불도(佛道)를 성취한다.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계행(戒行)을 수행해야 6바라밀(波羅蜜)을 성취한다고 해설하였다. 6.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 나오는 것네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처음에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닦음으로 인하여 산란함이 없어서 보리를 발기(發起)시킨다. 수행하는 보살은 보리심(菩提心)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지게 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섭념(攝念)해야 한다고 해설했다. 번뇌의 인연을 해석했다. 수행하는 보살은 처음 보리심을 발기하여 전념(專念)으로 6바라밀을 유지해야 함을 해설했다. 7. 『화엄경선재동자경(花嚴經善財童子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처음에 수행하는 보살이 일으킨 보리와 성문의 도행을 비유하여 비교하고 가늠하였다. 8. 『보계소문경(寶髻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6바라밀을 수행함을 해설하였다. 9. 『연법사품경(演法師品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성문법의 가르침을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또 모든 세계에서 수행하는 보살행문(菩薩行門)을 해설하였다. 10. 『결정비니경(決定毘尼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보살과 성문의 행을 수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계행에 머물러 지니는가와 3독(毒)의 가볍고 무거운 원인을 해설하였다. 11. 『변청정비니경(遍淸淨毘尼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의 계행을 비교하여 살폈다. 성문의 계행을 비교하여 가르쳐 그 마음을 조복하였다. 이상 열한 부는 상권(上卷)에 해당한다. 12. 『해혜보살소문경(海慧菩薩所問經)』에 나오는 것여덟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비록 계율을 범해도 6바라밀의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능히 범하지 아니함을 성취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의 깊은 이치를 성문과 보살의 경중(輕重)을 비유하여 비교하고 살펴보았다. 수행하는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발하여 능히 인욕(忍辱)하면 삿된 마(魔)로 하여금 보리에서 물러나 잃게 하지 못하게 한다. 몸≺身≻ㆍ입≺口≻ㆍ뜻≺意≻의 세 가지 업을 참으면 부동(不動)한 6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을 해설하였다. 관행(觀行)으로 6바라밀의 염문(念門)을 성취함을 해설하였다. 여덟 가지 공덕이 번뇌와 조화롭게 섞임을 비유하여 해설하였다. 네 가지 선행(善行)을 해설했다. 수행하는 보살이 닦는 도행에는 열두 가지 삿된 마가 있어 도를 장애함이 있다는 앙구사구(央俱賖鉤)를 해설하였다. 13. 『희락엄경(戱樂嚴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다섯 가지 욕망을 선교방편으로 인연하면 곧 권고하여 보리의 인을 내게 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게 됨을 해설하였다. 14. 『선교방편경(善巧方便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성문의 행을 익히거나 배우면 무거운 장애의 인연을 범하게 됨을 해설하였다. 15. 『승적품경(勝積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물러나 성문의 행에 들어감을 비유했다. 16. 『여래장경(如來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여래께서 인욕하여서 증득하신 인과를 관(觀)하고 생각했다. 17. 『금광상승비니경(金光上勝毘尼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나타내어 설명하였다. 금광승(金光勝) 동녀(童女)가 열 가지 행원(行願)을 내어 출가를 그만두고도 마음이 열려 뜻을 알았다. 18. 『항복마경(降伏魔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마왕(魔王)이 보살이 되어 스무 가지 마(魔)의 장애를 말하였으나, 응당 스스로 깨닫고 취하지 말라. 19. 『부루나소문경(富婁那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악지식(惡知識)을 위하면 그것 때문에 네 가지 인연으로 보리를 버리고 물러나서 성문의 해탈에 들어간다. 20. 『보동자천인소문경(寶童子天人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보살과 성문의 수행에서 두 가지 도행인 진실한 말과 거짓되지 아니함을 비교하여 가늠하면 모든 행은 싫어함이 없음을 해설하였다. 21. 『보적경(寶積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과 성문의 법행(法行)을 비교하여 살폈다. 이상 열 부는 중권(中卷)에 해당한다. 22. 『허공장보살소문경(虛空藏菩薩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에게 마흔다섯 가지 마군의 장애가 있는데, 만약 이를 능히 깨달아 알면, 네 가지 마를 초월하여 제도한다고 설명하였다. 23. 『여래경계경(如來境界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모든 비구가 가섭(迦葉)여래에게 법을 여쭌 적이 있는 까닭으로 지금에도 잊지 않으며, 미래에도 미륵의 3회상(會上)에 태어나게 된다. 24. 『아사세품경(阿闍世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삼승장(三乘藏) 보살의 인연을 말하고 또 상좌(上座)의 인연을 해설하였다. 25. 『이구보살소문경(離垢菩薩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공중에 있던 보살들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몸을 나타내었는데, 이들의 몸이 여인이었으나 보리심을 낸 까닭으로 남자의 몸이 되었다. 26. 『문수사리보살소문경(文殊師利菩薩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두 가지 행을 닦아 익히면 열 가지 선근의 이익을 얻는다. 27. 『광명변조품경(光明遍照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모든 비구가 부처님을 따라 서다림(逝多林) 가운데 있었으나 여래의 위신과 성스러운 덕을 보지 못했음과 모든 보살의 복력(福力)이 성문보다 뛰어남을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28. 『출생보리경(出生菩提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세 가지 부처님의 지위를 말했다. 또 3승(乘)의 높고 낮은 인연을 말했다. 29. 『보취경(寶聚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처음으로 보리심을 낸 사람의 공덕은 항하(恒河)의 모래 수의 아라한보다 많아서 능히 미칠 수가 없다. 30. 『나라연품경(那羅延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네 가지 머물러야 하는 지위에 머무름을 설명했다. 31. 『집일체공덕품경(集一切功德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칼에 나아가 죽기를 청하며, 생사를 바꾸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원하여 삼계를 떠나지 않는다. 32. 『밀엄경(密嚴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성문과 수행하는 보살의 행업(行業)의 깊고 얕음을 비교하여 살폈다. 33. 『범찰경(梵刹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이 항상 인욕의 대행원(大行願)을 내어야 속히 보리에 나아간다. 34. 『일체제불소념경(一切諸佛所念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수치를 인욕하여서 다시는 3업(業)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35. 『법집경(法集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열 가지 계행을 닦아 지녀야 하니, 다시 별도로 열 가지 계행이 있다. 36. 『아차야말보살경(阿差耶末菩薩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일체 모든 경계≺諸色≻에서 행하는 사람의 계력(戒力: 계를 지켜 생긴 공력)은 모두 그 한계가 있지만, 오직 수행하는 보살 계력은 다함이 없다. 37. 『집회품경(集會品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3승(乘)의 교법(敎法)을 드러내어 보였다. 38.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재가(在家) 보살은 당연히 네 종류의 행과 공덕을 닦아 출가하지 않는 인연을 말하였다. 39. 『수승구계품경(殊勝具戒品經)』에 나오는 것두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고 당연히 마군과 함께 싸운다면, 헤아릴 수 없는 의복ㆍ음식ㆍ침구를 받아도 장애되지 않는다. 또 아뇩달(阿耨達)용왕이 네 개의 큰 강으로써 성취하였음을 해석했다. 40. 『해심밀경(解深密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6바라밀을 닦는 지위의 행에 머문다. 41. 『승만경(勝鬘經)』에 나오는 것한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승만 부인이 게송으로써 여래를 찬탄하자 여래께서 곧 출현하셨으며, 부인이 수지할 10대행원(大行願)을 이루었다. 42. 『출생무변문경(出生無邊門經)』에 나오는 것세 가지 조목의 행을 드러내어 설명하였다. 이 경의 다라니를 지니는 이는 죽을 때 80억의 모든 부처님께서 친히 오셔서 영접함을 설명하였다. 또 여래의 3신(身)을 표현하였다. 또 수행하는 보살이 네 가지 일과 네 가지 일의 무상행문(無相行門)을 닦아야 빨리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명하였다. 이상 스물한 부는 하권에 들어 있다. 원하는 조항을 찾고자 할 때에는 이 차례에 의하여 경문(經文)을 찾아 살피기를 바란다.
1. 상액경(象腋經)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이 실천해야 할 6바라밀은 공행(空行)임을 해설하였다. 보살이 태어나면서 6도(道)에 들어가 중생들을 구원하여 제도하나니, 그런 까닭에 몸이 쾌락을 느낀다. 보살의 수행은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그때에 문수사리동자(文殊師利童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여래께서 대중들을 위하여 해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하여 그 이치를 해설하여 그대와 대중들을 기쁘게 받들어 실천할 수 있게 하겠다.”
그때에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은 어떻게 가장 뛰어난 미묘한 법[妙法]에 머물러서 일체의 보살행문(菩薩行門)을 나타내며, 또한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모든 부처님의 국토[佛刹]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신 것입니까?”
이때에 세존께서 문수사리동자를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 좋은 말이로구나. 문수사리야, 그대는 간략하게 물었지만,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하여 의심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리라.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그러자 문수사리동자가 아뢰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쳐 주시는 것을 잘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여섯 가지 상응하는 법이 있어 매우 심오한 일체의 법취(法趣)에 잘 머문다. 어떤 것이 그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인색하지 않고 아끼는 마음과 몸의 차이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니, 몸과 아끼는 마음은 다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계행(戒行)을 굳게 지켜 자신의 계율과 계율이 아닌 것이 다름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니, 자신의 계율과 계율이 아닌 것은 다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욕에 잘 머물러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되, 자신과 성냄이 다름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니, 자신과 성냄은 다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선행(善行)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하되, 자신과 태만함이 다름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니, 자신과 태만은 다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방편으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청정하게 머물러 자신을 보지 않고, 모든 행을 여의고 또한 화합하지 않는 것이니, 삼매인 선정의 마음이 일체 법인 까닭으로 둘 다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바른 지혜는 일체 모든 법에서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열반(涅槃)도 구하지 않아서 자신과 중생신(衆生身)이 다름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니, 6취 가운데에서 몸과 차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야, 당연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들은 이 여섯 가지 법으로 인하여 일체의 매우 심오한 법행(法行)을 성취하느니라. 또 문수사리야, 수행하는 보살은 또 다시 여섯 가지 상응하는 법이 있어 일체의 깊고 깊은 법행(法行)을 잘 실천하여 들어가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수행하는 보살은 만약 지옥(地獄)에 태어나도 천상(天上)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만약 축생(畜生)으로 태어나면 인간의 가장 승묘(勝妙)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셋째는 만약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곧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넷째는 만약 6취(趣)에 태어나도 각각 본래의 몸은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뛰어난 몸을 나타내어 능가할 이가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두루 다녀도 가는 일도 없고 오는 것도 없이 안연(安然)히 움직이지 않고서 일체 부처님의 세계에 그 몸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여러 중생들의 음성을 따라 온갖 법을 연설하되 뒤섞이거나 혼란하지 않는 것이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이 여섯 가지 법이 있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일체 법을 실천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삼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마하발두마(摩訶鉢頭摩)이다. 이 삼매를 얻고 나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지옥에 들어가도 천상의 쾌락을 누린다. 그 보살은 이 모든 지옥의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을 보면, 복력(福力)으로 모든 죄인을 위해 널리 법을 설하여 무량 백천 중생들을 도탈(度脫)케 한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지옥에 태어나도 모든 하늘의 쾌락을 누리느니라.”
또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축생으로 태어나서도 인간의 가장 승묘한 쾌락을 누립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삼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변적정(遍寂靜)이다. 이 삼매를 얻고 나면, 곧 축생으로 태어나도 그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뛰어나고 미묘한 쾌락을 누리게 된다. 축생의 몸이기 때문에 모든 축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해설하여 무량 백천 중생들을 도탈케 한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축생으로 태어나도 인간의 가장 뛰어나고 미묘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니라.”
문수사리동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도 전륜성왕의 쾌락을 누립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삼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이연적정(離緣寂靜)이다. 이 삼매를 얻고 나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도 모든 가난한 이웃 중생들에게 설법하여, 간탐(慳貪)과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을 꾸짖고 보시와 지계를 찬양하여 이러한 좋은 인연으로 무량 백천 중생들을 도탈케 하며, 몸으로는 전륜성왕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니라.”
문수사리동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6취 가운데에서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각각 그 종류를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모든 쾌락을 누리며 온갖 뛰어남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삼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일체변광명(一切遍光明)이다. 이 삼매를 얻은 힘 때문에 6취에 두루 태어나서 방편으로 여러 종류의 몸을 나타내어 모든 쾌락을 누리며, 용모가 뛰어난 것이니라.”
문수사리동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훌륭하고 좋은 방편[善敎方便]으로 일체 부처님의 세계를 돌아다녀도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이 안연(安然)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이 일체 부처님의 세계에 나타납니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삼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섭일체어언(攝一切語言)이다. 이 삼매의 힘을 얻은 까닭에 몸을 나누어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나타나지만,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이 안연히 움직이지 않고 부처님의 세계에 나타나서 모든 여래를 뵙고 법요(法要)를 다 듣는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훌륭하고 미묘한 방편으로 일체 모든 부처님 세계에 두루 돌아다니지만,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이 안연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문수사리동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다른 모든 종류의 중생들에게 그 종류의 음성을 따라서 설법하되, 이 모든 말과 소리가 뒤섞이거나 혼란함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다라니(陀羅尼)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아난차벌다(阿難哆伐多)이다. 이 다라니를 얻고 나면 수행하는 보살은 한량없고 그지없이 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 그 언어를 각각 다 이해하여 뒤섞이거나 혼란함이 없느니라.” 그때에 문수사리동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의 훌륭하고 미묘한 방편을 분명하게 알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이 매우 심오한 법을 구하려면 어떠한 법행(法行)을 친근히 해야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법의 이치에 대하여 깨달아 알기 좋아하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허공을 마주하는 것과 같으니라.” 문수사리동자가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허공을 마주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허공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색(色)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나니, 열반의 모양[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는 모두 화합하는 일이 없으니, 모습이 없는 것[無相]이기 때문이다. 일체 색(色) 등의 온갖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상응(相應)하는 것이 없나니,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가 열반의 모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열반도 또한 화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버릴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느니라.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버릴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버릴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알 것도 없고 익힐 것도 없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일체의 색(色) 등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알 것도 없고 익힐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알 것도 없고 익힐 것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밝은 것도 없고 어두운 것도 없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밝은 것도 없고 어두운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밝은 것도 없고 어두운 것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처소에 집착하여 취할 것이 없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집착하여 취할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도(道)에서 취할 것도 없고, 도 아닌 것에서도 취할 것도 없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도에서 취할 것도 없고 도 아닌 것에서도 취할 것이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도도 없고 도 아닌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성문(聲聞)의 해탈(解脫)과 연각(緣覺)의 해탈과 대승(大乘)의 해탈을 배우지 않는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3승(乘)의 처소에서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반연할 것도 없고 받아들일 것도 없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반연할 것도 없고 받아들일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반연할 것도 없고 받아들일 것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색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체성(體性)이 없어서 혼탁과 혼란도 없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들의 열반의 체성도 다 혼탁도 없고 혼란이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혼탁도 없고 혼란도 없느니라. 또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처소에는 집착할 것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일체 중생들이 일체 법에 대하여 집착할 것이 없으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여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하면 바른 지혜[正智]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라. 모든 법에 집착하는 생각이 곧 열반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무상(無常)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문수사리야, 일체 모든 법이 이미 실상(實相)이 없는데도, 만약 불신(佛身) 보기를 원하는 이라면 응당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만약 볼 것이 아니라고 하면 곧 바른 지위에 도달할 것이다. 바른 지위에 도달한 이가 그 가운데에서 상(相)에 집착하면, 이와 같은 보시는 큰 복밭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보시하는 이는 많은 복을 얻지 못하고 이익될 것도 없다. 만약 보시하는 것이 있어도 많은 복과 이익 얻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를 세간에서 걸사(乞士)라고 부른다. 보시한 것 가운데 복과 이익의 대가가 없으면 이미 대가가 없는 복과 이익을 얻은 것이니, 곧 스스로 취할 것이 없는 복과 지혜를 성취한 것이니라. 이미 스스로 취할 것이 없는 복덕과 지혜를 성취했다면, 이후에 곧 속히 무생법인(無生法忍)1)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설묘법결정업장경(說妙法決定業障經)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선지식이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함을 해설하였다. 삿된 마군이 비록 법을 듣고 비방하여도 이미 법을 들었기 때문에 뒤에는 반드시 성불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스물네 가지 대승의 명호를 해설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법계장전(法界藏殿)에 계셨는데, 모든 부처님께서 모인 한량없이 넓은 도량에 큰 비구들과 보살마하살과 함께 계셨다. 그때에 이 도량에 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공덕장엄개부화(功德莊嚴開敷花)였으며, 그는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물러나 한편에 앉았다. 이때에 부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있다면, 어떠한 무리의 사람은 선지식이 아니므로 응당 함께 머물지 않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저 삼계(三界) 가운데 범천왕(梵天王)ㆍ제석천왕(帝釋天王)ㆍ사천왕(四天王)ㆍ사문(沙門)ㆍ바라문(婆羅門)은 다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선지식이 된다. 오직 성문만은 제외하나니, 성문은 수행하는 보살을 대승의 도를 수행하는 데에서 물러나게 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선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는 까닭에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에게 권장하고 유인하여 돌이켜 소승에 들어가게 하나니, 이런 까닭에 성문승(聲聞乘)의 사람은 선지식이 아니다. 부인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성문승의 비구와 같은 방에서 기거하지 말아야 하며, 같은 좌석이나 침상을 쓰지도 말아야 하며, 같은 길을 가지도 않아야 한다. 만약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지혜가 더욱 많아져서 두 가지라는 분별이 없으며, 대승의 법을 깨닫고 나서 방편으로 성문들을 권장하고 유인하여 대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로소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성문인 비구의 복덕과 지혜가 협소하고 하열하면 곧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매우 심오한 대승의 법을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그가 비방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시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소승(小乘)의 경론(經論)을 자주 열람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불도(佛道)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부인아, 꼭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릴지언정, 보리(菩提)를 버리고 성문에 들어가 나한의 도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들만을 권청(勸請)하기 때문이다. 이때에 만약 보리의 마음을 버리고 따로 다른 도를 일으켜 성문인 나한의 도과(道果)에 들어가면 번뇌와 혼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보살이 보리에서 물러나면 두 사람이 다 함께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부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살생 등의 다섯 가지 큰 죄를 지을지언정, 수다원과(須陀洹果)를 배우지 않아야 하고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1겁이나 100겁, 더 나아가서는 1,000겁에 이르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지언정, 사다함과(斯陀含果)를 배우지 않아야 하고, 보리의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축생에 떨어질지언정, 아나함과(阿那含果)를 배우지 않아야 하고 보리의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중생들을 살해하여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닦지 않아야 하고,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아라한은 혼자 증득하고 사적으로 열반에 들어가나니, 비유하면 좀도둑이 몰래 다른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보살은 보리심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거두어 받아들이나니, 차라리 불구덩이에 같이 있을지언정, 성문의 적멸(寂滅)한 열반에 머물지 않아야 하고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이치로 인하여 중생들을 거두어 받아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불도(佛道)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일체 세간의 하늘ㆍ인간ㆍ아수라(阿修羅)의 존중을 받을 것이며 공양을 받을 만하나니, 성문을 초월하면 곧 삿된 마군의 권속이 희롱하거나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이때에 부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삿된 마군의 권속입니까?” 부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대승의 경전을 펴서 연설하는 곳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대승경전을 설하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듣기를 좋아하지 않고 조롱하고 비방하면, 이것이 삿된 마군의 권속이며, 그는 대승경전을 비방한 마음 때문에 죽어서 아비지옥(阿鼻地獄)2)에 떨어져 한량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꼭 알아야만 한다. 또 아귀(餓鬼)에 태어나 불과 똥오줌을 먹으며 한량없이 많은 겁을 지내면서 고통을 다 받고 나면, 뒷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 가운데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벙어리나 문둥병이나 불구자로 태어날 것이며, 이 중생들은 목숨을 마친 뒤에 한량없이 많은 생을 지내다가 비로소 부처님을 만나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직접 공양을 올리고 돌아와 다시 대승경전을 듣고 순일하여 잡스러움이 없게 된다.” 이때에 여래께서 모든 털구멍으로 널리 음성을 내시고, 낱낱의 털구멍마다 무량(無量) 억백천의 법광(法光)을 내었고,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음(法音)을 내어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때에 이 모임 가운데에서 만약 성문승이면 곧 성문승의 법을 들었고, 만약 연각승이면 곧 연각승의 법을 들었으며, 만약 대승을 수행하는 사람이면 곧 대승의 오묘한 법을 들었다. 새와 짐승의 무리들도 각각 그 소리에 맞게 부처님의 법을 들었다. 이 모임 가운데의 어떤 중생은 과거에 일찍이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했으므로, 여래께서 묵묵히 말씀하시지 않으심을 보았다. 그 나머지 중생들은 과거에 일찍이 대승경전을 비방했던 까닭에 비록 많은 겁 동안을 지옥에 떨어져 있었고 아귀로 고통을 받았을지라도, 법을 비방할 때에 대승경전이 귀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의 처소에서 직접 대승의 법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켜 마침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성취하였다. 이때에 부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말씀하신 대승은 무엇 때문에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무엇 때문에 대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 좋은 말이다. 부인아, 대승을 매우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 때문이니 그것을 잘 생각하여라. 꼭 너를 위하여 응당 대승의 명호에 대하여 설명해 주리라. 이른바 첫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좋아하게 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둘째는 동요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셋째는 허물이 없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넷째는 헤아릴 수 없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다섯째는 사방의 바다와 같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여섯째는 금시조(金翅鳥)3)ㆍ긴나라(緊那羅)4)ㆍ마후라가(摩睺羅伽)5) 등 잡다한 종류가 다 공경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일곱째는 건달바(乾達婆)6)에게 칭찬을 들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여덟째는 여러 하늘들이 다 공경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아홉째는 범천(梵天)이 귀의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열째는 천제석(天帝釋)이 공경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열한째는 사천왕(四天王)이 거두어 보호해 주는 대상이 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열두째는 용왕(龍王)이 공양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열셋째는 보살이 받들어 가지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열넷째는 불성(佛性)을 성취하게 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열다섯째는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이 귀의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열여섯째는 일체의 공양을 널리 받을 만하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열일곱째는 약수왕(藥樹王)7)과 같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열여덟째는 모든 번뇌를 끊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열아홉째는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스무째는 말이 없고 연설할 것도 없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스물한째는 허공의 모양과 같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스물두째는 삼보(三寶) 종자의 성품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스물셋째는 근기가 둔한 중생은 믿지 않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하며, 스물넷째는 일체를 초월했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고 이름한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승의 위력(威力)과 그 명호(名號)에 대해 연설하실 때,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고, 백천 가지 악기는 연주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울렸으며, 공중에서는 여러 하늘들이 꽃을 비 내리듯이 흩어 내렸다. 무량 백천의 천자들은 모두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으며, 무량 백천의 성문들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 또 처음 계를 받은 보살로서 아직 법을 깨닫지 못한 자들도 모두 이미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때에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을 무엇이라고 이름하며 어떻게 받들고 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대승거나승(大乘巨拏勝)’이라고 하나니, 그렇게 이 경을 받아 지니도록 하라. 또 이름을 ‘설묘법결정업장(說妙法決定業障)’이라 하나니, 그렇게 받아 지니도록 하라.” 여래께서 이 경을 연설해 마치시자, 아난과 공덕장엄개부화 부인, 그리고 모든 천룡팔부(天龍八部)들이 다 크게 환희하며 받아 지니고 받들어 행하였다.
3. 유마힐소문경(維摩詰所問經)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불종성(佛種性)을 인연하여 보리가 발기됨을 해설하고, 출가의 인연과 공덕에 대하여 해설했다.
이때에 유마힐(維摩詰) 장자가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여래의 종성을 분명하게 잘 아실 터이니,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떠한 것을 종성이라고 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종성이니, 5음(陰)도 종성이고, 무명(無明)으로 나고 죽고 하는 것도 종성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종성이며, 4전도(顚倒)8) 망상도 다 종성입니다. 5개(蓋)9)도 종성이며, 6입(入)도 종성입니다. 7식(識)의 번뇌도 종성이요, 9뇌(腦)10)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도 종성이며, 십악불선(十惡不善)도 종성입니다. 선남자여, 요점을 간추려 말하면 62견(見)11)과 일체 번뇌가 모두 여래의 종성입니다.” 그때에 유마힐이 물었다. “그대는 무슨 뜻으로 일체 번뇌가 모두 부처님의 종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무위(無爲)를 깨달아 알아서 이미 정멸(定滅)에 머물러 있으면, 이 사람은 당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 보살이 번뇌에 머무르면서 지(地)의 자리에 머물러 정위(正位)의 실상(實相)을 보면, 이러한 사람은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하면 육지에서는 연꽃은 자라지 못하고 진흙탕에서만 자라며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만약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무위(無爲)의 멸정(滅定)에 머물면, 불종성의 싹은 다시 나는 일이 없고 꽃도 필 수 없으며 번뇌의 진흙탕이라야 보리심을 낼 수 있습니다. 번뇌를 인연해서 불종성의 싹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허공에서는 종자가 자라지 못하지만 비옥한 땅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무위의 멸정에서는 당연히 보리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내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수미산(須彌山)과 같아야 비로소 보리심을 내고 불종성을 내어 한량없는 지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넓은 사해(四海)에 들어가지 않으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만약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종성이라는 보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보리의 종성은 본래 번뇌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장로 마하가섭(摩訶迦葉)이 감탄하면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하였다. “정말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불종성은 모두 번뇌의 종성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성문들은 보리심을 내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삼계(三界)의 번뇌 종자를 태워 없앴습니다. 저희들은 차라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5역죄[五逆]를 지을지언정 당연히 세간의 번뇌를 끊고 해탈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이미 5역죄를 지었어도 죄를 받는 것이 끝나면, 마침내 돌아와 다시 보리심을 발하여 직접 불법을 듣고 불사(佛事)를 드러내지만, 아라한(阿羅漢)과 같은 이는 번뇌가 이미 다하여 다시는 뒤의 존재가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5근(根)이 모두 망가졌다면, 이러한 사람의 식심(識心)은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한(羅漢)도 또한 그러하여 번뇌가 모두 괴멸되고 모든 결(結)이 이미 제거되어 힘이 없는 까닭에 위없는 보리를 감당하고 붙들어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범부는 부처님을 친근하게 하지만 성문과 벽지불은 보리를 멀리합니다. 왜냐하면 범부는 자주 삼보(三寶)의 위력과 한량없이 많은 종성을 듣고는 곧 보리심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일찍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덕[聖德]과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들었으나 보리심을 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라후라(羅睺羅)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라후라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분께 나아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옛적을 생각해 보니, 옛날 비사리성(鞞舍離城)에 살고 있던 모든 족성의 사람들이 저의 처소를 찾아와 절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道)를 닦으시니, 그렇게 출가한 이에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그때에 제가 모든 족성의 사람들에게 법에 맞게 설법을 했는데, 그것은 출가의 공덕과 인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을 말할 때 마침 유마힐이 저의 처소에 와서 저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이 지금 말씀하신 출가의 공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출가라는 것은 아무 이익도 없고 아무 공덕도 없으니 이것을 출가라고 합니다. 유위법(有爲法)을 주장하는 이는 이익이 있고 공덕이 있다고 말하지만, 저 출가라는 것은 무위법이기 때문입니다. 무위법은 아무 이익도 없고 아무 공덕도 없으며, 일체 모든 행을 멀리 여의었고, 열반(涅槃)에 지혜로운 이가 나아가 받는 것이며, 성인이 행할 바의 처소입니다. 많은 마군을 항복받고 5도(道)를 벗어나며, 5안(眼)12)을 깨끗이 하고 5근(根)을 안정하며,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다른 이를 괴롭게 하지 않으며, 온갖 악에 물들지 않고 모든 외도(外道)를 굴복시키며, 거짓된 이름을 초월하고 계율을 범하는 진흙탕을 벗어나며, 내 것에도 집착이 없고 내 것이 없는 것에도 받을 것이 없으며, 또한 동요하고 혼란함이 없고 몸과 마음을 조복하며, 다른 대중들을 거두어 보호하고 선정(禪定)을 따라 바깥 허물을 여의며, 일체의 처소에서 취할 것이 없어야 하니, 만약 이와 같이 출가하면 좋은 출가라고 이름할 것입니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에 함께 출가하여 율의(律儀)와 모든 부처님의 교법[法敎]을 잘 배우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때를 만나기도 매우 어려우며, 위없는 보리를 일으키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들 부족의 사람들이 유마힐에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만약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에 유마힐 장자께서 여러 동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항상 청정한 행[梵行]을 닦으라. 이것이 곧 출가의 공덕이니라.’ 이때에 이 서른두 명 족성의 젊은이가 모두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까닭에 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그분께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4. 방광여래지경(方廣如來智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선지식(善知識)과 악지식(惡知識)을 해설하여 보살은 응당 성문과 함께 살지 않아야 함을 해설하였으며, 수행하는 보살과 성문의 도행(道行)의 깊고 얕음을 헤아려 해설했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마하목건련(摩訶目揵連)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선지식이기 때문에 모든 법으로 보살을 가르쳐 인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하나니, 이로써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라도 당연히 성문과 연각의 소승(小乘) 교도(敎道)를 배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파계한 사람과 삿된 행을 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보살의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저 성문과 연각은 불도를 장애하기 때문에 선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율을 범한 사람은 보살의 바른 수행[正行]을 깨뜨리지 못하나니, 이 계율을 범하고 삿된 행을 하는 사람은 법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불도를 장애할 능력이 없다. 만약 성문과 연각이 세속적 진리[世諦]로써 내가 없게 되고 또한 번뇌가 없게 된다면, 이러한 지혜 때문에 처음 배우는 보살로 하여금 성문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은 보살의 선지식이 아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차라리 계율을 깨뜨리고 삿된 행을 행하는 이와 사귀는 한이 있을지언정, 반드시 성문승과 연각승(緣覺乘)의 사람에게는 법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율을 범하고 삿된 행을 행하는 이와는 비록 사귄다고 해도 몸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성문의 사람들은 가고 앉음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집안의 도둑이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당연히 성문과 함께 익히고 배우고 사귀고 내왕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야간(野干: 여우)은 사자와 같이 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과 보살과의 관계도 또한 이와 같다. 왜냐하면 성문은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닦아 배우기 때문이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불도만을 전념하여 구해서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제 한 몸만 나아갈 길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바른 길을 잘 행하여 중생들을 인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자기의 마음만을 청정히 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능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고 또한 중생들의 마음도 청정하게 하지만, 성문은 오직 자기의 번뇌만 제거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자기의 번뇌를 제거하고 또한 중생들의 번뇌도 제거하여 없애지만, 성문은 삿되게 빠른 길에 들어가 혼자만 세간을 피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살이라면 스스로 바른 길에 들어가 중생들을 인도하지만, 성문은 오직 습기와 번뇌만을 제거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습기를 모두 없애고 번뇌도 다 제거하지만, 성문과 외도들은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살은 스스로 바른 도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하지만, 성문은 적멸(寂滅) 열반(涅槃)에 들어가 그 법마저도 또한 없애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등정각을 이루고 이미 무여열반에 들어가면 법은 없어지지 않고,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과 4성제(聖諦)와 32상(相)과 80종호(種好)도 한량없이 많아서 불사(佛事)와 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문과 벽지불은 모두 이러한 덕목이 없느니라.”
5. 승의제품경(勝義諦品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행원(行願)을 일으키면 빨리 불도(佛道)를 성취하며, 수행하는 보살이 열 가지 계행(戒行)으로 6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을 해설하였다.
이때 보현(普賢)보살이 보지(普智)보살에게 말했다. “불자여, 수행하는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기 위한 까닭에 응당 열 가지 행원(行願)을 일으켜야 합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요, 둘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 번뇌를 멀리 여의게 하려는 서원이며, 셋째는 상속(相續)되는 습기를 제거하여 없애 주려는 서원이요, 넷째는 일체의 불법에 대하여 의혹이 없게 하려는 서원이며, 다섯째는 중생들의 일체 괴로움 덩어리를 제거하고 구원해 주려는 서원이다. 여섯째는 중생들을 3도(途)13)와 여덟 가지 재난[八難]14)에서 구제해 주려는 서원이요, 일곱째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고 친히 모시겠다는 서원이며, 여덟째는 보살의 일체 계행을 배우겠다고 하는 서원이요, 아홉째는 공중에 올라가서 털끝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사(佛事)를 나타내어 보이겠다고 하는 서원이며, 열째는 큰 법의 북을 크게 쳐서 모든 부처님 국토의 중생들이 듣는다면, 근기를 따라 속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겠다는 서원이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배우는 보살들은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만약 이러한 지위에 머물면 오래지 않아서 여래의 행원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불자야,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다시 열 가지 계행이 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구경에는 보리(菩提)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그 계행이요, 둘째는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지위를 멀리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항상 일체 중생들의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행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의 계율을 받아 행하되 중생들로 하여금 조금도 범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 모든 법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요, 일곱째는 닦은 바의 공덕을 시방에 회향하고 보시하여 불도(佛道)를 이루게 되기를 서원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여래의 법체(法體)를 마땅히 분별하지 아니함이요, 아홉째는 일체 세간의 법에 탐욕과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열째는 6근(根)을 방어하고 보호하여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불자야,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계행이니, 만약 보살이 능히 이 지위에 머문다면 오래지 않아 계행과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하여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리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도에서 물러나 길을 헤매는 열 가지가 있으니,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 반드시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자기의 스승[師僧]과 화상(和尙)15)과 선지식(善知識)16)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둘째는 세간의 괴로움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셋째는 닦는 바의 계행에서 홀연히 후회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넷째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다섯째는 삼마발저(三摩鉢低)17)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여섯째는 조그마한 공덕을 닦고 문득 만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일곱째는 대승(大乘)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여덟째 보살의 계행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요, 아홉째는 아라한도(阿羅漢道)와 벽지불도(辟支佛道)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며, 열째는 또 수행하는 보살을 보고 증오하거나 질투하는 것이니, 이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불자야, 이와 같은 열 가지가 보살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니, 이런 것들을 멀리 여읠 능력만 있다면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해탈의 법문(法門)에 들어가리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열 가지 행원(行願)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미래의 겁(劫: 아주 오랜 시간)이 다하도록 세간에 머물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둘째는 나는 최후까지 일체 모든 부처님께 친히 공양 올리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셋째는 나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보현보살의 행원에 머물게 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넷째는 나는 일체 계행의 공덕을 쌓고 모으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다섯째는 나는 널리 6바라밀 닦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여섯째는 나는 보리의 계행에 만족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일곱째는 일체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여덟째는 나는 시방의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아홉째는 나는 일체 부처님의 법을 깊이 구하여 스스로 잘 알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며, 열째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서 등정각(等正覺 )18)을 성취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원하는 것이 넓고 좋은 행원이다. 불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큰 행원이라고 하나니, 원력(願力)의 힘 때문에 속히 보살이 되고 행원을 구족하느니라. 또한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다시 열 가지 마장(魔障: 악마의 장애)이 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홀연히 물러나는 마음을 내어 ‘나는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둘째는 부지런히 수행함을 올바르게 일으켰다가 홀연히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셋째는 조그마한 공덕으로 싫어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넷째는 세상에서 은둔하여 후미진 데 머물기를 좋아하고 선행(善行)을 함께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다섯째는 일체 좋은 행원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다. 여섯째는 번뇌를 끊어버리고 멸정(滅定)19) 닦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일곱째는 세간법(世間法)을 끊어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여덟째는 보살의 도행(道行)을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고, 아홉째는 중생들에게 권유하여 교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장애이며, 열째는 부처님의 법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번째의 마장이다. 불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 가지 마장(魔障)이니, 만약 보살이 이런 마장을 멀리 여의면, 오래지 않아 속히 여래의 열 가지 기별(記別)20)의 지위를 얻을 것이다.”
6.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실천해야 할 네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처음에는 단바라밀(檀波羅蜜: 보시바라밀)을 배워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 산란함이 없어지고 나서도 보리의 마음이 산란한 까닭에 6바라밀의 행으로 생각을 다잡는다. 번뇌의 인연에 대하여 해설했으며, 보살은 처음 낸 보리의 마음으로 6바라밀의 행을 유지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때에 성자(聖者)21) 사리불(舍利弗)22)이 성자 부루나(富婁那)에게 말하였다. “또한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맨 먼저 단바라밀(檀波羅密)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탐하고 아끼는 세상의 업(業)은 시작이 없는 오랜 옛날부터 익혀 온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것을 버릴 때엔 아끼는 마음도 곧 버리게 되며, 그 인연으로 보리심을 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보리심이 발하면 곧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게 될 것이요,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면 곧 2승(乘)을 점점 멀리 여의게 됩니다. 만약 2승을 점점 멀리 여의면 곧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나아가게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비가 올 때 비가 내리는 곳에 병을 놓아두면 이 병에 제일 먼저 들어간 빗방울과 제일 나중에 들어간 빗방울, 그 두 방울만이 인연이 되어 병이 가득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들어간 빗방울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점점 들어가서 병이 가득 차는 것과 같습니다. 부루나여, 보살의 수행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반드시 처음 보리심을 낸 까닭만으로 불도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최후에 보리수 아래에서만 불도를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것과 나아가 최후와 그 중간에서 보살이 점점 불도를 증득하고, 여러 가지 선행(善行)을 일으켜 3아승기(阿僧祇)23) 동안 수행하여 부처님의 도를 이익이 되게 돕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인자(仁者)24)이신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산란한 마음에 물드는 일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때에 성자 부루나가 성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거두어야 산란함이 없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삿된 행과 나쁜 견해를 내어도 장차 좋은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저지른 나쁜 행도 반드시 보리에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삿된 견해를 위하여 세간의 생사를 끊지 않나니, 이 때문에 내 몸은 세간에서 바꾸고 변하여 방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 마음에 산란함이 없습니다.” 그때에 부루나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약 보살의 보리심이 산란하면 어떤 모양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이 마음이 산란한 것은 성문승과 연각승의 사람들이 그 도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승(乘: 성문승ㆍ연각승)의 도과(道果: 불도의 과위)를 구하면 곧 이것이 산란한 마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2승의 도행(道行)은 보리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견해도 오히려 산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3독(毒)25)의 견해가 불도를 돕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바꾸어가면서 보리를 이익되게 하나니, 이러한 견해 때문에 세간에 태어나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합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번뇌를 돕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부루나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을 섭념(攝念)하는 까닭에 선(善)을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곧 산란함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또 성문과 벽지불의 섭념에 상응하면 보살도 또한 산란해집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섭념하지 못하고 나고 죽음을 끊지 못한다면 도를 돕는 까닭에 산란한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다잡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세간에 있으면서도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생각을 거두어 계속 이어가면서 세간에 태어남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태어나고 나면 곧 단바라밀(檀波羅蜜)ㆍ지계(持戒)바라밀ㆍ인욕(忍辱)바라밀ㆍ정진(精進)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지혜(智慧)바라밀을 받아 이와 같이 닦고 배우는데, 이와 같이 생각을 거두는 것이 세간의 나고 죽음의 길을 돕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주고 배우며, 나아가 부처님이 될 때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번뇌를 싫어하거나 여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번뇌를 알고 분별하여 ‘이들 번뇌는 나의 몸을 이롭게 하고 내가 부처를 성취하는 것을 돕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번뇌에 모양이 있다면 최상의 미묘한 공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번뇌를 위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은 항상 번뇌를 보호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지혜로써 번뇌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쓰기 때문에 삼계의 얽매임에 간섭 받지 않고 나로 하여금 6바라밀을 증장시켜 원만하게 하여 빨리 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증장하면 나는 곧 세간의 나고 죽고 하는 얽매임에서 해탈하여 관만(寬慢)을 얻습니다. 부루나여,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비유하면 수레에 무거운 물건을 실은 것과 같으니, 수레가 무거우면 그 때문에 수레의 굴대가 점점 닳아서 수레에 실은 물건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면 그 굴대는 할 일을 다 끝내고 곧 끊어집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번뇌를 인연하는 까닭에 삼계에는 생사가 있나니,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번뇌 때문에 계속 세간에 태어나지만 6바라밀이 곧 증장하고 원만함을 얻습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원만함을 얻으면, 곧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만약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면, 곧 결정적으로 부처님의 지위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 앉고 나면 곧 살바야(薩婆若)26)의 지혜가 일어나고 앞뒤의 번뇌는 장차 끊어져 없어지고 다시는 이러한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보살이 이미 정각을 성취하고 나면 번뇌는 다시 인연할 것이 없나니, 비유하면 수레의 굴대가 무거운 짐을 싣고 성에 들어가서 일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이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 나면 또한 이와 같아서 번뇌가 일을 분별하는 것을 다시는 인연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중간에 번뇌를 끊지 않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비록 성냄이나 꾸지람을 당해도 도리어 빌어 구하는 것을 좇아서 모두 도를 돕는 좋은 인연으로 삼나니, 보리심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羅漢)의 마음을 거둔다면 그 지혜도 또한 이러하나니, 수행하는 보살은 불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의 행문(行門)이 없었다면 여래는 무엇을 따라 그 법을 만들어서 나한의 도과(道果)를 닦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법을 만들어 닦게 하는 까닭에 불도(佛道)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마하반야(摩訶般若)에서 가타(伽他: 게송)로 말씀하셨으니, 비유하면 세간에서 나무에 싹이 없으면 나무의 몸통이 없으며, 또한 나무의 몸통이 없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엇을 근거하여 무성해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중생들에게 만약 보리의 씨앗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셨다면 성문은 무엇으로부터 생겼겠습니까? 비유하면 등을 밝히는 데는 심지의 힘을 필요로 하지만, 이 심지는 맨 처음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서만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는 것도 아니고,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앞과 뒤와 중간의 불꽃들이 서로 이어져서 심지가 다 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보리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 발심만을 인연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며, 또한 최후의 발심만을 인연한 것도 아닙니다. 앞과 뒤와 중간의 마음이 서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까닭에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찰나(刹那刹那: 아주 짧은 시간)가 보리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불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시(布施)27)하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수자상(受者相)28)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에 구하는 바도 없고 탐하고 아끼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시하면 비록 조금만 보시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시를 하는 것과 같나니, 곧 수행하는 보살이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언제나 여래의 원만한 위신력(威神力)을 생각하고 거룩한 덕을 드러내어 드날리면, 곧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행(戒行)입니다. 만약 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상(戒相)29)이 점점 이지러지면 곧 계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이 세간의 법을 수순하는 까닭에 비록 오욕(五欲)30)을 받지만 마음으로는 3귀의(歸依)31)를 생각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나는 정각을 성취하고 중생을 구원하기를 서원합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곧 이미 지계바라밀행에 머문 것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써 마음으로 계를 범하지도 않고 계를 범했다고 이름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억 겁 동안 비록 열 가지 좋은 계행을 지녔다고 해도 만약 성문(聲聞)의 아라한과(阿羅漢果)만 좋아한다면, 이것은 곧 남을 얕보며 계를 범하고 대승(大乘)을 망가뜨리는 것이니,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지계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넓고 큰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이 감옥에 갇혔거나 목에 칼을 차고 있거나 발에 칼을 채운 채 있거나 손과 발에 고랑을 차고 있거나 형틀에 묶였거나 용수를 썼거나 채찍질을 당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손과 발과 코와 귀를 잘리거나 몸이 분리되는 것을 보면, 그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저들을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받아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다 안락함을 얻게 하겠노라. 만약 나를 고달프게 하면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잘 참으며 마음으로 나쁘게 대함이 없으리라’라고 하나니,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이 행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비로운 인욕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성숙시키기를 좋아하며, 청정한 부처님의 세계에서 고행하거나 핍박하거나 번거롭게 실천하면서도 피로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를 원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정진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은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으로 오욕에 얽매여 있지만, 성문과 아라한의 도과(道果)를 좋아하지 않고 보리에 전념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항상 선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비유하면 상인(商人)이 큰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선박을 수리하지 않고 타고 가면, 상인과 재물이 모두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미리 배를 수리하여 튼튼하게 하였다면, 상인과 재물을 목적지[彼岸]까지 잘 운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하는 보살도 비록 도에 대한 마음이 있으나 견고한 지혜가 없으면 오래지 않아 보리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바라밀로써 보리를 성취하고, 결함이 없이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찰나 일념 간에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나니, 이것이 곧 수행하는 보살이 한량없이 많은 2승(乘)들의 공덕을 초월하는 지혜바라밀행입니다.”
7. 화엄경입법계품(華嚴經入法界品)
실천해야 할 한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처음 닦는 보살이 보리심을 낸 까닭에 성문의 종류로는 미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짐승의 왕인 사자와 같다. 모든 짐승을 위하는 까닭에 큰 소리로 우렁차게 우나니, 그 소리 때문에 사자가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 그 새끼가 살찌고 씩씩하면 용감하고 건장하여 날뛰는데, 모든 짐승들이 그 큰 소리를 들으면 모두 다 도망하여 숨는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도 비유하면 사자가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와 같이 보리의 우렁찬 소리를 내나니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런 까닭에 여래가 살바야 지혜로써 처음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불성(佛性)을 찬탄하시는 것은 다 여래가 잘 가르쳐 인도하고자 함이니, 보살이 지혜를 얻어 용감하고 건장하면 보리가 증장될 것이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번뇌에 탐착하면 저절로 손해를 본다. 비유하면 사자의 힘줄로 현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면 다른 짐승의 힘줄로 만든 줄은 모두 끊어지는 것과 같다. 여래가 바라밀로써 보리를 성숙시키고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는 까닭에 만약 찬탄함이 있으면, 5정(情)32)이 다 끊어지고 2승의 도행(道行)도 모두 함께 끊어진다. 비유하면 코끼리와 소 따위의 잡다한 젖을 가득 채워 큰 못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만약 사자의 진짜 젖 한 방울을 못에 떨어뜨리면 이 모든 잡다한 젖은 흘러가 버리고 같은 못에 머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리심의 젖도 또한 이와 같아서 백천 겁 동안 쌓은 악과 죄업도 사자의 보리심 때문에 그 죄장(罪障)은 다 사라져 없어지고 나머지 2승(乘)의 해탈도 없어져서 보리의 종성(種性)과 감히 함께하지 못하게 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가릉빈가(迦陵頻伽)33)가 오히려 알 속에 있으면서 만약 소리를 내면, 설산(雪山)에 사는 큰 새들의 소리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나니, 생사의 알 가운데서 큰 보리심을 발하는 까닭에 닦은 공덕과 대비(大悲)의 세력이 저 성문과 연각은 미칠 수 없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금시조(金翅鳥)34) 왕의 새끼는 처음 나서도 눈은 밝고 날카로우며 매우 빨리 날아서, 일체 모든 새들이 아무리 오래 성장했다 하더라도 미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보리심을 내어 법왕자(法王子: 부처님의 아들)가 되면 지혜가 청정하고 대비하며 용감하고 건장하여 일체 2승은 비록 오랜 겁을 지내면서 이미 도행(道行)을 닦았다 하더라도 모두 미칠 수가 없다.”
8. 보계소문경(寶髻所問經)
실천해야 할 한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은 한 가지 계율을 잘 지키고 청정하게 바라밀을 실천해야 함을 해설하였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보계(寶髻)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어떤 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지계바라밀의 청정한 행인가? 선남자야,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한 가지 지계바라밀의 청정한 행(行)이 있느니라. 어떠한 것이 그 한 가지인가? 위없는 보리에서 마음을 버렸지만, 다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은 만약 일[事]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라도 능히 상응하게 한다. 이 마음은 삼계(三界) 안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여 최상이 되며, 이 마음은 성문과 연각을 초월하였으며, 이 마음은 일체 중생들을 구원하여 제도할 수 있고, 삼계의 중생들을 피안(彼岸)35)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 마음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 구슬이 한량없이 많은 양과 같으며, 이 마음은 깊고 무거워 생각을 보호하여 버림이 없고 잠깐도 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열 가지 시바라밀(尸波羅蜜)의 청정한 행을 닦아야 하나니, 어떠한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세 가지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한 행과 네 가지 입이 짓는 청정한 행과 세 가지 마음이 짓는 청정한 행이니, 이것이 열 가지 다함없는 청정한 계행이 되느니라.”
9. 연법사품경(演法師品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수행하는 보살이 성문의 법교(法敎: 敎法)를 비교하여 헤아렸다. 수행하는 보살이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보살행문(菩薩行門)을 닦고 배운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큰 바다에 들어가 바다 밑바닥에 앉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이미 바다를 보고 나서는 곧 소 발자국에 고인 물에서 손과 발을 흔들어대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손을 내저으면서 물에서 뜨는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지난번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큰 바다에 들어가 바다 밑에 앉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오늘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먼저 이 소 발자국에 고인 물에서 배우고 익힌 다음에 바다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사리불아, 이 사람이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훌륭하고 좋은 방편을 취하지도 않은 채 ‘내가 소 발자국에 고인 물에서 먼저 익히고 배운 뒤에 바다 밑에 들어가리라’고 했다면,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사리불이 말했다.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바다에 들어가 뜨는 것을 익혀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처가 열반에 든 뒤에 세간에 법주(法主)36)인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새와 우바이가 이 대승경전에 대하여 믿는 마음을 내어 공양을 올리며, 여래의 지혜와 거룩한 덕을 드러내어 드날리고 공경하고 존중하면 이미 대승의 깊은 이치에 인연한 것이긴 하지만, 지혜가 좁고 하열하면 그 밑바닥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여 뒤에는 성문에 의지하여 머물거나 잡된 학문과 『아함경(阿含經)』과 논(論)을 닦고 익히며, 명예와 이양(利養) 때문에 모든 단월(檀越: 보시하는 불자들)들과 오가고 하게 되느니라. 만약 어떤 비구가 대승경전을 익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서로서로 아첨하며 바르지 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니, 도반[伴侶]을 이끌어 성문 배우기만 좋아한다면, 소 발자국에 고인 웅덩이 물에서 손을 내저으며 물 위에 뜨는 것을 익히고 배우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사리불아, 이러한 까닭에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가지고 있는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니라. 이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여래의 위의를 배우고 모아 실천해야 하느니라. 만약 여래가 지혜가 없는 대중들 가운데 있으면 저들과 서로 오고 가면서 내통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법을 베푸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받지도 아니하고 침묵하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을 것이니라.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라. 마치 모든 부처님 세계의 모든 보살마하살이 백천 가지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주지(住持)하고 있음을 보고 듣는 것처럼 모든 백천 국토에서도 억백천 중생들에게 익히고 배우도록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신통과 큰 힘을 얻게 하고 선행(善行)의 공덕을 성취하게 하느니라. 사리불아,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서 모든 보살들을 따라 법행(法行)을 익히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저 위의(威儀)와 행업(行業)37)과 선정(禪定)38)과 해탈삼매(解脫三昧)와 삼마발제(三摩鉢帝: 定)와 선교방편(善巧方便)과 위신력(威神力)과 5신통과 해탈을 마땅히 배워야 하는 까닭에 그들을 따라서 닦고 배우는 것이니라. 그러나 공한정처(空閑靜處)에서는 마음으로 시방 국토의 모든 큰 보살들의 근기(根機)를 따르는 방편을 생각하되, 반드시 성문의 지혜에 들어가기를 좋아하여 수지(受持)하거나 익히고 배우지 말아야 하느니라.”
10. 결정비니경(決定毘尼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성문과 보살은 어떻게 가르침을 받아야 계행(戒行)과 율의(律儀)가 상응하는가를 해설하였다. 3독(毒)의 유형을 해설하여 가볍고 무거움을 결정하였다.
그때에 성자 우바리(優波離)39)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부처님이 계시는 곳에 나아가 머리 숙여 정례(頂禮)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종래에 편안히 앉아 선정에 들어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세존께서 먼저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의 사람과 그리고 처음 대승(大乘)을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계와 청정한 율의(律儀)를 제정하셨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계율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비니율장(毗尼律藏)40)에 있어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니 별다른 문제가 없사오나 만약 이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제가 어떻게 계율을 가르치는 것이 좋겠습니까? 만약 성문승과 연각승의 사람들이 금계(禁戒)를 닦고 지녀서 그들로 하여금 어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처음 대승을 수행하는 보살이 계율을 보호하고 닦아 지니게 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이러한 이유로 저를 위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지금 부처님의 처소에서 비밀리에 듣고 지녀 기억하고자 합니다. 저는 곧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에 저 자신을 자제할 수 있사오니, 저에게 만약 금단(禁斷)의 계율을 거두어 주시면 감히 감당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것을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 하며, 어떤 것을 계율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까? 세존이시여, 지금 이 모임 가운데는 성문과 보살과 헤아릴 수 없는 대중들이 다 모였으니, 감히 드러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우바리가 이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우바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성문을 위하여 근기에 알맞은 청정한 계율을 따로따로 설명하도록 하라’고 하고, 다시 ‘처음 대승의 행을 수행하는 보살들을 위한 까닭에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근기에 맞도록 청정한 계율을 특별히 설하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이겠느냐? 우바리야, 만약 성문이 지키는 계율은 그 계행이 차별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대승을 수행하는 보살의 계상과 위배되나니, 이는 곧 보살의 청정한 계율이 아니다. 만약 처음 대승을 수행하는 보살이 지키는 계율이 청정하지만, 곧 성문의 계행과 더불어 위배되어 같지 않다면, 이것도 청정한 계율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성문의 뜻과 원력(願力) 때문에 나아가서는 찰나(刹那)41)도 세간의 생사를 구하지 않으며, 또한 좋아하는 것도 없고 소원하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성문의 청정한 계행이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수행하는 보살의 뜻과 원력 때문에 ‘바라건대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 동안 이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들을 구원하여 제도하되 마음에 피곤해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나이다’라고 서원한다면, 이것이 처음 대승이 수행하는 법을 수행하는 보살의 청정한 계행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각각 근기를 따라 금계(禁戒)를 설하는 것이 당연하니라. 만약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다른 이의 마음에 순종하여 중생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문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자기를 이롭게 하느라고 다른 이의 마음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처음 대승을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관용(寬容)과 방편이다. 그러나 성문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관용하는 것이 없고 금계는 위엄이 있고 엄격하다. 만약 처음 대승을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장원(長遠)하므로 말할 만한 상(相)이 없다. 그러나 성문을 위하여 계율을 말한다면, 위엄이 있고 엄격하므로 상이 있는 것을 집착할 것이다. 우바리야, 무슨 까닭에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수행하는 보살은 다른 사람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학(修學)하게 하며, 왜 성문은 다른 사람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닦고 배우게 하겠느냐?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수행하는 보살은 각각 근기를 따라 중생들을 인도하여 교화하며, 다른 이의 마음을 순종하기 때문에 괴로운 일이 없다. 그러므로 계행을 닦고 지키는 것이다. 만약 성문이라면 곧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 까닭에 계행을 닦고 지니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 대승이 수행해야 할 법을 수행하는 보살의 계행은 너그럽게 용납하면서도 여김이 없으며, 무슨 까닭에 성문의 금계는 몹시 좁고 위엄이 있고 엄격한가?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만약 처음 대승이 수행하는 법을 수행하는 보살이 이른 아침에 계율을 어겨 죄를 지었더라도, 정오에 이르러 만약 보리심을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게 하여 계를 모아 성취하였으면, 곧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 만약 정오를 당하여 계율을 범하였더라도 황혼에 이르러 보리심을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게 하면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 만약 초저녁에 계율을 범했다 하더라도 한밤중이 다 되도록 보리심을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게 하여 계를 쌓아 성취하면 곧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 만약 한밤중에 계율을 어긴 일이 있더라도 그 다음날 새벽이 이를 때까지 보리심을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게 하여 계를 쌓아 성취하면 곧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대승이 수행해야 할 법을 수행하는 보살은 계행(戒行)이 느슨해져서 엄격하지 않으면, 또한 보살이 죄를 짓고 계율을 범하는 일이 있어도 마땅히 뉘우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성문이 계율을 어기면 계상(戒相)42)이 곧 없어져서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성문이라면 계율을 지켜서 번뇌를 제거하려는 까닭에 머리가 타고 옷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처럼 마음으로 빨리 적멸의 열반을 구하기 위하여 단단히 계행(戒行)43)을 지킨다. 무엇을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의 길고 먼 수행이며, 모양[相]이 없고 집착이 없지만 세간을 여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성문이 모양에 집착하여 일생 동안 단멸케 하여 나타내는 수학(修學)이라고 하는가? 우바리야, 만약 처음으로 대승이 수행해야 할 법을 수행하는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 동안 비록 오욕(五欲)의 쾌락을 받았어도 보리심을 잠깐이나마 버린 적이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 보살의 계행은 완전무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대승의 행을 닦는 보살은 뒤에 가서는 보리심을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수면(睡眠) 등의 오욕에 있어서도 오히려 더러워짐이 없는데, 하물며 깨달은 사람에게야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만약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이라면 반드시 일생 동안 번뇌를 다 끊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보리가 성숙해지면 번뇌는 저절로 없어진다. 만약 성문이라면 도행(道行)을 닦고 익혀도 오히려 성숙해지지 않는다. 이들의 마음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다시는 세간에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일생 동안에 신속하게 수행할 것을 생각한다. 비유하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다.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은 장구한 세월에도 마음에 싫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고 따라 들어가 수행한다. 그러나 응당 알아야 한다. 성문은 일생 동안 잠시 동안만 닦고 배운다. 이러한 까닭에 우바리야, 네가 만약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가르쳐 주고 계율을 말해 주려면, 너그러운 것이나 막는 것으로 다른 이의 뜻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깊고 깊게 닦고 배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만약 성문을 가르쳐 주고 계율을 말해 주려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그럽거나 느리게 함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은 큰 인연을 위하여 법의 그릇을 닦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성취한다. 보살은 반드시 세간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멀고 먼 오랜 겁 동안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다’고 발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래는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삼계(三界)의 나고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고 허물을 뉘우치는 인연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래는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매우 심오하고 청정한 인연과 허물이 없고 얽힘이 없으며 장애가 없고 공상(空相)이라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만약 보살이 이러한 말을 듣고 나면 세간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면서 조금이나마 싫어하거나 피곤해 하는 일이 없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것이니라.” 그때에 성자 우바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3독(毒)의 중죄에 세 종류가 있으니, 탐욕을 반연하여 서로 호응하는 것과 성냄을 반연하여 오라에 묶이는 것과 어리석은 것[愚癡]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무거우며 어느 것이 가장 가볍습니까?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을 위하여 그 가볍고 무거운 것과 방편의 계행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성자 우바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처음 대승의 수행법을 닦는 보살이라면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 동안 항상 탐욕을 범하여 여러 가지 죄를 지은 까닭에 또한 대승을 믿고 지니면서 한 생각이라도 성내는 마음을 내면 그 죄는 탐욕의 죄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바리야, 만약 성내는 마음이 발동하면 곧 중생들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내는 마음을 버리고 탐욕심이 일어나면 곧 중생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며, 보살도 액난(厄難)이 없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우바리야.” 부처님께서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만약 탐욕을 범하게 되면 보리심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느릴 것이며 지은 죄는 점점 가벼워지게 될 것이다. 만약 진심(瞋心)을 범하면 보리심이 없어지고 떠나가는 것이 점점 빨라지고 죄를 얻는 것도 매우 무거울 것이다. 만약 어리석음을 범하면 나태해지고 보리심을 떠나는 것이 빨라져서 얻은 죄가 점점 더 깊게 될 것이니라. 우바리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3독의 가볍고 무거운 것이 이와 같으니,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지혜의 마음을 잘 지키고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범하는 일이 없이 완전무결하게 해야 하느니라.”
11. 변청정비니경(遍淸淨毘尼經)
실천해야 할 두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보살행과 성문행에 각각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하는가를 해설하고, 2승(乘)의 가볍고 무거움을 비교하여 설한 것이다.
그때에 적정(寂靜) 천자가 문수사리동자(文殊師利童子)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까? 만약 성문 비구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까?” 문수가 대답했다. “마음이 놀라고 움직이는 까닭에 삼계가 싫어서 여의려고 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한량없이 많은 법으로 세간을 섭수하려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을 끊지 않고, 일체 중생들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려고 세간에 머물기를 좋아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공덕과 자량(資糧)을 싫어해서 여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지혜의 자량과 공덕을 모아서 싫어하지 않으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번뇌를 싫다고 여기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일체 중생들의 번뇌를 섭수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들을 위하지 아니하여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덕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일체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덕을 널리 드러내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닦은 행업(行業)을 모든 하늘 사람이 증명하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다시 닦은 행업을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하늘 사람들이 널리 증명하여 알아들으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마군(魔軍)을 버리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마군들로 하여금 들고 일어나게 하여 보살이 꺾어버릴 수 있으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심량(心量)을 밝히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일체 국토에서 제불여래의 거룩한 덕을 밝히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위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성덕을 수습하고 섭념(攝念)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소승의 해탈을 위하여 빠르게 되기를 집착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찰나의 지혜로써 보리를 성숙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삼보의 씨앗과 성품을 끊으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삼보의 씨앗과 성품을 닦고 배우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와병(瓦甁)이 깨지면 다시는 완전하게 회복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고, 금 그릇은 파괴되어도 수리하여 가지면 옛날과 같아지는 것과 같은 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훌륭하고 좋은 방편을 구족하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훌륭하고 좋은 방편에 상응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를 갖추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10력과 4무소외의 마음이 상응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세간을 피하는 것이 불구덩이를 피하듯 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세간에 머물기를 좋아하여 동산에 노닐고 집에 살듯이 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6바라밀과 함께 4섭(攝)44)의 일을 갖추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4바라밀과 아울러 4섭의 일을 수행하여 굳게 생각을 다잡아 유지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만약 일체 숙업(宿業)과 습기(習氣)를 끊지 못하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상속하는 일체의 습기를 제거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요긴한 것만 말하여 만약 마음으로 수량(數量)에 집착하여 양법(量法)을 가까이하고 헤아릴 수 있는 계행(戒行)과 삼매(三昧)와 지혜(智慧)와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익히고 배우면 이것은 곧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요, 만약 숫자를 따지지 않고 한량없이 많은 번뇌로써 무량한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배운 계행과 삼매와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을 친근히 하면 이것은 곧 수행하는 보살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그때에 여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 좋은 말이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을 조복하는 법행(法行)에 처음 들어가는 것이다. 무슨 이치 때문인가? 문수사리야, 내가 말한 해탈까지의 일에 대하여 잘 살펴보아라. 이것이 조복(調伏)의 뜻이니, 모두 다 원만히 성취하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문수사리야, 비유하면 마치 두 사람이 같은 곳에 있어도 한 사람은 사해의 바닷물에 대하여 찬탄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을 찬탄하는 것과 같으니라. 문수사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이 찬탄할 만큼 많은 것이냐?”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작은 웅덩이로서 아주 얕은 물인데 하물며 사해의 바닷물과 비교하여 찬탄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성문이 그 마음을 조복하는 현상도 또한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 발자국에 고인 물과 같아 자체가 너무 적어서 건널 것도 아니고 찬탄해도 이익될 것이 없다. 소승의 경중(輕重)도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다른 한 사람이 찬탄하는 큰 바다에 대하여 문수사리야,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사람이 큰 바다에 대한 찬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큰 바다의 공덕이 한량없으니, 찬탄한 것도 한량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마땅히 수행이 한량없이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비유하면 큰 바다와 같아서 물방울의 양을 알 수 없듯이 대승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다.” 그때에 이 법을 말해 마치자, 1만 2천 명의 천자(天子)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각각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지금부터 보살이 수행하는 곳에서 수행하여 닦고 배워 일체 중생들을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길에 들어가게 하기를 바라옵니다.”
---- 1)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법공지(法空智)라고도 한다. 무생법인을 법공지라고 하는 데 대하여, 무생인은 인공지(人空智)를 뜻한다. 즉 아견(我見)에 의해 인식되는 인아(人我)는 모두 공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지혜이다. 2) ‘아비’는 avici의 음사이다. 의역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한다. 8대 지옥의 하나로서 염부제 밑 2만 유순(由旬) 되는 곳에 있으며 5역(逆)의 죄를 지은 사람이 떨어진다고 한다. 고통이 끊일 사이 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한다. 3) 범어 garuḍa. 가루라(迦樓羅)ㆍ가류라(加留羅)ㆍ계로다(揭嚕茶)라 음역하며, 묘시조(妙翅鳥)라고 번역한다. 인도 신화의 가공의 큰 새이다. 사천하(四天下)의 대수(大樹)에서 내려와 용을 잡아먹고 양 날개를 펴면 336만 리나 된다고 한다. 그 날개는 금색이라고 한다. 대승경전에서는 천룡인부중(天龍人部衆)의 하나이고, 밀교에서는 범천(梵天)ㆍ대자재천(大自在天)이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이 새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다고 한다. 또는 문수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4) 범어 Kiṃnara. 또는 긴나라(緊拏羅)ㆍ긴타라(緊陀羅)ㆍ긴날락(緊捺洛)ㆍ견타라(甄陀羅)ㆍ진타라(眞陀羅)라고 하기도 하며, 번역하여 의인(疑人)ㆍ의신(疑神)ㆍ인비인(人非人)ㆍ가신(歌神)ㆍ가악신(歌樂神)ㆍ음악신(音樂神)이라고도 한다. 8부중(部衆)의 하나로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또는 새인지 일정하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는 하늘의 악신(樂神)이라고 한다. 혹은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또는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는 등 그 형상도 일정하지 않다. 5) 범어 Mahoraga. 8부중(部衆)의 하나이다. 또는 막호락(莫呼洛)ㆍ모호락(牟呼洛)이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대망신(大蟒神)ㆍ대복행(大腹行)이라고 한다. 몸은 사람과 같고 머리는 뱀이라고 한다. 용의 무리에 딸린 악신(樂神)으로 묘신(廟神)이라고도 한다. 태장계 만다라에서는 외금강원의 북쪽에 있다. 6) 범어 gandharva의 음역이다. 또는 건달박(健達縛)ㆍ건달바(犍達婆)ㆍ언달바(彦達婆)ㆍ건답화(犍沓和)ㆍ헌달박(巘達縛)이라 하기도 하며, 번역하여 향신(香紳)ㆍ후향(齅香)ㆍ향음(香飮)ㆍ심향(尋香)ㆍ식향(食香)ㆍ심향행(尋香行)이라고 한다. 갖가지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속성이 주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하늘의 악사라 하는데, 하늘에 있으며 풍악을 울리는 신이다. 술ㆍ고기를 안 먹고, 다만 향을 찾을 뿐이므로 심향이라고도 하며, 긴나라와 함께 제석천을 모시고 기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는 동방 지국천(持國天)의 권속으로서 동방 수호의 신으로 인식되었으며, 또 천룡팔부 중의 하나로서 불법의 수호자로 되어 있다. 7) 초목으로 병을 고치는 이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이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대승의 가르침이 번뇌로 고통 받는 중생을 가장 잘 치유해 주는 것을 뜻한다. 8) 4종전도(種顚倒) 또는 4도(倒)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 빠져 있는 네 가지 그릇된 견해로서, 즉 상전도(常顚倒)ㆍ낙전도(樂顚倒)ㆍ아전도(我顚倒)ㆍ정전도(淨顚倒)를 말한다. 2승(乘)전도로서 무상(無常)전도ㆍ무락(無樂)전도ㆍ무아(無我)전도ㆍ무정(無淨)전도 등 네 가지 그릇된 견해라고도 한다. 9) 범어 pañca nivaraṇā. 5장(障)이라고도 한다. 개(蓋)는 개부(蓋覆)한다는 뜻이다. 5법(法)이 있어 심성(心性)을 가리워 선법(善法)을 낼 수 없게 한다.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이니, 5욕에 집착함으로 심성을 가리는 것이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이니, 성내는 것으로써 심성을 가리는 것이며, 셋째는 수면개(睡眠蓋)이니, 마음이 흐리고 몸이 무거워짐으로 심성을 가리는 것이요, 넷째는 도회개(掉悔蓋)이니, 마음이 흔들리고 근심함으로 심성을 가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의법(疑法)이니, 법에 대하여 결단이 없이 미룸으로써 심성을 가리는 것이다. 10) 9액(厄)ㆍ9난(難)ㆍ9횡(橫)ㆍ9죄보(罪報)라고도 한다. 석존이 현세에서 받은 9가지 재난. 첫째 음녀 손타리에게서 욕설을 들은 일. 둘째 전차파라문의 계집에게서 욕설을 들은 일. 셋째 제바달다에게 발가락을 다친 일. 넷째 병목에 발을 찔린 일. 다섯째 비루리 때문에 두통을 앓은 일. 여섯째 아기달다 파라문에게 말 먹이 보리의 베풀음을 받은 일. 일곱째 차가운 바람 때문에 등이 아팠던 일. 여덟째 성도 전 6년 동안의 고행. 아홉째 바라문의 마을에 들어가 밥을 빌다가 얻지 못한 일. 11) 외도의 여러 주장을 분류하여 62종으로 한 것. ①본겁본견(本劫本見)ㆍ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을 62종으로 나눔. 본겁은 과거시, 본견은 과거에서 상견(常見)을 일으킨 것. 말겁은 미래, 말견은 미래세에서 단견(斷見)을 일으킨 것. 본겁본견의 설을 18종으로, 말겁말견의 설을 44종으로 하여 62견이라 한다. ②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世)에 각각 5온(蘊)이 있어 곱하여 15가 되고, 낱낱이 4구(句)의 이견(異見)이 있어 합하여 60견(見)이 되고, 근본인 단(斷)ㆍ상(常) 2견을 더한 것. ③5온ㆍ3세의 곱하는 것은 ②와 같고, 4구의 방식을 달리하여 이 4구로써 3세의 5온에 일관하여 62견으로 한다. ④4구의 해석은 ②와 같고, 4구와 3세의 배대(配對)를 달리한 것이다. 12) ①육안(肉眼)이니 우리 중생들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눈이며, ②천안(天眼)이니 색계(色界)의 사람이 가진 눈으로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눈이며, ③혜안(慧眼)이니 2승(乘)의 사람의 눈으로 연기의 실상(實相)을 보는 지혜의 눈이며, ④법안(法眼)이니 보살의 눈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일체의 법문을 비춰 보는 지혜의 눈이며, ⑤불안(佛眼)이니 부처님의 눈으로 일체를 알며 일체를 비춰 보는 눈으로 앞의 네 가지를 모두 구비한 눈을 말한다. 13)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계를 말한다. 14)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하는 여덟 가지 어려운 처지를 말한다. 15) 범어 upādhyāya, 팔리어 upahāya. 오사(烏社)ㆍ올사(殟社)ㆍ화사(和社)ㆍ화사(和闍)ㆍ화상(和上)이라고도 한다. 범어로는 오파타야(鄔波駄耶)라 음역하고, 친교사(親敎師)ㆍ역생(力生)ㆍ의학(依學)ㆍ근송(近誦)이라 번역한다. 본래는 아사리와 함께 수계사(授戒師)인 스님을 말하는 것이나, 후세에는 덕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게 되었다. 16)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선지식(善知識)ㆍ선우(善友)ㆍ친우(親友)ㆍ승우(勝友)ㆍ선친우(善親友)라 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ㆍ악우(惡友)ㆍ악사(惡師)라 한다. 다만 지식이라고만 할 때는 선지식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이듯이 노ㆍ소ㆍ남ㆍ녀ㆍ귀ㆍ천 어떠한 모양을 하였든지 불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인연을 맺게 하는 이는 모두가 선지식이다. 17) 범어 samāpatti. 정(定)의 일명. 삼마발제(三摩鉢提)ㆍ삼마발제(三摩拔提)라고도 하며, 등지(等至)라 번역. 정을 등지라 함은 등(等)은 정력(定力)에 의하여 혼침(惛沈)ㆍ도거(掉擧)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등 평정(平靜)함을 말함. 정력이 이런 상태에 이르게 하므로 지(至)라 한다. 18) 범어 Samyaksaṁbuddha. 부처님의 10호(號)의 하나. ‘삼먁삼불타’라고 쓰기도 한다. 번역하여 정등각(正等覺)ㆍ정변각(正遍覺)ㆍ정변지(正遍智)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평등하고 바른 깨침을 말한다. 19) 마음의 작용을 모두 끊어버린 선정. 멸진정(滅盡定)의 준말. 20)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하신 말씀. 21) 부처님 제자를 부르는 말. 22)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 뛰어난 분. 23) 보살이 불위(佛位)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햇수[年數]. 또는 3기(祇)라고도 한다. 10주ㆍ10행ㆍ10회향의 3위(位)를 수행하여 마치는 데 1아승기겁을 지내며, 그 동안에 7만 5천 부처님께 공양한다. 10지 중의 초지로부터 제7지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마치는 데 제2 아승기겁을 지내며, 7만 6천 부처님께 공양한다. 제8지로부터 제10지의 수행을 마치는데 제3 아승기겁을 지내며, 7만 7천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한다. 아승기겁은 불교에서 일컫는 124대수(大數) 가운데 105번째의 수로서 한자어로는 무수(無數)라고 한다. 24) 부처님의 제자가 같은 서열의 제자를 일컫는 말. 25)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26) 범어 sarvaña. 줄여서는 살운(薩雲)ㆍ살운(薩云)이라고도 하며, 일체지(一切智)라고 번역한다. 불과(佛果)에서 일체 법을 증득하는 지혜이다. 살바야해(薩婆若海)라 함은 이 지혜의 넓은 것을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27) 단나(檀那)ㆍ단(檀)ㆍ다나(陀那)ㆍ시여(施與)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질 등을 베풀어 주는 것으로서, 6바라밀의 하나. 보시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재(財)와 법(法), 2종 보시를 비롯하여, 3ㆍ4ㆍ5ㆍ6ㆍ8종 등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 재시(財施)ㆍ법시(法施)ㆍ무외시(無畏施) 등으로 나누는 3종 보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여러 가지 보시행들은 보살이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덕목이다. 보시할 때 중요한 점은 집착함이 없어야 하며, 청정한 것을 베풀어야 하며, 보시물에 기준을 두지 말고 베푸는 마음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28) 모든 물질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목숨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 수(受)는 수(壽). 29)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業)을 행할 때 계행(戒行)이 나타나는 모양. 30)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5관이 그 대상인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에 대해 일으키는 욕망. 또 재욕(財欲)ㆍ색욕ㆍ음식욕ㆍ명예욕ㆍ수면욕(睡眠欲)을 말하는 수도 있다. 31)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다. 32)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으로 일으키는 다섯 가지 감정. 5근(根)이라고도 한다. 33) 범어 kalaviṅka. 또는 가라빈가(歌羅頻伽)ㆍ갈라빈가(羯羅頻迦)ㆍ가릉비가(迦陵毘伽)라고도 하며, 줄여서 가릉빈(迦陵頻)ㆍ가루빈(迦累賓)ㆍ가릉(迦陵)ㆍ갈비(羯脾)ㆍ빈가(頻迦)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호성(好聲)이라 한다. 소리가 곱기로 유명하다.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맑은 인도의 새를 말하기도 한다. 이 새는 ‘극락조’라고도 하여, 정토만다라 등에서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으로 그린다. 옛날 동양에서 천상 사람이 나는 모양을 그려 가릉빈가라 함은, 대개 그 소리가 고운 것을 이상화(理想化)하여 모양의 아름다움으로 변한 것인 듯하다. 34) 범어 garuḍa. 가루라(迦樓羅)ㆍ가류라(迦留羅)ㆍ계로다(揭路茶)ㆍ가로다(加嚕茶)라고도 쓰고, 항영(項癭)ㆍ대소항(大嗉項)ㆍ식토비고성(食吐悲苦聲)이라 번역한다. 또는 소발랄니(蘇鉢剌尼)라 하고, 묘시조(妙翅鳥)라 번역하기도 한다. 용을 잡아먹는다는 조류의 왕. 8부중(部衆)의 하나. 실제로 있는 동물이 아니고 신화의 새이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새의 괴수로서 이러한 큰 새의 존재를 생각하고, 대승경전 같은 데에 8부 중의 하나로 자주 인용하고 있다. 밀교에서는 이 새를 대범천(大梵天)ㆍ대자재천(大自在天) 등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화현한 것이라 하고, 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태장계 외금강부 중에 들어 있다. 35)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향, 즉 열반의 경지. 36) 원래는 부처님을 일컫지만 여기서는 불법을 알고, 법을 말하는 이. 37)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 38) 선은 범어 선나의 준말, 정은 선의 한자 뜻. 생각을 고요히 하여 산란하지 않은 상태. 39)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계율에 대하여 제일 뛰어났던 제자. 40) 부처님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설한 율장. 41) 범어 kṣaṇa. 차나(叉拏)라고 음역. 일념(一念). 지극히 짧은 시간. 120찰나가 1달찰나(怛刹那), 60달찰나가 1납박(臘縛), 30납박이 1모호율다(牟呼栗多), 30모호율다가 1주야(晝夜)이므로, 1주야인 24시간을 120×60×30×30으로 나눈 것이니, 곧 75분의 1초가 된다. 42) 각주 28) 참조. 43) 계 4별(別)의 하나. 계를 받은 뒤, 계법의 조목에 따라 이를 실천 수행하는 것. 44) 고통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중생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네 가지 방법. ①보시섭(布施攝)이니, 상대편이 좋아하는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여 친절한 정의(情誼)를 감동케 하여 이끌어 들임. ②애어섭(愛語攝)이니,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하여 친해서 이끌어 들임. ③이행섭(利行攝)이니, 동작ㆍ언어ㆍ의념(意念)에 선행(善行)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여 이끌어 들임. ④동사섭(同事攝)이니 상대편의 근성(根性)을 따라 변신(變身)하여 친하며, 행동을 같이하여 이끌어 들임.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riad_of_Yakushi_Nyorai
https://en.wikipedia.org/wiki/File:Triad_of_Yakushi_Nyorai.JPG English: Jyodai no Tyoukoku (Ancient Japan Scultpures), Asahi-Shinbun, Osaka, Japan Author Ogawa Seiyou (1894-1960), a famous photographer in Japan ● [pt op tr] fr
♥Avis ,Portugal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아직도 그런 작전들이 떠오른다. 서해안 해변에서 쭈구미 사체를 보고 이름지은 추구미작전 다라니 삼매 앞 글자를 따 지은 다삼작전 청정무구작전 등등이 그런 것이다.
연구를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매일 뽑혀지는 경전을 놓고 대강 같은 내용만 중복해 기술하고 하루를 보내기 쉽다. 그런 가운데 일단 사찰탐방을 다녀오려 했다. 그러나 더위나 코로나 영향으로 사찰탐방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요즘 몸이 안 좋아 오랜만에 병원에 들렀다. 요즘 만성 피로가 심하다.
그런데 공교롭게 지금까지 다니던 병원들이 하나같이 폐업했다. 그래서 새 병원에서 약을 처방 받으려니 곤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헛걸음만 하고 되돌아왔다.
심신을 일신해서 새로 연구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연구 방향을 어떻게 새로 잡을 것인가를 두고 일단 고민해본다. 앞으로 조금 수준을 높여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도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가 좀 더 어려워진다. 인터넷 페이지는 지금도 조금 힘들다.
그런데 이번에 투자종목으로 겪은 경험을 되살려 좀 더 쉬운 주제를 살피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도 궁금하다. 어떤 종목이 2 주만에 이전 시세의 10 배가 되었다. 그런데 떨어지지도 않는다. 과거 시세보다 10 배가 올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면 갑자기 이전 시세의 10 배를 주고 종목을 매입한 이는 손해를 볼 것인가.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물건을 자신이 갑자기 10 배를 주고 자신이 혼자 매매를 진행하여 매입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와 사정이 비슷하다. 그렇게 매입한 이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런 형태로 계속 매매를 반복해도 마찬가지다. 거래시 지불하는 약간의 수수료만 비용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렇게 행하는 사정이 있다.
투자 시장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뉴톤이 올라탈 때까지 시세가 오른다. 뉴톤이 올라타자 바로 내린다.
뉴톤은 운동의 3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의 천재다. 수학의 미적분식도 뉴톤의 연구결과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평소 뉴톤이 현재의 각 물질의 위치를 파악하면 운동의 3 법칙을 통해 장래의 상태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주식시장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는 일화다. 실질이 없는데 어떤 종목이 계속 상승한다. 실질이 없기에 떨어질 것 같은데 관찰하면 꾸준히 상승해간다. 그래도 떨어질 것 같은데 또 상승하는 모습만 보게 된다. 그러다가 뉴톤이 이제 그 종목을 매입한 것이다. 그러자 끝없는 추락을 해서 손실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뉴톤이 올라탈 때까지는 계속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시세를 유지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 시세 이상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뉴톤이 올라타면 사정이 반대로 된다. 그렇게 계속 유지할 필요가 별로 없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시장 상황을 계속 바라보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계속 If 구문을 반복하거나 Should have + p.p 구문만 혼자 반복하면서 후회하는 심정만 생기게 된다.
그래서 한번 떠난 배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뉴톤이 미리 타고 있어도 배는 출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총량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뉴톤이 타고 있는 것, 내린 것, 또 다시 올라 타는 것이 파악된다. 그래서 뜻과 같지 않다.
주사위 게임에서 주사위를 원하는대로 나오게 할 능력이 없는 경우, 그리고 주사위 숫자를 매번 맞출 신통력도 없는 경우 계속 시장을 바라보면 정신건강만 해롭다.
그래도 여유자금을 어떤 형태로든 보관할 필요는 있다. 그래서 그런 취지에서만 잠깐 관찰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보통 TV 를 함께 같이 보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리모컨을 자신이 갖고 보는 경우와 다른 이가 리모컨을 갖고 보는 경우 입장이 다르다.
리모컨을 갖고 있는 이가 자꾸 채널을 돌린다고 하자. 조금 더 보고 싶은 광고나 프로가 나왔다. 그래도 마구 돌린다. 어떤 광고나 프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상대는 계속 머무르면서 관심있게 본다. 이런 경험을 몇번 하면 자신이 리모컨을 쥐고 방송을 보고 싶어한다.
현실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주사위를 나오게 할 능력도 없고 예측할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종목을 바라보게 되면 결국 위와 같은 상태가 된다. 자신의 뜻과 하나도 같지 않기에 짜증이 밀려올 수 있다.
이런 상태를 바꿔야 한다.
정말 시장에 머물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하려면 자신이 리모콘을 쥘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 종목의 90% 이상을 보유한 소수 주주 형태가 되거나, 아니면 따로 미래 시세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신통력을 갖거나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심을 적당히 끊어야 한다.
그리고 대신 자신이 그런 시장의 출구에서 나와 이후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그런 상태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야 한다.
현재 doctr 님의 원고를 본인이 인수한 상태다. 40 년전 과거에 처음 doctr 님이 원고 작성에 들어간 비용을 1 년당 5 조원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이 원고를 인수한 본인이 이제 500 조원 정도로 올렸다. 물론 투자종목 시장상황에 영향을 받아서다.
과거 행복론을 인수한 이후 논의 성격상 두 부분이 흠결이 있어서 중간에 편집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래서 이제 그 흠결을 메우고 새로 편집을 해갈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조금 현실에 밀착된 논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doctr 님의 선현지복 연구소의 본 취지와도 부합한다. 일단 그런 구상을 해보게 된다.
doctr 님의 행복론, 이상사회론, 현상의 진리론은 수행 분야의 니르바나 해탈, 불국토,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상응한다.
그런데 이 분야의 흠결은 이 논의가 생사현실안에 닫혀 있다는 점이다.
물론 doctr 님은 생사문제와 관련해 완전히 논의를 닫지는 않았었다. 다만 어떤 이가 행복론과 고려할 범위를 현생에만 국한하였다. 이 경우 한 주체가 사후 그와 관련된 것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만일 있다면 현생만 고려한 논의는 잘못된 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없다면 사후까지 고려한 논의는 공연한 논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학이 끝나면 졸업시험과 진학시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방학기간만 고려해 최상을 추구하면, 잘못된 방향이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방학기간 후에 어떤 학생이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졸업이나 진학까지 고려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의가 된다. 그래서 이 각 경우 논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행복론에서 사후 문제까지 고려에 넣으면 범위가 너무 확장된다. 또 이 문제는 사실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논의 자체가 종교적 성격의 논의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doctr 님은 처음에 어느 경우에던지 적절한 논의가 되도록 할 방안을 찾았다.
즉 사후 연속된 삶이 있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는 현생의 행복론 없다고 하면 이것만으로 충분한 행복론이 되도록 논의 방향을 잡았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논의 법위에서 제외하였기에 역시 불완전한 논의가 된다.
그래서 행복론 편집을 하는 가운데 먼저 단멸관을 부정해야 하는 사정을 먼저 확립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런 가운데 현재 행복론은 니르바나 행복론으로 명칭을 바꾸어 편집을 행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무량겁에 걸쳐 생사가 이어진다는 전제에서 행복을 살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왜 이렇게 살펴야 하는지가 행복론안에 들어가게 된다.
무량한 겁에 걸쳐 한 주체의 생사가 이어진다는 사정을 현재 현실 안에서 설명해야 한다. 이는 무량겁을 이어가는 한 주체의 근본정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설명하는 문제가 된다.
한편, doctr 님의 행복론에서 구체적 실현방법론이 다시 문제된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소원하는 바가 많다. 이것이 또 각 주체의 행복문제와 관련이 깊다. 예를 들어 건강, 시간, 지혜, 지식, 미, 인격, 인간관계, 부, 명예, 지위, 권력, 자유... 등등이 나열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각 경우마다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이 운전하는 이가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와 같다.
어떤 내용은 그냥 바라보고 지나쳐야 한다. pass 어떤 내용은 끊고 제거해야 한다. stop 어떤 경우는 그 방향을 돌려서 나아가야 한다. turn 또 어떤 경우는 그 내용을 아주 잘 성취해야 한다. go
이렇게 각 경우마다 다르다.
그런데 행복론에서는 이는 생사현실안의 문제다. 그래서 행복론에서는 선한 행복을 잘 성취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수행과 관련해서는 입장이 다르게 된다. 그것은 결국 수행목표의 성취를 위해서 이들 각 내용을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르바나 행복론은 기존의 행복론과는 그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초기 행복론의 문제점은 물론 doctr 님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그런데 이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편집을 달리해야 한다. 그래서 니르바나 행복론이 새로 편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원하는 부를 잘 성취할 수 있는가가 행복론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니르바나 행복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는 처음 행복론이 가졌던 다음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행복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자. 그런데 어떤 경우는 대단히 부유하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단순히 생계만 해결되고 있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각 상태에서 그가 행복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자. 이 때 이 두 경우 가운데 어떤 상태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이것이 처음 문제된다.
언뜻 생각하면 어차피 행복하다면 차라리 돈이 더 많은 상태가 행복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일반적으로 외관이나 수단을 중요시하기 쉽다. 그래서 먼저 외관상 풍요로운 상태가 더 낫게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무엇이 수단이고 목표인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무엇하려고 하는가. 무엇때문에 돈을 벌려고 했는가. 이 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행복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만일 행복 때문에 돈이 필요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행복은 돈보다 상위가치에 있는 목표가 된다. 그리고 돈을 버는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경우는 돈을 버는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해 들이는 비용과 같다. 그래서 같은 행복을 얻는데 들이는 비용을 많이 들였다고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하면 그 반대가 된다.
무엇이 수단이고 목표인가는 다음처럼 생각해야 한다.
사과 나무가 있다고 하자. 사과 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사과나무의 뿌리가 있고 싹이 나고 줄기가 생긴다. 가지가 뻗고 잎이 열리고 꽃이 피고 그리고 열매가 생긴다.
그래서 발생과정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사과열매로 본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가치의 발생은 거꾸로 보게 된다.
사과 열매가 가치가 있다. 그래서 사과나무의 꽃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또 잎과 가지가 가치가 있다. 그리고 또 싹과 줄기, 뿌리의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보게 된다.
그래서 이 판단이 중요하다.
행복과 행복을 얻는 수단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차피 행복한 가운데 이왕이면 돈이나 지위가 높으면 더 좋다고 본다고 하자. 그렇다면 돈이나 지위를 행복보다 더 상위의 가치로 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돈이나 지위는 행복을 얻는 수단이라고 본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차피 행복한 가운데 이왕이면 이런 수단을 적게 들여 같은 행복을 얻는 것이 더 현명하다. 반대로 말하면 같은 수단이나 비용을 들인 상태에서는 더 많은 행복을 얻는 것이 낫다.
그래서 행복론의 방향도 이 판단에 따라 그 방향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는 행복이 가장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볼 때이다.
그래서 어차피 행복하다면 다시 이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우열을 살핀 것인가가 추가로 문제된다.
doctr 님은 이 문제에서 행복이나 좋음이 누적된 상태로서 선한 행복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행복하거나 좋음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모두 차별없고 제한없이 좋다. 그리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궁하게 좋다. 그리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다 좋다.
이런 상태는 단순히 자신만 지금 당장 한 측면만 좋은 상태와 다르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이 결여되면 그 만큼 문제다. 물론 이는 이상적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념적으로 위에 가까운 상태를 선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차피 행복한 여러 경우가운데 이런 상태에 가까운 상태가 더 낫다. 그래서 선한 행복을 목표로 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니르바나 행복론은 결국 이와 다시 관련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이다.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 목표점의 관계를 놓고 이 문제를 살펴야 한다.
최근에 탐욕수행론 분노 수행론 맹목적 어리석음 수행론을 살핀바 있다. 탐욕 수행론은 조금 표현을 고쳐 리비도 수행론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각 주체가 강한 본능적 충동에 이끌려 나아가는 방향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면 결과적으로 고통에 처하게 된다. 물론 각 주체는 각 상황에서 이런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 방향이 당장 자신에게 많은 좋음을 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는 인과의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 각각을 살피면 그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살피고 이것을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본능적 충동에 이끌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런 에너지를 단지 방향만 돌려서 수행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향을 살폈다.
그리고 각 주체가 현실에서 희망하는 각 소원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수행에서는 어떻게 보게 되는가가 니르바나 행복론과 관련된다.
간단히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은 이들 일체가 망집에 바탕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들 일체는 모두 제거해야 한다. 대신 올바른 깨달음에 바탕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보리심에 바탕한 서원으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내용이 니르바나 행복론의 주된 내용이 된다.
그것은 각 주체가 희망하는 다양한 소원과 관련해서는 다음 내용이 된다.
그것을 끊고 버려야 할 사정을 먼저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 stop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갖는 소원에 대한 주된 내용이 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방향을 돌려서 서원의 형태로 바꾸어 성취할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니르바나 행복론은 기존 행복론과 방향이 달라진다.
다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소원을 고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경전에서도 취급된다. 결국 그 내용이 중생제도의 방편과 관련된다. 그래서 간단하지 않다.
이 경우는
개인적으로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남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남(해탈) 그리고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함 불국토의 장엄 성불 등의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이들이 취급된다. 그래서 이런 상위가치와의 관계에 따라 그 평가를 달리하게 된다.
그런데 또 이 경우 방편이 갖는 선악무기성 때문에 그런 방편의 구체적 성취방안은 직접 제공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다라니 삼매의 내용이 된다.
그래서 경전을 아무리 살펴도 다라니 삼매의 구체적 내용은 제시되지 않는다.
오늘 살피는 『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에서도 사정이 같다. 수행자가 지옥에 처해서도 천상의 쾌략을 누리는 방안이 있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축생에 처해서도 그런 방안이 있다고 제시된다.
물론 수행자가 지옥이나 축생에 처하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그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중생이 처하는 상황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생의 상태가 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중생을 구출해 내야 한다.
문제는 그 방안으로서 마하발두마 삼매나 변적정삼매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삼매에 대해서는 삼매의 일반적 방안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정작 삼매의 명칭만 제시받는 상태가 된다.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마하발두마 삼매가 되고 변적정 삼매가 되는가는 모호하다.
다라니도 사정이 같다. 구체적 소원을 성취하는 방안들은 모두 다라니 형태로만 제시된다. 그런데 아무리 다라니 구문을 살펴도 그 구체적 방안은 모호하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각 방편이 갖는 성격은 선악무기성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선하게도 사용되고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내용도 된다. [무기]
예를 들어 전기나, 폭약을 만드는 방안, 원자력 에너지를 얻는 방안이 갖는 사정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직접 제공할 수 없다. 물론 중생들이나 하급 수행자에게 그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은 그 제공자가 개입해 구체적 경우에 오직 선한 방향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통제 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결국 삼매나 다라니 형태로만 제시된다.
경전을 아무리 살펴도 삼매나 다라니의 구체적 내용이 제시되지 않는 사정이다. 그러나 삼매의 명칭이나 다라니 구절은 제시된다.
그리고 어떤 방편이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어떤 방편이나 소원의 성취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위와 같은 상위가치의 성취에 얼마나 어떤 형태로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니르바나 행복론도 결국 이런 방향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런 경우에는 노벨이 폭약을 개발해 수익을 얻은 다음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상태가 된다. 폭약은 탄광에서 광석을 캐낼 때는 수고를 대단히 덜어준다. 그런데 전쟁에서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이를 반성하고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런데 오늘날 노벨상을 수상하는 과학자가 발표하는 연구결과는 또 다시 이런 양면성을 갖는다. 그래서 아윈쉬타인의 원자력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물론 과학자는 가치 중립성에 숨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자가 발표한 연구결과가 악한 목적에 사용될 때는 무력하다. 그래서 과학자가 표방하는 가치 중립성이란, 알고보면 무책임한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건강만 회복하면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는 자세와 같다. 그 환자가 건강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대량 학살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의사는 가치 중립성에 숨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책무를 다한 것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하고 무책임하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이 문제를 그렇게 취급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니르바나 행복론에서 이렇게 임하면 결국 실질이 공허한 상태가 되기 쉽다. 정작 각 개인이 소원하는 각 수단의 성취방법은 내용이 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사실 투자 문제가 제기되면 각 경우에 어떻게 임해야 수익을 많이 거두는가를 살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구체적 경우에 그후 어떤 상태로 나아가는가가 더 큰 문제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는 역시 위와 같은 문제점을 갖게 된다. 맹목적으로 많은 수익만이 최고다. 이런 입장이 아니라면 이런 내용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또 생사현실 안에서 이에 초점을 대부분 맞춘다. 그런 사정 때문에 이 내용을 위 상위가치에 연결시켜 살피는 것이 니르바나 행복론에서 중요하다.
투자는 망쳐도 생사고통은 벗어나야 한다. 투자가 성공해도 이를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1차적 목표점이다. 그리고 니르바나 행복론도 여기에 초점을 두게 된다.
73 너희들 대중과 범왕과 제석과 사천왕과 천용과 귀신들은 다 마땅히 공경하여 가벼이 생각하는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내지말며 항상 모름지기 이 보살께 공양하고 명호를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稱念]하며 예찬(禮讚)하면 무량한 복을 얻고 무량한 죄를 멸하며 목숨이 마치면 극락세계인 아미타불(阿彌陀佛) 국토에 가 태어나게 되리라." ● 사바하 娑婆訶<七十三>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