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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생존을 현명하게 얻는 경우
- 일류고의 병폐
- 일류고
- 논문작성
- 텍스북
- 인천식주人天識住
- 실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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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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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ealization of The Good & The Right In Wisdom & Nirvāṇa Happiness, 善現智福
- ॐ मणि पद्मे हूँ
행복과최상
불기2561-12-24-회쟁론_001 본문
『회쟁론』
K0630
T1631
회쟁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회쟁론』 ♣0630-001♧
회쟁론
♥아래는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페이지 내용 업데이트 관련 안내]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19_1104_161548_nik_ar8_s12 구례 쌍계사부근
○ 2020_1114_134245_nik_bw4_s12 삼각산 도선사
○ 2018_1023_171943_nik_Ab15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18_1023_122206_can_AB7_s12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18_1022_174941_nik_Ab35 공주 태화산 마곡사
○ 2020_1017_150158_can_ar43_s12 삼각산 화계사
○ 2020_0910_124942_nik_Ab27 속리산 법주사
○ 2020_0908_162552_nik_ab39 합천 해인사
○ 2020_0908_154856_nik_BW27 합천 해인사
○ 2020_0906_114444_nik_BW27 천축산 불영사
○ 2020_0211_141817_can_fix 불암산 천보사
○ 2019_1105_155240_can_ct21 순천 조계산 송광사
○ 2019_1106_165144_can_BW25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9_1106_155604_can_ct36_s12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9_1106_121408_can_Ab35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6_091302_can_CT33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5_133719_nik_ar38 순천 조계산 선암사
● [pt op tr] fr
○ 2020_0909_143857_can_BW28 무주 백련사
❋❋본문 ♥ ◎[개별논의]
★%★
『회쟁론』 ♣0630-001♧
>>>
만약 일체에 자체[체體]가 없다면
언어도 일체에 속하니
언어 스스로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언어에 자체가 있다면
앞서 세운 주장이 깨어진다.
이처럼 오류가 있으니,
특별한 이유[승인勝因]를 또한 말해야 한다.
K0630V17P0756a18L;
若一切無體 言語是一切 言語自無體
何能遮彼體
若語有自體 前所立宗壞
如是則有過 應更說勝因 汝謂如勿聲
* 앞서 세운 주장 = 체가 없다는 주장
○ [pt op tr] 회쟁론_K0630_T1631 핵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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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12-24_회쟁론_001
x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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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001♧
회쟁론_핵심
CELINE DION - Encore Un Soir
Salvatore Adamo - Des Mots Dans Le Vent
Daniel Guichard - Je T'aime, Tu Vois
Leo Ferre - L'examen De Minuit & Bien Loin De Ici
● [pt op tr] fr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회쟁론
♣0630-001♧
『회쟁론』
회쟁론
○ [pt op tr]
관련페이지 내역
●회쟁론 판본에서 논자별구분 내용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k0630t1631001.html#010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회쟁론
sfd8--불교경율논코너sp_2563_05.txt ☞ ☞●회쟁론 판본에서 논자별구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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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쟁론을 살피기 위한 기본 내용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
■ 가정적 항변 구조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 중복서술을 피하고 체계적인 순서 배열 작업 진행중
▲4-5-6-7 부분 => 12-24 [현재 페이지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 현재 페이지]
▲1-2-3- 부분 =>09-22 일자로 모음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과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
회쟁론을 살피기 위한 기본 내용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
● 『회쟁론』
0 ● if만일-라면식 논의
0 ● 논의의 판본확정문제과 가정적 논의방식
0 ● 판본확정문제와 추상적 가정적 논의
>>>
1 ● 논의상 언어표현 의미혼동문제
1 ● 언어표현에 의존한 의미확정 곤란성
1 ● 망집과 궤변의 사례
2 ● 논의 취지와 배경 맥락에 따른 의미 파악
2 ● 배경사정 이해 없이 논의를 살피는 문제점
-------------
2 ● 배경사정 이해와 구체적 의미 확정
2● 실체없음과 공함을 제시하는 배경사정
2● 생사고통 해결의 전제로서 무아무자성 공의 이해
2● 생사고통 해결의 원칙적방안과 공의 이해
2● 기본적인 계의 수행덕목을 제시하는 사정
2● 생사고통 해결에서 무아 무자성 공의 이해의 가치
2● 무아 공 제시배경과 『회쟁론』의 논의 초점
2● 악취공견과 무아 공 제시취지의 오해문제
2● 차별없이 공함과 수행 필요성
2● - 악취공견과 수행의 필요성
2● - 일반적 입장과 수행의 필요성
2● 논의 배경사정과 혼동문제
-----------------------
0 ● 망상분별에 대한 해결방안 3가지
0 ● 망상분별을 받아들인 바탕에서 결론만 같게 취하는 방안
3 ● 언어표현이 지시가능한 의미들
3 ● 입장 조화를 위한 취사장 사단장의 방안
3 ● 다양한 유무 판단과 회쟁론의 유무판단
3 ● 언어영역의 존부문제 -언어표현 존부 논의
3 ● 관념의 존부 문제
3 ● 일반적인 유무판단- 관념 대응 감각현실 유무
3 ● 관념 대응 감각현실 유무 판단과 망집
3 ● 각 영역에 대한 기호
3 ● 참된 실체 존부 문제
0 ● 집착과 업을 통한 생사고통
3 ● 실재의 의미
3 ● 공과 실체없음의 관계
* 12월분에서 옮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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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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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t op tr] fr
◀접기◫
*
< 수정방안>
회쟁론은 분량이 많다.
따라서 편의상 하루하루 부분 부분 떼어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그래서 불기2565-11-29 일 부터는
각 부분을 떼어 일일단상 코너로 옮겨 놓고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일일단상 코너와 병행해 과거 조각글을 살펴 수정해 가기로 한다.
이를 위해 각 부분에 임시=> 표시를 붙여 표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추후 수정이 이뤄져도 임시 => 편집하는 일일단상 페이지 부분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수정이 마쳐지면 삭제처리하기로 한다.
[개관]
『회쟁론』 및 『중론』의 취지는 무엇인가?
용수보살의 『회쟁론』 및 『중론』은 다음을 제시함에 그 취지가 있다.
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1/2565-11-29-k0893-025.html
임시2=>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0-k0393-001.html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의 꿈을 꾼다고 하자.
그러나 이는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는 꿈을 꾸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얻는 내용이다.
한편, 꿈 속의 바다나 황금은 그에 기대하는 여러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꿈은 비록 생생하게 꾸지만, 실답지 않다.
현실도 이런 꿈과 같다.
현실이 꿈과 같은지를 살필 때 우선 다음이 문제된다.
예를 들어 아침에 거리를 나서니 멀리 산이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산을 대하면 매 순간 그 모습이 다르다.
안경을 쓰고 보거나 벗고 보거나, 가까이 보거나 멀리서 볼 때나, 어둡고 밝을 때 때 등등으로
매 상황마다 달리 보인다.
그렇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그런 상황에서 매번 반복된다.
현실은 꿈과 달리 다수 주체가 일정한 상황 일정한 조건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받는다.
그래서 현실 내용은 꿈과 달리, 진짜라고 할 참된 내용을 그 안에 뼈대로 갖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이런 현실일체는 하나같이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런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오히려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는 감각현실을 얻고 분별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이 가운데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또 나머지부분은 외부 세상이라 여기고 대한다.
이처럼 한 주체는 현실 내용을 얻는다.
이런 현실은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하여 얻어내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가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얻어낸 현실 내용은 아무것도 없게 되는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런 내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경우 자신이 보았던 내용은 아주 사라져 없어지게 되는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에 관계없이 무언가가 있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런 내용은 결국 일정한 주체나 마음과 관계없이 본래부터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이를 '실재'라고 표현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실재는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하여 현실에서 내용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될 때 한 주체는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
한 주체는 오직 자신의 마음이 관계해 화합해 얻어내는 내용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는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서,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불가득 공 ]
이런 가운데 현실과 실재의 관계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선, 현실 내용은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해 얻어낸 내용이다.
따라서 현실은 본 바탕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한편, 본 바탕 실재 역시 현실 내용이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영역은 한 주체가 끝내 얻어낼 수 없다.
따라서 실재에서는 현실 내용과 같은 내용도 얻어낼 수 없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한 주체가 매 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게 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 내용은 결국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꿈에서 바다나 황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꿈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꾸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마음이 화합해 얻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마치 꿈처럼 실답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할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생사현실은 한편, 정작 꿈은 아니다.
꿈과 성격이 부분적으로 같지만, 꿈과 또 많은 부분 다르다.
각 내용을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게 된다.
그리고 다수주체가 일정한 상황 일정한 조건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은 본래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또한 참된 실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 일체가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진짜처럼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 안에서 망집번뇌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런 생사고통은 생사현실에서 다음의 인과관계를 통해 얻게 된다.
망집 번뇌[혹] => 이에 바탕해 행하는 업 => 생사고통 [혹-업-고]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이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그런데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미리 원인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
즉 생사고통을 겪기 이전에 원인단계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일단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업을 끊고 중지해야 한다.
또 그런 업을 중단하려면,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망집에 바탕하여 매순간 일정한 업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혹-업-고의 각 단계에서 그 내용을 이와 달리 바꿔야 한다.
즉, 가장 기본적으로 망집 번뇌를 제거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대신 올바른 깨달음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처음에는 올바른 진리의 내용을 믿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점차 이를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대해 잘못 분별하는 내용을 시정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사나 생멸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본래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또한 본래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생사현실은 니르바나의 상태다. [생사즉 열반]
이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한편, 망집번뇌에 바탕한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에 행한 업의 장애가 쌓여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로 인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쌓여 있는 업장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즉 올바른 깨달음에 바탕해 과거에 쌓아 놓은 업장을 해소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계의 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계ㆍ정ㆍ혜 수행덕목을 모두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선 자신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해행증]
그렇게 스스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났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시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게 된다.
이런 경우 중생의 제도를 위해 자비심을 바탕으로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것을 자신이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일단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내에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원만히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현실에서는 망집에 바탕해 임하기 쉽다.
그래서 현실일체에 참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고 고집하기 쉽다.
또 본 바탕인 실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실재가 공하지 않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도 현실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중생도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원칙적으로 문제되는 본 바탕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잘 관해야 한다.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면 꿈만 대해서는 곤란하다.
이를 위해서는 꿈 밖의 현실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 꿈 내용의 관계를 잘 살펴야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현실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어떤 것인지를 잘 관해야 한다.
한편 이런 원칙적 방식으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정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즉,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지만, 꿈과 또 많은 부분 다르다.
현실 내용은 각 내용을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게 된다.
그리고 다수주체가 일정한 상황 일정한 조건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현실이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이런 망집에 바탕해 수많은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고집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보충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편을 통해 잘못임을 밝히게 된다.
우선, 가정적으로 그런 잘못된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어떤 잘못된 상태에 이르는가를 보여주게 된다. [가정적 항변의 방식]
그래서 반사적으로 무아 무자성 공의 입장이 옳음을 밝히려 노력하게 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예를 들어 『회쟁론』 및 『중론』은 이런 입장에서 논의를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이해하려면 이런 내용들이 논의되게 된 배경사정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이들 논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내용부터 살피기로 한다.
[ 중복부분 ○■]
● 회쟁론 논의의 바탕
4● 실답지 않은 꿈과 현실
4● 실답지 않음과 실재
4● 실답지 않음과 수행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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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답지 않음
4 ■ ● 실답지 않음의 의미
4 ● 실답지 않음의 의미 혼동
4 ● 실답지 않음과 내용의 존부문제
4● 실답지 않음을 밝히는 사정
4-1 ● 일반적 망집의 배경사정
4● 실체 존부의 논의 필요성 - 실다움에 대한 망집제거
4● 공함과 실체없음[무아무자성]의 관계
5-4 ● 망집과 망집의 재료의 구분
● 도너츠 비닐 마술에서 문제되는 부분과 재료의 문제
● 논리학에서의 망집 부분과 그 재료의 구분
● 실답지 않는 내용 가운데 망집 부분이 문제되는 사정
● 망집의 제거와 수행 필요성
4 ● 실답지 않음을 살피는 원칙적 방안
4 ● 꿈의 실답지 않음
4 ● 실재와 감각현실
4 ● 감각현실이 본 바탕에 대해 실다운가- 가정적 논의
4-4 ● 관념분별이 감각현실에 대해 실다운가- 가정적 논의
● 실재와 실체와 관련한 가정적 논의 => 경전에서 현실의 실다움의 논의와 실재와 실체 문제
● 각 영역의 발생단계와 - 논의시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
4 ● 실답지않음의 논의
4 ■ ● 꿈의 실답지 않음의 윈칙적 판단 방식
5 ● 실다움 여부의 판단의 원칙적 방식 -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의 원칙적인 관계 분별 -
4-4 ● 감각현실과 관련한 망집- 비닐마술을 통한 이해
7 ● 망집 제거를 위한 가정적 항변의 필요성
7 ● 실재에 대한 논의시 가정적 논의를 사용하는 사정 -직접 살피기 곤란함
7 ● 실재에 대한 논의에 사용하는 현실 내용
7 ● 언어를 통한 망집과 생사고통
7 ● 실답지 않음에도 실답다고 망집을 일으키는 기본 배경
7 ● 가정적 항변의 어려움 - 무량한 상대의 입장 받아들이기
7 ● 가정적 항변에 대한 오해 - 귀류논증을 간접 증명으로 혼동
7 ● 무량한 가정적 항변
7 ● 귀류 논증의 구체적 관계성의 이해 곤란성
7 ● 결론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제 - 악취공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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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가정적 항변의 방식
7 ● if 만일--라면의 논의의 의미
7 ●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의 성격
7 ● 소송과 논쟁에서의 가정적 항변이 사용되는 사정
7 ● 『회쟁론』의 가정적 항변방식의 의미
7 ● 가정적 논의의 성격
7 ● 가정적 항변의 이해 곤란성
7 ● 가정적 항변의 복잡성-상대의 망상에 맞춤
7 ● 가정적 항변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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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가정적 논의의 기본문제
7 ● 추론 체계의 문제
7 ● 상대주장비판과 자신주장의 모순문제
7 ● 가정적 항변의 배경사정과 가정적 항변방식
7 ● 논의의 초점과 목표 및 취지
7 ● 가정적 항변 방식에 의한 유무문제 논의의 문제점
7 ● 감각현실과 관념 및 각 영역 사이의 혼동
7 ● 무량한 망상분별과 가정적 항변논의의 어려움
8 ● 회쟁론 논의의 초점 - 실재의 공함과 무아무자성
8 ● 『회쟁론』논의의 초점 - 현실이 실답지 않음 - 무아 무자성 공의 논의
8 ● 가정적 항변에서 사용하는 논증 재료와 언어표현
9 ● 회쟁론 논의에서 일으키기 쉬운 혼동
2 ● 맥락을 통한 표현확정 문제
9 ● 『회쟁론』의 구체적 고찰
9 ● 회쟁론에서 결론내용과 근거자료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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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답지 않은 꿈과 현실
- 꿈의 실답지 않음과 현실의 실답지 않음
'꿈'을 실답지 않다.
그리고 '현실'을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꿈을 무엇때문에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
이를 먼저 살펴보자.
철수가 침대에서 누어 잔다.
그리고 바다에서 황금을 얻는 꿈을 생생하게 꾼다고 하자.
그런데 꿈에서 영희가 그것을 다 가져갔다.
철수가 꿈을 깨었다.
이후 그 꿈을 실답게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영희에게 황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요구는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
이를 일반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철수가 그런 꿈을 꾼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요구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철수는 침대에 누어 자면서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런 일이 없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또 꿈에서 바다나 황금을 보았다.
그런 일이 없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침대에 누어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었다.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고 영희에게 가져간 황금을 돌려달라면 이치에 맞지 않다.
꿈은 꿈 안의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꿈은 침대가 있는 현실에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철수가 꾼 꿈은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
철수는 생생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처럼 생생하게 꾸었음에도
그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꿈은 꿈을 꾸게 된 그런 상황과 조건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상황과 조건을 떠나면 그런 내용은 얻지 못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참된 진짜내용이 아니다. [ => 무상, 무아, 무자성, ]
2 침대가 놓여진 현실은 그가 그런 꿈을 꾼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현실에서 꿈에 해당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즉 꿈은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 불가득 공 ]
그런 내용을 꾼 것이다.
3 꿈에서 본 황금은 현실의 황금과 비슷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꿈에서 본 황금은 단단하거나 무겁지도 않다.
또 다른 장식을 만들거나 다른 물건과 바꿀 수도 없다. [ => 무자성, ]
즉 꿈에서 본 황금은 현실의 황금에서 기대하는 여러 성품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꿈은 참된 내용이 아닌 가짜다.
그렇기에 아무리 생생하게 꾸었다해도 꿈은 실답지 않다.
○ 실재와 현실의 실답지 않음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보는 사정과 실재 ]
대부분 꿈이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현실'이 실답지 않음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긴다.
그런데 왜 현실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
현실에서 한 주체는 감관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행한다.
예를 들어 눈을 떠 앞을 본다.
그런 가운데 앞에 영희가 있다고 여긴다.
이런 경우다.
그런 가운데 이들 현실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래서 망집을 일으킨 이들 사이에서 가해와 피해 관계가 중첩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런 상태에서 생생하고 실답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 경우를 가정해보자.
현실에서 앞에 영희가 서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영희에게 다가가 꽃을 건네려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래서 평생 마비 상태로 지내며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과정은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
생사고통에 처하는 것은 그 전에 행한 업이 있기 때문이다.
절벽에 굴러 떨어진 것은 그 이전에 절벽을 향해 걸어간 업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걸어간 것은 또 그렇게 걸어야 한다고 여기게 된 일정한 판단 분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상분별 번뇌 - 업 - 고의 관계가 생사현실에서 문제된다.
이 경우 되도록 원인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업을 행하게 되는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은 무엇인가.
이를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놓고 살펴보자.
먼저 꿈이 실답지 않다고 본 사정이 있다.
그런데 현실도 그와 사정이 같다.
즉 생사현실이 꿈이 갖는 특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꿈과 같다고 말하게 된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이외 나머지 감각현실[소리,냄새,맛,촉감]이나 관념분별도 이와 같다.
따라서 이에 준해 살피면 된다.
1 우선 감각현실을 놓고 생각해보자.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이런 감각현실은 우선 그렇게 눈을 뜰 때만 그런 조건 상황에서 얻는다.
즉, 한 주체가 감관을 대하는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다.
그것은 또 상황따라 조건따라 매번 달라진다.
즉, 그런 조건을 떠나면 얻지 못하고 사라진다.
따라서 그처럼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영구불변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고정되 유지되는 진짜 실체가 아니다.
바위 하나를 놓고 살펴보자.
바위는 상당히 오래 그 상태로 유지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만질 때가 다르다.
그리고 눈으로 보더라도 아침에 대할 때와 밤에 대할 때가 다르다.
또 색안경을 끼고 대할 때와 벗고 대할 때가 다르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
매 순간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렇지만, 그 각 내용 하나하나는 그런 조건과 상황에서만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 무상, 무아, 무자성]
=>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2.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런데 이는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영역에서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를 간단히 다음처럼 살필 수 있다.
우선 눈으로 보는 내용은 눈으로 보는 영역에 있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소리를 듣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또 손으로 만져 촉감을 얻는 촉감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즉 이처럼 다른 감각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관념 분별 영역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주체는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한 주체는 마음안에 얻어지는 내용만 얻는다.
즉, 단지 마음은 마음에 화합해 얻어지는 내용만 얻는다.
그러나 실재는 그런 마음과 관계맺지 않은 내용이다.
한편, 마음은 그래서 마음 밖 내용 그 자체는 끝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공하다고 표현한다. [실재의 불가득, 공]
꿈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 내용을 꿈으로 꾸게 된다.
그런데 현실이 이와 성격이 마찬가지다.
즉,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뿐이다.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실재를 바탕으로, 단지 화합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따라서 감각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 실재의 공함 =>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 [ 공해탈삼매 ]
3.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감각현실 일정 부분을 대해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경우 그 상태에서 일정한 모습이나 성품을 분별해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 감각현실에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또 그 감각현실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또는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정 부분을 자신이나 영희 철수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부분[상]을 취한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영희나 철수의 그런 모습과 성품을 갖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 부분을 대한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그렇지 않다.
우선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또 감각현실도 역시 관념분별이 아니다.
각 영역 내용에 일정하게 기대하는 성품이 있다.
그러나 각 영역 내용은 그런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주체와 관계하지도 않고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을 본 바탕 실재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실재는 표현상 현실을 얻는 본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 진여(眞如, tathatā)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가 곧 꿈과는 성격이 다른 참된 진짜 실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표현으로 '실재'와 '실체'의 의미를 혼동을 일으키면 안된다.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데 본 바탕에 그런 참된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찾아 제시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 ]
그리고 한 주체는 본 바탕 실재를 끝내 직접 얻지 못한다.
한 주체는 마음이 관계하여 얻어낸 내용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실재는 의미를 갖지 않는 표현인 공을 빌려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불가득, 공]
그래서 실재는 실체를 갖지 못해 무아 무자성인 한편,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공함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결국 실재는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실답지 않은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 실체가 어느 영역 어느 내용엔가는 있는가가 문제된다.
즉, 꿈과 달리,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것이 어딘가에는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결국, 실재 영역과 감각현실, 관념분별 어느 영역에서나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 승의무자성 ]
한편, 감각현실 내용은 다시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는다.
감각현실은 한 주체가 관여해 얻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시각내용은 눈이 관계해서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떠나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아니다. [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또한, 감각현실 영역에서 관념분별은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에도 역시 그런 관념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다.
한편, 관념분별은 다시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는다.
관념 영역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은 없다.
또한 관념내용에도 그런 감각현실 내용은 없다.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그런데 이런 각각의 내용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한다고 하자.
즉 이 각 내용이 꿈과 성격이 달리 참된 성품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또는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실다운 내용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일으키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소원을 갖고 이를 추구하는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런 바탕에서 무궁하게 반복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이런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우선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소원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무원무작해탈삼매]
또 그러려면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이처럼 생사고통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 각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망집을 현실에서 일으키는 과정을 다시 잘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감각현실을 대하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이 상황에서 감각현실은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소재가 된다.
그래서 그 일정 부분을 대하면 그로부터 영희나 바위라는 등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그 일정부분은 그런 일정한 모습과 성품을 갖는다고 잘못 분별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어떤 내용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어떤 부분을 '가리키게' 하는 내용 사이에서 서로간의 성격과 지위를 혼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수에게 영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또는 영희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가 찾다가 영희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는 일정부분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러면서 저기에 영희가 '있다'고 답하게 된다.
이는 바로 '그 부분이 영희이다'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이 과정들을 먼저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고 하자.
그래서 주변을 살펴본다고 하자.
이 때 초점을 맞추어서 일정 부분을 본다.
이 경우 그렇게 일정 부분을 바라보면 그 부분이 영희나 안경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 때 그가 바라본 내용은 감각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런 경우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은 그처럼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이 경우는 다음 두 내용의 관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관념을 일으키게 하는 감각현실 부분' => 그로 인해 일으켜진 관념 내용
한편, 이제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영희나 안경을 찾는 상황이 있다.
이 때 그 상황에서 설령 영희나 안경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 상황에서 관념영역 안에 그가 찾고자 하는 영희나 안경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런 가운데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제 영희나 안경을 찾아서 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이 경우 관념영역에 있는 내용은 그처럼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을 가리키게끔 하는 내용이 된다.
이 경우는 다음 두 내용의 관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하는 관념내용' => 그로 인해 가리켜진 감각현실 부분
결국 현실에서 감각현실 부분과 관념영역은 서로 다음의 관계를 갖는다.
'관념을 일으키게 하는 감각현실 부분' => 그로 인해 일으켜진 관념 내용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하는 관념내용' => 그로 인해 가리켜진 감각현실 부분
그런데 이들 두 내용은 한 주체의 마음안에서 동시에 병행해 얻어진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게 하는 감각현실 부분'과 '그로 인해 일으켜진 관념내용'을 두고 서로 그 지위를 혼동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1차적 망상분별이 된다.
이제 이런 망집현상을 비유로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라이터를' 생각하면 '담배'를 반복해 떠올리게 된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고 '라이터는 곧 담배이다'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이런 판단은 잘못임을 쉽게 이해한다.
라이터가 담배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터가 곧 담배는 아니다.
한편, 그 상황에서 담배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라이터를 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도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소 라이터가 매번 담배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터 부분에 담배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다.
한편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손을 부딪힐 때마다 손뼉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는 손모습에는 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
또 눈으로 보는 손모습이 손뼉소리인 것도 아니다.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반복해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다.
또 그 감각현실 부분이 그런 분별내용인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각 주체별로 하나의 부분을 대하면서 제각각 다른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그 때마다 그런 각 분별내용이 그 부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생명체들은 감관이나 인식기관이 각기 다르다.
이런 여러 다른 생명체들을 함께 놓고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앞의 문제는 더 상황이 심하다.
즉 각 생명체가 제각각 일으켜 얻는 내용은 수 없이 다르다.
그렇다고 매 경우마다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그처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각 주체 입장에서는 다음처럼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매번 일정부분을 대할 때마다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자신이 그런 부분을 대해 일으키고, 분별하는 모습과 성품이 그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곧 그러그러한 것[분별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어떤 것이 A 가 아니다.
그런데 그처럼 A 가 아닌 것을 대하면서 그것이 A 라고 여긴다고 하자.
또 어떤 부분에 A 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대해서 그 부분에 A 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이들은 모두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한 주체가 현실내용을 얻고 분별하는 경우가 이와 마찬가지다.
일정한 감각현실을 눈,귀,코,입,몸을 통해 얻게 된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들이다.
이들은 제각각 엉뚱하게 서로 대단히 다른 내용들이다.
이런 내용을 얻는 가운데 한 주체는 일정한 분별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각 경우 일정한 관계에서 반복해 일정한 관념 내용을 일으켜 얻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일으킨 관념내용은 그 감각현실 부분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정부분을 대하면 특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그런 경험을 매번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잘못된 망상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떤 부분을 대해 안경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는 다른 부분에서는 그런 분별을 보통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정부분을 대하게 되면 보통 안경이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사정으로 그는 그 부분이 곧 안경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그가 안경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에는 그런 관념내용이 본래 있지 않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먼저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 상황에서 그는 다시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분별영역에서 일으켜 얻는 분별내용일 뿐이다.
감각현실 자체에서 그런 분별 내용은 얻지 못한다.
이는 그가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분별 내용은 그 감각현실 부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 그 감각현실 부분은 곧 그런 분별 내용인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모습[相]과 성품[성]을 얻을 수 없음=> 무상해탈]
그런데 예를 들어 현실에서 영희나 안경이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때 그가 손으로 일정 부분을 영희나 안경이라고 가리킨다고 하자.
이 때 그는 그 부분이 그가 생각하는 영희나 안경'이다'라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또 그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에 그런 영희나 안경이 '있다'라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처럼 행하는 것은 망집에 바탕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이들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눈을 감고 영희나 안경을 생각해 떠올려 보자.
그 때 떠올려지는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이것을 잘 붙잡아 보자.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직전에 눈으로 본 영희나 안경 모습이 찾아지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자.
찾아지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검토해본 것이다.
그러나 소리, 냄새, 맛, 촉감과 같은 감각현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 감각내용과 관념분별의 관계는 다 이와 마찬가지다.
한편, 감각들[시각, 청각,후각, 미각, 촉각] 서로간에서도 이들 관계는 마찬가지다.
시각의 내용은 청각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또 청각 내용은 시각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한편 본 바탕인 실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도 이에 준해서 판단하게 된다.
본 바탕 실재에서는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다.
한편, 감각현실은 마음이 관계해 얻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재는 마음과의 관계를 떠나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따라서 감각현실은 본 바탕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와 관념분별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현실 내용 일체는 하나같이 꿈처럼 결국 실답지 않다.
꿈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꿈을 꾸는 상황에서 화합해 얻는 것 뿐이다.
현실도 본 바탕인 실재와의 관계가 이와 같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본 바탕 실재를 바탕으로 얻는다.
그래서 그 발생관계를 다음처럼 표시할 수 있다.
본 바탕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 과정에서 본 바탕이 본래 얻을 수 없고 공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 상호간의 관계는 결국 침대에서 꾸는 꿈과 같은 관계에 있다.
이 사정을 각 내용을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 각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또 이해해야 한다.
이는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과정과 같다.
꿈을 꾸는 가운데 꿈만 대해서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꿈을 깨서, 침대가 놓인 현실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침대가 놓인 현실과 꿈 내용을 서로 함께 대조해 살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생사현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에서 생사현실 안의 내용만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이 관계하지 않는 본 바탕 내용은 무언가를 살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는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이해는 생사현실 안에서 그 효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꿈을 꿀 때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자.
그런데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꿈을 깨고 침대가 놓인 현실을 대하고서야 꿈이었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다시 꿈을 꾸면 또 다시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자.
그리고 꿈을 꾸는 동안은 그것이 꿈인지를 다시 모른다고 하자.
그러면 별 효용이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다음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아예 꿈을 꾸지 않고 늘 깨어 있으면 될 것이다.
한편 꿈을 꾸더라도 그 꿈안에서 그것이 꿈임을 알고서 꾼다고 하자.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 훨씬 낫다.
생사현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본래 본 바탕에서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이 문제가 되지도 않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없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일 조차 불필요하다.
또 그런 이해를 얻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실재가 실재를 아는 일도 없다.
한편,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공하지 않는 실재가 비로소 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가 그 사정을 이해하던 않던 본 바탕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본 바탕은 본래 그렇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함에도 어떤 이가 망집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안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즉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매 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무궁하게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공한 바탕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을 대할 때만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함에 중요하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에 임해야만 생사현실 안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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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05-k0650-024.html
임시2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4-k0001-583.html
임시3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5-k1390-004.html
○ 있음과 실답게 있음의 차이
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는 현실내용을 '전혀 얻지 못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생하게 꿈을 꾸고 얻는다.
그러나 꿈은 실답지 않다.
현실도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은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감각현실은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분별을 명료하게 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은 본 바탕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 그처럼 일시적으로 일으켜 얻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결국 꿈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현실에서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그에 묶이지 않고 생사현실에서 벗어나올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과 '실답게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현실에서 존재가 문제되는 영역이 있다.
이를 본 바탕인 실재 영역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 영역으로 나눠보자.
현실에서 한 주체는 감관을 통해 색성향미촉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눈을 떠 얻는 내용은 감각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를 감각현실 영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한편, 눈을 감더라도 마음으로 떠올려 생각하게 되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음으로 도깨비를 떠올린다고 하자.
이는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그처럼 생각해 내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떠올리는 영역을 관념분별 영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는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얻는다.
한편, 한 주체와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을 또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건 얻지 못하건 관계없는 내용이다.
한편 이 어디인가에 꿈과는 성격이 달리, 참된 진짜가 있는가가 문제된다.
즉 꿈과는 달리 늘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참된 실체가 있는가가 함께 문제된다.
그래서 이들은 우선 다음과 같이 기호로 표시해보자.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영역 □
그리고 이들 영역에 어떤 내용이 얻어지면 그것을 다음처럼 표시해보자.
현실에서 한 주체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다음처럼 표시할 수 있다.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그리고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참된 실체가 있는가를 살핀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내용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로서, 고정 불변한 실체가 어느 영역에인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을 $ 라고 따로 표시해보자.
○ 단순한 있음의 의미
이제 현실에서 이들 내용을 이처럼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내용을 얻기에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어떤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그런 모습을 보기에 그런 의미로 '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다.
이 경우 없다는 다음을 의미한다.
눈을 떴다. 그리고 주변환경도 밝다.
그래서 무언가(예를 들어 바위나 나무)가 있다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뜻으로 있고 없음을 말한다.
꿈 내용도 그런 의미로는 있다고 ㅎ야 한다.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여하튼 그런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그런 꿈은 그런 의미로 '있다'라고 할 수 있다.
○ 실답게 있음의 의미
그런데 지금 주된 초점은 이들 내용이 과연 '실답게' 있는 내용인가이다.
여기서 '실답게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과 다른 의미다.
현실 내용은 현실에서 얻는다. =>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다. => 그래서 '실답지 않게 있다'
이 경우 실답게 있음은 단순한 있음과는 어떤 다른 의미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관념분별을 놓고 생각해보자.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영역 □ 을 구분한다.
이런 가운데 한 주체가 관념영역에서 관념을 떠올린다.
그러면 그런 관념내용이 그런 측면에서는 있다고 해야 한다.
자신이 안경을 찾을 때 안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찾고자 하는 안경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다.
그래서 관념영역에서 그런 관념은 그런 형태로는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현실에서 없을 것 같은 '도깨비'를 생각한다고 하자.
또는 '뿔달린 토끼'나 '거북이털'도 사정이 같다.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해도 자신은 그런 생각을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관념내용은 그런 측면에서 관념영역에는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를 기호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그런데 어떤 관념내용 ■이 '실답게 있다'라고 표현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다음 의미를 나타낸다.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영역 □ 을 찾아본다.
그러니, 그 관념분별 ■ 은 우선 감각현실영역▽에서도 그렇게 있다고 하자.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영역 #에서도 그렇게 있다고 하자.
즉, 그 관념 ■은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영역 □ 에서 모두
■ -■ -■ 이런 상태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경우 그 ■ 은 그 만큼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사정이 이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꿈이 실답지 않다라는 경우와 구별된다.
자면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침대에는 없다.
그렇기에 실답지 않다고 한다.
이런 상태와 구별된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관념영역에서 관념내용을 명료하게는 얻는다.
그러나 그 관념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정이 위와 같지 않음을 나타낸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었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관념영역에서 ■과 같은 관념내용을 일으켜 얻었다.
그러나 관념내용 ■ 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그런 ■ 을 그가 일으켜 얻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 은 명료하게 일으켜 얻었다.
그러나 그 ■ 라는 내용은 그 영역에서 그렇게 일으킨 것일뿐이다.
그렇지만, 다른 영역 예를 들어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등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을 그렇게 일으켜 얻은 것뿐이라는 뜻이다.
즉 그 상태를 기호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실재 #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그래서 이는 ■ -■ -■ 이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실답게 있고, 없음'의 문제와
단순히 '있고, 없음'의 문제는 서로 성격이 다르다.
어떤 관념■이 '실답게' 있고 없음을 논의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는 다음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념분별 ■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관념내용 ■은 단순히 관념영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즉, 다른 영역에서도 '얻어진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얻어진 감각현실▼에 ■ 과 같은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실재영역 # 에도 ■과 같은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즉, 그것은 실재영역 # - 감각현실영역▽ - 관념분별영역 □ 에서
■ -■ -■ 이런 상태로 ■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각 영역에 그런 ■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분별한다.
따라서 ■ 을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반대로 ■ 관념내용이 실답게 있음을 부정하는 입장은 다음 입장이다.
이 입장은 현실에서 ■과 같은 관념내용을 일으켜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념내용 ■은 관념영역에서는 그렇게 일으켜 얻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런 관념 ■은 있는 것이다.
다만, 다른 각 영역에서 ■ 과 같은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즉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내용을 그렇게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것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도깨비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털과 같은 관념의 경우와 같다.
즉, 관념내용 ■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 ○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다.
또 감각현실 영역 ▽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다.
또 ▼과 같은 구체적 감각현실 내용에 그런 관념내용■ 은 얻을 수 없다.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도 마찬가지다.
실재 #영역에서 그런 관념내용 ■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 내용들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 상황에서 그런 관념 ■ 자체를 얻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상황에서 감각현실 ▼을 얻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다.
다만 감각현실 영역에 ■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이는 실재 #에 어떤 내용도 전혀 아무것도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재 #영역에서 그런 관념내용 ■을 끝내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실재 영역 #에서는 본래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다.
각 주체는 오직 마음의 관계해 화합해 얻어낸 내용만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념 ■은 한 주체의 마음안에서 얻어 내는 내용이다.
따라서, 결국 ■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 영역에서는 ■과 같은 내용은 본래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일으키는 관념 ■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명료하게 현실에서 일으켜 얻는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관념영역에서 일으켜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관념 ■은 '실답게' 있는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 유무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을 떠남
현실에서 관념내용 ■ 을 얻기에 그것을 실답게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자.
즉 그런 관념내용 ■은 본바탕 실재#에서도 얻어진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또 각 감각현실▽ 영역에도 얻어진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더 나아가 그런 관념내용 ■은 그에 해당한 참된 진짜 실체$를 갖는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유의 극단에 치우친 잘못된 입장이 된다.
그래서 관념분별■ 은 '실답게 있음'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무의 극단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면 또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우선, 그런 관념내용 ■을 실재 영역에서 얻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잘못 오해한다.
그래서 실재 # 영역에는 아무런 내용이 전혀 없음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한편, 위 입장은 그런 관념내용은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지 못함도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잘못 오해한다.
그래서 감각현실▽ 영역에서 감각현실 ▼도 전혀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더 나아가 관념영역에서는 그런 관념내용 ■ 을 얻는다.
그런 관념내용 ■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관념이 실답지 않게 있다는 말이 그런 관념내용■ 도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무에 극단에 치우친 잘못된 입장이다.
유의 극단에 치우치면, 생사현실에 집착에 바탕해 잘못된 업을 행하게끔 만든다.
반대로 무의 극단에 치우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단순히 잘못된 번뇌와 업, 고통을 제거함에 그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선법까지 함께 버리는 형태가 되기 쉽다. [악취공견]
그래서 이처럼 유와 무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은 곤란하다.
그러나 관념내용 ■ 은 '실답게 있는 것은 아님'을 내세운다고 하자.
이는 유와 무의 극단을 떠난 입장이 된다.
이는 관념내용이 관념내용에서 얻어지지만,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실재#는 끝내 얻지 못하여 공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실재#에서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은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잘 관해야 한다.
이는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효용을 갖는다.
그런 경우 우선, 유의 극단이 갖는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게 된다.
관념 ■은 '실답게'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관념이 실답다라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데 각 영역에 그런 ■은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때문에 그런 관념내용 ■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렇기에 이를 망상분별이라고 표현한다.
즉 '얻을 수 없는 것'을 '있다'고 잘못된 판단[망상분별]을 한다.
=> 그래서 어떤 a 를 실다운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러면 그 내용을 집착하게끔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매 상황에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매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할 도리 밖에는 없게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그 주체는 이후 반복해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본래 각 영역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생사고통은 본래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망집에 바탕해 그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무량하게 겪어 나간다.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 혹- 업 - 고 ]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려면 원인단계에서 제거해 해결하는 것이 낫다.
따라서 근본 바탕이 되는 망상분별을 잘 제거해야 함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반대로 무의 극단에 치우친다고 하자.
그러면 자칫, 생사현실 일체를 모두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기 쉽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중생들이 겪는 생사고통을 방치해도 무방한 것으로 잘못 여기기 쉽다.
또는 그런 사정 때문에 아무런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오해하기 쉽다.
또는 그런 사정 때문에 오히려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오해하기도 쉽다.
또는 그런 사정 때문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하게 악행을 행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이는 실재의 공함 등을 잘못 지나치게 이해하는 악취공견의 형태가 되기 쉽다.
그리고 결국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선법까지 함께 버리는 형태가 된다.
우선, 관념 ■이 실답지 않음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그에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에 바탕한 업을 제거하게 된다.
또한 생사고통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그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쌓여진 업장을 제거하는 올바른 수행에 임하게 된다.
또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유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의 부작용을 제거하는 측면이 된다.
그러나 한편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하여 무에 극단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즉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렇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답지 않은데, 실답다고 여기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실답게 겪어 나간다.
따라서 이를 잘 해결해야 한다.
먼저 보리심을 바탕으로 생사 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상태임을 관하게 된다.
즉,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임을 관하게 된다. [생사즉 열반]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생사현실은 그런 형태로 연기관계를 통해 전개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한다.
즉, 중생들은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어나간다.
즉 번뇌-업-고의 관계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감을 잘 관한다.[혹-업-고]
그래서 보리심에 바탕해 이런 사정을 관하고 중생들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건지려는 서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하게 된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려 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무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의 부작용을 제거하는 측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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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실답게 여기는 사정
현실은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은 꿈과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다.
따라서 이에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꿈'이 실답지 않음은 대부분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현실이 실답지 않음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매순간 대단히 실답게 여기며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배경 사정을 먼저 살피기로 한다.
그 사정을 먼저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생생하고 풍부한 감각현실
- 매순간 생생하고 다양한 감각현실이 중첩되어 얻어짐
2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겹쳐 행하는 망상분별
- 감각현실 부분에 곧 그런 관념이 '있다'라는 잘못된 분별
-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 '이다'라는 잘못된 분별
- 그런 관념은 곧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는다는 잘못된 분별
[ => 무상해탈삼매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3 실다운 자신, 외부세상, 외부대상, 외부물질 및 외부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기는 망상분별
4 현실이 마음내용이면서 실답게 여겨지는 사정
- 감각현실의 각 부분의 특성이 달리 파악됨
- 현실이 다수에게 유사하게 반복되어 파악됨
-- 다수가 함께 얻음
-- 일정한 시기
-- 일정한 장소 상황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음
--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조건에 일정한 내용을 결과로 반복해 얻음
=> 마음 밖에 현실내용과 상응한 내용이 그처럼 실재한다는 잘못된 분별
=> 또는 마음 밖 외부에 전혀 아무것도 없지만, 단지 다수 주체의 마음안 공종자로 그렇게 된다는 잘못된 분별 - [4 난 ]
5 본 바탕인 실재와 관련한 망상분별
- 실재가 공하지 않고 현실과 일치하거나, 유사하거나 비례한 형태로 있다는 잘못된 분별
[ => 공해탈삼매 ]
6 실체에 대한 망상분별
-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뼈대가 있기에 일정한 내용을 얻게 된다는 잘못된 분별
이런 사정들로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을 그처럼 실답게 잘못 여기게 되는 정도와 사정에 비례해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따라서 그 정도에 상응해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이 요구된다.
이하에서 위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생하고 풍부한 감각현실
현실에서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감각현실도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관념분별을 그 감각현실을 떠나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감각현실을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얻게 된다.
또한 감각현실 자체가 각 부분이 구분되는 형태로 얻어진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분별을 일으키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 주체가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그가 일으키는 분별은 순수하게 공상이나 상상만으로 일으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며 대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아무런 감각현실을 전혀 얻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다.
또 예를 들어 그가 그 상황에서 순전히 하나의 하얀 백지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것도 아니다.
즉, 그런 상태에서 단순히 상상만으로 각 부분을 나누어 그처럼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런 상태에서 단순히 상상으로 이 부분은 영희고 저 부분은 철수라고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실에서 다양한 감각현실을 얻는다.
즉, 그 상황에 얻는 감각현실도 색,소리,냄새,맛, 촉감[색성향미촉]의 형태로 다양하다.
한편, 그가 얻는 감각현실은 각 부분이 서로 생생하게 차이나는 형태로 얻는다.
눈을 뜨면 노란 색 부분과 흰 부분 검은 부분 이런 식으로 각 부분을 달리 얻는다.
귀로는 음악 소리 문닫는 소리 이런 식으로 각 부분을 달리 얻는다.
감각현실은 매순간 이처럼 대단히 생생한 내용이 풍부하게 얻어진다.
그런 가운데 각 부분에 대응해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그 감각현실이나 분별 하나 하나는 물론 하나같이 다 실답지 않다.
즉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의 내용을 놓고 보면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청각 내용은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다.
후각, 미각, 촉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감각은 하나같이 엉뚱하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같이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사정이 같다.
그리고 이는 시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다른 감각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시각 또한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 각각 엉뚱하고 가짜라고 할 내용이다.
즉 이들은 하나같이 다른 영역의 상태와는 엉뚱한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제각각 엉뚱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들은 비유하면, 제 각각 침대에 누어 꾸는 엉뚱한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하나하나 실답지 않다.
그래도 이처럼 내용을 다양하고 풍부하고 생생하게 함께 얻는다.
그렇게 되면 이로 인해 이들 각 내용이 대단히 실다운 것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게 된다.
물론 이들 하나하나를 놓고 살피면 하나하나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런 가짜가 매순간 생생하게 얻어진다.
그리고 그 내용이 대단히 다양하고 많다.
물론 가짜가 대단히 많다고 그것들이 다 함께 실답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가 대단히 다양하고 생생하게 매 순간 계속 얻어진다.
그러면 가짜가 다른 가짜를 서로 긍정해주고 인정해주는 효과를 갖게 된다.
그래서 가짜가 많아지면 그 가짜가 실다운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즉 가짜가 서로서로 서로를 지지해주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이들 전체 내용은 무언가 실다운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한편, 이들 내용을 다 함께 서로 접착해 붙여 이해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그런 가운데 현실은 실다운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과라고 여기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과를 눈으로 대하면 그런 모습이다.
또 손을 대 두드리면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또 코로 대하면 그런 내음이다.
또 입으로 대하면 그런 맛이다.
또 손으로 만지면 그런 촉감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사과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그처럼 사과라고 여긴 내용 자체는 사실은 그가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사과라는 관념 내용은 바로 이런 감각 내용들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사과'라는 분별내용에 대해 다음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사과라는 분별내용은 결국 그런 생생한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과는 이처럼 각 감각으로 각기 다른 생생한 내용을 주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한편,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또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곧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더 나아가 현실의 본 바탕 실재에도 그가 일으킨 그런 관념내용과 같은 내용이 그처럼 그대로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이런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런 식으로 잘못 분별한다.
그런데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현실에서 이들 감각내용을 다 함께 동시에 얻는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동시에 얻는다.
그리고 이 관계를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다양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내용을 모두 함께 접착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각 내용을 서로 대조해 보기로 하자.
그런 경우 눈으로 본 색은 소리가 아니다. 소리나, 향이나, 맛이나 촉감도 아니다.
또 나머지 감각현실들 간도 사정이 같다.
더욱이 이들 감각현실 일체는 또 그가 일으킨 그런 관념내용도 아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내용은 서로간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간에 대단히 엉뚱하다.
즉,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단지 그 상황에서 그런 각 내용을 각 영역에서 그처럼 각각 일으켜 얻는 것뿐이다.
또한 그런 다양한 감각현실은 그런 관념 자체를 대상으로 해 얻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런 관념에 해당한 내용을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2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겹쳐 행하는 망상분별
현실에서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동시에 얻는다.
그리고 이를 겹쳐 잘못 분별하기 쉽다.
즉, 자신이 행하는 관념분별 내용이 감각현실 영역에 그대로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에 대해서도 이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침대에서 꾸는 바다꿈과는 다르다고 여기게 된다.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을 살펴보자.
현실에서 먼저 감관으로 감각현실[색,성,향,미,촉]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좋고 나쁨의 느낌을 얻는다.
한편, 관념영역에서는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각 영역에서 제각각 달리 이들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을 한 주체가 동시에 함께 얻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 '분별 영역'에서 그 각각의 정체와 상호관계에 대해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한 주체가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 감각현실을 전체로 얻는다.
그런데 관념영역에서는 그 각 부분을 이리저리 묶고 나누며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손으로 가리키는) 저 (감각현실)부분은 (자신이 분별하는 그러그러한) 사과다.
이런 형태로 여러 분별을 행한다.
예를 들어 이 부분은 사과다.
이 부분은 영희다.
또 이 부분은 자신의 몸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 다시 다음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어떤 이가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리고 일정한 분별내용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감각현실 각 부분에 그런 분별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우선 잘못 여긴다. [망상분별]
그리고 다시 그 감각현실 그 부분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다'라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감각현실 부분은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한 재료일 뿐이다.
그리고 관념내용은 그로 인해 일으켜진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관념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잘못 착각하게 된다.
이는 관념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 - 그로 인해 '일으켜진' 관념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한편 이 반대 방향으로도 망상분별을 행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찾는다. 예를 들어 안경이나 영희가 보이지 않아 찾는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이에게도 안경이나 영희를 찾아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것을 찾는 이는 마음 속에 찾고자 하는 안경이나 영희에 대한 내용을 갖고 있다.
이는 결국 그가 갖고 있는 안경이나 영희에 대한 관념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상황에서 어떤 이가 그 내용을 찾았다고 하자.
그러자 다른 이가 그것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때 그가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즉 손으로 가리킨 부분이 찾는 안경이나 영희라고 여기며 그렇게 행하게 된다.
이는 그가 그 부분에 곧 자신이 생각하는 안경이나 영희가 '있다'고 잘못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 그가 그 부분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안경이나 영희'이다'라고 잘못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처음 마음에 가졌던 관념내용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가리키게끔 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그 관념으로 인해 가리켜진 부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그런 부분을 '가리키게' 하는 관념과 그로 인해 가리켜진 '감각현실 부분'의 관계를 혼동하게 된다.
현실에서 이처러 망상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일반적으로 이를 바탕으로 이후 그처럼 가리켜진 감각현실 부분에서 그처럼 상(相 Lakṣaṇa )을 취하게 된다.
즉, 그런 부분이 '영희'이고 '안경'이라고 여기며 상을 취하고 대한다.
또 반대로 감각현실 일정 부분을 대한 가운데 그 부분이 곧 '영희'라고 여기며 상(想 Saṃjña)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간에 상호 관계가 있다.
한편, 이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즉 그처럼 상을 취하고 그에 바탕해 상에 머물고 행위를 해나간다.
[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머무는 망집현상]
이를 위해 그림을 제시하여 살펴보자.
08pfl--image/사람.jpg
일단 위 그림은 조금 이상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저와 같은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저 부분이 사람으로 여기고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것은 사실은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대해 그런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 현실 현상이 첫 문제다.
이런 망상분별은 비닐마술의 비유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닐마술이란, 다음과 같다.
세모△ 가 그려진 비닐과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비닐을 겹쳐 놓게 되면
처음 세모△ 가 그려진 비닐에 동그라미○가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또 이로 인해 어느 비닐에도 없는 모양이 보이게 된다.
즉, 안이 세모이고 밖이 동그란 도너츠 모양 ㋰이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세모가 그려진 비닐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 상황에서 그 비닐을 그런 도너츠모양으로 대하게 된다.
즉, 세모 △를 대하면서 그것을 곧 그런 도너츠 ㋰로 잘못 여긴다.
이는 달리말하면,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 동그라미○가 '있다'고 잘못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런데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는 동그라미○가 없다.
한편, 그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 세모△가 '있다'고 잘못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는 세모△는 얻을 수 없다.
세모△ 와 동그라미 ○는 각기 다른 영역에 있는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세모는 그런 도너츠㋰도 아니다.
08pfl--image/8-vinyl-magic.jpg
[img2-10]
이 비닐마술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
이 경우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 상황에서 그가 있다고 여기는 내용은 사실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다.
즉, 안이 세모인 도너츠모양㋰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그 도너츠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도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또 그 도너츠는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도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분별이 바로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 비닐마술의 본 사정을 자세히 제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각 비닐에 그런 도너츠가 없음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나 어떤 이가 그 상황에 그런 도너츠를 있다고 잘못 여기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여전히 그런 모습을 그 상황에서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반문하게 된다.
이 비닐의 세모△는 자신이 본 도너츠의 그 세모△다.
여기 이 비닐에 있는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대로 도너츠의 동그라미○ 그대로이다.
이렇게 자신이 그런 내용을 분명하게 얻는다.
그런데 왜 이 각 영역에서 그런 도너츠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계속 고집하고 임하게 되기 쉽다.
물론 이 도너츠 비닐마술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일반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으키는 혼동이 이와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각 내용을 쉽게 얻는다.
즉, 한 주체가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동시에 얻게 된다.
그리고 마음 안에서 이를 겹쳐 대하게 된다.
그러면 이 두 관계를 그처럼 잘못 착각하고 대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들에서 그 성격에 대해 혼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경우가 위 비닐마술에서 일으키는 혼동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잘못임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 쉽다.
그리고 그 주장을 계속 고집하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망집 문제다.
현실 상황이 이런 비유와 같다.
그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부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저부분은 곧 사과이다. 또는 영희이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그에게 지적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오히려 다음처럼 반문하게 된다.
그것은 사과이고 나무라는 사정은 너무나 당연하게 옳다.
그것은 굳이 다른 설명이나 증명도 필요없다.
눈으로 그것을 보면 그것이 사과이고 나무임을 모르는가.
누구가 눈을 뜨고 그냥 대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즉 현실을 대하면 바로 그것이 옳은 내용임을 '즉자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누구나 쉽게 이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게 된다.
현실에서 대부분 그처럼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부분은 곧 자신이 분별한 내용 그것'이다'라고 굳게 믿는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망상환자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는 치솔만 대하면 그것을 자신이 사랑하던 개라고 여기며 반응한다고 하자.
그가 다른 부분을 대할 경우는 그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 치솔부분만 대하면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개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치솔을 개라고 여기며 대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의사는 그가 이런 상태가 망상분별 상태임을 쉽게 이해한다.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그 부분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그 부분에 '없다.'
그렇기에 그 환자의 상태는 망상분별 상태인 것이다.
그 부분에 본래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처럼 엉뚱한 부분을 취해 붙잡는다.
그리고 자꾸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며 임한다.
그런 사정으로 그를 망상환자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인 생사현실 안의 중생 상태가 이와 같다.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이들 내용을 재료로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면 문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두 내용을 따로 놓고 서로 비교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관계는 침대에 누어 꾼 바다 꿈의 관계와 같다.
그처럼 서로 엉뚱한 내용이다.
따라서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꿈과 비닐마술을 념두에 두고 현실 경우를 다시 잘 살펴보자.
○ 관념 -> 감각현실 부분
우선 어떤 경우에 사과나 영희가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일단 이 상황에서 그런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도 이 상황에서 이들 내용은 마음에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사과나 영희란 생각은 자신이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사과나 영희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 나선다고 하자.
그러다가 사과나 영희를 찾아서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즉 저 부분에 찾는 사과가 있다.
저 부분에 영희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런 부분을 가리키게 한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즉 앞 순간에 생각한 내용들이다.
이들은 관념내용 ~> 감각현실의 관계다.
그리고 이 경우 이들은 '가리키게 하는 것'~ '그로 인해 가리켜진 내용'의 관계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 감각현실 부분 -> 관념
한편, 이제 다른 이가 그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그 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즉 그 부분은 사과라거나, 영희라는 등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가리킨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일으켜진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은 그런 관념내용을 일으키게 한 재료다.
또 관념내용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일으켜진 내용일 뿐이다.
또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관념내용이 아니다.
이들은 감각현실 ~> 관념내용의 관계다.
그리고 이 경우 이들은 '일으키게 하는 것' ~ '그로 인해 일으켜진 내용'의 관계다
○ 감각현실과 관념을 겹쳐 잘못 이해하는 현상
그가 일정부분을 대해 사과라는 생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 경우 그는 일반적으로 다음 상태에 있다.
그는 여타의 다른 부분에서는 보통 그런 생각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분을 대하면 보통 그런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일상생활에서 반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도로를 보면서 사과란 생각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 사과라고 여기는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또 그는 보통 사과라는 생각을 보통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그 부분이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런 관계에 있다.
또 그런 경우 그는 이 두 내용을 통상 동시에 얻게 된다.
○ 감각현실 부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런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감각현실 부분에 관념내용이 그처럼 함께 겹쳐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 감각현실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과나 영희'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그러면 자신의 일으킨 분별 내용이 감각현실 영역에도 그처럼 함께 있다고 잘못 여긴다.
○ 관념의 내용에 대한 잘못된 분별
또 이는 반대 방향으로도 잘못된 분별을 행하게 한다.
즉, 그런 사과나 영희의 관념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관념은 그 안에 그런 감각현실을 구체적 내용으로 '갖고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관념은 곧 그런 감각현실'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 현실 내용이 실답다고 잘못 이해함
이런 망집의 바탕에서는 그가 분별한 내용은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
즉 꿈과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꿈 내용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감각현실 부분에는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한편 분별한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부분으로 갖고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꿈과는 달리 이들 내용은 실다운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
이를 다시 자세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를 정지된 한단면의 내용과, 변화과정을 나누어 살펴보자.
○ 정지된 한 단면과 관련한 분별
먼저 감각현실의 한 정지단면을 놓고 보자.
여기서 그 한 부분을 대하면 그는 그 부분이 a 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은 얻어진다.
또 그에 대해 관념영역에서 a 라는 생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이 부분은 '자신'이다.
저 부분은 타인인 영희다.
또는 소, 양이다.
또는 바위나 책상이다.
이런 식을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 감각현실 부분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관념내용 a 는 얻어지지 않는다.
○ 변화과정과 관련된 분별
한편, 현실에서 어떤 것을 대하면 다양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영희가 저기에서 여기로 오고 있다.
꽃이 오늘 아침에 피어났다.
공이 굴러간다.
이런 등등의 분별을 행한다.
그래서 현실에 그런 어떤 a 의 '생멸이나 생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현실에서 물론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각 내용이 매 순간 들고 남은 있다.
즉 눈을 뜨면 내용이 얻어진다.
또 눈을 감으면 일정한 내용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그는 '생멸'로 이해하게 된다.
우선 그가 생각하는 생이란 관념은 무언가 a 가 없다가 있게 됨을 뜻한다.
그가 생각하는 멸이란 관념은 무언가 a 가 있다가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일단 그가 a 로 여기고 대하는 그 감각현실 부분은 정작 a 가 아니다.
또한 어느 감각현실 단면에도 그런 있다가 없음[생]이나 없다가 있음[멸]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일련해 계속 대하는 감각현실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일련의 감각현실은 그가 분별하는 그런 a 의 생멸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관념은 그가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일 뿐이다.
즉 그런그런 여러 감각현실 단면을 대하는 가운데 일으킨 관념일 뿐이다.
그리고 정작 그가 생각하는 그런 관념은 그런 감각현실 각 부분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감각현실 각 부분에는 그런 관념을 본래 얻을수 없다.
그런데도 그가 위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현실에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a가 있다고 여긴다.
또 그런 a 의 생멸과 생사 등이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런 바탕에서 그는 감각현실 영역안의 내용을 엉뚱하게 취해 붙잡는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바로 자신이 말하는 a나 자신이나 영희라고 여기게 된다.
이 경우 그에게 무엇을 그런 a 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망집의 바탕에서 그런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 a의 '생멸이나 생사'도 마찬가지다.
즉 영희라고 여긴 부분이 화장터라고 여기는 부분에 들어 간다고 하자.
그리고 이후 일련의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런 부분들을 함께 가리켜 그것이 곧 영희의 생사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물론 감각현실 부분에 그가 그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들은 얻어진다.
또 그런 부분을 대해 그런 관념을 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관념내용은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감각현실들은 그가 이해하는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욕계에서는 대부분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임해 활동해나간다.
그러면 그 주체는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현실에 계속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분주히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이런 경우 기본적으로 다음을 잘 확인해야 한다.
우선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은 또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정체와 상호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현실에서 자신이 일으킨 망집의 사정을 이해하고 벗어날 수 있다.
3 실다운 자신, 외부세상, 외부대상, 외부물질 및 외부 객관적 실재로 여기는 망상분별
현실에서 한 주체가 집착을 가장 많이 갖는 부분이 있다.
이는 자기자신이다.
누구나 자기자신을 가장 많이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으로 무엇이 자기자신인가에 관련해 잘못된 분별을 행하게 된다.
이 부분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현실에서 제각각 어떤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며 대하는가를 확인해보자.
제각각 현실에서 무언가를 자신으로 여기면서 임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켜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자신이 어떤 순간 눈을 뜬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내용 안에서 어떤 부분이 자신에 해당하는가를 손으로 가리켜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면서 손으로 가리키게 되는 부분이 있게 된다.
○ 자신에 대한 잘못된 분별
현실에서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게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평소 눈을 떠 대할 때 주변 환경은 계속 들고 나며 바뀐다.
그러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일정 부분은 그와 다르다고 여기게 된다.
즉 그 부분은 계속 늘 반복해 파악된다고 잘못 여긴다. [ 항상됨 ]
한편, 예를 들어 자신이 거리를 나가 걷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만 따로 떼어 움직여 변화함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 부분이 다른 부분과 구별된다고 여긴다. [ 자신의 뜻대로 됨 ]
한편 자신의 몸 부분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손을 대어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나머지 부분과 달리 그 부분에서도 촉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손을 자신의 몸에 대는 경우와 벽에 대는 경우를 서로 비교해보자.
그러면 각 경우 각 부분의 촉감이 다르다.
그리고 양 부분에서 모두 촉감을 느끼게 되는 범위를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 감관이 있어 현실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일반적으로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 감각및 인식의 기관이 위치한 부분]
그러나 이들 내용은 모두 자신이 감관을 통해 얻어낸 감각 내용이다.
그래서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이들을 자세히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분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매순간 스스로 자신으로 보는 내용은 완전히 일정한 것이 아니다.
잠깐만 움직이고 활동하는 경우에도 이 각 내용은 전후로 달라진다.
아이 - 소년 - 청년 - 장년 - 노년을 걸쳐서 살피면, 그 사정을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 부분이 자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즉 한 주체가 생노병사를 겪는다고 하자.
그것을 자신이 원해서 뜻과 같이 그런 변화를 겪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몸으로 본 부분에 자신의 감관이나 정신이 위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처음 몸으로 본 부분은 위와 같은 성격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가짐을 확인하게 된다.
그 부분이 위와 같은 내용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이 걸친 옷과 같은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과 같은 사정으로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분별임을 알 수 있다.
○ 자신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잘못된 분별
앞과 같은 사정으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외 나머지 부분에 대해 다양한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아래에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 자신외 나머지부분은 외부세상이라고 잘못 여기는 분별
앞과 같은 사정으로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그 나머지 부분은 모두 그런 자신의 밖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부분은 이제 신과는 구분되는 '외부세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자신 - 외부 세상으로 나누어 이를 잘못 분별하고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모두 눈을 통해 자신이 얻어낸 시각내용이다.
즉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따라서 이를 자신 밖 외부 세상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 감각과정에서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에 대한 잘못된 분별
한편,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각 감관은 곧 그런 부분에 위치한다고 잘못 분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나머지 다른 부분은 이들 감관이 대한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스스로 눈으로 여기는 부분을 수저 등을 대어 가린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에서는 보지 못하게 된다.
또 그것을 떼면 이제 일정한 모습을 보게끔 된다.
한편, 스스로 귀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으로 막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잘 듣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손을 떼면 소리를 잘 듣게 된다.
나머지 감관들도 마찬가지다.
코를 손으로 막으면 냄새를 못 맡게 된다.
혀를 사과에 대면 맛을 느끼게 된다.
손으로 여기는 부분을 사과에 대면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일상에서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이들 각 부분을 곧 자신의 감관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즉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게 하는 감관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감관들은 자신에게 속한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부분을 이들과 구분한다.
즉 나머지 다른 부분은 이들 감관이 대한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우선 눈은 눈을 직접 보지 못한다.
한편, 손으로 만져 눈으로 여기는 부분은 촉각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촉각 내용이 시각을 얻게 한 것은 아니다.
한편 그런 상황에서 눈을 통해 자신이 감관으로 여기게 된 부분은 사실상 시각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내용의 한 부분이 그런 각 감각을 얻게 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시각 내용의 한 부분이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눈을 감아 그런 각 부분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런 각 감각은 여전히 행할수 있다.
그래서 위와 같은 판단은 잘못된 분별이다.
○ 운동 동작의 대상에 대한 잘못된 망상분별
한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사과를 집어 책상에 올려 놓는다고 하자.
그러면 사과는 그 부분만 떨어져 책상에 올려진다.
또 한편 그런 사과를 손으로 만져 굴린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분만 따로 굴러감을 보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험을 수없이 반복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런 부분은 그런 행위의 대상이 된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앞과 같은 사정으로 잘못된 판단이다.
이들 각 내용은 시각 내용이다.
그래서 시각내용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대상으로 삼아 그런 동작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 외부물질- 물질과 정신에 대한 잘못된 망상분별
한편,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반해 이들은 보이거나 만져진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모두 마음과는 별개의 특성을 가진 외부 물질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또 이들 내용은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몸으로 본 부분은 이와 구분되는 자신의 육체로 잘못 여긴다.
또 자신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세상을 구성하는 외부 물질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물질 - 정신의 구분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모두 한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따라서 이들이 마음을 떠나 있는 내용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 외부 객관적 실재로 잘못 분별하는 현상
한편 현실 상황에서 어떤 이가 사과를 집어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이 상황에서 그 사과부분만 영희가 받게 된다.
그리고 철수나 영희 등을 비롯해 서로가 이런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얻는 경험을 철수나 영희도 똑같이 얻는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자신이 얻는 이들 내용은 모든 주체가 함께 공통해 얻게 되는 내용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얻는 이들 현실 내용은 곧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자신과는 독립해 외부에 객관적으로 있는 내용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다른 주체가 또 다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을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얻은 내용을 자신과 관계없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 가서 어떤 조각상을 대한다고 하자.
자신은 정면에서 이 조각상을 본다.
영희는 오른쪽에 서서 이 조각상을 본다.
철수는 왼쪽에 서서 이 조각상을 본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조각상을 보는데, 영희나 철수도 본다.
그래서 자신이 본 조각상 모습은 곧 영희나 철수가 다 함께 대하는 내용으로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를 자신과 관계없이 모든 이가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이 경우 그 내용은 마치 그 주체와 관계없이 얻어낼 수 있는 내용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기술할 때 그 주체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인 것처럼 기술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상황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모두 각 주체가 관계해 얻어낸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 상황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제각각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그 상황에서 그 내용을 대한 관찰자를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한편 처음 자신이 위치한 위치에 다른 주체가 서서 대하게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감관상태가 엇비슷한 인간들끼리는 그 내용이 어느 정도 공통하다고 보게 된다.
그렇다해도 각 주체의 감관 상태가 다른 생명들의 경우에는 또 사정이 그렇지 못함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박쥐나 방울뱀을 그 위치에 놓고 생각해보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한 주체라고 해도 각기 다른 감관마다 서로 엉뚱한 내용을 얻게 됨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들 판단은 잘못된 분별이다.
여하튼 각 주체는 현실내용 자체에 대해 잘못된 망상분별을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일으키게 된다.
이를 간단히 다시 정리해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이 내용을 놓고 그 정체나 그 성격 지위에 대해 잘못된 분별과 평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우선 그 가운데 일정 부분을 곧 실다운 '자신'이라고 잘못된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그가 대하는 '외부 세상'이라고 잘못된 분별을 행한다.
또 그 나머지 부분들은 곧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이들 부분은 자신의 마음과는 떨어져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결국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 물질'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 앞에서 자신의 몸으로 여긴 부분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도 앞에 준해서 이는 마음과는 다른 '육체'인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 철수등 모든 이가 함께 대하는 공통된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즉, 이들 내용은 곧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를 자신과 별개로 외부에 실답게 있는 내용들로 여긴다.
그리고 그 분별내용들도 역시 그처럼 실답게 있는 내용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에 비례해서 현실을 실다운 것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각 주체는 이런 바탕에서 이후 다시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나가게 된다.
그리고 온갖 무량한 망상 분별을 행해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바탕에서 온갖 내용을 살펴 나간다.
물질의 정체, 그 크기와 양, 시간의 전후, 공간의 좌우, 운동의 법칙, 인과관계 및 가치 등등의 경우가 마찬가지다.
그리고 희망과 목표를 세우고 그 실천방안을 찾는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일반적인 입장이 위와 같다.
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07-k0174-002.html
임시2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8-k1482-011.html
4 현실이 마음내용이면서 실답게 여겨지는 사정
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07-k0174-002.html
임시2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8-k1482-011.html
4 현실이 마음내용이면서 실답게 여겨지는 사정
- 감각현실의 각 부분의 특성이 달리 파악됨
- 현실이 다수에게 유사하게 반복되어 파악됨
-- 다수가 함께 얻음
-- 일정한 시기
-- 일정한 장소 상황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음
--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조건에 일정한 내용을 결과로 반복해 얻음
=> 마음 밖에 마음 안 내용과 상응한 내용이 그처럼 실재한다는 잘못된 분별
=> 또는 마음 밖 외부에 전혀 아무것도 없지만, 단지 다수 주체의 마음안 공종자로 그렇게 된다는 분별 - [4 난 ]
>>>
우선, 현실에서 한 주체는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다양한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그가 얻는 감각현실 일부를 자신으로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나머지 부분은 곧 외부세상, 외부대상, 외부물질인것으로 잘못 분별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자신과 독립해 존재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이들을 다시 조금 넓고 길고 깊게 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판단 평가한 이들 내용이 모두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현실은 외부세상이나 마음 밖의 외부물질이 아님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또 외부의 객관적 실재도 아님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또 이들 현실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 유식무경 ]
물론 이들 일체 내용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이런 내용은 누구나 현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별도로 자세히 살핀다.
참고: 현실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확인하는 기본 실험
● 기본적 실험방안과 추가적 실험방안
http://buddhism007.tistory.com/4035#003
sfed--불설마요란경_K0694_T0066.txt
sfd8--불교단상_2562_02.txt ☞○ 기본적 실험방안과 추가적 실험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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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존재 확인 실험
http://buddhism007.tistory.com/4224#005
sfed--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txt
sfd8--불교단상_2562_03.txt ☞ ☞●마음의 존재 확인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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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ct-list--editing_text.TXT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entry/마음-현상의-이해#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그런데 여기서는 이를 간단히만 요약해보기로 하자.
우선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구해 써보기로 하자.
그러면 평소에 외부 현실로 여긴 내용이 일시에 색과 형태가 다 함께 변한다.
그런데 평소 대한 현실이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하자.
그런데 색안경 하나 바꿔 써서 이처럼 외부의 객관적 실재를 다 일시에 바꿀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자신은 대단한 초능력자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
눈을 손가락으로 눌러 두개의 달이 보이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 경우 처음 본 달이 정말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하자.
그렇다면 손가락을 눈으로 눌러 달을 순간 두 개로 만들어 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제2 의 달]
한편, 눈을 뜨고 감는 일을 반복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 상황에서 옆에 있는 영희나 철수도 그처럼 반복하게 한다.
그러면서 영희나 철수가 매순간 보고하게 해보자.
그리고 그 내용을 놓고 관찰해보자.
그러면 자신이 눈으로 보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 내용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은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은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유식무경]
다만,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음을 살피기로 한다.
현실 일체는 마음안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들 내용은 실다운 것으로 자꾸 여기게 된다.
즉 마음 밖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꿈과 달리,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끔 된다.
그 사정을 살펴보자.
우선, 눈을 감았다가 뜬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에서 눈을 뜨면 그 순간 일정한 내용을 함께 한번에 일시에 얻게 된다.
즉, 눈을 뜨는 순간 얻는 내용 일체는 그렇게 얻는 감각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 일체는 하나의 마음 내용이다.
즉, 그 일체가 마음내용인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각 부분을 경험을 통해 검토해보자.
그러면 이 하나의 마음내용 각 부분의 특성이 제각각 다르다.
이들 각 부분을 나누어 살펴 본다고 하자.
이를 이미 앞 3에서도 살폈다.
우선 평소 자신으로 여기며 대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이 나머지 부분을 다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자신과 유사한 영희나 철수로 여기며 대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 자신과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유사한 생명체로 대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강아지나, 고양이, 나무 등이 그런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생명으로 보지 않는 나머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바위나 책상, 의자 등이 그런 부분들이다.
이 각 부분의 특성이 서로 다르다.
이런 차이를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형태로 경험하게 된다.
자신으로 보는 부분이 갖는 특성은 이미 3 에서 보았다.
물론 엄격하게 살피면 그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그런 분별을 하게끔 하는 특성을 달리 갖는다.
그래서 그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즉 이들 각 부분은 그가 눈을 뜰 때 다 함께 얻는 내용이다.
그래서 하나의 마음내용이다.
그럼에도 각 부분은 일상생활상 서로 다른 특성을 갖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그 각각은 각기 다른 실재가 따로 있기에 그렇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을 살피면 다시 다음 차이점을 파악하게 된다.
물론 현실내용은
각 주체별로 그리고 각 감관별로 화합해 일정 조건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
또 그 내용도 매 순간 낮과 밤에 따라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는 여전히 꿈처럼 일정 조건에서만 일시적으로 얻는 내용이다.
따라서 무상한 것이고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다.
그래도 현실은 매 순간 대하면 일정하게 판단하게끔 된다.
즉 그렇게 유사한 형태로 각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바위는 바위라고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어떤 한순간만 얻는데 그치지 않는다.
매일 일정 시간 장소에서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된다.
그 사정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현실 안에서는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 위치를 파악하는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책상에 사과를 놓아 두었다고 하자.
그런데 다음날 해가 뜰 때[시간기준] 다시 그 책상 부분[위치 기준]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역시 그 사과를 보게 된다. [시간 장소]
또 그런 상황에서 그 사과에 손을 댄다고 하자.[일정조건]
그러면 그 상황마다 반복해 촉감을 느끼게 된다. [조건]
또 사과를 굴린다고 하자.
그러면 앞으로 소리를 내어 굴러가게 된다.
이런 관계를 반복해서 경험한다. [인과 관계, 작용-효과의 관계]
또 그런 사정은 자신에기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자신 뿐 아니라 영희나 철수도 비슷하다. [다수 주체]
즉, 현실 내용은 다수 주체가 함께 얻는 성격을 갖는다.
- 꿈은 혼자 꾸는 것과 다르다.
또 비슷한 시간 공간 및 비슷한 상황조건에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또 비슷한 관계로 색,성,향,미,촉을 비롯한 다양한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일정한 행위를 행하면 일정한 결과를 받는 관계를 반복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다시 좋고 나쁨의 느낌 및 명료한 관념 분별 내용을 장구하게 반복해 얻어나간다.
- 이는 꿈이 1 회성이며 일시적 임시적인 것과 다르다.
즉 현실 내용은 다수 주체간- 일정시간 공간에서 - 일정 조건 상황관계에서 - 유사한 현실 내용을 반복해 늘 얻는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꿈과 달리 갖는 특성이다.
그 경우 그 각각은 각기 다른 실재가 있기에 그렇다고 여기기 쉽다.
또 이는 일반적 입장에서 현실을 실답게 여기게끔 되는 사정이기도 한다.
그래서 현실이 이렇게 꿈과 달리 파악되는 사정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
우선 현실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꿈도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 같이 마음안 내용이라고 하자.
그리고 현실내용도 꿈처럼 그런 내용을 마음 밖 영역에서는 전혀 얻지 못한다고 하자.
즉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상황과 같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점에서 꿈과 큰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우선 꿈과는 다르다.
즉 앞과 같은 특성이 각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실 내용은 다수에게 다 함께 일정한 조건 상황에서 반복해 얻어진다.
그런 차이가 있다.
그래서 현실이 왜 그렇게 나타나는가를 따로 설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마음밖 본 바탕 실재의 정체를 함께 판단해야 한다.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꿈 내용과 꿈 밖 침대 상황을 함께 놓고 비교 판단해야 한다.
이와 사정이 같다.
먼저 꿈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 바다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리고 어느 섬에 도착해 황금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꿈 속에서 이렇게 여긴다고 하자.
...
자신이 바다와 섬 그리고 황금을 보았다.
따라서 꿈 밖 상태는 이런 꿈에 준해 추리할 수 있다.
그래서 꿈 밖 상태는 꿈 내용에 상응한 내용이 그 위치에 각기 있으리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임은 그가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 쉽게 판단하게 된다.
즉, 그가 현실 상황을 본 다음에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즉 깨어서 침대 상황을 잘 파악하고, 꿈과 비교해 봄으로써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정체와 성격을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러면 이를 위해 본 바탕 사정을 함께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꿈과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꿈의 경우는 한 주체가 꿈을 깬다고 하자.
그러면 꿈과 다른 현실 내용을 다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명확하게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는 이와 조금 사정이 다르다.
한 주체는 오직 마음이 관계한 내용만 얻게 된다.
그런데 문제삼는 본 바탕 실재는 그렇지 못하다.
실재는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도 있다고 할 내용이다.
그런 사정으로 한 주체는 본 바탕 실재를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본 바탕 실재 상태를 오직 추리로 파악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본 바탕 실재에 대해 여러 다른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
그 각 입장에 따라 현실 내용을 실답게 여기게 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를 다시 아래 항목에서 살피기로 한다.
5 본 바탕인 실재와 관련한 망상분별
현실 내용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 내용은 각 주체가 제각각 얻는 마음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현실 내용은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제 본 바탕의 실재는 무언가가 문제된다.
즉 각 주체와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 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자신 마음과는 무관하게 마음 밖에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형태의 내용인가 등이 문제된다.
이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자응 살펴보기로 하자.
○ 마음 밖 실재에 마음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있다는 입장
우선, 현실 내용이 다 함께 그 일체가 다 마음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각 부분의 특성이 다르다.
마음안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차별이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각 부분이 달리 파악된다.
그래서 그것을 오로지 마음안에 그 사정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을 다음처럼 이해한다고 하자.
이들 각각이 일정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은 마음 밖에 사유가 있다.
즉, 현실 내용은 마음 안 내용이다.
그런데 현실 내용에 일치하는 내용이, 마음 밖 영역에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그런 차별적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 마음 밖 실재에 마음내용과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이 있다는 입장
한편, 다음과 같은 입장도 또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마음 밖 내용이 마음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그와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라고 추리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앞의 두 입장은 결국 다음과 같은 입장이 된다.
우선 위 주장들은 현실 내용에 상응하는 내용이 그처럼 마음 밖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현실은 꿈과는 달리 실답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 내용은 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즉 다음과 같이 이해하게 된다.
우선 꿈은 실답지 않음은 이해할 수 있다.
즉, 꿈에서 꾼 내용을 꿈 밖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꿈은 실답지 않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꿈과 다르다.
우선 현실에서 얻는 각 부분에 차별이 있다.
또 그 차별에 응해 마음 밖에 그에 상응한 내용이 있다.
즉 일치한다고 하던, 비례한다고 하던 사정이 그와 같다.
그래서 현실은 그 만큼 실답다.
즉, 꿈과 달리 실답다.
이렇게 이해하게끔 된다.
○ 또 다른 입장 - 일부 극단적 유식학자의 입장
그런데 이를 달리 해석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우선 마음 밖의 본 바탕 실재영역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긴다고 하자.
즉,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이해한다.
그런데도 '다수 주체'가 함께 일정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 현상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은 오직 각 주체의 마음안에서만 그 사유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를 각 주체가 마음안에 공통적으로 갖는 내용[공종자]으로 설명하려는 경우가 있다.
또 그런 취지로 공종자라는 개념을 고안해 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무리가 따르게 된다.
우선 한 주체가 건축물을 거리에 세웠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위 입장에서는 그 주체의 마음안 공종자를 변화시킨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먼저 한 주체의 마음안 공종자가 변화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주체의 마음 밖 내용( 다른 주체의 공종자)까지 다 함께 변화해야 할 근거는 없다.
즉 건축물을 거리에 세운 일은 알고보면 한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 변화한 것 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세계의 수많은 다른 이들의 마음 안 내용(각 주체의 공종자)까지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 거리를 지나가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다 그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래서 설명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다음 문제를 또 갖는다.
이런 입장은 처음에는 한 주체의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주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주체의 마음이나 공종자는 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 된다.
왜 한 주체의 마음 밖에 어떤 것은 없고, 또 어떤 다른 것(마음, 공종자 등)은 있다고 하는가.
그렇게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런 부분에서 설명이 곤란하게 된다.
○ 실재는 얻지 못하여 공하다는 입장.
위와 같은 이해는 제각각 문제가 있다.
이들은 각각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 두 입장은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어느 주체도 본 바탕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현실 마음내용과 일치한다거나 비례한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무리가 따른다.
세번째 입장은 다시 다음의 문제가 있다.
우선 어떤 주체가 마음 밖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마음 밖에 어떤 내용도 전혀 없다고 단정할 도리는 없다.
이는 무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으로 지나치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각각 본 바탕 실재의 공함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마음 밖 실재 본 바탕은 공하다.
그러나 공함은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 맨 처음 현실 내용 하나하나는 꿈과 성격이 같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즉,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과 성격이 같다.
우선 각 주체는 현실에서 마음에 얻는 내용만 얻는다.
그리고 마음 밖 내용은 얻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 밖 실재 내용은 직접 얻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과 본 바탕 실재는 이처럼 구별된다.
즉 현실은 얻고, 실재는 얻지 못하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결국 이는 침대에서 바다 꿈을 꾸는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다수 주체가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그 사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 그 사정은 다음처럼 이해하면 충분하다.
우선 본 바탕 실재가 공하다.
그런데 다수 주체는 서로 같은 성격을 갖는 마음의 구조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공한 실상을 대하는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어떤 이가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정은 다른 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갑이 어느 순간 사과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를 사과로 여긴다고 하자.
그 경우 같은 구조로 된 다른 을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을도 그 상태에 처하면 엇비슷하게 사과 모습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를 사과로 여긴다.
한편 그 상황에서 갑이 사과를 집어 을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은 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을도 그 상황에서 엇비슷한 인식을 하게 된다.
즉 을도 역시 갑이 사과를 집어 건네는 상태로 인식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실상이 공함과 이들 내용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각 주체는 이런 관계로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게 된다.
그렇다해도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것은 변함이 없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갑을 을 비롯한 다수 주체가 일정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본 바탕 실재와 이들 내용의 관계가 문제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관계가 각기 엉뚱한 것 뿐이다.
즉 실재와 갑이 얻는 각 내용은 서로 엉뚱하다.
또 실재와 을이 얻는 각 내용은 서로 엉뚱하다.
즉 실재는 갑,을을 비롯해 모두 얻지 못하고 공하다.
그런데 현실은 갑,을을 비롯해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이처럼 서로 다르고 엉뚱하다.
그래서 이들은 제각각 꿈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즉, 여전히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이처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즉, 실재가 공함은 실재 영역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본 바탕과는 엉뚱한 것을 얻어내는 관계에 있다.
그런 상태가 각 주체에게 공통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현실 내용을 다수 주체가 그런 관계로 반복해 얻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이 내용 이해를 위해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경우 그 꿈은 실답지 않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 경우 꿈 밖 현실 영역에 침대가 전혀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꿈 밖 현실 영역에 침대 등이 있어도 관계없다.
단지 꿈 밖 현실의 침대와 꿈 안의 바다나 황금이 서로 엉뚱한 관계다.
그런 사정으로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현실 내용도 사정이 같다.
마음 밖 본 바탕과 현실내용의 관계를 위에 준해서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마음 밖 본 바탕에 아무 내용도 전혀 없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우만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공의 이해에서 무의 극단에 치우친 입장이 된다.
우선 실재의 공함은 있고 없음 양변을 모두 떠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에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본 바탕 실재와 현실 내용의 관계가 서로 엉뚱한 것이다.
우선 본 바탕 실재는 얻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은 한 주체가 그 마음안에서 얻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는 각 주체들간에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다고 말하게 된다.
이해를 위해 다음 비유를 놓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다수가 반복해 비슷한 내용을 무량하게 반복해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런 내용이 외부에 반드시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정을 그림울 그리는 과정이나, 연극, 영화, 또는 전자게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아이들이 행하는 전자 게임을 놓고 살펴보자.
이 전자게임 화면을 놓고 살펴보자.
이 화면에 나오는 거리나 인물 아이템을 놓고 보자.
이들은 꿈과 성격이 같다.
즉 이들 내용은 다른 영역에 그와 일치하는 내용을 찾기 힘들다.
즉 화면 밖 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화면 밖의 또 다른 영역, 예를 들어
하드 디스크나, 메모리, 전선줄, 마우스, 키보드 등에서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련의 관계가 되면 그 화면에 일정모습이 그렇게 화합해 나타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화면에서 일정 내용을 마우스로 클릭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일정한 아이템이 얻어질 수 있다.
또는 인물 캐릭터가 일정한 동작을 하거나 옮겨 간다고 하자.
그런데 이 관계는 그 게임을 임하는 다수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리고 그 게임의 조건이 충족되는 한, 무수히 반복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그 하나하나가 실다운 내용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바로 위와 같은 특성 때문에 현실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게도 된다.
즉 현실이 꿈과 달리 갖는 특성이 많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만큼 현실을 꿈과 달리 실답게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나간다.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망집번뇌[혹]-업-고의 관계는 무량겁에 걸쳐 이런 형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를 시정해야 한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문제삼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즉 본 바탕 실재나 참된 실체의 존부를 문제삼는 경우가 드물다.
현실에서는 일상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 내용만을 주로 문제삼는다.
그리고 이들로 망상분별을 대부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해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대부분 삶을 마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깊게 세상과 자신의 정체를 탐구한다고 하자.
그런 특수한 경우에 이런 주제를 문제삼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라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실체나 실재를 문제삼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현실에서 일으킨 망상분별을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시켜 증폭시켜가게 된다.
그런 경우 다음처럼 추리하고 주장하기 쉽다.
현실에서 다수가 반복해 일정한 관계로 내용을 얻는다.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에 현실과 일치하거나, 상응하고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이 실답게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이 그렇다라고 추리하기 쉽다.
그리고 실재에 대한 논의에서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이미 앞에서 살폈다.
그런 경우 현실 내용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된다.
물론 일반입장도 현실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임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배경은 위 경우들과는 다르다.
즉 다음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경우는 우선 현실 그 자체를 곧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음 차이가 있다.
우선 현실은 실재가 아님을 이해한다.
그리고 현실은 마음내용임도 이해한다.
다만, 본 바탕 실재와 현실 내용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 뿐이다.
즉, 그 마음내용을 얻는 사정을 다음처럼 이해한다고 하자.
즉, 마음 내용은 마음 밖에 그와 일치한 내용이 있어서 그렇게 얻게 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 현실과 실재의 일치 상응의 추정]
그런 경우 결국 본 바탕의 실재란 여하튼 현실내용과 관련된다.
그래서 현실과 본 바탕 실재는 결국 일치하는 내용으로 이해하기 쉽다.
또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와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것으로 추정하기 쉽다.
또 그런 입장에서 실재란 결국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특별한 어떤 것[ something special]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은 곧 그런 실재를 대표하는 내용[ representative]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이런 경우 그런 사정으로 현실은 그만큼 실다운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이 해결이 문제된다.
6.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가 있다는 망상분별과 실다움
현실내용을 놓고 앞과 같이 여러 사정으로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각 주체가 매순간 그 순간만 얻는 일시적 내용이다.
그리고 일정한 관계에서만 얻는 내용이다.
즉, 각 주체의 각 감관별, 각 상황 조건따라 달리 화합해 얻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 내용은 각각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즉 각기 다른 감각영역, 관념영역, 그리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의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하나 실답지 않다.
즉 침대에서 엉뚱하게 꾸 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를 실답게 여기게 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따로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즉 현실 내용을 얻는데는 그런 실체가 현실 안팎 어디인가에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추리하기 쉽다.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뼈대가 되는 참된 진짜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매순간 얻는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만큼 현실을 실다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를 추리하는 사정
현실에서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가 있다고 잘못 추리하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하나의 바위나 나무를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매 순간 매 상황에서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어두울 때 보는 바위의 모습과 낮에 보는 모습이 다르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볼 때와 벗고 볼 때가 다르다.
그래서 매 순간 얻는 그 모습을 참된 진짜라고 여기기 곤란하게 된다.
그것은 다른 순간 다른 상황의 모습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판단하면 그런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그러나 매 순간 바위는 바위라고 분별하게 된다.
그리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분별하게 된다.
즉 바위는 산이 아니고 바위다. 이렇게 분별할 수 있다.
한편, 영희가 어릴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매 시기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이 매순간의 내용을 모두 영희로 분별하게 된다.
또 한편, 짧은 순간에서도 매순간 영희의 모습이나 그 크기가 매 순간 다 다르다.
예를 들어 100M 앞에서 자신 앞까지 영희가 뛰어 온다고 하자.
그 매순간 영희의 모습과 크기는 다르다.
그러나, 그 각 순간에서 일정부분을 모두 영희라고 분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일정 부분은 영희다. 그리고 나머지는 영희가 아닌 다른 부분이다. 나무고 거리다.
이런 식으로 구분해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분별하게 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 경우 그 각기 다른 모습은 엄밀하게 보면 다 다르다.
그럼에도 일정한 것은 바위로 또는 영희로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그 안에 각기 참된 뼈대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추리하게끔 된다.
즉 그런 참된 진짜가 그 안에 있다.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각 내용을 그렇게 파악하게 된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과연 그런 참된 진짜 내용이 있는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한편, 이미 4에서 본 내용들도 역시 이런 추리에 영향을 미친다.
즉, 각 부분이 특성이 일정하게 차별되어 파악된다. (자신- 다른 인간- 생명 - 무생명 )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또 현실에서 다수 주체가 일정한 내용을 일정한 시간과 공간 조건에서 일정한 관계로 엇비슷한 형태로 얻는다.
그래서 현실 내용을 일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이렇게 일정하게 내용이 파악되는 배경 사정을 역시 앞처럼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그처럼 내용이 파악되게 하는 사정을 찾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에 참된 진짜 실체가 그처럼 있어서 그런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의 의미
실체의 문제는 '꿈이 실답지 않다'는 논의와 관련된다.
꿈은 꿈을 꾸는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꿈은 실답지 않고 가짜라고 여기게 된다.
그것은 꿈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 꿈은 그런 상황과 조건에서만 얻는 일시적 내용이다.
즉 그런 상황과 조건을 떠나면 얻지 못한다.
- 한편 꿈은 다른 영역, 침대가 놓인 현실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내용이다.
- 한편 꿈은 그 내용에서 기대되는 성품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그 내용은 가짜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꿈과 달리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와는 다른 성품을 가진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경우 그런 참된 진짜를 찾기 전에 먼저 그 내용을 몽타쥬로 마음에서 그려 놓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우선 앞에 나열한 꿈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참된 진짜가 가져야 할 속성[실체의 성품]을 꿈과 달리 나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성품을 가진 것만이 꿈과 다른 참된 진짜[아, 자성]라고 하게 된다.
그래서 우선 관념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몽타쥬로 그려 놓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몽타쥬를 관념영역에서 그려 놓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물론 그 몽타쥬 내용 자체는 그런 관념 영역에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몽타쥬에 해당한 내용이 현실에 정말 존재하는가이다.
○ 유개념과 실체의 구분
여기서 먼저 단순한 유개념과 실체의 존부 문제를 서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100M 앞에서 자신 앞까지 영희가 뛰어 온다고 하자.
그 매순간 영희의 모습과 크기는 다르다.
그러나, 그 각 순간에서 일정부분을 모두 영희라고 분별하게 된다.
이 경우 일단 관념에서 그런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유개념 등]
그러나 이는 관념내용일 뿐이다.
이 경우 이 관념과 대응시키는 각기 다른 구체적 감각현실들이 있다.
즉, 이들 각 감각현실에 대해 공통적으로 그런 관념을 대응시켜 일으킨다.
이는 자상(구체적 모습)-공상(共相)의 관계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관념적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즉 창고 안에 수많은 색상, 수많은 형태의 상자가 있다고 하자.
이들은 대하면서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이 상황에 각 부분에 각기 다른 구체적 감각현실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이들은 각각 파란 상자. 빨간 상자, 큰 상자, 작은 상자....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또 이들 모두에 하나의 관념을 모두 공통적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모두 상자의 성품을 공통적으로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본질은 상자라고 여기게 된다.
즉, 이들 모두의 정체는 상자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다 함께 상자라는 유개념에 포함시켜 넣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판단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각 문제는 참된 진짜로서 실체의 존부 판단 문제와는 일단 구분된다.
즉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의 존부문제는 앞 문제와는 초점을 조금 달리 한다.
그것은 다음 문제다.
우선 꿈과는 성격이 달라야 참된 진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참된 진짜 내용을 관념으로 조합해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참된 실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에 해당하는 것이 정말 어느 영역에서든 찾아지는가.
얻어지는가. 발견되는가. 그래서 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의 존부 문제는 위 문제와는 조금 논의 성격이 다르다.
즉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정말 다른 영역에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이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에 요구하는 위와 같은 특성을 갖춰야 한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하나도 얻을 수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을 '없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는 없다고 하게 된다. [무아, 무자성]
한편, 이 논의는 다음 이유로 현실적으로 논의 실익이 없음도 이해해야 한다.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현실의 각 주체는 우선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현실의 각 주체는 이런 실체와 끝내 관련될 수 없다.
=> 그래서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각 주체에게는 실익이 없는 내용이 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노력을 통해 지금 논의하는 어떤 참된 진짜 상태가 끝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또 그런 사정으로 그것은 실체가 아닌 것이라고 해야 한다.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는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는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실익이 없다.
○ 실체가 있다는 망집의 부작용
실체가 있다고 잘못 분별하는 입장은 다음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즉 그런 생각 때문에 현실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하게 된다.
그 사정은 다음 때문이다.
물론 각 순간의 내용은 변화하고 다르다.
그래서 하나하나 가짜다. 실답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참된 진짜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사정으로 현실 내용이 그처럼 나타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경우 다음처럼 생각하게끔 된다.
이들 내용은 비록 가짜다.
그러나 그 안에 뼈대가 되는 참된 진짜가 따로 있다.
그런 사정으로 이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망집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과정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근본 단계에서 생사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망집을 근본적으로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런 망상분별을 잘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현실의 각 모습이 그런 참된 진짜 실체가 있다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또 그런 실체가 있어 현실이 그처럼 나타난다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꿈에서 어떤 이가 바다나 황금을 꾸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가 다음처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 꿈을 꾼 것은 침대 어딘가에 그런 것이 있어 꾸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실답지 않은 꿈을 실답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런 생각에 바탕해 업을 해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
물론 꿈의 경우에서는 위와 같은 자세가 잘못임을 쉽게 파악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이해가 잘못임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그것은 어딘 가에 그런 모습을 보게끔 하는 참된 뼈대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렇게 다수가 함께, 그리고 자주, 그런 시기와 장소, 조건에서 그런 모습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사정으로 또 이후 일정한 결과를 그렇게 반복해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선 현실 각 감각현실은 각기 그렇지 않다.
서로 엉뚱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복해 얻는다.
쟁반모습과 쟁반을 두드려 얻는 소리는 매번 반복한다. 그리고 서로 엉뚱하다.
그래서 앞과 같은 추리는 이들 관계에서 조차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이를 전자게임이나 그림 그리기, 연극 영화의 내용을 통해서도 살폈다.
이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른 영역에 그에 해당한 내용이 없다.
그렇다 해도 그런 내용은 다수에게 반복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도깨비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종이 밖에 도깨비가 없어도 그것은 그렇게 반복해 그릴 수 있다.
또 그 그림을 다수가 대하면 또 그런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해당한 진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런 진짜가 없다고 해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들 어느 영역에도 참된 진짜는 없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전에서는 그 사정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어느 영역에도 참된 진짜로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한편, 본 바탕 실재는 공하다. 그래서 그 내용을 한 주체가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다. [ 불가득 공]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생사현실은 그런 관계로 무량겁에 걸쳐 다수에게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한번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 그 과보를 받아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서로간에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각 내용이 다른 내용의 바탕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런 생사현실 내용을 통해 본 바탕의 사정도 이해하게 된다.
즉 세속제는 승의제를 이해하게 하는 바탕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각 내용을 놓고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 실재에 대한 논의와의 구별
한편, 실체의 존부[무아, 무자성]판단 문제는 본 바탕 실재를 살피는 문제와는 일단 구분된다.
즉, '실체의 존부문제'와 '실재의 공함'은 서로 논의하는 초점이 다르다.
먼저 본 바탕 실재의 공함을 살피는 것은 다음 문제다.
우선, 현실 내용은 한 주체가 관여해서 얻는 내용이다.
즉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해 마음안에 얻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떤 주체나 마음이 관계하지 않더라도 어떤 내용 무언가는 그대로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런 논의가 본 바탕으로 있다고 할 실재를 찾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실재를 찾는다고 하자.
그러나 한 주체는 오직 마음이 관계해 얻어낸 내용만 얻게 된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 있는 주체는 끝내 문제삼는 실재를 얻어낼 수 없다.
그러나 얻어낼 수 없다[불가득]은 있다, 없다라는 말과는 다른 표현이다.
예를 들어 비유로 이해해보자.
눈으로는 끝내 귀가 듣는 소리를 '얻어낼 수 없다.'
눈으로 내용을 얻는 안식을 놓고 생각해보자.
안식의 입장에서는 소리를 끝내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안식에서 얻는 내용[색]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또 사정이 그렇다고 이식에서 얻는 내용[소리]가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다만 안식의 입장에서는 소리의 유무를 판단할 수 없는 것 뿐이다.
이 비유를 통해 불가득 공과 유무의 관계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즉 불가득 공이란 표현이 아무 것도 전혀 없음[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삼는 실재가 무언가를 찾는다고 하자.
이는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상태로서 어떤 무언가가 있는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은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이런 주제로서 찾는 실재는 한 주체가 얻지 못한다.
한 주체가 놓여진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끝내 '있고 없음'의 2 분법 판단을 떠난다.
더 나아가 '같고 다름' '깨끗함 더러움' ' 좋고 나쁨' '생겨남 멸함'... 등의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나타내기 위해 본 바탕 실재를 공하다고 표현한다.
즉 본래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이를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실재의 공함'과 '실체의 존부문제'는 서로 초점이 다르다.
실체의 존부 문제는 다음을 문제삼는다.
우선 관념영역에서 거짓된 꿈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 내용을 찾는다.
그리고 그런 몽타쥬를 만들어 그 존부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관념영역에서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간에 다음의 관계를 갖는다.
만일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본 바탕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될 때도 그 내용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그 실재는 얻지 못한다. [불가득, 공]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는 입장은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가 없다는 입장도 포함하게 된다.
즉 실체가 있다는 입장은 실재가 공하다는 입장과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고 할 때는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는 없다는 내용도 함께 포함하게 된다.
그래서 통상 이들을 함께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본래 초점을 삼는 측면이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즉 공함은 본 바탕 실재가 무엇인가를 문제삼는 측면이다.
그리고 무아 무자성의 논의는 현실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의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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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길 때의 문제점
현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배경사정을 다양하게 살폈다.
그런데 여하튼 다양한 경로로 이렇게 잘못된 망상분별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분별로 인해 현실을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그러면 그 바탕에서 매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행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그런 업을 어쩔 도리 없이 행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매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행하는 것을 중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첫 원인단계에서부터 이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파악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현실 내용 하나하나가 꿈과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어떤 사정 때문에 그처럼 망집을 갖게끔 되는가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런 내용은 잘못된 망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 그런 망집을 갖게 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 망집을 일으키면 쉽게 벗어나오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오히려 이를 잘 벗어나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중생도 또 잘 벗어나오도록 이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실내용이 마음 내용임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님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대상이 아님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한편, 망집이 어떤 형태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도 잘 파악해야 한다.
먼저 망집은 매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근본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매생 출발시 망집이 매듭지어 지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태로 생에 임하게끔 되는가도 잘 파악해야 한다. [3능변]
그리고 그런 망집을 바탕할 때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업을 행하게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가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과 망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 주체는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이전 생과는 끊겨 단락된다.
그런 가운데 근본정신이 또 다른 생명형태로 옮겨가게 된다.
그래서 이후 같은 형태로 무한히 생사를 반복해 가게 된다[분단생사]
따라서 그렇게 생사현실에 임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이후 어떤 방안으로 이런 망집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한편, 경전에서는 이런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나 참된 실체의 유무를 살핀다.
그리고 현실을 본 바탕과 대조해 살피게 된다.
그래야 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현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처럼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를 자세히 살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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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08-k0001-272.html
임시2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2/01/2565-01-04-k0079-040.html
● 꿈처럼 실답지 않은 현실과 수행의 필요성
- 현실을 실답게 여기는 정도와 비례하는 수행의 필요성
○ 생사고통 해결을 위한 생사현실 정체의 올바른 이해 필요성
경전과 논서를 통해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이 반복해 강조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이 실답다거나 실답지 않음이 왜 문제되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의 충족을 위한 논의는 아니다.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사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려면,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자신이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시 자비심에 바탕해 다른 중생의 생사고통을 해결하기를 서원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과 입장을 같이해서 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즉 본래 생멸이나 생사는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 이해하고 이에 바탕해 수행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가정적으로 살펴보자.
○ 생사고통의 실존
만일 생사현실 안에 생사고통이 전혀 없다고 하자.
또는 있더라도 아주 잠깐 동안만 잠시 겪고 그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굳이 생사현실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노력이 필요없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이런 경우 생사현실이 실답다거나 실답지 않음을 논의할 실익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생사현실에는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대표적으로 생-노-병-사-원증회고-애별리고-구부득고-원증회고와 같은 생사고통을 겪는다.(8고)
그외에도 생사현실에는 가난과 질병, 사고로 고통을 당하는 현실이 있다.
더 나아가 범죄로 피해받거나, 감옥에 갇혀 고통을 당하는 현실이 있다.
그외 신분 등 여러 사유로 속박을 당하는 현실이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아 평안함을 누리는 경우에는 이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잘못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사고통은 생사현실에 처한 이상 피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생사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할 필요가 있다.
○ 생사고통의 발생과정의 이해와 해결 방안
-우연론, 필연론, 조물주론 및 연기관계와 수행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다음 문제를 살펴보자.
생사고통이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려고 해도 어떤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단지 앞으로 우연히 생사고통을 겪지 않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또 생사고통에 이미 처한 상태에서도 그것이 다시 우연히 없어지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그외 생사고통을 해결할 다른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한편, 생사고통이 신과 같은 절대자에 의해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단지 앞으로 신의 자비나 은총으로 생사고통을 겪지 않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또 생사고통에 이미 처한 상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의 자비나 은총만을 기대할 뿐이다.
그리고 그외 생사고통을 해결할 다른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한편, 생사고통이 숙명적으로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고통을 피할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단지 숙명적으로 발생할 일에 생사고통이 없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또 생사고통에 이미 처한 상태에서도 그것을 숙명적으로 겪을 도리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외 생사고통을 해결할 다른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수행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놓고 살펴보기로 하자.
어떤 이가 산을 올라갔다고 하자.
그런데 멀리 반짝이는 것이 보여 그것을 금으로 알았다고 하자. [망집]
그리고 금을 주으려고 그 앞으로 걸어나갔다고 하자. [ 업]
그러다가 낭떨어지에 떨어졌다. 그래서 허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평생 장애상태로 고통을 받고 지내게 되었다고 하자. [ 고통 ]
이런 하나의 사고를 하나 놓고 생각해보자.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해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갑자기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즉 자신이 침대에서 누어 잤다.
그러나 일어나 보니 홀연히 낭떨어지에 떨어져 있고, 허리가 부러진 상태가 된 것이 아니다.
또는 신에 의해 자신이 어쩔 도리 없이 발생한 일도 아니다.
즉 자신이 침대에서 누어 잤다.
그런데 신이 갑자기 자신을 갑자기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낭떨어지에 자신을 집어 던졌다.
그래서 갑자기 허리가 부러진 상태가 된 것이 아니다.
또는 숙명에 의해 어쩔 도리 없이 발생한 일도 아니다.
즉 자신이 침대에서 누어 잤다.
그런데 자신이 어쩔 도리 없이 숙명적으로 산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숙명적으로 낭떨어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숙명적으로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상태는 망집 - 업 - 고통의 관계로 발생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형태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일체 생사고통도 이와 성격이 같다.
생사고통은 망집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연기관계로 발생한다. (혹-업-고)
그러나 이 관계는 의존해 일어나는 연기관계일 뿐이며, 숙명론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이 각 내용은 망집에 의한 것이며, 절대적으로 결정된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원인 결과 관계를 숙명적 기계적 인과론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간단히 기계적 인과론과 연기관계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사현실에서 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A + B -> C 로 표시해보자.
이는 예를 들어 종이A에 불B을 붙이니-> 이로 인해 연기C가 발생한다는 내용과 같다.
이 관계는 다시 다음을 의미한다.
일정한 상황에서 종이A나 불B이 없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연기C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 종이A나 불B이 있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연기C가 나타났다.
이런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어떤 C는 이런 관계로 나타남을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연기관계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게 된다.
이는 결국 이들 A + B -> C 사이가 다음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
따라서 생사현실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한편 생사현실은 절대적 신의 뜻에 의한 것도 아니라고 하게 된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A + B 가 위 관계가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C가 나타난다.
그런 경우 절대적 신에 의해 매번 C가 달리 나타나거나 달리 나타나지는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세속제로 이런 연기관계를 파악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관계는 그 자체로 무상-고-무아,무자성-열반-공을 함께 제시하는 내용이 된다.
이들 내용이 모두 A + B -> C 라는 표현에 이미 표현되어 있다.
우선, C 라는 결과는 A + B 라는 원인에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발생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관계를 떠나면 또 얻지 못하고 사라짐도 제시한다. (=>무상)
한편,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가 그런 C에 집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위 조건과 결과의 성취여부에 따라 고통을 받게 된다. (=> 고)
한편 위 관계는 그런 조건에서 그처럼 C가 나타난 것임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는 그런 C가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같은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제시한다.
즉, 이는 그런 C가 그런 조건과 관계없이 늘 일정하게 고정된 참된 진짜의 실체가 아님도 함께 제시한다. (=> 무아, 무자성)
또한 위 관계는 그런 C 가 그런 관계를 떠나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임도 함께 제시한다. (불가득, 공)
그런데 여기서 C 가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라고 하자.
이 경우 본 바탕은 본래 그런 C 는 얻을 수 없는 상태임도 제시한다. (=> 생사 즉 열반 )
즉 생사현실에서 각 내용이 이런 연기의 관계를 통해 나타남을 파악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세속제를 바탕으로 제일의제(승의제-본바탕과 관련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는 본 상태가 이러하기에 생사현실이 그처럼 전개된다는 사정도 함께 제시한다.
즉, 참된 진짜인 실체가 없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를 얻지 못하여 공하다.
=> 그런데 바로 그런 상태이기에 생사현실에서 각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
이런 관계를 나타낸다.
즉, 본 바탕에서는 A 나 B 나 C... 등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그런 형태로 실답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무유정법)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근본 어리석음(무명)에 바탕해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바탕해 생사현실에서 각 부분을 A 나 B 나 C라고 이해하고 상을 취하게 된다. ( 상을 취함)
그런 상태에서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사이에 A + B -> C 의 관계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는 각 내용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기관계를 통해 나타난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이를 바탕으로 본 바탕이 공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연기 즉 공이라는 관계식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런데 A + B -> C 의 연기관계를 우연론이나, 숙명론적 기계론 등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위 내용을 망집에 바탕해 다음과 같이 잘못 이해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상을 취한다. (망집)
그러면 일부분을 A 나 B 나 C라고 이해하고 일정 부분을 취하게 된다. ( 상을 취함)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생사현실에서 A + B -> C 의 관계를 현실에서 경험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다시 그 상황에서 경험하지 않은 가능성을 고려한다.
그래서 A + B -> 다음에는 1,2,3,4,5,6,7,8,9,0,A,B,C,D... 등이 나타날 여러 가능성이 있다고 억측한다.
그리고 다음처럼 해석한다.
그 상황에서는 C 가 나타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이 C 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원인없이 또는 우연히 나타난 것 뿐이라고 이해한다. [무인론, 우연론]
한편 신의 뜻이라는 입장은 다음 입장이다.
A + B -> 다음에는 1,2,3,4,5,6,7,8,9,0,A,B,C,D... 등이 나타날 여러 가능성이 있다고 억측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그 가운데 C 가 나타난 것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한편 기계적 인과론의 입장은 다음 입장이다.
A + B -> 다음에는 1,2,3,4,5,6,7,8,9,0,A,B,C,D... 등이 나타날 여러 가능성이 없다고 억측한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는 오로지 C 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C 가 그렇게 인과관계에 절대적으로 묶여 결정된 가운데 나타났다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각 경우 가능성으로 나열한 내용은 본래 그 상황에서는 얻지 못한 내용이다.
그런데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내용에 대해 있다 없다 등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쳐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면 위와 같이 우연론이나 필연론을 취해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뜻에 의한다는 입장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신의 정체나 존재 개입여부를 스스로 확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망집에 바탕해 그런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 주체 입장에서는 C 의 발생은 결국 우연론의 입장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런 입장은 모두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현실이 나타나는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된다.
또 그런 경우는 그런 잘못된 망집 때문에 이후 잘못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만일 현실 사정이 정말 그가 이해한 바와 같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생사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어떤 수행을 하든 않든, 아무런 차이나 효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수행을 하거나 않는 일 마저도 자신의 뜻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생사현실의 정체나 발생 관계를 파악하는 일 역시 자신의 뜻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C 등이 매 경우마다 우연적으로 또는 신의 뜻에 의해 또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C가 발생하는 관계를 위처럼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입장에서는 스스로 행할 바가 별로 없다고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그리고 단지 소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생사현실에서 대부분을 자신의 뜻에 의해 행한다.
예를 들어 차를 운전하거나 거리를 걷거나 식사하고 일하는 대부분을 자신의 뜻에 의해 행한다.
다만, 어떤 중요한 C가 현실에서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망집에 바탕해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해 대하려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C가 우연히 또는 신에 의해 또는 운명적으로 발생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임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런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실 내용이 나타나는 관계도 올바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생사현실의 기본 사정과 발생과정을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생사고통 해결방안의 순서 - 원인의 예방과 사후 대처 방안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해결을 위한 방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이미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진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이 상태에서도 사후적으로 치료를 하고 고통을 벗어날 수도 있다.
한편, 그런 사고를 당하기 전에 미리 주의하고 예방하는 노력으로 고통을 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해결방안으로는 예방방안과 사후대처방안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예방방안이나 사후대처방안이나 모두 행하기 힘들다.
그래서 먼저 이 두 방안 가운데 어떤 것이 효과적인가를 먼저 생각해보기로 하자.
어떤 경우는 사후대처방안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예방을 하는데 드는 노력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두 경우 모두 동등하게 쉬울 수도 있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좀 더 쉬운 방안으로 생사고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방을 통해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훨씬 쉽다.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 떨어져 겪는 생사고통을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 상태에서 치료를 통해 원 상태로 회복하려 한다고 하자.
그 노력은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미리 산의 상황을 잘 판단한다.
그리고 낭떨어지를 향해 가는 일을 미리 중단한다고 하자.
또는 산을 올라갈 때 좀 더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예방 노력은 위 사후 대처 방안보다는 훨씬 쉽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성격이 대부분 위와 같다.
그래서 미리 원인단계에서 생사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쉽다.
○ 생사고통 해결방안의 순서 - 인천교적 수행 - 계의 덕목 - 신견 등 망집제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생사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사고통은 망집 - 업을 원인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업과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은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론상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사현실 상황은 사정이 다르다.
망집의 제거는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판단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각 주체는 이미 기본적으로 뿌리깊은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에 임하는 상태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이론처럼 쉽지 않다.
비유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차를 올바로 잘 운전하려면, 차에 대해 상세한 설명서를 잘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하자.
그런데 현재 적당히 운전을 배우고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는 중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도로나 운전대에서 눈을 떼면 곧바로 사고가 날 상황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도로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물론 사고를 완벽하게 예방하려면 근본적으로는 설명서를 잘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일단, 기본적으로 사고를 발생시킬 행위만 중단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일단 사고에서 안전한 상태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여유를 가진 후 시간을 내 설명서를 읽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상황이 이와 같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험한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받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려면 정려나 반야지혜를 닦는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그처럼 험한 산악지대에서 훈련을 받는 가운데 이를 행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그로 인해 더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끔 된다.
그래서 우선 그 상태에서는 훈련을 잘 성취해 일단 안전한 상태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후 기본적으로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것이 더 낫다.
일반적으로 생사현실은 기본적으로 뿌리깊은 망집에 바탕해 처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생사현실에서 번뇌 망집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쉼없이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야만 하는 상태에 묶여 있게 된다.
그런데 망집을 제거하려면, 생사현실에서 정려 수행을 드는 수행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반야지혜를 통해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본 바탕 실재가 공함을 잘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음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망집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원칙적으로 망집을 제거하기 힘들다.
즉, 이런 수행은 생사현실에 묶인 일반적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당장 행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망집을 제거하려면 우선 당장은 3 악도의 생사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사고통을 발생시키는 업부터 중단하고 제거하는 것이 낫다.
이런 경우에는 우선 생사현실이 무상함을 잘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 생사현실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한편, 3악도에서 벗어나려면, 생사와 관련해 기본적으로 단멸관을 제거해야 한다.
단멸관이란, 생사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자신과 관련된 것은 모두 끝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따라서 이를 제거하고, 생사전후에 걸쳐 인과관계를 넓고 길고 깊게 관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에 바탕해 인천교적인 기본적 가르침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10 선법과 같은 기본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쌓여 있는 업의 장애를 함께 잘 제거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생사현실에서 3 악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과 하늘세계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인천교적 가르침]
그 이후 점차 신견 등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계의 수행 덕목을 잘 성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런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이후 지혜자량을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게 된다.
○ 순서를 바꾸어 계의 성취보다 망집을 먼저 제거하려는 경우의 부작용
한편, 계의 덕목이 원만히 성취되지 않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 계기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먼저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바탕으로 오히려 생사현실에서 잘못된 자세를 취하기 쉽다. [악취공견]
생사현실의 본 바탕은 공하다.
생사현실은 이런 바탕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생사현실은 마치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은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자칫 이런 가르침을 통해 실재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사현실도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잘못 극단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런 경우는 무의 극단에 치우쳐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런 경우 생사현실이 사정이 그렇기에 생사고통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한 것처럼 잘못 이해한다.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하다.
생사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사정이 그러니 이런들 어떠한가 저런들 어떠한가.
이런 형태로 생사현실을 잘못 이해하고 임하게 되기 쉽다.
한편, 이런 잘못된 생각에 바탕해서 다음처럼 잘못 자세를 취하게끔 된다.
즉 생사현실에서 아무런 수행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긴다.
또 아무렇게 임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긴다.
또 어떤 행위를 이전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심지어 악행을 심하게 한다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는 평소 자신이 본래 행하던 자세를 고집하고 현실에 임하기 쉽다.
본래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따라서 이들을 실답다고 여기며 망집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생사현실이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이 생사고통을 극복하는 가장 원칙적 방안이 된다.
그리고 이론상 생사고통을 당면한 상태에서도 이런 원칙적인 방안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앞과 같이 악취공견에 바탕해 자세를 잘못 취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정작 위 원칙적인 방안으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현실에서 수행을 할 때도 약간의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생사고통을 당면한 상황에서조차도 원칙적인 방안만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수행도 위와 같은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마찬가지로 잘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부터 이를 통해 잘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정작 수행의 어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수행은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리고 오히려 망집에 바탕해 종전의 자세만 계속 고집하고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이는 본래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자세가 오히려 당장 편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을 행할 때 겪는 어려움을 이를 통해 극복하지 못해서이다.
다만, 그런 상태에서 생사현실이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 내용은 제멋대로 행하는 데에 명분만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망집에 바탕해 종전에 행하던 자세대로 계속 행해 나간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그는 더 심한 생사고통에 처하게 된다.
수행은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사고통을 당면해 극복하는 것은 훨씬 이보다 힘들다.
그런데 수행의 작은 어려움조차도 원칙적인 방안으로 극복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자.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에 처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훨씬 심한 이들 생사고통을 그런 방안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일반 경우보다 더 심한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
결국, 생사현실에서 계의 수행덕목이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자.
이런 상태에서 원칙적인 방안을 먼저 잘못 취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악취공견을 일으켜 오히려 부작용을 발생시키게 된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선 다음 예방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가장 기본적으로는 인천교적인 10 선법과 같은 기초적 가르침부터 잘 실천해야 한다.
즉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업을 일단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바탕으로 10 선업과 같은 기본적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당장 3 악도의 생사고통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선 인간세계와 하늘세계를 오가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이런 기초적 수행을 통해 3 악도의 생사고통에서 멀여졌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완전히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설령 욕계를 벗어나 색계나 무색계에 처한다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의 일체는 모두 무상하고, 변천하는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태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그 상태로만 머문다고 하자.
그러면 끝내 다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행고]
그래서 위 상태에 일단 이른 후에는 다시 보다 근본적인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즉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우선 계의 덕목의 성취가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즉, 무조건 망집에 바탕한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간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이런 수행을 통해 일단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업의 장애가 제거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이들 수행은 복덕 자량을 쌓게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면 이후 지혜 자량을 닦아 성취할 바탕이 마련된다.
이는 마치 은행 통장과 같다.
처음에 빚을 많이 져서 부채가 많은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계속 꾸준히 노력해 소득을 얻어 예금을 해나가야 한다.
그려면 점차 부채가 감소되어 나중에는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는 잔액 자산이 점점 증가하게 된다.
수행을 통해 처음 업장이 제거되고 이후에는 복덕자량이 쌓이는 것도 이와 같다.
그래서 계의 덕목을 잘 성취하여 복덕자량이 원만히 성취되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우 정려 수행과 지혜를 닦는 수행을 성취할 바탕이 마련된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지혜 자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본 바탕은 차별없이 공함을 잘 관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보다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견 등 망집 번뇌를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그런 바탕에서 이후 다른 중생도 원만하게 잘 제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도 이런 순서에 따라 수행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생사를 벗어날 수행방안은 이런 차례로 제시된다.
○ 생사현실을 실답게 여기는 망집의 제거와 수행
생사현실의 본 바탕은 차별없이 공하다.
본래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이 나타난다.
따라서 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이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 생사고통을 잘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는 이런 생사현실의 정체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이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생사고통의 문제가 없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이 실답다거나 실답지 않음을 살필 실익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를 바탕으로 생사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실답지 않다는 사정만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도 마찬가지다.
실재에도 참된 진짜로서 실체가 없다.
실재도 무아 무자성이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도 역시 실답지 않다.
또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도 실답지 않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체만 놓고 보면 이들 모두 다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이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는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과 생사고통의 정체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과 생사현실이 꿈과 달리 실다움을 확인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역시 생사고통은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이 실다운 경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경우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역시 생사고통은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이 실답지 '않은' 경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역시 살펴야 한다.
생사현실이 실답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그 생사고통이 좀 더 문제가 심할 것이다.
그래서 그 예방과 사후 대처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발생한 생사고통도 방편을 잘 취해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생사고통도 더 큰 생사고통을 가져오지 않도록 잘 대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생사고통을 발생시키는 업을 더 잘 중단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생사고통을 발생되는 관계를 살폈다.
생사고통이 발생되는 데에는 [혹-업-고]의 관계가 있다.
즉, 분별 번뇌 집착 =>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함 => 생사고통
그런데 처음 업을 행하는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에 바탕한 업도 잘못된 방향으로 행하게끔 된다.
그래서 욕계현실에서 서로 가해 피해 관계가 중첩되게 된다.
그러면 이후 그 주체가 이로 인해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들 각 원인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을 올바른 내용으로 잘 대체해 넣어야 한다.
즉 올바른 진리의 깨달음과 그에 바탕한 올바른 가치판단
=> 집착을 제거하고 올바른 서원을 실천하는 올바른 수행
이런 형태로 각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 실답지 않음의 이해와 생사고통의 해결문제
그런데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생사현실에서 이를 실답게 잘못 여긴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생사현실 안에서 겪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고통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
먼저, 당면한 생사고통을 극복함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생사고통을 발생시키는 업을 중단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시에도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생사현실에서 다른 생명이 생사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는 과정에서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이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요구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어떤 사정으로 생사현실을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한편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다시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방치해도 무방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수행 과정에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 유무 양쪽의 극단을 취하는 각 입장의 문제점을 잘 살펴야 한다.
○ 꿈과 생사현실의 차이와 수행문제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이 사실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과정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현실이 꿈과 완전히 같다고 하자.
그렇다면, 생사현실안의 생사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별다른 수행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다 무방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사현실은 정작 꿈은 아니다.
따라서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대부분 대단히 실답게 여긴다.
따라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또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다 무방하다고 할 수 없다.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정작 꿈과 다른 점이 많다.
그래서 생사현실안의 생사고통 문제를 꿈처럼 대처해 해결할 수는 없다.
여기서 그 사정을 꿈의 경우와 대조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 실답지 않음의 이해문제
예를 들어 꿈에서 심한 악몽과 고통을 겪어 문제라고 하자.
그러나 그가 꿈을 깨어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곧 침대가 놓인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후 현실과 꿈을 서로 대조하며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곧 꿈의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사현실이 꿈과 완전히 같다면, 이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현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현실은 한 주체가 관계하여 그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 주체가 이 상태에서 벗어나 본 바탕 실재를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실재 내용을 일체 얻지 못하게 된다.
한 주체는 오직 마음이 관계해 얻어내는 내용만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과는 상황이 다르다.
즉 본 바탕 실재 내용을 얻어 생사현실과 대조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단지 실재는 얻지 못하고 생사현실은 한 주체가 얻는다는 차이만 있다.
○ 묶임에서 벗어남(해탈)의 문제
한편, 꿈은, 주위가 시끄럽거나, 누군가 흔들어 쉽게 깰 수 있었다.
또 스스로 일어날 때가 되어 깨어나면 곧바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생사현실은 꿈과는 이와 상황이 다르다.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생사현실 묶임에서 곧바로 벗어나기 힘들다.
처음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사정이 있다. [근본식과 3능변]
그런데 그 배경사정은 여전히 그대로다.
한편, 생사현실에 임해 무량겁 동안 업을 행하여 업의 장애가 쌓여 있다고 하자.
이것이 제거되지 않은 경우 그 상태로 3 악도의 생사과정에 반복해 묶이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생사현실은 죽음으로 인해 곧바로 벗어나기 곤란하다.
○ 생사 즉 열반의 이해문제
한편, 꿈을 깨어 그것은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정작 꿈을 꾸는 동안 다시 그런 사정을 모른다고 하자.
즉, 꿈을 깨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시 꿈을 꾸게 되면 이를 잊어버리고 또 다시 꿈에 매몰당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을 꿀 때마다 문제를 매번 반복해 만나게 된다.
그런데 노력하여 꿈 안에서 그것이 꿈임을 자각하면서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하자.
물론 꿈 안에서 그것이 꿈임을 알며 꿈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경험도 종종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꿈에서 곧바로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경우는 결국 침대에 깬 상태로 꿈을 대하는 상황과 비슷하게 된다.
그런 경우 꿈 속에서 고통을 겪더라도, 꿈에 불과함을 이해하고 평안히 임할 수 있다.
생사현실과 본 바탕 실재의 관계도 이와 같다.
생사현실에서는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본 바탕 실재에서는 본래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또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요청하지도 않는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재는 실재를 앎도 얻을 수 없다.
실재가 그런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실재 영역에서가 아니다.
따라서 생사현실에서 벗어나 곧바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는 꿈과는 다른 점이다.
오히려 실재의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은 생사현실 안에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 실재의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실재의 공함을 잘 깨달아 이해하는 것이 요구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이 공함을 이해한다고 하자.
또한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이 자신이 아님을 이해했다고 하자. [유신견의 제거]
그래서 생사현실안에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것만으로 곧바로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기는 곤란하다.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에 들어와 임하게 된 배경사정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 구생기 신견 ]
생사현실에 들어와 생사현실을 대하게 되는 데에는 일정한 배경사정이 있다. [근본식과 3능변]
그런 바탕에서 생을 출발한다.
그리고 그 상태는 이후 한 생 동안 계속 이어진다.
이는 꿈 안에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정을 알면서 계속 꿈을 꾸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이를 통해 생사현실 안에서 당면한 생사고통을 잘 극복해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수행도 그런 바탕에서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다.
○ 생사현실 안의 복덕 자량의 구비 문제
한편, 꿈에서 꿈임을 자각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꿈 내용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매번 축축한 곳에서 구부려 매번 잔다고 하자.
이처럼 잠을 자는 상황이 나빠 매번 꿈꿀때마다 반복해 악몽을 꾼다고 하자.
이런 경우 꿈에서 꿈임을 알아도 원치않는 불쾌한 꿈을 반복해 꿀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꿈 내용은 꿈 내용대로 그것이 좋은 형태가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시 잠 자는 자세를 개선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생사현실도 이와 사정이 같다.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 실재가 공함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만으로 생사현실 내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생사현실 내용은 생사현실에서 업장을 제거하고 복덕을 쌓는 수행으로서 좋아지게 된다.
○ 완전한 해탈 열반의 문제
꿈을 자각하면서 꾸더라도 꿈 내용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잠은 자지만 꿈은 꾸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이론상 아예 잠을 자지 않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하여 해탈과 열반을 얻는 상태는 이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행을 통해 업장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고 하자.
그래서 아라한의 상태가 되어 생사현실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비유하면, 꿈에서 깨어난 후 다시는 자지 않고 꿈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상태와 비슷하다.
그러나 생사현실의 경우는 꿈과는 성격이 다른 점이 많다.
따라서 비록 자신이 생사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자.
생사현실 안에는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 하여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는 앞의 내용을 잘 이해한 다음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에 임해야 한다.
즉,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 즉 열반]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두려워하여 생사를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들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통해 중생제도에 필요한 복덕 자량과 지혜 자량을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따라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에서는 이런 점이 차이가 있게 된다.
○ 실답지 않음과 생사고통의 문제
생사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렇지만, 생사현실은 또 꿈은 아니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꿈과 달리 대처해야 하는 사정을 보았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은 이와 다르다.
이런 사정을 우선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히려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여긴다.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여러 사정으로 실답게 여기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을 앞에서 이미 살폈다.
여기서 그 대강만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생사현실에서는 매순간 생생하고 다양한 감각현실을 중첩해 얻게 된다.
2 그리고 이에 대해 명료하게 분별해 내용을 얻는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겹쳐 대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 부분에 곧 그런 관념이 '있다'라고 잘못 분별을 행하게 된다.
또한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 '이다'라고 잘못 분별하게 된다.
또한 그런 관념은 곧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잘못 분별하게 된다.
3 한편, 현실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일부를 실다운 자신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외부세상, 외부대상, 외부물질 및 외부 객관적 실재로 잘못 분별하게 된다.
4 한편 현실에서 감각현실의 각 부분 특성이 달리 파악된다. (자신-인간-생명체-무정물)
또한 생사현실은 다수가, 일정한 시기, 일정한 장소 상황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그리고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조건에 일정한 내용을 결과로 반복해 얻는다.
그래서 이런 차이를 낳게 하는 내용이 별도로 실재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5 한편, 본 바탕 실재가 공하지 않고 현실과 일치하다고 잘못 분별하기도 한다.
또 본 바탕 실재는 현실과 유사하거나 비례한 형태로 있다고 잘못 분별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현실을 그만큼 실다운 것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6 한편, 생사현실을 그런 형태로 얻는 것은 그 안에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뼈대가 있기에 그렇다라고 잘못 분별한다.
그런 경우 현실을 실다운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현실에는 결국 이런 여러 사정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정들로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고 임하게 된다.
이처럼 생사현실의 정체를 사실과 달리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많은 장애를 만나게 된다.
즉 우선 생사고통을 당면할 경우, 이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반응하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생사 고통을 훨씬 더 증폭시키고 확대해 나가기 쉽다.
한편, 생사고통을 예방하기 위한 수행도 잘 행하지 못하게 된다.
당면한 생사현실을 실답게 여긴 가운데 과도하게 집착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도 중단하기 힘들다.
그리고 수행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훨씬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잘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예방하기 힘들게 된다.
현실에서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한 바탕에서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런 사정을 현실과 반대로 가정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누구나 현실의 본 정체를 정확하게 바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현실을 대할 때 그것이 꿈이나 만화처럼 실답지 않음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 내용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별도의 특별한 수행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생사현실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고 하자.
또 집착을 가져도 업을 행하는 것을 쉽게 중단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별도의 특별한 수행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집착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전혀 겪지 않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별도의 특별한 수행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 상태에서 실답지 않음을 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고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별도의 특별한 수행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것이 아주 일시적으로 잠시 겪고 끝날 뿐이라고 하자.
사정이 이렇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별도의 특별한 수행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
따라서 그 정도에 상응해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이 요구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한 바탕에서 이런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래야 각 수행이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 잘 관하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 경우에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각 경우마다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잘 예방할 수 있다.
한편 생사고통을 당면한 상황에서도 이를 잘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 안에서 다른 생명의 생사고통도 잘 해결해나갈 수있게 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 내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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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과정
그런데 우선,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이를 재료로 관념영역에서 잘못된 판단을 일으킨다.
즉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분별을 일으킨 내용을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에 집착한다. [망집]
그리고 이 부분부터가 문제다.
그리고 그처럼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이를 바탕으로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각 주체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따라서 현실을 그처럼 실답게 잘못 여기게 되는 정도와 사정에 비례해 생사고통 해결이 문제된다.
따라서 그 정도에 상응해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이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관념영역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은 번뇌다.
그래서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생사고통은 아니다.
그런데 생사고통은 다음의 일련의 관계로 얻게 된다.
감각현실,관념분별=> 관념영역에서 행하는 잘못된 판단[망상분별] => 현실을 실답게 여기고 집착함[망집]
=>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함 => 생사고통을 겪음
따라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근본원인이 되는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관념영역에서 일으키는 망집 부분'부터를 문제삼게 된다.
현실을 대할 때 각 주체는 세상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즉, 자신이 대하는 것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 자체도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렇지만, 현실을 대단히 생생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현실에 진짜인 실체가 없음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가 공함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을 먼저 살피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분별하는 내용이 우선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이 분별한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감각한 현실 내용도 마찬가지다.
감각한 현실내용이 그대로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또는 감각현실 내용이 적어도 실재와 일치한다고 잘못 여긴다.
또는 적어도 현실과 비례하거나 유사한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이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한편 현실에 상응한 진짜 내용으로서 실체가 따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은 그런 실체에 바탕해 얻는다고 여긴다.
또 그런 사정때문에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망상분별로 인해 현실이 실답다고 여긴다.
그리고 현실 내용에 집착을 일으켜 대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매 순간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또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매 순간 그런 상태로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어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한다고 하자.
우선 그 상황에 처하면 그 주체는 쉽게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받아나간다.
이론상 그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것만으로 고통을 극복해 벗어나기 힘들다.
매 순간 그 고통이 생생하고 느껴지고 실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상분별과 관련해 다음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들 관계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잘못된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우선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내용은 자신과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평소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자신이 이해하는 그런 자신'이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 평소 감각한 현실은 외부세상으로 잘못 여긴다.
또 그 현실은 마음과 별개 외부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곧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현실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즉,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나 함께 대하는 객관적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현실의 본 정체와 사정이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감각현실은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현실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실재는 공하다.
그래서 현실은 마치 꿈과 성격이 같다.
즉, 침대엔 없는 내용인 황금꿈을 꾸는 상태와 같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즉 현실 내용은 본 바탕에서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현실의 그런 조건에서 얻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은 진짜라고 할 실체를 바탕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무아, 무자성]
현실은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매순간 명료하게 분별을 행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정으로 그것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쌓여진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 해탈, 니르바나]
그런데 현실에서는 쉽게 망집 상태를 벗어나기 힘든 사정이 따로 있다.
앞과 같은 기본 내용을 이해해도 사정이 어렵다.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예를 들어 사과를 눈으로 보면 여전히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또 사과를 손으로 두드리면 그때마다 소리를 듣게 된다.
코를 갖다 대면 냄새를 맡는다.
입을 갖다 대면 맛을 느낀다.
손을 대면 촉감을 느낀다.
이들 하나하나 다 실답지 않고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이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은 현실에서 계속 반복해 얻게 된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실다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이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이후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이 여전히 따라 변화하고 움직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과를 책상 위에 놓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모습을 그처럼 계속 일정하게 얻게 된다.
또 자신이 책상에서 사과를 집어 굴린다고 하자.
그런 경우 여전히 사과가 굴러간다.
또 유리에 사과를 던진다고 하자.
그러면 유리가 깨진다.
또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매번 열린다.
또 사과를 집어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역시 영희도 그것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다수가 이런 경험을 비슷하게 반복해 얻게 된다.
즉, 일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내용을 여전히 비슷하게 반복해 얻는다.
현실이 실답지 않다.
그리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한다.
그렇다해도 매번 비슷한 내용을 그처럼 반복해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이 이처럼 유사한 형태로 다수 주체게에게 반복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반복해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되는 그 배경사정까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이런 망집상태에서 쉽게 잘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 사정은 간단히 다음처럼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으로 그린 만화나 전자게임의 화면과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게임 내용은 하나하나 다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일정 화면에서 어떤 부분을 클릭하면 어떤 아이템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또 그 아이템을 가지면 다른 화면에서 어떤 물건과 바꿀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게임화면 내용이 실다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리고 그처럼 반복해 얻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망집을 일으키게끔 되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처음 생을 출발하는 과정에서 망집에 단단히 매이게 되는 과정[3능변]이 있다.
그리고 이 내용 이해를 위해 마음과 관련한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불교내 유식 부분에서 다룬다.
지금은 이를 살피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리 이런 내용을 함께 념두에 잘 두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망집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현실 하나하나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한 단면이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내용을 무량하게 반복해 겹쳐 놓아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이들 내용이 참된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황금을 그린 딱지가 있다고 하자.
이를 수만장 쌓아 놓는다고 그로 인해 딱지가 황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어떤 것의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문제되는 내용의 한 단면을 붙잡고 그 정체를 분명하게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는 실재와 실체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본 바탕 실재에는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그리고 진짜라고 볼 '실체'가 없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면 이와 대비해 현실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아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또한 극심한 생사고통의 상황에서도 이를 평안하게 참고 벗어날 수 있다.
대부분 생사에 묶일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처럼 번뇌 망집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한다.
그런데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장차 생사에 묶일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즉,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할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수행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업의 장애를 해소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 묶임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인다.
예를 들어 꿈에서 영희가 금을 가져갔다고 하자.
철수가 이 꿈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한다고 하자.
그러면 영희를 상대로 금을 반환하라고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또 영희를 볼 때마다 욕을 할 수도 있다.
또 영희를 찾아가 무언가를 들어 던지게도 된다.
꿈 내용이 본래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본래 없던 황금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황금을 잃어버린다고 하자.
그런 경우 본래 부터 황금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래 없던 황금이 그 일로 인해 새삼 다시 없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집착을 일으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후 그에 바탕해 계속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철수는 이후 다양한 문제상황에 직면하게끔 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실답지 못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에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려면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생사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 para-end-return ◧◧◧
[내용보충]
>>>
○ 실답지 않는 내용 가운데 망집 부분이 문제되는 사정
이런 상태가 비닐마술의 상황과 같다.
즉,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 세모난 도너츠나 세모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와 사정이 같다.
여기서 말하는 도너츠는 알고보면 세모 + 동그라미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다른 영역 내용을 접착시킨 상태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세모는 세모다.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처럼 반문하게 된다.
자신이 보는 도너츠가 여기 분명 있지 않은가.
세모가 분명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임하게 된다.
동그라미도 마찬가지다.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다.
그리고 세모는 세모다.
그래서 세모가 있는 영역에 동그라미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도너츠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역시 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다음처럼 반문하게 된다.
자신이 보는 동그라미와 도너츠가 여기 분명히 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인가.
이렇게 반문하며 임하게 된다.
이 도너츠가 본래 각 비닐에는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생사고통을 겪는 현상이 없다고 하자.
세모와 동그라미로 실답지 않은 도너츠를 하나 더 얻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된다.
그것이 곧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리고 이 부분이 생사고통을 얻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물론 그 원인부분만 떼어 놓고 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은 생사고통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이 자체는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일이 문제라고 하자.
그런데 이들이 처음 그 수용소에 끌려가는 기차에 올라탄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큰 고통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 기차에 올라탄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고통을 겪는 것을 피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그런 고통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바로 이 부분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도너츠 비닐마술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어떤 이가 앞의 상황에서 기차에 올라타는 그 부분만 떼놓고 본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여전히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앞 상황도 마찬가지다.
세모와 동그라미를 놓고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도너츠가 각 영역마다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현상은 그것만 놓고 보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것을 문제삼는 사정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어차피 처음 세모나 동그라미나 하나같이 실답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도너츠를 더 하나 있다고 여기면 무슨 문제인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상태에서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대해 집착을 갖게 된다.
또 각 순간마다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매 순간 생각하고 말과 행위를 해나가게 된다.
즉 그런 바탕에서는 매순간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그렇게 되면 이제 그 기본 바탕이 변화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도 사실은 앞 처음 상황과 사정이 같다.
즉, 비닐을 대하며 도너츠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조금 아름다운 도너츠를 얻기 위해 그 바탕에서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면 세모는 세모대로 조금 변화한다.
또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대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 경우도 알고보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첫 상황과 그 성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전제로 한다고 하자.
그러면 도너츠가 조금 다른 형태가 되었다고 여기게 될 뿐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상황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이제 어떤 이가 기차를 올라탔다고 하자.
그리고 끝내 내리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매 순간 각 상황에서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는 행위를 계속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기차가 수용소에 도착해서 기차에서 내리게 된다.
그러면 결국 도망갈 수 없는 3 악도라는 수용소에 갇힌 상태가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그런 고통을 받게 된 원인을 또 잘 파악히지 못하다.
처음 원인이 된 내용과 결과가 모습과 성격이 너무 다르다.
즉, 기차와 수용소는 너무 모습이 다르다. [이숙인-이숙과]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받는 과정도 이와 같다.
앞의 사례에서 처음 기차를 타는 상황에서 못 빠져 나온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이후 단계로 나아갈 수록 점점 빠져 나올기 힘들다.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나 처음 소개한 원칙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앞 단계에서 잘 안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뒷 단계에서 갑자기 잘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지만, 첫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고 낫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사기를 당한다고 하자.
또는 유괴나 감금당하는 사고를 당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사정이 같다.
처음 그런 상황에 진입해 들어가는 첫 단계만 따로 떼어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 중고 핸드폰을 주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한다고 하자.
또는 아저씨가 빵과 공연 초대장을 하나 건네준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각 경우마다 첫 단계부분만 떼어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서 잘 벗어나오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에는 빠져 나오는 것이 더 힘들게 된다.
생사과정에서 3 악도의 생사고통을 겪는 일도 이와 성격이 같다.
일단 3 악도에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다만 아무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 단계에서 적용되는 원칙은 뒷 단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이후 수행노력을 잘 행할 수 있다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를 극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단히 힘들다.
현실적으로 첫 단계에서 잘 안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이후로 갈수록 이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더 힘들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는 정도가 심해진다.
처음에 현실을 대하면서
감각현실도 얻고 관념분별도 일으켜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이후 대부분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이후 그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하게 된다.
그 이후 그렇게 매순간 열심히 업을 행해서
밭에 씨를 뿌리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후 나중에 열매가 맺게 된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본격적인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즉, 3 악도에 들어가 극심하게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를 경전에서 혹-업-고의 관계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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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집의 제거와 수행 필요성
3 악도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고통이 직접 문제되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역시 앞의 원칙적인 방안이 적용된다.
그래서 그 방안으로 이를 직접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원인 단계에서 예방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그 근본을 제거하는 것이 행하기도 쉽다.
그리고 효과도 좋다.
이론상으로만 살피면 원인부분이나, 결과 부분이나 그 기본 상태와 성격은 같다.
그래서 앞 부분에 적용되는 원리는 뒷 부분에서도 원칙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씨 단계에서 씨를 제거하는 것이 훨씬 쉽다.
나중에 그 씨가 큰 나무 형태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는 이를 해결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게 된다.
수용소에 들어가는 상황을 놓고 비유적으로 살펴보자.
수용소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수용소보다는 기차를 타는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다.
또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 이전 이전 단계로 갈수록 그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그 효과도 더 좋다.
다만 이론상 어느 경우나 다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서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또 수행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경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사정이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론처럼 쉽지 않다.
현실에서 묶여서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는 생사현실에서 처하는 3 악도의 상황이 바로 그와 같다.
축생이 옆에 있을 때 산수나 글자를 이해시키려고 한다고 하자.
그래서 독경을 반복해 들려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단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론상은 어느 경우나 그 원리는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첫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런 바탕에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런 내용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얻게 되면 이를 재료로 곧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앞의 비닐마술의 상황과 같이 도너츠가 있다고 보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처럼 일으킨 관념분별이 감각현실 영역에도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 실재 영역에도 그처럼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
또 그것은 또 참답고 실다운 진짜라고 여긴다.
이런 형태로 점점 망집을 증폭시켜 나가게 되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이 실답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에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이를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그 현실사정에서 앞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근본 전도망상 상태를 벗어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망집이 심화된 상태에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그런 입장에서는 매번 현실에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보기에 이 화분은 화분이다.
그리고 이 손은 내 손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문제밍르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몸으로 보는 부분에서
어느날 피가 흐른다고 하자.
또는 그런 상태가 곧 되리라고 예상이 된다고 하자.
그려면 이것을 큰 문제로 보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리고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떤 이가 많은 부분에서 집착을 잘 제거했다고 하자.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망집을 제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서 아상을 제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앞의 노력이 다 무산되게 된다.
어떤 이가 지갑을 하나 뺏어 들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갖고 도망가는 이를 쫒아가서
수용소까지 열심히 쫒아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 방안으로 지갑을 통해 대부분 그 수용소에 끌고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지갑을 들고 가도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자.
또 아들을 끌고 가도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의 손과 발을 자르거나 붙잡고 끌고 가면
거기서부터는 대부분 곤란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경우는 결국 마찬가지가 된다.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 부분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일으키는 모든 집착의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래서 이것이 수행자의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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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09-k1235-001.html
○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는 사정
현실내용이 이처럼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각 주체들이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 나간다.
이를 매 생마다 반복하며 무량하게 받아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
현실은 꿈이나 또는 게임내용이나 만화나 소설과 다르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현실을 왜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위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본 논의가 제시되게 되는 사정이다.
그리고 결국 이 논의는
현실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는데 초점이 있다.
현실 내용은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다.
또 그 바탕은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꿈처럼 일정조건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것임을 제시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리고 이 바탕에서 현실 내용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끊고 중지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반대로 그간 쌓아 놓은 업장을 해소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행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잘 성취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야 함을 제시한다.
이는 망집을 제거하지 못해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받는 것과 차이가 크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위 내용을 핵심으로 논의가 행해지게 된다.
그런데 처음 그 문제상황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즉, 그가 일으킨 망집이 옳거나 옳지 않거나, 삶에 큰 관계가 없다고 하자.
또 그에 집착을 갖고 임하거나 않거나 차이가 없다고 하자.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거나 겪지 않는 차이도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자신 얼굴에 갑자기 온통 검은 점이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의사가 치료가 불가능하고 삶을 정리하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고민이라고 하자.
그런데 경전이나 논서에서
이런 현실은 전도몽상 증상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 뿐이라고 제시한다.
이는 실답지 않다.
그리고 환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는가.
원래는 해결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내용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것만으로 현실 내용이 곧바로 원하는 형태로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한 분별을 실답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현실의 수많은 사건 사고도 바로 이런 사정으로 인해 나타난다.
이는 꿈을 놓고 철수가 시비를 일으키는 상황과 같다.
따라서 『회쟁론』이나 『중론』이나 경전에서 이에 대해 반복제시한다.
이들 내용은 바로 이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처럼 제시해도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처한 중생들이 대부분 생사고통을 그대로 받아나가게 된다.
사정이 이와 같다.
따라서 더욱더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수많은 망상분별 가운데 특히 잘 살펴야 할 주제가 있다.
각 주체는 특히 자신과 자신의 수명, 생명에 강한 집착을 갖는다.
또 자신의 것에 집착을 갖고 임한다.
이들이 그가 갖는 온갖 집착의 근원이다.
그래서 특히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 나가게 된다.
○ 실체의 존부의 논의 사정 - 실답다고 여기는 망집제거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실답지 않다.
이 이해를 위해 다음 내용이 중요하다.
우선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실답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기 쉽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꿈은 실답지 않다고 볼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어떤 이가 꿈을 실답게 여기고 집착한다고 하자.
그러면 가짜에 현혹되어 문제 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 그런 내용인가 아닌가의 판단이 중요하다.
그래서 현실이 꿈과 다른 성격을 갖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현실이 꿈과는 달리 참된 진짜라고 할 내용을 갖는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현실내용이 꿈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꿈과 다른 특성을 갖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꿈이 갖는 특성과는 다른 특성을 먼저 나열한다.
그래서 먼저 이런 참된 진짜에 해당한 특성을 나열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것이 그런 특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꿈과 달리 참된 진짜라고 할 만하하다.
그리고 이런 것이 과연 어딘가에 있는가를 찾아나서게 된다.
또 이를 위해 먼저 관념영역에서 찾고자 하는 진짜를 몽타쥬로 만들어 놓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체'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에 해당한 것이 어딘가에 정말 있는가를 문제삼고 찾아 나서게 된다.
결국 실체가 가져야 할 성품은 꿈과는 다른 특성들이다.
즉, 꿈처럼 어떤 조건에서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또 어느 영역에서는 얻고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 각 영역마다 사정이 달라지는 성품이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이 진짜라고 하자.
그렇다면, 꿈을 깨서 대하는 침대에서도 그 내용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진짜라면, 위와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먼저 진짜라고 하기 위해 요구되는 성품을 먼저 나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몽타쥬를 구성하게 된다.
이는 관념영역에서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후 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어딘가에 있는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결론은 그런 실체는 없다라는 내용이다.[무아, 무자성]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위해 온 시간대와 공간대를 다 찾고 살펴서 확인해야 결론을 얻을 듯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결론을 얻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와 같은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온 시간대에 걸쳐 온 공간대를 다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몽타쥬에 해당하는 것이 없음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결론은 결국 다음 방식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우선 가정적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요구를 충족하는 그런 진짜가 하나라도 있다고 먼저 전제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현실내용은 하나도 얻을 수 없음을 밝혀낸다.
그런데 현실은 또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가정적 항변방식의 논증과 귀류논증을 통해서 그런 결론을 끌어 내게 되는 것이다.
○ 실체가 없음[무아무자성]과 실재의 공함의 관계
이제 감각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물론 일반 입장에서는 이를 문제삼는 경우가 현실에서 드물다.
그렇다해도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면 이 논의가 필요하다.
또 이를 위해서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의 사정을 살펴야 한다.
이런 본 바탕과 대조해 현실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과 같다.
꿈만 대해서는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기 곤란하다.
꿈을 깨서 현실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과 대조해 꿈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꿈이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도 사정이 이와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본다.
또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직전에 본 내용은 일체 하나도 얻지 못한다.
이 경우 전혀 없게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이와 관계없이 본 바탕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할 것인가 문제된다.
또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직전에 본 내용과 비슷한가
아니면 눈을 감고 대한 상태와 오히려 비슷한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실재의 정체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다시 다음을 문제삼게 된다.
즉, 현실내용이 본 바탕에서도 얻어지는가.
따라서 현실내용은 실답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할 것인가.
즉, 침대에서 얻을 수 없는 황금이나 바다꿈과 같은 성격인가.
이런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이런 논의끝에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 비무]
그러나 각 주체는 마음과 관계된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각 주체 입장에서는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2 분법의 유무, 동이, 정 부정 등등의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차별을 세울 수도 없다.
또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본래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하다는 표현을 사용해 나타낸다.
그래서 실재는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본 바탕에는 생사고통이나 생멸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현실에서는 생멸과 생사 등 온갖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본 바탕에서는 이를 문제삼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의 어떤 주체나 어떤 내용도 이런 본 바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본 바탕의 사정이 이와 같다.
현실내용은 일단 그런 본 바탕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도 그런 현실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는 현실 내용이 침대에 누어 꾸는 꿈의 관계와 마찬가지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현실은 그런 의미에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데 기본 전제가 된다.
즉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는 것은 여기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실재가 공함은 무아 무자성과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 무자성은 참된 진짜로서 실체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 바탕의 실재가 무언가를 찾아나선다고 하자.
이 경우 지금 문제삼는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본 바탕의 내용을 앞처럼 공하다고 제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무아 무자성이어서 그런 실체가 없다고 하자.
그러나 이는 본 바탕에 전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본 바탕은 무언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 경우 한 주체로서는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그리고 분별과 언설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실재는 공하다라고 제시하게 된다. [공]
결국 공함을 제시할 때는 실체가 없음도 함께 말하는 것이 된다. [무아, 무자성, 공]
그래서 이 두 내용은 이런 측면에서 서로 관련된다.
그러나 그 각각의 의미를 서로 잘 구분해 파악해야 한다.
2. 일반적입장에서 실체에 대한 망집을 갖는 사정
무아 무자성은 그 자체가 궁금해서 살피는 취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취지가 중요하다.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이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활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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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답지 않음의 의미 혼동
- 망집을 일으키게 한 재료와 망집현상을 혼동하는 문제
- 실답지 않음과 내용의 있고 없음(존부)의 문제
실재나 실체와 관련된 논의과정에서
언어표현으로 주로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전등에서
'현실에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또는 영희나 철수라는 주체도 얻을수 없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이는 그런 현실내용이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기 위한 취지다.
이들 논의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함에 취지가 있다.
이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갖는 다음의 망집을 제거하는데 취지가 있다.
우선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감았다고 뜬다고 하자.
그러면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일정부분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대해 그것이 영희나 철수라고 여긴다고 하자.
또는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그는 그런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분별 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또한 그런 감각현실 일정 부분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예를 들어 그 상황에서 그에게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것은 곧 그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라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또 그런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한편, 생사 생멸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일반적으로 감각현실 영역에서 '무언가 감각현실이 들고 나는 것'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을 보게 된다.
또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한다고 하자.
그러면 감각현실을 얻고 못 얻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또 눈을 계속 뜨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거리를 바라본다고 하자.
그러면 거리에 사람들이 들고 남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화단에서 꽃이 피고 짐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을 그가 '생멸함'이라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생멸함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라고 어떤 이에게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현상을 손으로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감각현실들을 '생멸'이라고 접착시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는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내용이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은 단지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한 재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취해서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즉,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을 취해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아닌' 부분을 그런 부분'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따라서 이런 분별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영희라고 여기며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그 부분이 곧 영희다. 이렇게 여기면서 평소 임한다고 하자.
그런 자세가 망집상태다.
한편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도 마찬가지다.
실재 영역에서는 자신이 감각하거나, 분별한 그런 현실내용을 얻을 수 없다.
현실 내용은 한 주체의 마음이 관여해 그의 마음이 얻어낸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삼는 본 바탕은 이런 주체나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그런데 한 주체는 오직 그의 마음이 관계해 마음이 얻어내는 내용만 얻게 된다.
그래서 실재는 그런 주체 입장에서는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재를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앞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분별을 행하기 쉽다.
즉,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따라서 이런 분별 역시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처럼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자신이 일으킨 분별 내용을 실답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현실 내용은 꿈과 달리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런 꿈 내용은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한다.
그래서 꿈이 실답지 않음은 잘 이해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래서 일정한 분별은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현실은 꿈과 달리,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침대에 없는 바다나 황금을 꿈에서 꾼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꿈과는 달리 실다운 것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경우 그는 현실 내용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는 이후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예방하려면 미리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 내용을 밝히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꿈 밖 현실 영역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즉 꿈을 꾼 침대가 놓인 현실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 내용과 꿈을 서로 대조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꿈에서 본 황금은 (다른 영역-침대가 있는 현실)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밝힐 때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생생하게 명료하게 얻는다.
현실에서 우선, 일정한 상황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즉 '저 부분은 영희다' '이 부분은 자신이다' 등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또 '무언가가 생겨나고 멸한다' 등으로 분별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다음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우선 그런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현실 상황에서 그런 관념분별은 명료하게 얻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 경우 이 상황에서 그 관념분별이 1 차적으로 <그 감각현실 부분에>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
한편,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된다.
더 나아가 이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 실체>가 있는가 주된 논의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들 문제가 곧 그 관념분별이 실다운 것인가의 논의와 관련된다.
그래서 이들 논의는 위 부분을 밝히는데 초점이 있다.
또 이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현실 상황에서 감각현실 내용을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는 그런 부분이 아니다.
이 경우 그 감각내용이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된다.
또 앞과 반대로 그 감각내용이 분별 내용 안에 있다고 할 것인가도 문제된다.
더 나아가 이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 실체가 있는가 주된 논의 초점이 된다.
그리고 이들 문제가 곧 그 각 내용이 실다운 것인가를 살피는데 필요한 논의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통해 다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각 내용은 우선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여타 다른 영역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관념은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또 관념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다.
한편, 감각현실은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한편, 각 감각현실은 또 다른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시각 내용은 청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반대로 청각 내용은 시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서로간에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또 각 감각현실은 관념영역에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들은 모두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각 내용들은 단지 화합을 통해 일정 영역에서 얻게 된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 각 현실 내용은 침대에서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이들 각 현실 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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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유, 불가득이란 표현의 의미에 대한 혼동 문제
현실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들 현실 내용을 실답게 여긴다고 하자.
그러나 이는 잘못된 망상 분별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이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망상분별은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런 망상분별의 제거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경전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하기 위해 다음처럼 표현하게 된다.
그런 현실 내용은 본래 있는 바가 없다. 그리고 본래 얻을 수 없다. [무소유, 불가득]
이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음을 나타낸다. [무소유, 무아, 무자성]
또한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 그런 내용들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불가득, 공]
그래서 이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음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예를 들어 생사현실에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이는 그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해야 함을 나타낸다.
- 망집 상태에서 실답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에 대해 일으키는 오해
그런데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 표현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하기 쉽다.
즉,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우선 생멸을 다음처럼 이해한다.
어떤 이가 이미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그는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을 먼저 접착시켜 이해하는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가 일정부분을 영희로 여기고 대하고 있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일정부분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이처럼 그는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이라고 여기는 상태다.
또 생멸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감각현실 영역에서 무언가 감각현실이 들고 남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생멸이라는 관념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생멸이라는 표현이 내용도 그런 것으로 접착시켜 잘못 이해한다.
예를 들어 그에게 무엇을 생멸이라고 하는지 가리켜 보라고 하자.
그러면 그는 감각현실에 무엇이 들고 나는 것을 생멸로 가리키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 그런 영희나 그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 표현을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즉, 그가 평소 영희나 생멸 생사로 이해한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가 평소 영희나 생멸 생사로 이해하던 내용이 있다.
즉 앞의 상황에서 그가 영희나 그 생멸 생사가 무엇인가를 가리켜보라고 하자.
그 상황에서 그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는 위 표현은 그 상황에 그런 부분들 일체가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한다.
예를 들어 '본래 생사현실에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말이 감각현실 영역에서 각 내용이 들고 나는 일 자체가 없음을 제시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다시 이를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우선 위 표현은 그런 감각현실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또는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일으켜 얻는 관념내용 자체가 없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또는 그 상황에서 그런 관념 자체를 일으켜 얻으면 안 된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쉽다.
이런 형태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위와 같은 표현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것은 그가 망상분별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모두 접착시켜 그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접착시켜 대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위와 같은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즉 그런 관념내용이 곧 그 감각현실에 들어 있다고 이해하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모두 함께 접착시켜 잘못 이해하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위와 같이 위 표현을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즉 이는 현실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이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재료 자체를 얻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이 감각현실은 이후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가 된다.
한편, 그 상태에서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리고 이렇게 일으킨 관념도 이후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이렇게 얻은 이들 내용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이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 내용을 얻은 후 이들을 재료로 이후 일으키는 망상분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을 꿈과 달리 실답다고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논의의 주된 초점이 된다.
이는 그 각 내용이 실재 등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주된 초점이 된다.
이는 실재와 관련한 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본 바탕 실재에 관한 망상분별도 사정이 같다.
어떤 이가 본 바탕 실재 영역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로 인해 그런 내용이 꿈과 달리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영역는 공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게 된다.
즉 생사나 생멸 등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한 주체는 오직 마음과 관계한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한 주체 입장에서는 문제 삼는 실재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의 모든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남을 뜻한다.
그리고 언어로 끝내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본래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엇이 있다거나, 반대로 무엇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 이 표현의 의미를 다시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기 쉽다.
우선, 이 표현이 본 바탕 #실재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라고 한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또는 현실 내용을 전혀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고 잘못 오해하기 쉽다.
즉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감각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또 어떤 관념내용을 관념영역에서도 전혀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자체적으로 옳지도 않다.
또한, 이는 생사고통의 제거와도 큰 관련이 없다.
즉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데 큰 관련이 없다.
그리고 망집을 제거하는데도 큰 관련이 없다.
이들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은 각기 각 영역에서 현실에서 얻는다.
다만 실재를 포함한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할 뿐이다.
또 그래서 비록 그 내용을 얻지만,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다.
또 그래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을 것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표현은 본래 여러 영역의 내용을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각 경우에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일정한 논의가 이뤄지는 배경과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각 경우마다 논의의 초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논의내용을 살펴야 혼동을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전이나 논서 표현을 대할 때마다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래서 먼저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과 관련한 혼동을 먼저 잘 정리해야 한다.
이 혼동을 정리하기 위해 각 내용을 기호로 구분해 표시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뜬다고 하자.
그리고 그 때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고 하자.
이를 여기서 감각현실●로 표시해보자.
한편 그 상태에서 그는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그 일정부분이 영희라고 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이 부분은 자신의 몸이라고 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그런 내용이 생멸한다고 분별할 수도 있다.
이제 이런 내용을 여기서 관념(분별)내용□으로 표시해보자.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 ● 과 관념내용 □ 을 일으켜 얻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 주체가 그 마음안에서 얻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들 내용과 달리 본 바탕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게 된다.
즉, 그 주체와 관계없이 본래부터 있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를 문제삼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뜨면 일정한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눈을 감으면 그 감각현실 ● 은 사라진다.
그리고 얻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그가 처음 얻는 감각현실 ● 은 아주 사라져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그와 관계없이 무언가가 그대로 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본 바탕 실재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그런 실재를 실재# 표시로 기호로 표시해보기로 하자.
또 어딘가에 그런 각 내용을 얻게하는 참된 진짜 내용 실체가 뼈대로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처럼 문제삼는 참된 진짜 내용 실체를 $ 라고 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내용을 얻게 하는 과정은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자신과 관계없이 있다고 할 본 바탕 실재 #가 있다고 하자.
이제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눈을 뜨면 일정한 감각현실 ● 을 마음에서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다시 그 일정부분은 영희다. 바위다. 이런 식으로 분별하고 관념내용 □ 을 일으켜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 각 영역에 참된 실체 $ 가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 관계를 다음처럼 표시할 수 있게 된다.
본 바탕 실재 # ~ 감각현실 ● ~ 관념내용 □
그런데 현실 상황에서 한 주체는 감각현실● 과 관념내용 □ 을 마음에서 동시에 함께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의 관계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앞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를 살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일정한 감각현실 ● 을 얻고 있다.
그리고 그 일정 부분이 영희 □라고 분별한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에게 영희가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영희가 저기 있다고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가리킨 부분은 결국 그가 얻는 감각현실 ●의 일정 부분이다.
그것은 곧 그가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 □ '이다'라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또 그런 감각현실 ● 부분에 그런 영희 □ 가 ' 있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런 일정한 감각현실 ● 부분이 곧 '그런 분별 내용□ '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한 그런 감각현실 ● 일정 부분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는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을 함께 접착시켜 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즉, 감각현실 ● 에는 그런 관념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이는 감각현실을 얻는 영역에는 그런 관념 □ 을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이들 감각현실과 관념이 마치 꿈과 성격이 같음을 나타내는 취지다.
즉,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내용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그런 꿈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 이나 관념 □이 모두 이런 꿈과 성격이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망집 상태에서 일으키는 혼동의 문제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위 내용을 다음의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우선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감각현실 ●과 그 관념내용 □ 을 접착시켜 대하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는 위 표현이 그런 관념내용 □을 관념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또는 위 표현이 곧 그런 감각현실 ● 도 그 감각영역에서 얻지 못한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위 표현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물론 문제 되는 내용을 위처럼 각기 다른 기호 ● □ 등으로 표시하면 혼동이 적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각 영역의 내용을 모두 언어로 표현해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이 혼동이 훨씬 심하게 된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어떤 언어표현이 이들 가운데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지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이런 사정을 비닐 마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다시 이 부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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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마술이란, 다음과 같다.
세모△ 가 그려진 비닐과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비닐을 겹쳐 놓게 되면
처음 세모△ 가 그려진 비닐에 동그라미○가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또 이로 인해 어느 비닐에도 없는 모양이 보이게 된다.
즉, 안이 세모이고 밖이 동그란 도너츠 모양 ㋰이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세모가 그려진 비닐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 상황에서 그 비닐을 그런 도너츠모양으로 대하게 된다.
즉, 세모 △를 대하면서 그것을 곧 그런 도너츠 ㋰로 잘못 여긴다.
이는 달리말하면,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 동그라미○가 '있다'고 잘못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런데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는 동그라미○가 없다.
한편, 그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 세모△가 '있다'고 잘못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는 세모△는 얻을 수 없다.
세모△ 와 동그라미 ○는 각기 다른 영역에 있는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세모는 그런 도너츠㋰도 아니다.
이 경우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 상황에서 그가 있다고 여기는 내용은 사실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다.
즉, 안이 세모인 도너츠모양㋰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분별이 바로 망상분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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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 상황에서 어떤 이가 다음 사실을 지적한다고 하자.
즉, △가 그려진 비닐에 ○를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비닐을 겹쳐 대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우선 각 비닐이 각기 다른 영역 내용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비닐에 안이 세모인 도너츠모양㋰이 있다고 여기는 상태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위 내용을 다음처럼 잘못 이해하기 쉽다.
우선 그는 위 표현이 ○ 가 그려진 비닐 영역에서도 ○ 를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한편 그는 세모△ 와 동그라미○를 겹쳐 이를 하나의 내용 ㋰ 으로 대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위 표현이 곧 세모△가 그려진 비닐 영역에서 세모△ 역시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물론 비닐 마술에서 ○ 와 △ 를 그림처럼 구분해 표시하면 혼동은 적을 수 있다.
다만 언어를 통한 논의에서는 이 혼동이 훨씬 심하게 된다.
즉, 논의 과정에서는 문제되는 각 영역의 내용을 모두 언어표현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혼동이 훨씬 심하게 된다.
따라서 각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각 경우마다 잘 구별해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 망집을 일으켜 임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그 망상분별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하자.
우선,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정 부분은 영희다. 자신이다. 또는 나무다, 바위다.
그리고 이들은 생멸, 생사를 겪는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은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또 이를 바탕으로 관념분별도 명료하게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각 내용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또 다른 영역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에서 그처럼 얻지만, 모두 꿈처럼 실답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꿈을 놓고 생각해보자.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그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망상분별의 제거를 위해서 다음이 주된 논의초점이 된다.
즉, 영희나 철수와 같은 주체를 (본 바탕인 실재 영역 및,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또 그 생멸을 (본 바탕인 실재 영역 및,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고자 이 사정을 밝히게 된다.
즉 여기서 논의의 초점은 다음이다.
어떤 내용을 얻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있다고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을 그만큼 실다운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관념을 일으켜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관념이 감각현실 영역에도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또 더 나아가 그 관념은 본 바탕 실재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를 꿈과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시정시키려는 취지인 것이다.
그리고 경전 등에서 다음처럼 그 사정을 나타내게 된다.
생사현실에 본래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생사를 겪는 주체가 없다.
또 그런 현실 내용은 본래 있는 바가 없다 [무소유]
한편,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불가득]
이는 현실 내용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음을 나타낸다. [무소유, 무아, 무자성]
한편, 이들 내용은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 그런 내용들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불가득, 공]
그래서 이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음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는 망상분별을 시정하기 위한 내용이다.
즉 현실 내용이 실답다고 여기는 망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표현은 다음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런 '감각현실' 자체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그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영역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이 때 그 상황에서 일으킨 그런 '분별'내용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는 그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꿈은 실답지 않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다음을 의미한다.
꿈은 생생하게 꾸었다.
그러나 그런 꿈 내용은 침대가 놓여진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꿈을 실답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 실답지 않다는 이 표현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은 또 아니다.
즉, 이는 그런 꿈을 전혀 꾸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침대가 놓인 현실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꿈에서 본 내용은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실 내용에 대해 무소유, 불가득을 제시하는 것도 그 취지가 이와 같다.
그래서 이 표현을 다음 내용들로 오해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는 어떤 이가 그런 상황에서 감각현실이 얻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상황에서 그가 일정한 분별내용을 일으켜 얻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얻는 각 내용의 상호관계를 다음처럼 밝히는 것 뿐이다.
우선 그런 내용을 각 영역에서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각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특히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밝히려는 것이 주된 취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곧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종전에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를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생사의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우선 그런 상태에 처하게 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또 그러려면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려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무량겁에 걸쳐 쌓아 놓은 업장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통해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를 위해 위 내용들의 이해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논의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각 부분에서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이들 내용이 논의되는 이런 기본 배경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떤 논의도 논의 자체는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행한다.
예를 들어 도깨비는 세상에 없음을 논의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이는 관념영역에 관념내용 형태로는 있다.
또 그런 주장 안에 그런 글자나 언어 형태로는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측면에서 논의하는 것이 아님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 관계를 다음처럼 표시할 수 있다.
실재영역 - 감각현실 영역 - 관념 영역
-----------------------------------------------------
본 바탕 실재 #
X ~ 감각현실 ●
X X ~ 관념내용 □
-----------------------------------------------------
이 상황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 경우의 판단
실재영역 - 감각현실 영역 - 관념 영역
-----------------------------------------------------
감각현실 ●=> 감각현실 ● => 감각현실 ●
관념내용 □=> 관념내용 □ => 관념내용 □
-----------------------------------------------------
그리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제시하는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
실재영역 - 감각현실 영역 - 관념 영역
-----------------------------------------------------------------
실재 #는 공하다.[불가득 공]
실재에서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 -<다만 감각현실 ●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는다> -- 그러나 관념영역에 감각현실●은 없다.
실재에서 관념□을 얻지 못한다. --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관념□을 얻지 못한다. -- 다만 <관념내용 □>은 관념영역에서 일으켜 얻는다.
+
한편 이 어느 영역에도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 $는 없다. ( 무소유, 무아. 무자성)
-----------------------------------------------------------------
>>>
● 망집과 망집의 재료의 구분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또는 꿈, 또는 최면상황
이렇게 관계를 놓고 살핀다고 하자.
처음에 자신이 어떤 꿈내용이나 관념분별을 놓고
왜 이것을 실다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방식을 나머지 경우에 모두 같이 적용해가면 된다.
우선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다고 한다.
이는 관념분별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 관념분별도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세상을 대하는 것이 전도망상 증상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위 내용을 가지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관념분별이 이에 관계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관념분별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다음이다.
즉, 그 관념분별을 가지고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경우가 문제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그는 온갖 생각 말 행위를 행하게 된다.
그리고 각 영역을 휘저어 뒤범벅으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이후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 나간다.
여기서 그가 처음 일으킨 망집이 생사고통을 받는 근본 원인이 된다.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
그런 사정으로 이를 문제삼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잘못 이해하면 일체 분별판단을 문제로 여기기 쉽다.
예를 들어 무엇이 무엇때문에 나타난다고 분별할 수도 있다.
또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판단을 문제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수행자는 일반인처럼 이런 내용을 잘 분별판단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좀 더 잘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음까지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음까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문제라고 지적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좋으면 좋은대로 집착한다.
또 나쁘면 나쁜대로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판단을 하면 그것대로 집착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문제된다.
한편, 망집에 바탕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킨다.
그리고 집착을 일으켜 임한다.
그래서 이를 문제로 지적하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탐욕과 분노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좋고 나쁨의 분별까지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이처럼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엉뚱하게 문제없는 부분까지 다 없애야 한다고 임하게 되기 쉽다.
그러면 오히려 그런 자세가 문제가 된다.
무언가가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은 분노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계율을 제정한다.
그런데 무엇이 좋고 좋지 않음에 대해 분별을 아예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계율도 제정하기 곤란하게 된다.
부처님이 생사현실에서 무언가가 좋거나 나쁨을 분별해 계율을 제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분노는 수행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분노는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좋지 않음을 분별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좋지 않은 행에 대해 부처님이 분노로 대하는 것은 또 아니다.
한편, 분노가 문제되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해서, 좋고 나쁨의 분별까지 다 제거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또는 꿈, 또는 최면상황
을 놓고 다시 문제를 살펴보자.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는 관념분별을 일으킨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 자체가 문제라고 한 것이 아니다.
꿈을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꿈을 그 상황에서 생생하게 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꿈을 꾸면 절대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꿈이 실답지 않다.
그러므로 꿈을 실답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꿈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무언가를 행하지 말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제시한다고 하자.
따라서 이에 집착하고 이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행하면 곤란함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제는 꿈을 절대 꾸면 안 되는가 보다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자.
또는 아예 잠을 자지 않으려 한다고 하자.
또는 꿈을 안 꾸기 위해 약을 먹는다고 하자.
또는 아예 꿈을 꾸지 못하도록 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고 하자.
이렇게 나아가면 이제 이것이 또 문제가 된다.
이는 물론 비유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해가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살피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관념분별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장구하게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어느 부분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우선,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분별이 실답다고 이해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또 그런 내용에 집착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 대신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현실에서 수행의 방향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원칙적으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또는 꿈, 또는 최면상황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각 내용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먼저 관념분별을 하나 포착해서 붙든다.
그리고 이 관념분별 자체가 곧 그런 감각현실인가를 살핀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살핀다.
또 이 관념분별을 #실재와의 관계에서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이 관념분별 자체가 곧 실재인가.
실재가 곧 관념분별인가.
그리고 감각현실 자체가 곧 관념분별인가.
관념분별이 곧 감각현실인가.
이렇게 문제를 살피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런 실재나 감각현실이 관념분별과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또 다른 극단이 된다.
그래서 그런 관념분별을 그런 실재나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렇게 살피면 이들 관계는 상당히 모호하고 어중간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곧 그들이 있는 그런 상태 그대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인 줄 알고 이 각 내용을 대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서 이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 치우쳐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각 부분이 다 문제가 된다.
자신이 평소 화분으로 보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또는 평소 자신의 몸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소 그런 부분만 대하면 화분을 생각하고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현실 내용이 바로 앞과 같은 상태다.
이 상황에서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리고 실재영역이나 감각현실 영역도 그렇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 이는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기에 그렇다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잘못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관념을 대하면 곤란하다.
결국 그런 관념은 있지만, '실답지 않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며 대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전도망상 상태가 된다.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대한 내용들에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는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기 힘들게 된다.
또 그런 바탕에서는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도 행해나가기 힘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그런 망집 상태에서 또 다른 문제상황으로 자꾸 나아가게 된다.
번뇌 집착 =>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신구의3업) => 생사고통
이런 형태로 문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앞의 문제가 첫 단계에서 잘 해결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어느 부분에서라도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결국은 근본부분을 원천적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잘 해결안 되면 결국 불완전한 상태가 된다.
● 도너츠 비닐 마술에서 문제되는 부분과 재료의 문제
처음 도너츠 마술 비유나 꿈의 비유를 들었다.
이 비유를 놓고 앞의 문제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닐 도너츠마술의 상황에서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겹쳐 놓는다고 하자.
그러면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런 도너츠가 보인다고 하자.
그러면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도 그 도너츠가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동그라미 그려진 비닐에도 그 도너츠가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따라서 이런 도너츠가 실다운 것이라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러면 그 부분부터가 문제가 된다.
이 비닐 마술에서 제시하는 그 도너츠가
결국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현실의 고통이다.
이 경우 그 도너츠가 문제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각 비닐의 세모나 동그라미까지 문제는 아니다.
이는 그런 도너츠로 인한 문제가 없다.
이제 다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보자.
자신이 무언가를 보았다.
그런데 그 각 부분을 영희나 철수나 또는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현실상황은 원래는 어떤 것인가.
본래 그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 감각현실을 놓고 그런 생각을 일으킨 것뿐이다.
한편, 그 감각현실 영역에는 그런 분별내용을 얻을 수 없다.
반대로 관념분별도 마찬가지다.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었다.
그러나 그 관념분별 안에는 앞의 감각현실은 없다.
원래 상태가 이와 같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 그렇게 얻는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이후 다음 상태로 자꾸 넘어가게 된다.
즉, 그는 그런 감각현실을 대할 경우마다 그런 관념분별을 매번 자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제 그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분별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 아예 그 감각현실은 곧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다'라고 대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경전에서 생사현실에 그런 생멸이나 생사나
그런 주체가 없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이것이 비닐마술의 상황과 사정이 같다.
즉,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 도너츠가 있다고 여기는 현상과 같다.
그런 상태에서는 관념분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서 관념분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관념분별은 곧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부분으로 갖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관념분별은 또 그런 감각현실이다라고 여긴다.
이 문제는 현실에서 다음 문제가 된다.
○ 논리학에서의 망집 부분과 그 재료의 구분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가장 기초가 되는 분야다.
이런 논리학 분야에서 개념을 살피게 된다.
그리고 개념이 갖는 내포와 외연을 살피게 된다.
이는 어떤 개념이 어떤 성품(성질)을 갖는가를 살피는 문제다.
또 그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들을 살피는 문제다.
각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무언가하는 문제는
사전 편찬을 하는 이를 포함해서 대부분 고민한다.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문장에서 '물론'이란 말을 사용한다고 하자.
또 '은,는,이,가, 을' 등을 사용한다고 하자.
이 각 표현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본래 나무의 내포와 외연이 무언가 라는 문제가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관념영역에서 그 나무라는 개념의 내포 외연을 대강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나무는 식물이고 열매가 열리고 잎이 있는 식물이다.
대강 이런 식으로 나무라는 개념의 성품을 나열한다.
그리고 나무의 외연은 참나무, 소나무, 잣나무, 뽕나무.....이런 식으로 나열한다.
즉, 나무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벌려 세운다.
이처럼 한 개념을 살피는 일을 관념 영역에서만 그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관념영역안의 내용들로 별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정수나 유리수 이런 개념을 사용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정수의 내포나 와연을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하튼 사전을 참조하면
정수란, 자연수와 0, 그리고 자연수에 -기호를 붙인 수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이렇게 제시한다.
그리고 정수의 외연에 해당하는 것은 1, 2, 3, .... 0 -1, -2, -3 ...
이런 식으로 나열한다.
이것도 관념영역안의 내용으로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것이 아니다.
이 상태에서 이런 관념 영역 밖에도
그에 해당한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부분부터가 문제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개념이 갖는 내포와 외연을 감각현실 부분에서 찾으려 하기 쉽다.
'나무'가 무언가라고 문제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논리학자가 처음 앞처럼 관념영역 범위에서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는 큰 의미없는 희론이다.
그래서 그 자체만 보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이 사정을 잘 이해하고 대하면 긍정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다.
즉,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각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
경전에서 승의제[언설을 떠난 상태]를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언어 표현을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각 현실 내용의 본 정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 적용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분부터가 문제된다.
즉, 나무가 무언가를 놓고 위와 같이 파악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그런 상태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서 그 관념이 갖는 속성이나 대상들과 그 대상이 갖는 모습이
바로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 그대로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그 감각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분부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를 망집현상이라고 지적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오히려 다음처럼 반문하게 된다.
이는 따지고 살필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옳은 내용이다.
직관적으로 그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문제삼는가 하고 거꾸로 의문을 갖게끔 된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 내용을 하나하나 살필 필요가 있다.
유리수 무리수 허수 등이 감각현실과 어떤 관계인가를 살핀다고 하자.
이는 영희 철수 바위 그리고 자기자신이란 관념을 살필 때와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뒤의 경우에서 이들 경우는 앞의 경우와 다르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각현실에 그에 해당한 내용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망집현상의 하나다.
이 현상이 잘 제거되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로 모든 영역을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 영역까지도 이런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의 존부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실체가 있다고 고집하는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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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13-k0890-047.html
○ 현실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살피는 원칙적인 방안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즉 꿈처럼, 그 내용을 얻기는 하지만, 실다운 것이 아니다.
생사현실안의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은 아무 원인없이 겪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 떨어져 허리가 부러져 고통받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당사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생사고통 문제는 이와 성격이 같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갑자기 우연스럽게 아무 원인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느날 눈을 떴다고 하자.
그런데 아무 원인없이 자신이 홀연히 낭떨어지 위로 옮겨간다.
그리고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데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우선, 한 주체는 현실에서 일정한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집착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소원을 갖고 이를 추구해나간다.
그래서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 욕계에서 다른 주체와 가해와 피해관계가 중첩되어 쌓이게끔 된다.
그리고 이것이 업의 장애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 주체는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반복해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데에는 인과관계가 있다.
이를 간단히 압축하면 다음 관계로 제시할 수 있다.
근본무명(어리석음),망집(망상분별, 번뇌,집착)
=> 이에 바탕해 행하는 업
=> 생사고통
이런 관계가 있다.
이를 혹(번뇌잡염)-업-고의 관계라고 칭한다.
그래서 생사고통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관계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이런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고통을 당장 직접 받는 상태에서도 고통을 잘 극복해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보다는 미리 원인단계에서 이를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예를 들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심한 부상을 당해 고통을 받는 경우를 놓고 살펴보자.
이 경우 그 상태에서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보다는 미리 낭떨어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훨씬 낫다.
또 다른 예를 들어, 화재를 당해 화상을 입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들에서 결과가 발생한 후 극복하는 것과 이를 미리 예방하는 일을
서로 비교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예방하는 것이 훨씬 쉽고 낫다는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생사현실내 생사고통의 해결방안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우선, 생사고통에 처하게 하는 업을 먼저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한편, 그간 쌓아 놓은 업장을 제거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실수로 바닥에 황산을 쏟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태로 있으면 이후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경우 이후 이에 그만한 알칼리액을 붓는다고 하자.
그래서 쏟아 부은 황산을 중화시켜 물로 만든다고 하자.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업의 장애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과거에 행한 업으로 업장이 많이 쌓여 있는 상태라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이후 이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거 업에 대한 참회-서원-실천노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원만히 성취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고통에 처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새로 업의 장애를 일으키는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업을 일으키게 하는 망상분별을 또 제거해야 한다.
어떤 주체는 아무 원인없이 그런 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체가 일정한 업을 행하는 데에는 그가 일정한 분별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별이 잘못된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되면 결국 문제상황에 처하게 된다.
망상분별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업은 중단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인과관계를 넓고 길고 깊게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망집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단멸관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는 자신이 죽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 인과 관찰시 대단히 인과를 좁고 짧고 얕게 관하게 된다.
그러면 우선 잘못된 소원을 추구하게 된다.
또 그 소원을 잘못된 방안으로 추구하게끔 된다.
이 사정은 농사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어 몇십배의 수확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옥수수를 보거나 볍씨를 보면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오직 봄철 기간만 놓고 이 관계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씨를 밭에 뿌려도 그로 인한 열매를 보지 못한다.
이런 경우는 씨를 밭에 뿌리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또 그런 경우 씨를 뿌리기 보다는 이를 당장 식량으로 섭취하는 것이 낫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 얻는 판단은 대부분 정반대의 결론을 얻게 된다.
즉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 얻는 판단과 정반대의 내용들을 취하게끔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그대로 문제를 발생시키게 된다.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이 부분만은 잘 해결해야 한다.
우선, 한 주체는 생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생사를 계속 이어가게 됨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이는 5 살 아이가 노인이 되는 과정만 잘 살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가 5 살 아이였을 때를 생각해보자.
이 때도 일정한 모습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노인이 된 상태에서도 일정한 모습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 두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자.
이들은 전혀 같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5 살 아이때와 현재의 자신을 하나의 자신으로 이어 관념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5 살 아이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긴 내용을 A 라고 표시해보자.
그런데 60 살 노인이 된 때 자신으로 여긴 내용을 B 라고 표시해보자.
이 경우 노인이 될 때 5 살 때의 A 가 이 B 상태로 옮겨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매 순간 이처럼 다른 A, B, C,...D,E,F, 등의 내용을 계속 자신으로 여기며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임하게 되는 배경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여기에는 일정한 정신 구조와 기제가 작용한다.
이것을 단순히 기호로 ♨로 표시하기로 하자.
즉 이런 정신 구조와 기제를 바탕으로 한 주체는 매 순간 일정한 내용을 자신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뜬다고 하자.
그리고 이 경우 눈을 떠 얻는 모습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신이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의 일부다.
즉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나머지 감각이나 분별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매 순간 일정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면서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내용을 매 순간 얻는데 일정한 정신구조와 기제 ♨가 작용한다.
자세히 말하면, 근본정신과 이를 바탕으로 매생시 분화생성된 1,2,3,4,5,6,7 식의 구조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눈을 뜨면 그런 내용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또 그 가운데 다시 일부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게끔 된다.
이는 물론 잘못된 망상분별의 하나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정신구조와 기제♨는 현실에서 일정한 망상분별을 갖게끔 하는 바탕이 된다.
그리고 그가 임하는 생사현실의 상황이 이와 같다.
그래서 한 주체는 매순간 이와 같은 기제♨를 바탕으로 일정한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그 내용은 매순간 조금씩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매순간 파악한 내용을 나열하게 되면 위와 같은 내용이된다.
즉 그런 기제를 바탕으로 5 살 때 자신으로 파악한 내용은 A 이다.
그리고 그런 기제를 바탕으로 60 살 지금 자신으로 파악한 내용은 B 이다.
이런 식이다.
이 때 매순간 이런 A 와 B 등의 내용을 자신이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우선 노인이 된 상황에서는 5 살 때의 A 는 사라져 없다.
만일 5 살 때 자신으로 여긴 A 가 자신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노인이 되어 그 A 가 소멸된 때는 그는 사망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A 와 B 는 대단히 다르다.
그런데 이들은 또 어느 정도 유사하다.
즉 5 살 때도 사람이었다.
60 살 때도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에서는 이제 더 이상 이어질 것이 없다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배경이 되는 정신구조와 기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론 이 부분의 이해가 쉽지는 않다.
이런 경우 일단 무조건 믿어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해가 된 다음에 실천하려면, 늦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상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다음 실험을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처음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이 안에서 자신이 평소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을 붙잡아 보자.
그리고 그것은 I 라고 일단 표시해보자.
그런데 이제 눈을 감아보자.
그러면 그 직전까지 자신으로 여긴 그 I 부분은 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자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신이 그 상황에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이 양 순간에 모두 공통해서 존재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감각의 경우도 이와 사정이 같다.
이제 두번째 실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의식을 갖고 있다가 사고나 음주로 의식을 잃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하자.
분별하는 의식을 기준으로 자신을 설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의식을 잃을 때는 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는 그를 간호하는 입장에서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의식을 잃는 상황이나 그렇지 않는 상황에 함께 공통해 존재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이제 또 하나의 실험이 필요하다.
그런 주체가 나중에 사망해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다고 하자.
이 경우 화장터 전 후에 공통해 존재하는 것을 또 찾아야 한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의 단멸관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사후는 자신이 고려할 필요 없는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즉 앞에서 살핀 정신구조와 기제♨ 가운데 근본정신 부분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정신구조와 기제가 이후 생에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생전과 사후에 행한 업은 계속 씨(종자)로 보전된다.
그리고 이후 열매를 맺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각 과정에서 공통된 내용은 현재 순간에서도 역시 공통된다.
따라서 평소 수행과정에서 이를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이해를 통해 단멸관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러면 결국 수행방안이 그런 형태로 제시되는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수행방안은 결국 이런 바탕에서 제시된다.
즉 넓고 길고 깊은 관찰을 통해 무량한 많은 복덕과 지혜를 얻게 하는 방안을 찾게 된다.
또 그것이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수행방안이 제시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수행을 행해야 하는 배경이나 취지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이해되더라도 매 순간 당장 행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선 기본적인 수행과정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즉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때 수행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
한편 예방노력이 성취되지 못해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자.
그런 최악의 경우에서도 잘 극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이해를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또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할 때도 이런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기본내용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망집을 제거함에 있어서는
원칙적인 방식과 보충적인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원칙적 방식은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의 경전에서 제시된다.
한편 보충적 방식은 중관론 등의 논서에서 주로 제시된다.
아래에서 이런 방식을 개관해 살피기로 한다.
○ 실답지않음의 논의
From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임시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15-k1081-029.html
임시 =>(재수정)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17-k0001-430.html
>>>
● 망집을 제거하는 원칙적 방식과 보충적 방식(가정적 논의)
망집을 제거함에 있어서는
원칙적인 방식과 보충적인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망집 제거는 다음 문제다.
우선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실답게 있는 내용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한다.
그런데 이들 현실내용이 과연 실다운가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이 경우 먼저 관념분별은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또 관념분별이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또 한편 감각현실도 마찬가지다.
감각현실이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또 감각현실이 관념영역에서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더 나아가 이들 각 내용이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 결론은 모두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 현실 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를 살피는 가장 원칙적인 방안은 다음이다.
이런 경우 문제되는 각 내용을 놓고 그것이 그런 내용인가를 직접 살피면 된다.
그 다음 보충적인 방안은 또 다음이다.
현실이 실답다고 여기는 입장을 일단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그런 입장이 잘못됨을 밝혀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서 원칙적 방식은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의 경전에서 제시된다.
한편 보충적 방식은 중관론 등의 논서에서 주로 제시된다.
아래에서 이런 방식을 개관해 살피기로 한다.
먼저 원칙적 방식에 대해서는 그간 많이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아래에 간단히 제시하기로 한다.
그림을 보고 살피기로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이 그림은 다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이 때 얻는 내용을 1! 영역안의 a!라고 표시하기로 하자.
그리고 지금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상태라고 하자.
이 때 스스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 확인해보자.
그래서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켜보자.
현실에서 그렇게 자신으로 여기고 가리키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위 그림에서 a! 로 표시하고 있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대하면서 그 부분을 스스로 '나'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생각은 6@ 라는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렇게 분별하고 생각해낸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그래서 이를 a@로 표시하였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a! 와 a@와 같은 내용들을 얻게 된다.
즉 우선 현실에서 a! 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a@와 같은 분별내용을 일으켜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이들 내용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현실에서 이런 각 내용을 얻는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얻어진 이들 내용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는 이들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다.
그것이 이들 내용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밝히는 핵심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꿈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 꿈의 실답지 않음의 윈칙적 판단 방식
어떤 내용이 현실에서 얻어진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현실에서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과정을 먼저 살피는 것이 좋다.
자면서 바다나 황금꿈을 생생하게 꾸었다고 하자.
이제 이 꿈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꿈을 놓고 어떤 측면을 검토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런 경우 꿈 안의 내용만 살펴서는 곤란하다.
꿈 밖 현실에서 침대 영역의 사정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의 침대에서 그런 바다나 황금이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살펴야 한다.
꿈이 실답지 않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꿈을 정말 생생하게 꾸었나 여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꿈은 꿈대로 생생하게 꾼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한다.
꿈은 꿈을 꾸게 되는 그런 조건에서는 그렇게 꾸게 된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그런 상황을 떠나서도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렇지 못함을 현실에서 이해하게 된다.
한편, 꿈 내용이 꿈과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그 내용이 현실의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
그렇지 못함을 현실내용과 대조함으로써 이해하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어떤 내용은 일정한 성품을 갖는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바다물을 만지면 축축해진다.
황금은 딱딱하다. 이런 성품들이다.
그래서 일정한 내용은 일정한 성품을 갖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그처럼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도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가 등을 살피게 된다.
역시 그렇지 못함을 이해하게 된다.
꿈속에서 살을 꼬집어 본다고 하자.
이 경우 아프지 않아서 그 상황이 꿈임을 안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꿈의 성격과 지위를 검토한다.
그래서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꿈은 꿈을 꾸는 동안 생생하게 꾼 것은 사실이다.
또 현실에 그런 침대가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대조 비교하여 본다.
그런 가운데 위와 같은 사정을 살펴서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각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원칙적 방식이 된다.
여기서 이들 관계를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각 내용의 지위를 판단해보자.
우선 눈을 떠 현실에서 보는 침대는 감각현실이다.
한편, 꿈에서 본 내용의 성격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자.
다시 꿈을 꾸어 보아야 정확히 꿈의 위치가 무언가를 파악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꿈이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은 아니다.
그래서 꿈은 감각현실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각 현실 내용을 얻는 관계를 다음처럼 나열해보자.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그러면 꿈은 위 관계에서 관념분별 위치에 넣어야 적절하다.
그래서 꿈은 제 6 의식 가운데 몽중의식의 범주에 넣게 된다.
한편, 꿈 내용과 감각현실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꿈에서 바다나 황금을 보았다고 하자.
이런 내용이 곧 눈으로 보는 침대 즉 감각현실 자체인가를 검토해본다.
그래서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 꿈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반대로 눈으로 보는 침대와 같은 감각현실이 있다.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 곧 꿈에서 본 그 바다나 황금인가를 검토해보자.
그래서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 감각현실은 꿈이 아니다.
이렇게 각 내용의 위치를 바꾸어 묻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영희와 사람의 관계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때 다음 두 질문의 답은 서로 다르게 된다.
영희는 사람인가? - 그렇다.
사람은 영희인가? -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질문이 갖는 의미는 다르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이 둘의 관계를 묻고 살피게 된다.
그렇지만, 꿈에서 그런 내용을 보는 것은 현실내용과 전혀 관계없는가.
그러나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꿈에서 영희를 봤고 황금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내용들은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꿈에서도 그런 내용을 꾼것이다.
물론 침대가 놓인 현실과 꿈 속의 황금은 동떨어진 내용이다.
그러나 그 침대에 누어 그렇게 꾼 것이다.
그래서 침대가 있는 감각현실과 꿈이 전혀 무관하다고 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 꿈은 침대를 떠나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언가의 정체와 그 실다움 여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렇게 각 내용을 나열해 놓고 서로 대조해보며 관계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런 결과, 현실의 침대에서 꿈 내용이 얻어지지 않음을 확인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바다나 황금꿈이 엉터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꿈에서 본 내용은 생생하게 얻지만, 이는 실답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다.
○ 현실의 실답지 않음의 판단방식
현실 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는 방식도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먼저 꿈이 실답지 않음을 판단하는 과정을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해 현실 각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판단할 수 있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또 그런 가운데 관념분별도 명료하게 일으킨다.
그런데 이들 각 내용이 실다운 것인가를 검토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도 위 방식과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문제되는 내용을 일단 확보해 놓는다.
그리고 바탕이 되는 다른 영역의 내용을 또 확보한다.
그리고 그 두 내용을 놓고 서로 대조해본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문제되는 각 영역을 살핀다.
이 경우 이들 내용이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 그처럼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또 이와 함께 마음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그 각 내용을 얻는 관계를 살핀다.
즉 한 쪽이 없어도 다른 한쪽을 얻을 수 있는가 여부 등을 살핀다.
이를 통해 양 내용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이다.
이는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그 각 내용이 실다운가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 각 내용은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성격과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 현실의 실다움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들
○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감각현실을 얻는다.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본다.
귀로 일정한 소리를 듣는다.
이런 경우들이다.
이런 경우 이런 감각현실들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을 수 있는 것인가를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살펴야 한다.
또 마음의 다른 영역에서는 사정이 어떤가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것이 실다운것인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런 경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 그림에서는 #실재라고 표시하여 나타냈다.
그런데 이런 실재 내용을 검토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 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본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얻지 못한다.
이처럼 현실 내용은 한 주체가 관여해서 얻는 내용이다.
즉 한 주체의 마음이 관계해 마음 안에 얻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떤 주체나 마음이 관계하지 않더라도 어떤 내용 무언가는 그대로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런 논의가 본 바탕으로 있다고 할 실재를 찾는 문제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나무나 바위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눈을 감으면 이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보지 못한다고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가 자신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문제된다.
이것이 지금 문제삼는 본 바탕 실재#의 내용이 된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눈을 떠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적 분별 내용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이들 현실 내용이 발생하는 관계는 다음과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여기서 #실재는 어떤 주체가 관계하지 않고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이에 어떤 주체가 관계하여 얻어낸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 내용을 얻게 한 본 바탕은 #실재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한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의 지위나 성격을 판단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판단을 하려면 본 바탕 실재의 사정을 함께 살펴야 한다.
이런 판단은 꿈의 정체나 성격을 살피는 경우와 같다.
예를 들어 꿈의 정체와 성격을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꿈 밖 현실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서로 대조 비교하면서 살펴나가야 한다.
이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 실재와의 비교시 불가득의 문제점
현실 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라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앞과 같은 사정으로 실재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실재와 현실 내용을 놓고 각 내용의 관계를 살피게 된다.
이를 통해 어떤 내용이 실다운 내용인가 아닌가를 살피게 된다.
그런 가운데 #실재에 대해 다양한 추리나 주장을 하게 된다.
이 내용은 이미 앞에서 대강 살폈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얻은 현실 내용이 곧 본 바탕 실재라고 잘못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얻은 현실 내용은 실재가 아님을 이해한다고 하자.
즉, 현실이 자신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다음처럼 다시 여러 입장이 나뉜다.
먼저, 실재는 자신이 얻는 현실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입장
실재는 현실내용과 유사하거나 이에 비례한다는 입장.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얻지 못해,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는 입장.
등이다.
여하튼 이 가운데 어느 입장이나, 문제되는 내용을 직접 얻어 제시할 도리는 없다.
그런 가운데 입장의 대립이 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
즉, 현실에서 문제되는 각 내용을 직접 얻어 비교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이런 #실재가 어떤 사정에서 문제삼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과연 그런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실재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성격이 다름을 이해하게 된다.
즉 현실 내용은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다.
그러나 본 바탕 실재는 그렇지 못하다.
그 내용을 한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은 다음 때문이다.
한 주체는 오직 그 주체가 관여한 내용만 얻게 된다.
즉 그 주체의 마음이 관계하여 화합해 얻어낸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성격을 갖는 내용이 아니다.
즉 어떤 주체와도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한 주체는 끝내 실재를 직접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문제삼는 실재는 불가득 공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즉 본래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이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이는 한 주체가 행하는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이다 ~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등등의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 상태가 된다. [불이법]
그리고 이는 언설로 직접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결국 #실재와 현실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 현실내용은 #실재와 어떤 관계에서 얻게 되는가를 다시 잘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은 또 이런 본 바탕 실재를 떠나 얻는 것도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즉, 현실 내용은 #실재를 떠나지 않고 #실재를 바탕으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 내용의 정체와 지위를 살필 때는 원칙적으로 이런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통해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는 경우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이런 사정을 통해 현실안에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의 결론을 얻게 된다.
-- 실재는 감각현실이 아니다.
-- 감각현실은 실재가 아니다.
-- 그러나 감각현실은 실재를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실재도 감각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 실재와 관념분별의 관계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다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그 가운데 다시 관념분별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도 앞 경우에 준해 판단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역시 다음의 결론을 얻게 된다.
-- 실재는 관념분별이 아니다.
-- 관념분별은 실재가 아니다.
-- 그러나 관념분별을 실재를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실재도 관념분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의 관계
관념분별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그 바탕에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다시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물론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경로는 다양하다.
단순히 관념을 연상해 떠올려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비행기는 빠르다. 빠른 것은 기차다.
이런 식으로 여러 관념을 떠올리는 경우와 같다.
한편, 관념분별을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일으키기도 한다.
즉 얻어진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관념분별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눈을 떠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저 부분은 바위다. 이 부분은 영희다. 또 이 부분은 자신의 몸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키는 경우다.
이런 경우 현실에서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 관계를 다음처럼 나열해보자.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그래서 이 경우는 감각현실이 관념분별을 일으킨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이들 각각의 정체와 관계가 문제된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현실내용에서 감각현실과 관념 서로를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서로 잘 대조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감각현실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예를 들어 눈을 떠 무언가를 보게 된다고 하자.
이는 그가 눈을 의존해 마음에 얻어낸 내용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런 관념분별도 역시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모두 한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 둘을 서로 혼동하기 쉽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여 이 둘을 서로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래도 마음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는 관념내용이다.
한편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새로 얻게 되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눈을 의존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이런 내용은 다시 눈을 감으면 또 얻지 못한다.
그리고 이후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얻지 못한다.
즉, 이런 감각현실은 감관이 의존하는 그 순간에만 얻게 된다.
그래서 이 처럼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마음안에서 서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감각현실은 그것을 얻는 순간에만 얻게 된다.
그래서 다음 순간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음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 각 내용을 서로 잘 구분해 확보해보려 노력해보자.
그리고 이 두 내용을 서로 대조 비교해보자.
-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의 원칙적인 관계 분별 -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라고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이해했다고 하자.
이 경우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이 때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적용해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우선 문제되는 내용을 잘 붙잡아 놓는다.
예를 들어 스스로 다음과 같이 검토한다.
지금 상황에서 문제삼는 감각현실을 잘 포착해 붙잡아 둔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얻게 되는 감각현실의 경우 다음 방식으로 확보한다.
먼저 눈을 감는다.
그 순간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뜨면 그 순간 다시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
그런 내용을 눈을 뜰 때 얻는 감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선 잘 마음에서 포착해낸다.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 상황에서 관념내용을 잘 포착해 붙잡는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별 관계없이 여전히 마음에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러 내용을 관념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이를 잘 포착해낸다.
이와 같이 문제삼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먼저 잘 포착한다.
그 다음 이들 양 내용을 다음 방식으로 대조해본다.
먼저, 어떤 순간에 감관으로 얻는 감각현실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분별한 관념내용이 있었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한다고 하자.
그런데 분별 내용은 이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눈을 감으면 사라져 얻지 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눈을 뜨면 그 순간만 새로 얻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이다.
이처럼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감각현실을 얻는 상황을 잘 포착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는 감각현실 안에 그 직전까지 분별한 내용이 얻어지는가를 확인해본다.
이 상황에서 물론 감각현실을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판단할 내용은 그 부분이 아니다.
다음을 주의해서 판단해야 한다.
즉 그 순간에 얻는 감각현실에 처음 확보한 분별 내용이 다시 얻어지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즉 그 순간에 얻는 감각현실 안에 분별 내용 같은 내용이 찾아지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 감각현실에서는 관념분별을 '얻어낼 수 없다'.
위 표현은 다음과 다른 의미다. 따라서 서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감각현실을 대해 관념분별은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감각현실에 관념분별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라이터를 대해 불을 연상해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라이터에 그렇게 떠올린 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두 문제를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래서 다음의 결론을 얻는다.
-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한편 이 두 내용의 위치를 이제 반대로 놓고 또 다시 한번 살펴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살펴본다.
우선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런 가운데 눈을 감고 직전에 본 내용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눈을 감고도 떠올리게 되는 관념적 내용이다.
그런데 이 안에 눈을 감기 직전 본 모습이 이 안에서 찾아지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본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 관념내용 안에는 감각현실이 '없다'.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그런 가운데 다시 다음을 판단해본다.
그 관념분별 그 자체가 곧 그 직전에 얻은 감각현실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음의 결론을 얻는다.
-- 관념내용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한편, 관념분별을 얻는 관계를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물론 관념은 시인이 그냥 생각만으로 떠올려 내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어떤 것의 정체를 살피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 바탕해서 다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그런 가운데 저 부분은 바위다. 저 부분은 영희다. 이 부분은 자신의 몸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경우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관계가 문제된다.
그래서 다시 다음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즉, 그런 상황에서 일으킨 관념분별이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를 또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위와 같이 관계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둘은 또 전혀 무관한 관계는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데 그 관념은 다른 감각현실 부분을 대할 때는 잘 떠올리지 않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경우에는 그런 바위라는 생각을 잘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일정한 감각현실을 대해 바위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은 이런 관계가 있다.
즉 서로 아주 무관한 관계가 아니다.
이는 다음 사정을 살피면 이해가 쉽다.
어떤 눈 나쁜 이가 평소 안경없이는 글자를 잘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안경을 쓰고 난 후 작은 글자를 읽거나 물체를 알아보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 경우 그가 저 부분은 나무그림이다.
이 부분은 가나다라라고 적혀 있다. 이런식으로 분별을 한다고 하자.
이는 그 상황에서 그가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안경이 없어 희미한 상을 얻을 때는 그런 분별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역시 다음의 결론을 얻게 된다.
--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 감각현실 안에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다. )
--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 관념분별 안에 감각현실은 없다. )
-- 그러나 그 경우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을 떠나 얻는 것은 아니다.
이런 대조 판단과정을 통해 각 내용이 실다운가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여하튼 이런 각 내용의 정체와 관계를 서로 대조해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현실 각 내용은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성격과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처음 어떤 것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문제삼았다.
그런데 위와 같은 방식이 이 문제를 살피는 원칙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꿈이 실다운를 살필 때도 이런 방식이 원칙적인 방식이다.
결국 위 방안은 어떤 것의 정체를 살필 때 사용할 수 있는 원칙적 방식이다.
그리고 그 실다움 여부를 문제삼을 때 사용하는 기본 방식이다.
실험을 하는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소금인가. 밀가루인가.
또 소금에서 과연 밀가루가 얻어지는가 등이 문제된다고 하자.
그러면 두 내용을 일단 확보해 놓는 것이 첫 과제다.
그리고 그 두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이 두번째다.
그리고 이는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원칙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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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얻을 수 없음과 없음의 의미 차이
참고로 여기서 관념은 실재나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감각현실은 관념영역에서 '없다'고 표현한다.
그런데도 이처럼 표현을 약간 달리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얻어낼 수 없다[불가득]은 있다, 없다라는 말과는 다른 표현이다.
얻을 수 없음은 곧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눈으로는 소리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눈이 소리를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소리가 없다고 표현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각 표현에 차이가 있다.
한편, 있고 없음의 판단은 관념영역에서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하자.
관념분별 과정에서 다른 영역안의 내용에 대해 '있고 없음'을 판단할 경우라고 하자.
이는 '관념영역' 안에서 그런 내용이 얻어지는가 그리고 있는가 여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관념영역에서는 우선 판단할 그런 내용자체가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있고 없음'의 판단을 떠나게 된다.
즉 없다는 판단도 단정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얻을 수 없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실재에 대해 판단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는 얻을 수 없고, 분별을 떠난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유(有)나 무(無) 즉, 있고 없음의 양변을 떠남을 의미한다.
즉 관념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정만으로 이를 무(無)라고 단정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관념 안에 감각현실이 '있고 없음'을 판단할 경우라고 하자.
물론 관념영역에서 감각현실은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앞과 사정이 서로 같다.
즉 관념영역에서 그런 감각현실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관념영역에서 감각현실의 존부를 판단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관념 영역안에는' 적어도 그런 내용이 '없음'을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는 앞과 달리 관념에는 감각현실이 없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한편, 실체의 유무를 판단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실체는 없다라고 판단한다.
즉 무자성 무아라고 판단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꿈과 다른 참된 실체가 있는가 여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먼저 관념영역에서 꿈과 다른 성품을 갖는 형태로 실체의 몽타쥬를 그려서 찾아나선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 그것이 있을 수 없음을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어느 영역에도 없음을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각 표현에는 서로 의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불가득(不可得) 공과 아주 없음(無)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실답지 않음의 의미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그처럼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결국 그것은 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실답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현실에서 실답게 여기게 되는 사정이 많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미 앞에서 살폈다.
즉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지만, 그러나 정작 꿈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꿈과 다른 측면이 많다.
우선 현실은 5 감을 통해 대단히 생생하고 다양하게 얻는다.
그리고 좀 더 명료하게 분별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감각현실의 각 부분의 특성이 다르다.
또한 현실은 다수 주체가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일정한 관계로
반복해 무량겁에 걸쳐 받아나간다.
이런 등등이 다르다.
그래서 이런 특성 때문에 현실을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그러나, 어떤 존재의 정체를 살필 때는 그렇게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해도 이들 감각현실은 꿈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즉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들 현실 내용은 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이는 결국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하려면 전자게임의 화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는 만화가가 종이에 그리는 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는 영화화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도 앞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들 각 내용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은 꿈과는 달리 다수에게 일정한 관계로 반복한다.
그렇다해도 각 내용은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감각현실을 얻는 한 순간 한 단면을 정지시켜 놓는다고 해보자.
그런 가운데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 경우 실재나 마음안 다른 영역들에서는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내용은 물론 매순간 생생하게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우선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한편, 한 주체는 단지 감관으로 눈만 갖는 것이 아니다.
눈 외에도 귀, 코, 입, 몸 등의 감각기관을 갖는다.
그런데 각 감관을 통해 매 순간 각기 다른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감각영역 예를 들어 청각 영역이나 시각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관념분별을 행하는 영역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한편, 한 주체의 정신은 단지 감각과 관념만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근본 정신이나 제 7 식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한 정신에서 얻는 내용을 이런 각 경우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 현실 내용은 본 바탕 실재를 포함해 각기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이는 꿈과 같은 성격을 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매 순간 생생하게 얻지만, 그 내용을 실답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입장을 함께 고려해보자.
예를 들어, 벌이나 메뚜기는 외관상 인간과는 다른 눈 구조를 갖는다.
그래서 각 상황에서 서로 다른 내용을 얻는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한 주체가 본 내용은 다른 생명의 상태에서는 찾기 힘들다.
단지 엇비슷한 감각 인식기관을 가진 생명들 끼리 비슷한 내용을 얻는 것뿐이다.
즉, 인간이 얻는 현실 내용은 인간사이에서만 유사성을 갖는 것 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얻는 내용을 모든 생명이 공통적으로 얻는 내용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마음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곧 외부의 객관적 실재 자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한편 이처럼, 한 순간 한 정지된 단면을 놓고 살필 때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무한히 쌓아 포개어 놓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그로 인해 그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그림과 같다.
그림으로 황금을 그려 놓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렇게 황금그림을 수만장 쌓아 놓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로 인해 그것이 진짜 황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각현실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영역에서만 일시적으로 화합해 얻는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으로 이는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감각현실을 반복해 이어 얻는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를 한 인간을 놓고 보면 대략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100 년간 눈을 통해 계속 일정한 내용을 꾸준히 얻는다.
그리고 매순간 생생한 형태로 얻는다.
그래서 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보게 된다.
한편, 이런 내용을 세대를 이어가며 이어 나열해 살핀다고 하자.
그래서 몇 천년을 이어 살펴본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100 년간 눈을 계속 뜨고 대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런 감각현실이 계속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감각현실은 그런 형태로 고정되어 꿈과 달리 실다운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감각현실은 사실은 매순간 그처럼 눈을 떠 대하는 순간만 얻는 내용이다.
이 문제는 간단히 실험해도 확인할 수 있다
잠시라도 눈을 깜박거려보며 실험하면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금 직전에 눈을 뜨고 본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 직전 그 순간에 본 내용을 다시 마음에서 꺼내 보려 한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영역으로 옮겨 놓으려 노력해보자.
그런 경우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물론 이들 감각현실은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래서 매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감각현실은 그런 조건에서 그 순간만 얻는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그처럼 계속 얻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당장 눈을 감고 그 직전에 본 내용 조차도 다시 이를 얻어내기 힘들다.
그리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 보전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내용에 계속 집착을 갖게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매 순간 문제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결국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실답다고 볼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감각현실을 붙잡고 집착해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실다운 내용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이를 집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할 때는 바로 이런 점을 문제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게임화면의 사정과 같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감각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감각현실에 집착한 바탕에서 이후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로 인해 이후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는 생사고통의 문제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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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념분별의 실답지 않음의 의미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일정한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리고 일정 부분이 손이나 바위라고 여긴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감각현실과 그런 관념분별을 비교해보자.
이 경우 이들은 서로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서로 엉뚱한 내용들이다.
즉, 서로 상당히 질적으로 동떨어진 내용임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알고보면 현실에서 꾸는 꿈과 현실의 관계와도 같다.
꿈이 실답지 않음을 확인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이 두 내용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다만, 현실에서 관념분별이 이와 같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침대에서 꾼 황금꿈은 서로 엉뚱함을 잘 이해한다.
그러나 관념분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예를 들어 '일정 부분'을 보고 바위나 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자신이 분별한 내용은 꿈과 성격이 다르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는 비유하면 망상증 환자의 상태와 같다.
또는 최면걸린 이의 상태와 비슷하다.
어떤 망상환자가 치솔만 대하면 그것을 개로 잘못 여겨 대한다고 하자.
또는 어떤 이가 최면에 걸려 귤을 대하면서 사과라고 여긴다고 하자.
이런 상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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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중복 반복 부분 -- 정리 통합필요 >
[ 내용제거와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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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기 위한, 원칙적 방식과 보충적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
- 원칙적 방식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원칙적으로 각 영역의 내용을 서로 대조해 살피면 된다.
이것이 원칙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원칙적 방식에 대한 비유적 설명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사정을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같은 비유를 사용할 수 있다.
또는 각기 다른 그림들이 그려진 비닐들을 겹쳐 놓고 바라보는 상황을 비유로 사용할 수 있다.
또는 수정구슬에 각기 다른 색깔의 빛이 보이는 상황을 비유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비유는 해당 내용에 대한 직접적 근거나 논증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다.
즉, 이해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방편이다.
- 비유는 논증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로도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즉,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전도몽상 분별을 갖고 계속 임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사실은 더 노력하여 앞의 원칙적 방안을 통해 망집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이론적으로 이들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현실에 임하면 다시 망집 상태로 임하게끔 된다.
그렇게 망집을 일으키게 되는 현실 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거리에서 차가 오고가고 사람이 다닌다.
이런 상황에서 경전에서 거리에 그런 자신 및 사람과 사물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오고감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는 다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어떤 이가 차나 사람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부분은 정작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침대에 누어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우선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설령 이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가 현실에 임하면 다시 망집 상태로 임하게끔 된다.
무엇보다도 한 주체는 전도몽상을 이미 일으킨 상태에서 이번 생을 시작하게 된다.
즉 그런 전도몽상이 곧 그가 생을 출발한 시원적 출발전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전도몽상에 바탕한 분별이 더 옳은 것으로 여겨지게끔 된다.
그리고 현실에는 실답지 않은 현실을 실답게 여기게 되는 다양한 사정이 있다.
매 순간 생생하게 감각현실을 다양한 형태로 중첩해 얻는다.
예를 들어 눈으로 시각, 귀로 청각, 코로 후각, 혀로 미각, 몸으로 촉각을 생생하게 매순간 얻는다.
또한 매순간 분별을 명료하게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다수가 일정한 시기와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 일정한 결과를
무량하게 반복해 얻게 된다.
그런 관계로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이들 내용을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경전에서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현실에 사람이나 사물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다시 거리에 나선다고 하자.
그리고 거리를 거닐거나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위와 같은 사정을 그 현실에 적용하기 힘들다.
결국 다시 거리에 오가는 각 부분을 자동차나 사람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거리를 걸어다녀야 한다.
한편 차를 운전하는 경우도 사정이 같다.
그런 분별에 바탕해서 매순간 핸들을 좌우로 돌리고 차를 운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이전처럼 분별하고 임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사고를 당하거나 일으키고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는 다시 각 상황에서 그렇게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그런 바탕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또 생사고통을 벗어날 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또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할 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서 집착을 일으킨다.
그리고 초점을 맞추어 현실에 임하는 가운데 현실에 매몰당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는 다시 그 분별들 하나하나를 대단히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고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그 근거를 여러가지를 나열하게 된다.
그리고 망상분별을 계속 고집하면서 임하게 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다시 무량한 전도몽상을 증폭해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온갖 학문이나 주장을 그런 바탕에서 세워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원칙적인 방안만 제시하고 이를 방치할 도리는 없다.
그래서 다시 이런 각 경우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상대의 주장을 가정적 항변방식으로 논파해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이하에서는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를 살피기로 한다.
>>>
○ 가정적 항변의 방식
『회쟁론』이나 『중론송』 등 논서를 살핀다고 하자.
이들 논서는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 본 취지다.
물론 이 경우 본래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집착을 곧바로 제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들 논서에서는 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현실내용은 원칙적으로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들 현실내용이 오히려 실답다고 여기게끔 하는 현실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여전히 현실내용이 실답다고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런 주장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다시 가정적 항변의 방식을 사용해서 그런 견해를 물리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가정적 항변의 방식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
원칙적으로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상대가 망집에 묶여서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방편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일단 상대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그런 경우 어떤 모순이나 문제를 만나게 되는가를 살핀다.
그래서 그런 입장이 어떤 사유로 잘못인가를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을 물리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상대가 그런 망상분별의 문제를 파악해 벗어나올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적으로 원칙적으로 파악해야 할 내용을 이해시킨다.
그래서 이런 취지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런 입장의 논의를 일반적으로 파사현정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2 번째 방식을 '가정적 항변'이라고 표현해 살피게 된다.
가정적 항변이란 소송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용수보살님의 『회쟁론』이나 『중론』은
결국 이런 가정적 항변방식을 사용하는 형태다.
상대는 망상분별을 고집하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방식을 통해 그 주장을 살피는 논의다.
가정적 항변은 그 성격상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게 된다.
즉, 상대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장을 제시해 고집하는가에 따라 각 경우 달라진다.
본래 망상분별의 내용은 무량하다.
그래서 그에 따라 무량한 가정적(if)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무량한 망상분별에 맞추어 하나하나 이를 다 살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가정적항변의 방식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가를 대강 살피기로 한다.
따라서 용수보살이 『중론』이나 『회쟁론』 등에서
상대와 논의하는 기본 방식의 성격을 개괄적으로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이를 먼저 살피지 않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계속 표현만 따라 읽어간다고 하자.
그러면 이 논서가 무슨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리고 결국 용수보살이 엉터리 궤변적 주장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는 전도망상 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내용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
○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의 성격
경전이나 논서 등에서
상대의 망상분별을 제거하기 위해
다음 방식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일단 그런 망집을 일으킨 상대와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을 받아들인다.
그 다음 그런 바탕에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내용을 제시한다.
[가정적인 논의를 통한 방편,시설,안립]
또는 상대가 고집하는 입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가 갖는 망집을 제거한다. [가정적인 항변, 반박, 비판, 논박, ]
『회쟁론』이나 『중론송』 을 지금 살핀다.
그런데 이들 논서에서 논의하는 방식 대부분이 이와 같다.
특히 뒷 부분의 가정적인 항변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 경우 가정적 항변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정적 항변'에서 '가정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다음이다.
가정적 항변을 제시할 때 상대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입장은 아님을 나타낸다.
한편, 가정적 항변에서 '항변'이라는 것은 다음을 나타낸다.
논사는 일단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는 설령 상대 주장을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역시 상대 주장이 성립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한 것일 뿐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상대의 주장을 물리치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방도 스스로 그 주장을 폐기하게끔 노력하게 된다.
상대와 주장을 다투는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 상대가 스스로 주장이 잘못됨을 이해하고 버리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자신이 제시한 주장이 옳음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 해결이 쉬울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 보충적으로 가정정 항변 내용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주장을 폐기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을 보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 소송과 논쟁에서의 가정적 항변이 사용되는 사정
여기서 가정적 항변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은
원래 소송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논서의 논의는 소송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러나 소송은 아니다.
그래서 상대 주장에 대한 '가정적 비판' '가정적 반박' 이 정도로 표현해도 적절하다.
그러나 소송에서 사용하는 '가정적 항변' 이란 용어로 통일해서 표현하면
오히려 이해가 쉽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처럼 표현하기로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법률용어는 생소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하면 더 이해하기 어렵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미 이런 법률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논의과정에서 가정적 비판을 행하는 경우와 사정이 비슷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어떤 사정에서 이런 내용이 있게 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용어도 같은 표현을 함께 사용하기로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소송과정에서 가정적항변방식이 사용되는 사정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소송은 당사자가 시시비비를 다툰다.
재판관은 그런데 타임머신을 타고 각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그리고 각 당사자의 주장만으로 시시비비 문제를 판단해야 한다.
재판관이 제출된 주장과 증거를 통해 명확하게 재판을 잘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소송은 당사자에게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다툴 때는 시시비비를 해결할 방안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법률문제로 쌍방이 서로 다툰다고 하자.
이 경우 문제되는 내용이 '있고 없음'에 대해 직접 시시비비를 따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는 B 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한다.
그런데 B는 자신이 돈 자체를 빌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시시비비를 다툰다고 해보자.
여기서 문제는 과연 B 가 A로부터 그런 돈을 빌린 사실이 있고 또 갚지 않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이 경우 그런 사실의 유무를 밝히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각 당사자가 그런 사실을 직접 다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가장적 항변의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정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B는 상대로부터 돈 자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대는 다른 증거를 제시한다
즉, 증서에 B가 빌린 금액과 날짜 그리고 B의 지문과 도장이 찍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서를 제시하며 돈을 빨리 갚으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B의 입장에서는 다음 상태가 된다.
자신이 돈을 받은 사실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는 우선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상대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 자체가 없음을 주장하게 된다.
또 그런 증서를 작성한 일 자체도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런 사실이 없다는 주장만 반복한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이런 사실을 입증하려할 때 그 방안이 잘 찾아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이 입증하기 곤란하거나
또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예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다음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가정적 항변이란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일단 설령 '상대의 주장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
그렇다해도 이런 이런 사정 때문에
역시 상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엉터리임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을 가정적 항변이라고 소송에서 표현한다.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경우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다.
또 세계나 자신의 본 정체를 놓고 논의하는 경우에도 위와 비슷한 사정이 있게 된다..
그래서 논의를 하는 가운데 소송 상황에서 사용하는 위와 같은 방안을 사용하게 된다.
○ 『회쟁론』의 가정적 항변방식의 의미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가장 원칙적인 방안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가정적 항변의 방안과 이를 응용한 방안 등을 제시했었다.
이는 『회쟁론』과 같은 논서에서는 다음 부분들이다.
용수보살님은 '일체에 실체가 없다. 공하다' 이런 입장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내용을 밝히는 『회쟁론』에서는
만일 체가 있다면 ~~ 이러이러하게 된다. ( 그래서 문제가 된다. )
이런 형태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바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는 부분이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용수보살님이 만일 체가 있다면 ~~ 이러이러하게 된다.
이렇게 제시하는 부분은
사실은 용수보살님 입장에서는 제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용수보살님 입장은 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가 있다면 어떻다라고 제시하는 부분은 사실은 원래 자신의 입장과 어긋난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다음처럼 오해하기 쉽다.
우선 용수보살님이 '체가 있는 경우는 이러이러하다'라고 제시한 것은
'체가 있는 경우'가 있음을 우선 인정한 것이다.
더 나아가 체가 있지 않다면 용수보살님이 어떻게 그 사정을 알았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체가 있어서 이러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확립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용수보살님이 체가 있음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용수보살님은 '체가 있으면 이렇게 된다'는 관계를 정립해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수보살님이 '체가 있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용수보살님 입장은 가정적 항변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용수보살님 입장은 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런데 다만 상대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내세운다.
그래서 이 문제점을 알게 하기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가정적인 입장에서 '만일' 상대의 주장과 입장을 옳다고 전반적으로 받아들인다, (=> 가정적 )
그래서 상대 주장처럼 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 그리고 상대가 의존하는 추론체계나 언설표현 등도 전반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경우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게 된다. (=> 항변, 비판, 반박 )
따라서 그런 주장은 처음부터 취하면 안 된다.
이렇게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들 논의가 그런 방식으로 제시된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논의 내용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설령 내용을 이해해도 이를 통해 나중에 엉뚱한 혼동을 대단히 많이 일으키기 쉽다.
한편 용수보살님의 경우는 일체가 공함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정적 항변을 사용하는 경우와도 조금 성격이 다르다.
이는 가정적 항변에서 '귀류논증'방식이 갖는 성격과도 관련된다.
귀류논증은 만일 그런 경우라면 이러이러한 오류가 있다고 제시하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귀류논증방식을 사용해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밝힌다.
이는 이를 통해 그와 모순되는 다른 내용이 오히려 옳음을
간접적으로 내세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접적 증명방식]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만일 A 라고 하면 이런 문제가 있고 모순이 발생한다'
=> 그런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없다.
=> 그런 주장은 잘못이다. 참거짓 값 가운데 거짓이다.
이렇게 '귀류논증식'을 사용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대부분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B 가 대신 옳다는 내용을 내세우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즉 B 는 A 와는 모순된 내용이다.
A 가 잘못임을 밝힌다. => 그러면 이를 통해 A 와 모순된 B 가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B 가 옳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실을 접 살펴 증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회적으로 B 와 모순되고 양립할 수 없는 A를 찾는다.
그리고 그런 A 는 오류가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를 통해 B가 옳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취지로 귀류논증식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그런 논증에는 추론체계가 사용된다.
또한 추론과정에서 A 나 B 와 같은 내용도 받아들여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바탕에서 이 추론을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경전이나 논서에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는 본 취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체가 공하다는 바탕에 있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다음 입장이다.
즉 상대와 같은 주장을 그처럼 단정적으로 내세울 수 없다.
즉,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
이 부분까지를 밝히는 데만 본 취지가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정적 항변이나 귀류논증식을 사용하는 경우와 차이가 있다.
즉, 경전과 논서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가정적 항변의 본 의미로만 사용한다.
즉 본래 그 일체가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주장을 고집한다.
따라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게 된다.
이 때 그런 내용들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 입장이 있다.
이들에게 이런 내용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단 그런 중생의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게 된다.
그리고 일단 상대가 주장하는 그런 내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상대가 사용하는 추론체계 등도 역시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다음 내용을 보충적으로 제시한다.
즉 설령 그렇다해도 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입장을 취하면 곤란함을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가 망집에 바탕한 주장을 폐기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승의제를 이해하게 되도록 이끈다.
이런 취지다.
승의제는 본래 언설을 통해 나타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취지로 언설을 통해 논의해 나가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런 전반적인 사정과 취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경전과 논서 내용을 대하면서 혼동과 오해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전에서 일체가 무상하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또 '나'라는 것은 공하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내용은 일체가 있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또 '나'가 있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무상' '공'이 있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이런 내용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 현실 일체가 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또 현실에 자신이 이해하는 '나'라는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받아 나간다.
그런 경우 이런 상대를 이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단 그 상대가 이해하는 그런 표현을 통해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상대가 집착하고 고집하는 입장과 주장을 폐기하게끔 이끈다.
그런 취지로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 일체는 방편, 시설, 수단이다.
즉, 상대를 물을 건너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즉 상대가 사정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다.
그것은 또 가정적항변에서 '가정적'이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명, 안립, ]
○ 가정적 논의의 성격
앞에 나열한 내용들가운데
첫번째 항목에 해당한 내용은 이미 제시했다.
이런 사정은 『회쟁론』이나 『중론송』에서도
그런 사정을 직접 제시하는 부분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의 입장에서 그에 바탕해 어떤 비판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대는 거꾸로 다음과 같이 오해하기 쉽다.
즉, 그런 비판자가 가정적 항변과 관련된 내용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입장으로 오해하기 쉽다.
또 그런 추론체계 또는 다른 결론을 간접적으로 내세우는 입장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는 앞의 소송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소송에서 돈을 빌렸다는 내용을 놓고 다툰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자신은 그런 돈을 받은 적이 일체 없다고 원칙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과 같디 가정적 항변을 제시한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자신이 그런 돈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은 만취상태여서 밀린 대금으로 받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이 그런 도장이나 지문날인을 했다는 서류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밀린 대금을 받았다는 의미로 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지우고 변조된 것이다.
이렇게 항변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상대는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으로 오해하기 쉽다.
즉 상대가 그런 내용 전반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 가정적 항변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가정적이란 설령 그런 것을 인정하더라도---그렇다라고 제시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런 취지로 제시한 내용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다.
가정적 항변은 이를 제시하는 이가
항변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일단 상대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설령' '만에 하나' 상대 주장을 받아들인다해도 [가정]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엉터리로 보아야 함을 내세워 비판하는 취지다.
그래서 가정적 항변이 갖는 이런 성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거꾸로 이런 비판 내용을 다시 붙잡고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가 발생하게도 된다.
그래서 이런 논의에서는 일단 그런 특수한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경전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베푸신다.
그런 경우 언설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이 경전에 담겨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수보리 존자에게
부처님이 한마디라도 설한 내용이 있다고 보는가 이렇게 질문하신다.
그 질문도 역시 '말씀을 통해'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금강경의 내용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경우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일단 그 말씀 자체도 말씀이다.
그 앞 부분이나 뒷 부분도 말씀하신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가정적 논의나 가정적 주장의 의미를 혼동하는 사례다.
즉, 방편적으로 제시된 시설 안립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부처님이 말씀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
이는 언설 자체를 떠난 어떤 상태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대해 이해시키고자
어떤 말씀을 하시고 가르침을 베푼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내용은 가정적 논의를 통한 주장의 성격을 갖게 된다.
또는 지금 살피는 가정적 항변과 유사한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는 본래 원칙적으로 그런 언설을 떠난 상태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 취지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언설로 제시되는 본 취지다.
그러나 상대가 그 원칙적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망상에 바탕한 분별과 언어에 의존하는 상태다.
그래서 일단 이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언어방편을 시설해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를 통해 그런 사정을 이해하게끔 돕는 취지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언설이 제시된 취지와 사정과 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는 그런 그런 언설 자체에 대해 평소 이해해오던 내용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바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결국 부처님께서 이런 입장에서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외관상 대단히 많은 내용을 제시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해도 정작 설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고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정을 위와 같이 잘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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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mus0fl--Michel Delpech - Pour Un Flirt.lrc
○ 가정적 항변의 이해 곤란성
가정적 항변의 방식이 사용되는 배경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그래야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선 이들 논서가 가정적 항변방식으로 제시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문장 표현의 의미를 오해하기 쉽다.
또 그 가정적 항변 과정에서 일정한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추론 형태를 사용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표현의 의미를 오해하기 쉽다.
더 나아가 논의 취지나 배경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논의의 초덤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표현의 의미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경전도 이런 사정이 많다.
그런 사정 때문에 『금강경』에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다음처럼 질문한다.
즉, 나중에 후오백세에 어떤 이가 이런 구절을 대하면
과연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부처님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이와 같은 바탕에서 일반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임하게 된다.
그래서 경전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사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먼저 이들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도몽상증상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가정적 항변의 복잡성-상대의 망상에 맞춤
한편 이 가정적 항변은 논리와 추론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실재와 관련된 논의가 주로 이어진다.
그래서 언어표현도 일반인이 이해하는 의미와는 다른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논리나 추론 문제와 대부분 어려워한다.
그리고 언어 표현과 관련된 문제도 혼동을 많이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이 방안은 대단히 이해하기 복잡하다.
또한 가정적 항변은 일단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바탕에서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우회적이고 보충적인 방식이 된다.
또 그런 점에서 불완전한 측면도 있다.
즉, 문제되는 그 내용을 직접 놓고 그 내용을 직접 살피는 방안이 아니다.
가정적 항변은 다음처럼 논의하게 된다.
원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상대의 주장이 엉터리다.
또 그가 의존하는 언어나 추론 체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상대가 엉터리인 주장을 고집한다.
그래서 가정적으로 일단 상대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상대의 주장의 문제점을 제시해 주장을 논파해 나가게 된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일단 상대의 전도망상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의 망상 체계와 언어표현을 다 받아들이게 된다.
더 나아가 상대가 의존하는 엉터리 논리 추론체계까지 모두 일단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논의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먼저 이해해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이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적 주장을 비판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우선 칸트나 헤겔이 주장한 내용을 한번은 다 검토해야 한다.
또 문제되는 경우에는 해당 원어까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논의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 가정적 항변의 위험성
가정적 항변을 행하려면 먼저 상대가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장을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의 주장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곤란해진다.
그런데 이 부분이 가정적 논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복잡하게 여기게 한다.
한편, 가정적 항변은 우회적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복잡하다.
그래서 살피기 어려운 점이 많다.
한편, 이런 방식의 비판은 기대하는 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사정이 앞에서 제시한 소송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런 논의는 상대가 현실에서 갖는 전도망상 증상을 제거하려는 데 취지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가 수행의 자세로 전환해 나가게 하는데 취지가 있다.
그런데 논의를 하다보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논의에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다.
현실에서 법정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주장을 하며
쌍방이 다툼을 벌인다.
이런 경우 어느 한 일방이 논리 정연하게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논파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재판에서 소송을 이겼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런 재판으로 인해 당사자가 이후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또 상대가 다른 상대의 주장을 진심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이후 실천 노력하는 것도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이런 논의는 외관상 분쟁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알고보면 실질적 효용이 크지 않다.
그리고 관계된 당사자들은 그 부작용과 후유증을 대단히 오래 갖기 쉽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시비를 다투다 재판에서 패배했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는 상대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 주장은 엉터리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다만 무언가 잘못되어 억울하게 패배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정으로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와 관련한 또 다른 시시비비거리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실에서 논사가 처하는 상황은 비극적인 경우가 많다.
과거 법가사상가들도 대부분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는 결국 앞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즉 어떤 이가 논쟁에서 상대를 논파시킨다고 하자.
그리고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명확하게 밝힌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가 주장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상대가 의도한 대로 수행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경우가 적다.
그보다는 일단 자신을 논파시킨 상대에 극심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불쾌감을 갖는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보복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정작 수행으로 자세 전환은 잘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문제해결이 더 어렵게 된다.
일반적으로 저기에 영희가 있다가 이쪽으로 온다라고 여긴다.
또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생겨난다 는 등등으로 여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누구나 그런 내용이 옳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옳지 않은 망상분별임을 이해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자.
그래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상대 주장을 논파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반인 대부분이 바로 앞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즉, 그런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현실에서 보고 생각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명확하게 옳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 입장을 거꾸로 뒤집혀진 전도망상이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증상을 악화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영희가 거리에 있다가 이쪽으로 걸어 온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가 생각하는 내용이 현실에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 이가 가정적 항변을 통해서 그 주장을 논파당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로 인해 현실에서 그런 영희나 오고감을 얻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행으로 자세를 전환해 임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상대가 이치와 현실에도 맞지 않는 궤변을 펼친다고 여긴다.
단지 이론적으로만 그럴듯하게 내세운다고 여긴다.
그래서 상대를 논파시키기 곤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현실에서 자신의 주장이 오히려 옳다고 여긴다.
다만 논쟁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패배한 것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다시 상대 주장의 잘못을 끊임없이 찾아내려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공격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더 고집하고 나아가기 쉽다.
그런 가운데 상대를 공격하기 쉽다.
한편 그런 노력이 잘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가 거꾸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통해 그 주장을 논파하려 하기도 한다.
또는 자신이 가정적 항변을 '응용하여' 공격을 하기에 이른다.
거꾸로 그 주장을 자신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런 전제에서 상대가 다시는 그런 주장을 못하는 상태가 결과적으로 되도록 노력한다.
예를 들어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차피 주먹으로 상대를 가격해도 된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지금 살피는 『회쟁론』 첫부분에도 보인다.
즉 상대방부터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논의를 제기한다.
또 『용수보살전』에서도 그런 사례가 제시된다.
그런데 반드시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하튼 현실에서 상식적으로는 맞다고 대부분 여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전도몽상에 바탕한 엉터리 주장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서 전도몽상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이런 과정에서 필요하다.
그래서 이를 잘 살펴나가야 한다.
>>>
mus0fl--Lagaf - Bo le lavabo.lrc
○ 망집 제거를 위한 가정적 항변의 필요성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가장 원칙적인 내용은
그간 대단히 많이 반복했다.
세상과 자신의 본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런 방안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현실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보충적인 방안을 취하게 된다.
일단 일반적으로 망집 상태를 그대로 놓는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수행의 자세로 전환해 나오게 한다.
이런 방식이 오히려 효과적일 경우도 있다.
한편, 같은 사정으로 가정적 항변방식도 필요하다.
여기서는 일단 이 문제를 다음처럼 살피기로 한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도 누구나 엉터리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을 놓고 이 문제를 살피기로 하자.
예를 들어 철수가 어느날 자면서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꿈에서 자신이 많은 황금을 주어서 방에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그것을 영희가 나타나 다 가져가버렸다. .
그런데 그가 꿈을 깨고 나서 영희를 찾아간다.
그리고 가져간 황금을 하루바삐 다시 돌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해보자.
또는 어떤 이가 다음처럼 엉터리 주장을 한다고 하자.
저 화분에 있는 꽃은 rose(장미)다.
그런데 rose는 영어다.
그래서 저 화분에 있는 꽃은 영어다.
이런 이상한 주장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이들 비유로 드는 사례는 당연히 엉터리다.
지금 가정적 항변방식의 논의를 하는 과정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 이들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논사들이 각 내용을 놓고 임하는 상황이 이와 사정이 같다
상대가 주장하는 꿈 내용을 놓고 보자.
그러면 원칙적으로 현실영역에서 그런 꿈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현실영역에서는 그 내용의 유무를 따질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상대는 그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꿈 내용이 현실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다시 방편을 찾게 된다.
일단 설령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을 다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렇다해도 영희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또는 영희가 가져갔어도 꿈에서 다시 돌려주었음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런 식으로 상대가 그런 주장을 폐기하도록 이끄는 노력을 하게 된다.
두번째 문제도 비슷하다.
저 화분에 있는 꽃은 rose다.
그런데 rose는 영어다.
그래서 저 화분에 있는 꽃은 영어다.
이런 이상한 주장을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원칙적으로 그런 언어나 그런 추론 체계는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도 없음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도 상대는 그런 언어나 관념분별을 의존한 상태에서
그런 일정한 추론체계를 내세운다.
그리고 그런 추론체계나 그 주장이 확고하게 옳다고 고집하고 임한다.
그래서 다시 또 방편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대의 주장을 일단 다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다음처럼 비판한다.
일단 그런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도' 스스로 당연히 엉터리라고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그런 엉터리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밝힌다.
그래서 상대가 스스로 그 입장이 옳지 않음을 이해하게 만들고자 하게 된다.
그래서 저 화분에 있는 꽃이 영어라고 고집한다고 하자.
그러면 화분에 있는 꽃이 영어사전에도 그대로 들어 있겠다고 비판한다고 하자.
그래서 상대가 주장을 고집할 경우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될 문제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가 스스로 그 주장을 폐기하게끔 이끌게 된다.
○ 가정적 논의의 기본문제
if- 라면 방식으로 논의해가는 경우의 기본적 문제를 살펴보자.
○ 추론 체계의 문제
논의에서 만일(if) ~ 라면 이런 구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구문형태 가운데 다음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 형태를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이해한다.
S 는 M 이다.
M 은 P 이다.
※ 따라서 S 는 P 이다.
대부분 이런 추론식을 잘 이해한다.
그런데 정작 이 추론식이 왜 엉터리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하나를 살피는 데에도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회쟁론』에서도
if ... 라면, ~ 이다
이런 구조의 문장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 논의는 본래 일정한 추론체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를 살피려면 이런 추론 내용을 살펴야 한다.
한편 그런 추론을 진행하는 추론체계에 관해서도 살펴야 한다.
본래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그런 추론 체계 자체를 적용하기 곤란하다.
그런데도 이를 적용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근거부터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확립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후 무엇에 의존해 추론을 진행할 수 있는가부터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기계에서 제품을 만든다고 하자.
그런 경우 불량제품이 한 두개 나와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어떤 추론식을 통해 추론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추론식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이 하나라도 도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런 추론식은 논의에 사용하기 힘들다.
추론식 자체에서부터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추론식에 의존해 추론을 마쳐도 문제가 있게 된다.
즉 그에 의한 결론을 옳다고 보아야 할지 그르다고 보아야 할 지를 판단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경우는 추론식에 의존해 추론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
즉, 결론의 진위 판단과정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여기서는 사정상 이런 문제는 일단 생략한다.
즉, 추론 체계 자체에 담겨 있는 문제를 살피는 일은 생략한다.
이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살피기로 한다.
그러나 이는 여러 추론식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검토하는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인도 인명론의 여러 추론형식이 있다.
그리고 서양의 형식 논리학적인 연역추론식도 있다.
또 이와 성격이 다른 귀납 추론식도 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추론식과 관련된 여러 기본적 문제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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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주장비판과 자신주장의 모순문제
한편 일정한 추론체계를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리고 이런 추론체계에 따라 가정적 if 구문을 사용해 계속 논의해간다고 하자.
이런 경우 공통적으로 먼저 주의해야 할 기본 문제가 있다.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이런 바탕에서 각 논자 입장으로 들어가 살펴보자.
『회쟁론』에서 첫부분에
'체'가 없다면 ~ 이렇게 된다.
'체'가 있다면 - 이렇게 된다.
이렇게 서로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체가 없다면 - 이렇게 된다' 라는 내용을 살펴보자.
그런데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을 생각해보자.
이 입장에서는 정작 '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탕에 있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체가 없다면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일체에 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하자.
그래서 그런 자신의 본 입장을 관철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다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하자.
체가 없다면,~~ 이러이러하게 된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래서 문제가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취지다.
그런데 그의 입장을 시종일관 관철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처럼 '체가 없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처럼 체가 없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체가 없으면 ~~이러이러하게 된다는 관계성도 처음부터 파악할 수 없다.
그런 관계성을 파악할 경우가 현실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입장에서 그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었는가가 문제된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입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계속해서 양 입장간에
~ 이면 - 이다 ( 그래서 문제다. ) 이런 형태의 주장이 이어진다.
그래서 누군가 이 논의를 잠깐 중지시킨다고 하자.
그리고 다음처럼 말한다고 하자.
당신이 계속 '~ 이면 - 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당신의 본 입장은 그와 반대되는 내용을 주장하는 상태다.
그런데 당신의 입장에서 그 사실 및 그 관계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만일 당신이 그 사실을 그처럼 알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처음 주장이 잘못임을 오히려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이는 조금 이상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경우 if-라면 형식 문장을 가정적 항변의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이 경우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용수보살님 입장에서는
가정적 항변의 취지에서 이런 논의를 진행한다.
따라서 이런 가정적 방식의 논의를 제시해도 그 자신 입장에서 큰 문제가 없다.
그래서 가정적 항변을 제시하는 입장에서
if-라면 방식의 추론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어떤 내용을 적극적으로 세우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앞에 제시한 문제점이 있게 된다.
>>>
● 가정적 항변의 배경사정과 가정적 항변방식
○ 논의의 초점과 목표 및 취지
일체가 체가 없고 공하다고 밝힌다.
이는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래서 현실 내용이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생생하고 얻는다.
또 이를 바탕으로 관념영역에서 관념분별을 명료하게 일으킨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 - 감각현실 영역 - 관념분별 영역을 놓고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 각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밝히는데 초점이 있다.
그래서 마치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내용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핵심 부분이 된다.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
그러나 그 영역에서 그처럼 얻는 것이 현실이다.
즉, 그 각 내용은 그 영역에서 그렇게 얻는다.
그러나 그 각 내용은 그 바탕이 되는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는 일정 영역에서 일정 조건에서만 얻는 것임을 밝힌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논의의 초점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과 이런 취지에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논의하고 살펴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을 다른 내용과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주의해야 한다.
한편 이런 유무판단과 관련된 기본적 내용은 다음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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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3483#069
sfed--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sfd8--불교단상_2562_08.txt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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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적 항변 방식에 의한 유무문제 논의의 문제점
일반적으로 현실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런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취지로 현실 내용이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음을 밝힌다.
또 본 바탕 실재가 공함을 밝히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런 바탕에서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논파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결론을 이해시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를 수행에 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장구한 세월을 요하게 되기 쉽다.
『회쟁론』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회쟁론』의 구조를 보면 용수보살님은 무아 무자성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또 그런 내용에 대해 계속 비판하는 이가 현실에 있을 수 있다.
본래 용수보살님 입장에서는
어떤 주장을 내세울 것도 없고 부정할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떤 주장을 전개하는데 사용할 방식을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런데 다만 상대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임한다.
그래서 이제 자세를 전환해서
그런 엉터리 상대의 주장을 그대로 일단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망집이 갖게 되는 문제점을 시정하게 해주려 하게 된다.
따라서 다시 현실에서 이런 방식으로 임하게 되는 배경 사정을 또 이해해야 한다.
우선 현실 사정이 만일 그와 같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이런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if-라면 식 논의를 통한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는
상대가 그런 망지을 일으켜 완강히 고집하고 집착하는 상태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논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런 상태라면 그런 입장에서 또 해도 무방하다
이런 입장에서 임하는 것이다.
즉, 반드시 이런 입장으로만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본래 아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 추론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공한 사정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하는 방안은 이외에도 많다.
이런 사정도 잘 이해해야 한다.
가정적 항변이란
상대의 주장이 이치에 맞아서
용수보살님이 일일히 논의에 참여한다는 입장이 아니다.
처음부터 상대의 주장이나
상대가 제시하는 IF 라면에 사용하는 추론 체계 등은 하나같이 엉터리다.
그러나 상대가 하도 억지 고집을 피우는 상태다.
따라서 일단 양보해서 상대의 주장처럼 사정이 그렇다고 인정해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면 이러이러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그래서 상대가 스스로 그 주장이 갖는 문제를 시정할 계기를 제공해주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IF 논의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소송에서 사용하는 '가정적 항변'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경우 상대가 사용하고 바탕하고 있는 엉터리 추론이 무엇이던 관계없다.
일단 그것을 용수보살님이 받아들여준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if ~ 라면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런 전제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점을 만나게 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상대가 처음 주장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 논의해가게 된다.
즉 '가정적 항변' 논의는 먼저 상대의 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상대의 주장이 그런 바탕에서 잘못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런 잘못된 주장을 폐기하게 이끄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그로 인한 문제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취지의 가정적항변 방식 논의의 특성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용수보살님이 어떤 가정적 논의를 한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는 용수보살님이 내세우는 어떤 주장이 아니다.
또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용수보살님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런 취지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서양의 귀류논증이 사용되는 경우와 다른 점이다.
서양 귀류논증에서는 이는 간접증명방법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간접적으로 그와 모순되는 결론을 증명하고자 하는 취지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서양의 귀류논증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a 가 b 라는 것이 잘못임을 밝힌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결론을 통해 이와 모순되는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a 는 b 가 아니다. 따라서 c 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하자.
이런 경우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고자 주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회쟁론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가정적 항변에서 용수보살님이 추론에 사용하는 추론식이 있을 수 있다.
또 이 추론에 사용하는 각 단어나 문장 구절도 있다.
그리고 일정하게 무언가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내용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주장을 처음 내세우는 상대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런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은 상대의 입장이다.
또 그런 추론을 행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여기는 것도 상대의 입장이다.
가정적 항변에서는 이 문제점을 지적하는 입장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대의 입장이 옳지 않다고 원칙적으로 본다.
다만 그것을 밝히기 위해 일단 그런 상대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를 그 상대 입장에 서서 밝혀주게 된다.
따라서 제시하는 내용 전체는 상대의 입장에 있는 문제점들이다.
이를 그런 가정적인 입장에서 살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용수보살이 내세우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지금 논의에서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왜 용수보살님이 그런 비판이나 내용을 제시하는가.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파사현정을 행하는 기본 취지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함을 파악하여 현실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음을 파악한다고 하자.
그런데 망집을 일으켜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입장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가정적 항변을 통해 '가정적' IF 라면 방식의 논의를 전개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제거하게 한다.
mus0fl--Ben L'Oncle Soul - Soulman.lrc
대략적으로 위와 같은 기본 골격과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이제 점차 구체적인 논의를 살펴나가야 한다.
다만 하루에 모든 문제를 살피려면 곤란하다.
따라서 적당한 부분까지만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후에 또 그 다음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 『회쟁론』의 구체적 고찰
대략적으로 『회쟁론』이 논의되는 배경사정을 살폈다.
그리고 가정적 논의가 행해지는 기본 골격과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이런 바탕에서 점차 구체적인 논의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여기서는 앞에서 살핀 문제를
『회쟁론』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첫 대목을 놓고 살펴보기로 하자.
용수와 대론하는 어떤 상대가 있다.
그런데 그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고 제시된다.
만약 일체에 자체[體]가 없다면 [= 용수보살님 입장]
언어도 일체에 속하니 언어 스스로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언어에 자체가 있다면 앞서 세운 주장이 깨어진다.
..[ 일체에 자체가 없는 경우 있게 된다고 보는 문제점을 상대방이 제시한 내용 ]
이 문장을 보면 일단 위에 제시한 if--라면 구조의 판단이
2, 3 개 정도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일체에 자체가 없다면 ~
언어 스스로 자체가 없다면~
언어에 자체가 있다면~
이런 내용이다.
각 주장자가 'if ~ 라면 - 이다'
이런 형태로 각 내용의 관계를 제시한다고 하자.
이 경우 상대는 이런 관계나 내용이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관계가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체가 있는 것으로만 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
또 체가 없는 언어로는 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논의를 살피다 보면 대단히 복잡하다.
위 문장만 놓고 보면
표면상으로는 if-문장 구조가 많아야 2-3 개 정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단히 많은 if-문장 구조로 된 문제가 종합적으로 들어 있다.
if- 문장 구조가 1 개만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그런 if~ 문장에서 그런 결과가 얻어지게 되는지 밝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뒷 부분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용수보살님은 위 관계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이 내용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if-문장 구조가 하나만 잘못 제시되어도 문제해결이 복잡하다.
>>>
○ if 만일--라면의 논의의 의미
문장에 사용된 각 단어의 의미를 적절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입장에선 다음을 살펴야 한다.
우선 만일- 라면 구조의 문장에서
'만일' 이란 말 자체가 무슨 의미인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처음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이란 표현이 무언가
=> 왜 만약을 문제삼는가, 있는 현실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있는 현실을 있는대로 보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만약이란 표현을 사용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만약을 말한다고 하자.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논의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논의는 어느 부분에서 논의하는 것인가.
단순히 사전에 나열되는 언어 차원의 영역에서인가.
아니면 당신의 관념속인가.
아니면 감각으로 얻는 감각현실에서인가.
또 감각이라면 시각정보로 얻는 내용에서인가 아니면 청각정보영역인가
아니면 실재영역에 들어가 무엇을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는 상태인가.
도대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상태로 무엇을 살피고 논의하는 것인가.
이 가운데 어떤 경우를 만약이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그런 경우 각 내용의 관계는 무엇으로 실험하고 확인한 것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자.
그러면 벌써 나열되는 수많은 if ~ 라면 형태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크게 나누어 살펴야 할 경우수가
언어-관념분별-감각현실- 실재-진짜라고 할 실체의 존부문제에 걸쳐 나열된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문제가 대강 5 개 정도는 파생되어 제시된다.
그래서 왜 이가운데
처음에 얻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이 가운데 어느 부분에 위치한 내용을 놓고 문제삼는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또 그런 내용을 놓고 왜 '만일'이란 가정문을 통해 이를 살펴가게 되는가부터 답을 해야 한다.
이는 다음 문제다.
우선 언어는 다양한 영역과 측면을 가리키고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문장에서 언어로 'if - 라면 - 이다'라는 구조로 관계성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우선 그런 내용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결론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어떤 측면의 한 내용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경우 결론으로 얻고자 하는 그 내용을 직접 놓고 살펴서 내용을 확인하면 간단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영역에서 'if - 라면 - 이다'라는 형태로 이를 살핀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의 내용에 밀어 넣어 적용하려 한다.
그래서 그렇게 하게 되는 사정을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if - 라면 - 이다'라는 형태로 된 내용을 살펴야 한다.
즉, 이런 내용은 다시 무엇을 근거로 제시된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과 관계를 확립하게 된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철수의 옷이 더러운가 아닌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철수 옷을 직접 살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영희의 가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렇게 하는 사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 논의가 갖는 기본 특성이다.
이 경우 논의 초점이 실재 영역의 내용에 있다.
그런데 그 실재 영역은 어떤 주체가 어떤 내용을 직접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처음 제기되게 된다.
실재 영역의 어떤 문제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른 감각현실이나 관념영역의 내용을 가지고 살핀다고 하자.
그 사정은 문제디는 실재 영역의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하자.
그런 경우 현실 내용과 실재영역의 관계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내용을 살펴나가야 한다.
IF A 라면, B 이다라는 형태 문장에는 A 와 B 사이의 관계성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관계성은 도대체 어느 영역에서 관찰한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또 그와 같은 관계는 어떤 근거로 확립해 제시된 것인가부터 파악해야 한다.
A 와 B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아무 근거가 없이도 그저 관념을 나열해 제시한다고 하자.
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떤 소설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제시하더라도 무방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등불을 켜면 산신령이 나타나서 금도끼를 주고 간다.
이런 내용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그 옳고 그름을 살피기 곤란하다.
소설가가 상상에 바탕해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속의 등불은 특수한 등불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이것을 놓고 옳다 그름을 문제삼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은 억지 주장이 된다.
그리고 희론으로서 논의할 가치가 없다.
주장은 논의하고 검토할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제시하는 내용이 타당한 근거나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는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나하나 보여줄 필요가 있다.
IF A라면, B 이다라는 구조로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문장에 들어가는 A와 B 가 그런 관계로 제시되는 근거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 감각현실과 관념 및 각 영역 사이의 혼동
연못에 도끼를 떨어뜨리고 찾는 나뭇꾼의 이야기가 있다.
이런 경우 산신령이 나타나 나뭇꾼에게 이 금도끼를 문제삼은 것인가.
아니면 이 은도끼를 문제삼은 것인가.
아니면 이 쇠도끼를 문제삼은 것인가.
이렇게 문제를 나열하게 된다.
이 때 나뭇꾼이 자신의 쇠도끼를 찾는다고 하자.
그 경우 당신이 빠뜨렸다는 쇠도끼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산신령이 가지고 나온 쇠도끼 그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또 그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인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 상황에서 우선 나뭇꾼은 자신의 쇠도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쇠도끼를 매순간 눈으로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감각현실도 얻는다.
그런데 이런 감각현실은 다음 순간에 얻어내지 못한다.
즉 눈을 감게 되면 그 직전에 본 내용 조차도 다시 얻어내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
그런데 그런 나뭇꾼이 잃어버린 쇠도끼를 찾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상황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도끼를 찾는 것인가가 처음 문제된다.
물론 이 경우 그가 과거에 보았던 감각현실을 놓고 찾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억해 떠올리는 쇠도끼를 의존해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산신령이 들어 보이는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그렇다.
그렇지만, 쇠도끼를 대해 현실에서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를 또 구분한다.
그렇게 현실에서 그처럼 구분을 행한다.
그런데 현실 상황에서 그처럼 쇠도끼를 구분한다고 하자.
그 경우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판단을 행하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옳은 내용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경우 사실은 그 근거를 쉽게 답하기 곤란하다.
지금 산신령이 나뭇꾼에게 보여주는 것은 감각현실로 파악할 내용이다.
그런데 나뭇꾼이 찾는 도끼는 기억을 통해 되살려 얻는 관념이다.
그래서 그가 갖는 쇠도끼에 대한 관념을 기준으로 찾는 상태다.
그런데 이는 기억을 잃어버린 이에게 과거의 기억을 찾아주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 쇠도끼를 찾는 문제다.
그런데 산신령이 내민 다른 이의 쇠도끼를 자신의 쇠도끼로 알고 가져간다고 하자.
그러면 곤란하다.
그래서 어떤 쇠도끼가 자신의 쇠도끼임을 정확히 확인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 쇠도끼가 자신의 쇠도끼라고 볼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 논의는 인식 판단과정과 관련한 어려운 문제다.
한 순간에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이 과거에 경험한 감각현실과 같은가 다른가를 판단해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를 무엇을 기준으로 확인하게 되는가의 문제다.
어떤 이가 어떤 감각현실을 얻는다.
다시 그에 대해 어떤 분별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감각현실은 그런 관념분별로 판단한 내용을 갖는가.
어떤 한 내용을 한 영역에서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이 적용되고 타당하다고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생각해 보면 세상엔 이상한 일이 많다.
손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손에는 소리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
그래서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관계가 하필 그렇게 되는 사정을 살핀다고 하자.
그런데 손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그 단어설명에 소리라는 글자가 적혀 있기에 그렇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아니면 손이란 글자도 ㅅ 으로 시작하고 소리도 ㅅ 으로 시작해서 그런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경우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찾아 살펴야 한다.
눈으로 보는 손의 모습이 있다.
이를 놓고 그것이 귀로 듣는 소리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현실에서는 이런 관계를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관계성은 결국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일으키는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가 문제된다.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tv 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고 하자.
그것은 모니터 화소 상에서 유리컵이 떨어지는 장면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리고 TV 에 붙은 스피커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옳은 주장으로 보기 힘들다.
그런데 위 주장은 그런 성격을 갖는 주장이다.
○ 무량한 망상분별과 가정적 항변논의의 어려움
IF -라면 구조로된 논의에서는
살펴야 할 문제가 대단히 많이 쌓여 있다.
그래서 무량한 IF -라면 구조의 논의를 예상하게 된다.
가정적 항변 방식을 통해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이 실재 영역을 비롯해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실답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주로 상대가 그런 관념이 실답게 다른 영역에서 존재한다는
그런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관념영역 안에서 처음 관념적 주장을 바탕으로
자체적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거나,
그렇게 실답게 있다는 내용이나,
또는 그와 모순해서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내용이
바로 관념영역안의 그런 관념에 의존해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진다는 사정 등을 통해서
그것이 결국 관념영역안의 문제고
다른 영역에서 이와 관계없이 '별도로 있는' 내용이 아님을
밝히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결국 이들 관념적 내용들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이라는 주장
그래서 실다운 내용이라는 주장이 잘못임을
밝히게 되는 주요 방식이 된다.
그런데 이런 IF -라면 구조의 논의할 수 있는 내용은
사실은 상대가 일으키는 망집에 따라서 무량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무량한 if 가정적 논의로
시간을 소득없이 낭비하기 쉽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려면,
처음부터 앞에 제시한 골격부터 잘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논의에 임하는 초점을 잘 맞추고 논의를 살펴나가야 한다.
>>>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해 논파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해당 내용을 직접 제시하는 것이 차라리 간명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아 무자성 공을 문제삼게 된 사정을 살피는 것이 편할 수 있다.
또 그런 내용을 그렇게 제시하게 되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 편할 수 있다.
물론 그 내용이 이해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관계없이 그 상태에서 수행에 바로 착수하는 것이 낫다.
상대가 매 경우 억지 주장을 제기한다고 하자.
이 경우 상대의 억지 주장을 일일히 붙잡고 논파하는 것은 번잡하다.
그리고 각 주장마다 논의가 복잡하게 전개되는 사정이 있다.
여하튼 여기서는 이런 기본적 내용만 살핀다.
그리고 구체적 내용들은 다음에 또 이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
○ 실재에 대한 논의시 가정적 논의를 사용하는 사정 -직접 살피기 곤란함
#실재는 언어표현%[명칭]을 시설해서 그런 내용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 주체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그래서 논의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어려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가정적 항변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만일 ~ 라면 이라고 가정한 가운데 논의하게 된다.
논의하고자 하는 본 내용을 직접 제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는
주관과 관계하지 않는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그러나 이런 #실재에 논의할 때
제출하고 문제삼는 내용은 대부분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된다.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일체 내용은
결국 그 주체가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거나 관념분별이다.
그런데 논의 초점은 현실의 감각현실 및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를 살핀다.
그런데 정작 그 논의에 사용하는 자료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들이다.
그리고 논의에서 이들 각 내용을 언어표현이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 각 측면이 얽히게 된다.
그리고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과 관련해 혼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논의에서 초점을 잘 맞추어야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mus0fl--Jackie Quartz - Mise Au Point.lrc
지금까지 기본적인 내용을 살폈다.
이제 가정적 항변의 구조를 살피기로 한다.
○ [pt op tr] ▼https://www.youtube.com/watch?v=d6nec1cvYwc
이제 앞과 같은 주제를 놓고
가정적 항변을 행하는 방식이나 원리에 대해서 살펴야 한다.
그런데 대강 설명할 분량이 많다.
그런데 논서 내용은 하루만 살피고 마칠 일은 아니다.
따라서 부족한 부분은 기회가 될 때 또 이어 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원칙적인 방안을 잘 해결한다고 하자.
그러면 굳이 무량한 IF 논의에 들어가 살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가정적 항변으로 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앞에 간단하게 제시한 원칙적인 방안을 집중해 살피는 것이 좋다.
가정적 항변은 위와 같은 원칙적인 방안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살펴나가면 된다.
그러나 원칙적인 부분을 잘 해결한다고 하자.
그러면 보충방안은 그다지 필요가 없게 된다.
○ 실재에 대한 논의에 사용하는 현실 내용
한편 각 그림에는 # 실재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다.
이는, 어느 주체도 현실에서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또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정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일단 각 그림에 # 실재라는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온갖 분별을 행하고 주장을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일단 무언가의 정체를 놓고
그것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주장을 제시한다고 하자.
또 무언가가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은 깨끗하다 더럽다.
~은 좋다 나쁘다 등등 온갖 분별을 행하고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기본 내용을 재료로 삼아서 그런 주장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옳고 그름을 놓고 따질 때도 마찬가지다.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을 그 근거로 제시하면서 논의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앞과 같은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바탕에서 가정적 항변의 논의가 제시되는 사정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게 되는 사정을 살펴나가야 한다.
○ ▼mus0fl--Les Enfoirés - Toute la vie.lrc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구분 문제가 잘 정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동을 일으킥 된다.
실재는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실재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사정이 더 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논서에 제시된 가정적 항변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내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여기게 되기 쉽다.
그래서 해결하기 곤란한 상태로 남기 쉽다.
● 언어를 통한 망집과 생사고통
지금 피 흘리는 손을 보고 피 흘리는 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
이런 내용을 앞에 제시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내용을 적은 문장을 살펴보길 하자.
이 경우 앞 부분과 뒷 부분에 글자를 똑같이 적고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혼동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 이 혼동 문제의 심각성도 함께 잘 이해할 수 있다.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에서 문제되는 내용을 다 함께 접착시켜서 대하기 쉽다.
글자 자체는 언어내용에 해당한다.
한편, 그 글자가 각기 가리키는 각 영역의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들을 다 접착시켜 대하기 쉽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각 문제를 살펴나가기 쉽다.
실재의 정체나 실체 문제를 살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외 온갖 문제에서 그런 자세로 임하기 쉽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이렇게 살펴보자.
우선 ' 지금 피 흘리는 손을 보고 피 흘리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장이나 글자 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 경우 자신이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피흘리는 손이 있다.
그래서 이런 감각현실을 대응시킨다고 하자.
또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은 대부분 한국사람이다.
그런데 처음 단계에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입장은
처음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그렇게 임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내용을 가리키는 언어내용을 놓고도
이런 입장으로 임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나중에는 이 3 가지 내용을 놓고 다 함께 뒤범벅이 된 상태가 된다.
원래 상태를 이해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외국인이 위 문장 글자를 놓고 대하는 상황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사람이나 불란서사람이 한글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이들이 이를 대하는 상황과 잘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표기이고 글자라고 여기게 되는 정도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글자만 보고도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는 그저 '물` 이렇게만 옆에서 외쳐도 경기를 일으킨다.
이 현상이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결국 처음 얻는 감각현실 => 관념분별 => 언어 => 언어 관념 => 언어 감각현실
이런 관계를 놓고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각 내용은 본래는 서로간에 엉뚱하다고 할 별개의 내용이다.
그러나 전도몽상 상태로 이것을 반복해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주체는 이를 다 접착시켜 현실에 임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글자만 죽 읽으면
그로 인한 반응이 다 이끌려 나오게 된다.
나중에는 그런 언어표현이나 글자는
곧 그것이 가리키는 그 내용이라고까지 여기게 된다.
이 부분도 그 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별로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잘 이해하고 사용하는 입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망집현상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망집현상이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 부분이 문제다.
그 내용을 대하는 미국사람이나 외국인을 놓고 비교해본다고 하자.
그러면 본 사정은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글자가 쓰여진 부분을 대하는경우
원래는 글자가 하나의 그림으로서 그 형체에 대한 관념만 얻게 된다.
그러나 앞의 상태에서는
언어가 가리키고자 한 내용을 바로 건네준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다 겪고 이해한 것 같은 상태로 바로 넘어가게 된다.
책을 빨리 읽고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가 사실은 그와 같다.
히말라야산에 올라가서 겪은 추위
이렇게 글자만 보고 곧바로 오한까지 느끼는 상태가 된다.
이를 좋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는 다르다.
그가 어떻게 처음 그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살핀다고 하자.
그 경우 바로 이런 부분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어느날 길 거리를 가는데
어떤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그 이후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욕설이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또는 전혀 의미를 갖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조금 엉뚱하다.
그런데 이 상황이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 첫 단계의 문제다.
○ 실답지 않음에도 실답다고 망집을 일으키는 기본 배경
원칙적인 사정은 이미 앞에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과 같다.
본래 사정이 그렇다.
그렇지만, 어떤 이가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계속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집착을 갖고 임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이 어느 단계에서든지 전도망상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수행으로 전환해 벗어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 각 단계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뒷 단계로 넘어갈 수록 점점 현실적으로 수행을 행하기 힘들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 문제를 다시 살펴야 한다.
아무리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도
망집에 빠진 상태가 될까를 또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왜 매번 대하면 그것이 자신이 분명하다고 여기게 되는가.
그런데 그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게 되는 사정이 대단히 많다.
이것이 바로 그를 수용소로 끌고 가는데 사용되는 족쇄이기도 하고
또 그 족쇄가 그렇게 효과적으로 작용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 나열해 살필 수는 없다고 보는데
이미 그 대강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무리 그렇게 보려고 해도
자신이 어디론가 가야 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평소 자신이 자신의 손과 발로 여긴 그 부분만 따라 이동해 온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손을 컵에 갖다 대면
그 때 촉감을 느껴진다.
그러니 이 손이 그 촉감을 느끼게 한 주관의 부분이 아니라고 볼 도리가 없고
또 그 컵은 그런 주관에 해당하는 손이 대하게 되는 외부 대상이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컵은 그런 주관과는 성격이 다른 외부 물질이라고 보고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은 또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메뚜기나 박쥐를 자꾸 거론하면 곤란하지만,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이 현실에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들이 다 같이 그 현장에 임하면
자신이 컵으로 보고 건네주는 것을 컵이라고 다 똑같이 여기고
그렇게 자신처럼 다 대한다.
그리고 자신 혼자만 생각해도
어제 컵이라고 보고 대한 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제 한 실험을 오늘 또 해보아도 또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금 이 상태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자신이고
그리고 이 상태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손과 발이 잘려 나가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것이 실답지 않다는 내용을 제시하지 말라고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사정이 이런만큼
이런 내용과 이런 생각내용은 하나같이 실답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이 실답다는 이야기는
이 내용이 실재에도 그러하고
사정이 그렇기에 눈을 뜨면 매번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된다고 여긴다.
또 그런 내용을 보게 되면 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생각내용은 그런 감각 현실에도 그처럼 있고
그것은 또 실재도 그렇다고 여기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참된 실체를 갖는 진짜다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에 바탕해 이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들이 하나같이 실답다고 여기면
당연히 이에 집착하면서 그 각 내용을 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당장 매 순간 요구되는 행위를 어쩔 도리 없이 행하게 된다. [신구의 3업]
이것이 현실에 임하는 대부분의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이후 본격적인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
즉, => 그런 상태에서
3 악도의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하게 받는 수용소를 향해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수용소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이런 전도몽상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바탕에서 이를 취해 붙들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헤아려 이를 해결해야 한다.
원칙적인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들은 하나같이 엉뚱하고 이상한 상태다.
그리고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임하는 상태다.
그러나 사정이 그럴수록
자꾸 그런 전도몽상 분별을 일으키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그 사정을 또 한편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그 입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것이 왜 엉터리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살피는 가정적 항변이 중요하다.
○ 가정적 항변의 어려움 - 무량한 상대의 입장 받아들이기
다만 이런 논의는 구체적으로 대단히 복잡하다.
이 가정적 항변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방편과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가정적 항변을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원래 원칙적으로 이들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앞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일단 그 상대의 입장에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아윈시타인이면
아윈쉬타인이 의존하는 그런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그 논의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문제점을 비판하게 된다.
그래서 그 바탕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을 계속 고집하면
나중에 필연적으로 어떤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가를
빨리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에게 제시해서 살피게 한다.
그리고 상대가 그 문제를 잘 해결하라고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다.
그리고 이 내용이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많다.
가정적 항변은 우선 상대가 의존하는 바탕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점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설명이 복잡하다.
앞의 상황을 놓고 보자.
아윈시타인이 주장하는 내용이 문제라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전공이라고 할 시 감상만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문제가 해결되기 곤란하다.
그래서 상대가 의존하는 내용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그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문제를 찾아내 제시해주어야 한다.
원래 바탕이 엉터리므로 문제점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각 경우마다 무량하게 다르다.
또 그 사정이 하나같이 다 다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논의도 복잡하고 힘들게 된다.
○ 가정적 항변에 대한 오해 - 귀류논증을 간접 증명으로 혼동
그런데 이런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논의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는 상대 입장에서 다시 잘못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예를 들어 현실에 A 가 있다고 누군가 주장을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가정적 항변을 적용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주장자의 입장을 일단 처음에 모두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가 사용하는 언어나 추론 체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는 본 취지 등을 살펴야 한다.
그 다음 그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상대 스스로 잘못이 분명함을 바로 이해할 내용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 그렇게 되는 관계까지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상대에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스스로 검토해보게 한다.
그래서 이는 논리학에서 사용하는 귀류논증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같은 내용은 아니다.
여하튼 상대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만날 문제점을 찾아 제시해줘야 한다.
그래서 그 상대가 뚜렷하게 잘못임을 이해할 수 잇는 부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이런 노력 자체가 힘들다.
그런데 그런 문제점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래도 그 상대는 다시 이를 오해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A 가 있다는 주장을 처음 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앞과 같은 가정적 항변의 방식을 통해 그 첫 주장이 잘못임을 밝힌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상대방은 이제 다음과 같이 되기 쉽다.
A 가 있다는 자신의 주장이 그런 사정으로 잘못이다.
그러니 이제 A 가 없다고 해야 한다.
즉 그가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다시 이런 내용을 붙잡고 나아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논리학에서 귀류논증식을 사용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상태는 사실 이와 같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런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원칙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역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다시 이것을 붙잡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게 된다.
즉, 앞 방식처럼 가정적 항변방식을 취해 그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입장을 폐기하게끔 해야 한다.
이제 이렇게 되면 원 증상이 해소가 될 듯 하다.
그러나 이제 상대는 그것은 A 가 있는 것도 아니고 A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자꾸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렇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느 단계에서는 종합적으로 그것이 무언가? 이렇게 임하게 된다.
○ 무량한 가정적 항변
그래서 처음 가정적 항변을 적용할 때
이로 인해서 상대가 빨리 그 상태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원칙적인 내용으로 임하게 되면 좋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면
또 그 바탕에서 그런 성격의 문제들이 계속 이어져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현실에서 무량한 IF 논의에 들어가게 되기 쉽다.
현실에서 게임이 문제라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게임하나가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무량한 내용을 만들어 내게 된다.
산수 숫자와 덧셈 규칙이 제시되면
이것을 가지고 무량한 산수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런 가정적 항변을 통해 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적 내용을 정리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본래 생멸이나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를 다시 불생불멸... 이렇게 표현해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이를 다시 다음처럼 이해하기도 쉽다.
즉, 이 내용을 통해서 불생불멸을 확립했다.
이렇게 나아가기 쉽다.
이 현상은 결국 앞 내용의 연장선이다.
무엇이 공하다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또 공을 확립했다고 나아가기 쉽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증세가 심한 상태다.
불생불멸에서 불이란 글자에 집착해 잘못 대하기 쉽다.
또 공이란 글자에 그런 자세로 집착을 갖고 잘못 대하기 쉽다.
또 어떤 경우는
무엇이 공하다는 사정을 확인하거나 입증하려면
그것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님을 입증하면된다고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가정적 항변 논의에 대해 이런 형태로 오해하기 쉽다.
이처럼 가정적 항변으로 상대의 주장을 논파한다고 하자.
그래서 상대 주장이 엉터리 망상분별임을 이해시킨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자신의 망상분별 바탕에서 이처럼 입장을 다시 취하게 되기 쉽다.
그런 경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런 경우 결국 그 모든 경우 사정이 그와 같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칙적인 방안을 통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만 제시했다.
현실에서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그런 구체적 사정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각 주체가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된 기본 사정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가도 살펴야 한다.
전도몽상 분별 증상이 현실적으로 무량하다.
그런데 무량한 분별 내용을 하나하나 붙잡고 살피기는 곤란하다.
물론 이론상은 그렇게 해야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우선적으로 해결할 문제부터 살펴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 내용이 하나 문제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물리학 내용전체를 소개하고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기초적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공통한다.
즉 온갖 학문분야에서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논리학이나 어학이나 기타 학문분야 사정이 같다.
즉 기초부분에 이런 망집 증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잘 해결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바탕해 일으키는 무량한 전도몽상 분별 증상도 잘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함께 같이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원칙적 방안만으로 잘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세부적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는 차원에서 임해 해결할 문제가 된다.
>>>
내용 가운데 반복 제시하는 부분들이 많다.
여하튼 일단 이것으로 가정적 항변의 기본 문제를 마친다.
그리고 앞으로는 가정적 항변이 제시된 구체적인 부분을 놓고 이어 살펴가기로 한다.
○ 귀류 논증의 구체적 관계성의 이해 곤란성
구체적 문제에서는
주장을 전개하는 상대 입장을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 if 문장에서 결론이 이끌어지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점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각 문장과 문장의 관계부터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논리의 비약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마치 바둑을 둘 때
9 단들이 시합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가 어떤 돌을 두자
상대가 그 상태에서 곧바로 돌을 던지고 패배를 인정한다.
이런 경우에
바둑을 그래도 조금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왜 다 두지 않았는데 서로 그러는가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둑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왜 그 돌이 그 앞 돌에서 그렇게 나타나고
또 그것이 그렇게 되는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정적 항변이 제시된 내용들의 사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상태는 쉽게 말해 오목에서 5 알을 만드는 상태에서
4 알을 어떤 이가 나란히 놓아서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상태가 된 것이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사정은 원칙적인 입장을 놓고 대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전도망상 상태에서 내용을 전개한 입장을 놓고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대해야 그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이해가 각 문제마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각 경우마다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앞 내용에서 뒤 문장 내용이 갑자기 제시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내용은 왜 그런 상태를 만드는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가정적 항변의 구체적 내용을 살피는 경우 이것이 하나하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복잡해지게 된다.
>>>
○ 결론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제 - 악취공견
이런 내용을 계속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나중에 이른바 악취공견의 입장으로 극단적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역시 문제가 된다.
원칙적인 내용은 원칙대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한다.
즉 부처님이 제시한 수행내용을 집착없이 잘 임해서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한 측면에서 극단으로 나아가 임하면 곤란하다.
금강경에서
중생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수행에 정진해야 함을 제시한다.
또 보시하는 이나 보시를 받는 이나
보시하는 것이나 보시하는 행위나 모두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시를 또 무량하게 행해야 함을 제시한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어느 측면이나 부처님이 가르친 것처럼
다 함께 잘 성취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 사정이 위와 같다.
그런데 앞의 내용을 놓고 다음처럼 이해하기 쉬다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또 그렇게 행할 바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처럼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앞과 같은 바탕에서 뒤 내용이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앞에서 반복해 살폈다.
여하튼 그런 바탕에서 그처럼 수행에 잘 임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가정적 항변 논의가 행해지는 본 취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임해야 한다.
>>>
○ 회쟁론 논의에서 일으키기 쉬운 혼동
회쟁론 등에서 혼동을 많이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
우선 이 논의가 가정적 항변 성격을 갖고 제시되는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대한다.
또 하나는 회쟁론에서 사용되는 각 표현들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들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의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내용을 그 주된 논의대상으로 초점을 맞추고 논의하는지 모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논의는 하게 되는 사정과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배경 사정등을 전체적으로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각 표현만 지엽적으로 붙들고 그 의미를 찾는다고 하자.
그러면 내용 파악이 힘들게 된다.
한편, 실재의 공함 실체의 없음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내용을 원칙적으로는 직접 살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가정적 항변으로 논의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영역의 어떤 관계를 근거자료로 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영역의 어떤 내용을 밝히는가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각 표현은 이들 각 영역의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도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미리 개괄적으로 가정적 항변 논의에 관련된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다.
● 회쟁론 논의의 초점 - 실재의 공함과 무아무자성
언어를 가지고 문제삼을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언어 표현은 또 다양한 영역의 내용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 표현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가정적 논의에서도 언어표현을 의존해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논의는 현실 내용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공함과 실체가 없음을 밝히는 데에 초점이 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각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각 경우마다 적절하게 잘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논의를 살필 수 있게 된다.
○ 『회쟁론』논의의 초점 - 현실이 실답지 않음 - 무아 무자성 공의 논의
가정적 항변에서 만일(if) ~라면 구문에서 각 표현이 어떤 내용을 가리키고
어떤 내용을 주된 논의 초점으로 하여 논의하는가
또 왜 그런 논의를 하게 되는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단지 표현에만 매달려 논의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가정적 항변은 결국 상대의 전도망상을 해소시켜주려는 취지로 행한다.
그런데 상대가 이런 상태면 가정적 항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는 오히려 엉뚱한 혼동을 일으키고 증폭시켜 나가기 쉽다.
그래서 각 논서나 경전에서 초점을 두는 내용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이런 혼동을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적 항변의 취지도 잘 성취될 수 있다
어떤 것의 정체나 그 '있고 없음'을 논의한다고 하자.
이 경우 도대체 그것이 왜 문제되는가부터 그림을 놓고 다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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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위 그림처럼 어떤 이가 눈을 떠서 1 과 같은 시각정보를 감각현실로 얻는다.
그리고 그 부분을 대하며 그것이 자기자신이나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처럼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거울을 통해 본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귀에서 피가 많이 흘러 나온다고 하자.
그리고 자고 나서 일어나 거울을 보니 코가 잘라져 없어진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물론 일반적으로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단히 큰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대부분 큰 일이라고 보게 되는 현실을 놓고 살펴보자.
이 문제를 살피면 지금 살피는 문제가 왜 논의되는가 하는 사정을
오히려 공감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
현실에서 자신이 그런 상태다.
그런데 그것을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관하라고 한다.
그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참으라고 한다.
그래서 안인을 성취하자고 한다.
그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공감을 못 받기 쉽다.
○ 가정적 항변에서 사용하는 논증 재료와 언어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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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눈을 떠서 그처럼 보는 내용을
위 그림에서는 1 과 같은 영역에 표시해 나타냈다.
그리고 그런 감각 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그런 부분이 사람이라거나 철수나 영희라고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을 위 그림에서는 6 의 영역의 a 라고 표시하였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존재의 유무를 놓고 심각하게 문제삼고
시시비비의 논의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주장의 기본 재료는 크게 보아 이들 두 영역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눈으로 시각정보로 얻는 내용을 1 로 표시했다.
그외 귀나 코 입 몸 등을 통해 얻는 다른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정보도
1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 1 의 내용을 이들 감각현실을 대표하는 내용으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생각을 일으키고 분별을 일으킨다.
이들 내용은 그 일체를 6 의 영역의 내용으로 놓고 살필 수 있다.
어떠한 이가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고 하자.
그래서 현실이 어떻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또는 자신이나 상대가 어떻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리고 세계가 어떻다고 어떻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어떤 과학자나 의사나 생물학자나 기타 철학자나 간에 마찬가지다.
이들이 주장을 내세울 때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현실 내용을 얻는다.
그것은 곧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정을 위 그림에서 나타낸다.
그런데 한편
이 과정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 언어가 정작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즉 각 영역의 내용 가운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혼동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미리 잘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영희가 저기에 있다'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내용을 표현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영희가 앞에 제시한 두 영역의 내용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체적으로 보면
영희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서 그렇게 떠오른다는 내용인가.
아니면 1 의 영역에 표시한 그런 내용으로서
영희가 저기에 눈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나타내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이 부분에서부터 일단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어떤 존재의 정체를 살피고 논의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혼동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영역과 관련된 문제들이 수없이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회쟁론』과 같은 논의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상대방이 체가 없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대부분 다음처럼 이해한다.
즉, 체가 없으면 이들 모든 영역에서 일체 내용이 없다는 형태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언어표현에서 발생하는 혼동을 잘 파악해 정리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 현실에서 쉽게 얻는 내용에서부터 혼동을 잘 정리해야 한다.
잠깐 이와 관련된 연관 문제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영희를 보고 좋다고 느낀다고 하자.
그 경우 그 좋음은 위 영역 가운데 어디에 있는 내용인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꽃을 좋아하거나 영희를 좋아한다고 하자.
이 경우 현실에서 대부분 그런 좋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느끼는 좋음은 위 영역 가운데 어디에 있는 내용인가
물론 이런 문제는 『회쟁론』이나 『중론』 등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회쟁론』이나 『중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똑같이 발생한다.
따라서 기초적으로 이런 문제부터 잘 헤아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배고플 때 짜장면을 대하니 대단히 맛있고 좋게 느껴졌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짜장면을 3 그릇을 먹은 상태에서
강제로 4 그릇째를 억지로 먹을 것을 강요받았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먹지 않으면 바로 권총으로 사살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짜장면을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앞 상황에서 있다고 본 짜장면의 좋음은 그 상황에서 얻지 못한다.
그 경우 그 좋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또 그 상황에서 겪는 고통은 또 그 순간에 다시 어느 영역에 존재하는가.
이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한다.
다만, 존재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현실에서 문제삼을 수 있는 모든 내용을 이처럼 나열하며 살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존재 유무가 특별히 문제되는 내용을 주로 살피게 된다.
따라서 감각현실내용과 관념분별 내용을 주로 놓고 이들 관계를 살피게 된다.
여하튼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다양한 내용들을 놓고 이런 검토를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즉, 이들 내용을 기본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무량한 가정적[if] 논의 내용 및 가정적 항변 문제도
이에 바탕해 함께 잘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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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락을 통한 표현확정 문제
본래 하나의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잘 이해하고 확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확정 문제는 현실내용의 본 정체 확인문제와 관련된다.
현실 내용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 경우 존재가 문제되는 다양한 차원을 잘 구분해 살펴야 한다.
그런데 언어표현의 확정은 결국 이 문제와 관련된다.
다양한 의미 가운데 논의의 본 취지와 초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언어 표현만 의존해 내용을 파악해 낼 도리가 없다.
예를 들어 생사고통을 받는 고해를 건널 배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어떤 이가 배라는 표현만 붙들고 대한다고 하자.
그런데 배란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이 여럿 있다.
바다에 떠다니는 배, 먹는 과일로서 배, 사람의 배, 이런 식이다.
그래서 배라는 표현이 사용된 전후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오직 배라는 표현만 붙들고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이 가운데 어느 내용을 가리키는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 배가 출출하다. 그래서 가게에서 배를 많이 사 먹어야겠다고 말한다고 하자.
그리고 앞으로 배를 많이 사기 위해서라도 현금을 두 배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각 부분의 배의 의미를 큰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다만 배라고 표현만 붙잡고 내용을 생각없이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각 부분의 배가 어떤 영역, 어떤 차원, 어떤 측면, 어떤 의미의 배를 가리키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불교 경전과 논서를 살피는 경우 표현의 혼동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혼동문제가 대단히 반복되게 된다.
이런 경우 각 표현이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사전을 찾는다고 바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또 글자를 현미경으로 살핀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언어표현이 수많은 내용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내용을 모두 순열 조합방식으로 나열해서 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잘 찾아내기 위해서는
각 내용이 제시되는 그 배경 맥락과 취지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구절을 아무리 붙들고 살펴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가정적 항변은 전도몽상 증상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논의다.
그런데 그런 경우 그런 취지도 성취되기 곤란하다.
==== 불기2565-12-15
mus0fl--Alan Menken - Howard Ashman - Tim Rice - A Whole New World (Ce rêve Bleu).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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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적 항변과 관련된 3 번째 항목을 살피기로 하자.
여기서는 가정적 항변은 어떤 바탕에서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는 논의인가를 살핀다.
이를 위해 언어의 문제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림을 통해 하나의 언어가 가리킬 수 있는 각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 논의는 이 가운데 주로 어느 영역의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가정적항변 방식으로 논의하는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의 취지가 무언가를 헤아려야 한다.
여기에 또 다른 그림을 추가해 살피기로 하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놓고 이렇다 저렇다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그런 내용을 가리키고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 언어는 성격이 다른 다양한 내용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런데 각 언어표현만으로는 가리키는 내용을 매 경우 명료하게 파악하기 곤란하다.
즉 언어표현이 매 경우 일의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례를 배와 배와 배의 비유로 제시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논의가 다 그와 같은 사정이다.
언어로 문제삼을 수 있는 것들이 무언가를 먼저 살핀다고 하자.
즉 언어는 어떤 영역 어떤 차원의 내용들이 있는가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존재유무가 문제되는 중요한 내용을 일단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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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떡 쌓은 형태로 각 영역의 내용을 포개 놓았다.
각 언어표현은 이 가운데 어떤 영역의 어떤 측면의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각 경우마다 이를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을 혼동하게 된다.
가정적 항변의 내용을 언어로 진술할 경우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각 부분을 엉뚱하게 이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도망상을 오히려 증폭시키게 만든다.
그림만 살펴 이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우선 위 그림에서 5% 라고 표시된 언어내용이 있다.
이 언어내용은 각기 다른 영역의 다양한 내용을 가리킬 수 있다.
물론 본래 언어로 가리킬 수 없다고 보는 영역도 있다.
실재 영역은 한 주체가 그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본래 언어로 표현하기 곤란한 영역이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는 그런 영역까지도 언어표현으로 가리키며 논의하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것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 그런 것은 실재로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에 참된 진짜로서 실체가 있는가라를 논의해간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각 언어표현으로 가리키며 논의해가게 된다.
그래서 이 각 경우 각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또는 영희 또는 꽃 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에 대해 그 정체가 실답지 않음을 살피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런 논의가 제시되는 기본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각 구절을 살피는 과정에서 비교적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살필 때나 다른 경전을 살필 때도 다 마찬가지다.
여시아문으로 시작되는 각 경전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그렇게 들은 내용이 다음과 같다.
그런 '나는 없다' 무아 무자성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 경우 여시'아'문이라고 표현할 때의 '아'와
제법무'아'라고 표현하는 그 '아'가 서로 무슨관계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사전을 통해서 해결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해결이 힘들게 된다.
이는 지금 살피는 가정적 항변과도 관계가 있다.
가정적 항변에서 사용하는 언어표현이
바로 하나하나 그런 사정을 담고 제시되기 때문이다.
각 경우마다 가리키는 내용은 서로 무언가 관련된다.
그러면서도 정작 서로 차원이 다른 내용임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불생불멸 불래불거 이런 표현을 살핀다고 하자.
이는 생사현실에 생멸도 얻을 수 없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런 경우 그 생멸이나 오고감이 현실에서 무엇을 가리킨다고 볼 것인가.
이것이 첫 문제다.
이 내용을 먼저 언어 내용의 측면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이 사전에 그런 단어가 있고 없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위 논의 본 취지와는 엉뚱하다.
이는 물론 극단적인 경우다.
그러나 이처럼 엉뚱하게 내용을 파악하고 논의를 살필 수 있다.
그런 경우 논의 내용을 살피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혼동만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예를 들어 현실내용의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다음 그림에서 제시하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세상을 본다고 하자.
위 그림은 현실에서 그렇게 대하는 상태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 경우 보통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또 2 나 3 과 같은 부분을 놓고 '철수'나 '영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4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이렇게 보통 여기고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를 일반적으로전도망상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그런 가운데 실재 본 바탕도 이런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또 그런 내용에 상당한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이해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를 전도망상이라고 하는가.
한편 그런 주장을 가정적 항변 형식으로 비판해 지적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도대체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것인가.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 회쟁론에서 결론내용과 근거자료의 영역
현실적으로 전도망상 상태에서
추론 체계를 사용한다.
그 가운데 타당하다고 보는 추론체계로 다음 형태가 있다.
[3단논법 a_a_a]
이를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
S - M
M - P
∴ S - P
이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경우다.
사람은 생명이다.
생명은 죽는다.
∴ ( 따라서) 사람은 죽는다.
보통 이런 형식으로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도의 추론 체계가 이런 방식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는 나중에 자세히 따로 살피기로 한다.
다만 오늘날 상식적으로 위와 같은 추론체계를 대부분 타당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추론체계를 의존해 어떤 이가 엉터리 주장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어떻게 부정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논서에서 다루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다음처럼 주장을 제시한다고 하자.
세계에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자성이 있다고 하자.
이런 식으로 전제를 제시한다.
그 다음 그런 경우 있게 될 내용을 다시 이어 제시한다.
그것이 결국 if 문장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들 논의의 초점은 다음이다.
현실에서 대부분 자신이나 꽃이라고 보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그 실재 영역의 내용은 무엇인가가 논의 초점이 된다.
또 그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는가가 논의초점이 된다.
그래서 이 주제를 초점으로 가정적 항변방식으로 논의해가게 된다.
그러나 가정적 항변 자체가 이 내용을 직접 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들 논의에서 초점을 맞추는 내용이 실재나 실체라고 하자.
그런데 이들 내용은 어떤 주체도 직접 얻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을 직접 자료로 삼아 논의할 도리가 없다.
처음 문제되는 내용을 왜 직접 살피지 않는가를 살폈다.
그리고 가정적인 항변 방식을 사용하게 되는 사정을 살폈다.
그 사정이 이와 같다.
문제되는 각 내용을 어느 누구도 직접 얻어서 확인할 도리가 없다.
논자나 상대방이나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사정 때문에 가정적논의 방식으로 논의를 행하게 된다.
『회쟁론』에서 처음 언어에 체가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외 다른 경우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들 주제는 문제되는 내용을 직접 살피면서 논의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커피의 맛이 어떤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직접 문제되는 커피를 하나 사서 맛을 보면 될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는 가정적 항변방식으로 논의할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문제되는 내용을 직접 붙들고 살피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으로 논의하는 주제는 이와 사정이 다르다.
현실내용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는 실재는 무엇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는 이 가운데 참된 진짜의 내용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거자료를 제출하며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되는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처럼 문제되는 내용을 언어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실재나 실체와 같은 표현이 그런 경우다.
그런 가운데 이를 살펴나가게 된다.
따라서 논의과정에서 언어 표현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다시 이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IMG> 8식-8.jpg
◈Lab value 불기2561/12/24/일/14:15 |
○ [pt op tr] ▼mus0fl--Luis Mariano - Seul.lrc ♥ 잡담 ♥잣따기와 백척간두진일보 tv를 보다가 잣을 따는 모습을 보았다. 참고 >>> 2017_1224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014495&plink=OLDURL 높이 30m 나무에 주렁주렁…산골마을의 잣 수확 잣을 따는 모습을 보니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잣나무가 30m 정도 한다. 그런데 그 나무 위에 갈고리 달린 장대를 들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 장대로 잣나무에 달려 있는 잣을 따는 일을 한다. 올라가는 것도 힘들다. 그리고 올라가서 그 긴 장대를 들어서 잣을 따내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이를 보는 것만은 어렵지 않다. TV 에서 잣 따는 분이 나무에서 내려온다. 그러다가 한 5M 정도 높이에서 장대갈고리가 빠진다. 그래서 떨어지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잘 발생하지는 않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떨어져서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선가에서는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라는 말이 있다. 백척간두 진일보'란 말은 당나라 때 고승(高僧) 장사(長沙) 스님의 말씀이다. 백척이 오늘날 길이 단위로 30 m 정도를 의미한다. 그러니 앞의 상황에 딱 들어 맞는 내용인 것 같다. 표현 그대로 해석하면 백척이 되는 대나무 위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 ( 떨어져서 이 세상 사람이 되지 않는다. ) => 그러면 시방세계가 전신을 드러낸다. 또는 시방세계가 전신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로 해석된다. 일단 백척되는 대나무위에 올라서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된 상태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이런 것이 수행자의 자세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수행자를 경계시킨다. 이를 위한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 잣나무 따는 분을 보게 된다. 그렇게 30m 되는 곳까지 올라간다음 그리고 나무를 붙잡고 그 장대를 다시 들어 휘두른다. 그래서 잣을 수확한다. 오늘날만 잣을 그렇게 수확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처럼 행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앞과 같은 표현처럼 수행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요즘 고층빌딩을 지을 경우 크레인을 높게 세워서 작업을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크레인 작업을 하는 분은 그렇게 올라가 작업을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는다. 오늘 회쟁론이 뽑혔다. 한번 경전을 뽑는 스크립트를 돌리면 다양한 자료가 같이 랜덤으로 뽑혀 나온다. 그리고 불교 용어도 랜덤으로 다양하게 뽑혀 나오게 된다. 그런데 회쟁론이 뽑히는데 불교 용어도 나가르주나 용수보살님이 뽑혀 나온다. 아무래도 오늘은 용수보살님의 회쟁론이 대단히 인연이 깊다. 뽑혀 나오는 노래는 또 계속해서 서울? 또는 설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설이란 단어에서는 불가언설불가설...설불가설불가진, 또는 장광설, 또는 설왕설래라는 말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모두 언설과 관련되는 의미를 준다. 뽑혀 나온 사진도 보니 공교롭게 현재 행방불명상태인 분들이 사진에 나온다. 그런데 이 분들이 과거 중론송이나 논리 문제를 논의했던 분들이기도 하다. 전에 회쟁론을 살폈던 페이지를 다시 찾아 본다. 그래서 이전에는 어떤 내용을 적었는가를 살펴본다. 그 페이지에도 prince 님이 주인공으로 노래부르는 곡이 올려져 있다. 그래서 prince 님이 이런 논의와는 상당히 관계가 깊다고 시감상을 하게 된다. 불기25610922회쟁론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2063 오늘 살필 부분을 조금 다시 정리한다. 그러면서 이전 페이지에도 정리된 내용을 붙여 넣으려 했다. 그런데 페이지 분량이 많다. 그래서 자꾸 에러가 발생한다. 그래서 나중에 올리기로 한다. 그리고 일단 이 페이지에는 오늘 살핀 분량만 올려 놓기로 한다. 지금까지 여러 논서를 살폈다. 그런데 판본을 정리해 올리는 작업을 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대부분 논서의 본내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논서를 살피는 과정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많이 제시했다. 그러나 과거에 제시한 내용을 또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논서를 살피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은 과거 페이지에 모두 넘긴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본 내용에 조금씩 접근해 들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오늘도 사실은 본 내용을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언어나 논의 과정에 기본적으로 들어 있는 문제점이 많다. 그런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논의를 살피면 곤란하다. 어떤 주제를 놓고 시시비비의 논의가 전개될 때 혼동을 발생시킨다. 그러면 내용을 살피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경우가 많게 된다. ○ [pt op tr] ▼mus0fl--La Fouine - Hamdoulah Ça Va.lrc 쉬는 동안 늦은 식사도 하면서 TV 를 보았다. 그런데 유명한 변호사가 나온다. 그래서 사기사건으로 피해를 본 분에게 법률상담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이란 용어는 이런 법률문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그래서 상당히 관련성이 있다. 또 오늘 인턴연구원이 하는 gta 게임도 한번 해보았다. 게임을 하는 동안 게임은 게임대로 곤란을 겪었다. 그리고 마치고 난 뒤 다시 나타난 인턴연구원에게 곤경을 당했다. 시스템 연결선이 불안정하고 설정이 문제된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하면 곤란하다고 한다. 게임을 혼자 해보는 동안 무슨 키를 어떻게 눌러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다. 이것저것 눌러 보는 가운데 어떻게 하다 보니 경찰들이 출동한다. 그래서 열심히 도망가게 된다. 그리고 총을 맞고 사망하거나 번번히 체포당하곤 했다. >>> 게임상황 켑처 사고를 일으키고 난 뒤 일단 숨어서 사태를 지겨보는 중이다. 큰 트럭을 몰고 가다가 사고를 일으켰다. 무슨 조작키를 잘못 눌러서 이렇게 된 듯하다. 여하튼 차밖으로 튕겨 나온 상태다. 나중에는 버스를 한 번 몰아 보고 싶어서 도전을 했다. 그런데 버스 운전사에게 맞고 쫒겨 났다. 다음 장면이다. 결국 버스를 운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인에게 쫒겨난 버스 운전사도 곧바로 뒤따라오는 차를 뺏어 타는 것을 보았다. 그냥 가까이 가보았는데 시비가 붙었다. 그리고 상대가 휘두른 주먹을 곧바로 한 대 맞고 바로 사망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 다시 태어나니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 >>>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대단히 사실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몸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는 경찰에 포위되어서 체포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엉터리로 임하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교훈도 얻게 된다. 한국어로 된 간판도 보이고 가끔 한국어로 하는 욕설도 들린다. 한국 user를 위한 배려인가 싶다. 조작할 수 있는 키를 한 5 개 정도밖에 모른다. 그래서 달리기도 잘 안 되고 운전도 잘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런 가운데 일단 조작가능한 키를 누른다. 그러면 그것이 곧 사고를 일으키거나 범죄행위가 되는 게임 상황이다. 그런데 나중에 인턴연구원이 무기는 사용하지 않았는가 묻는다. 여하튼 게임상으로 험난한 경험을 많이 했다. 본인이 부순 시설물이나 차량이나 인명피해만 해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하게 연구업무에 귀환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도 이런 정도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아마 현실에서 게임처럼 임했다면 지금 이 페이지에 글을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논서나 경전에서는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 되는 현실을 마치 이런 게임이나 꿈이나 환영과 같이 실답지 않은 것임을 관하라고 반복해 제시한다. 그러니 만일 이런 게임내용을 놓고 현실도 이처럼 관하고 게임 내용에서처럼 임하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경전에서 비록 현실이 실답지 않지만,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잘 관하면서도 계를 지키면서 올바른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따라서 현실이 게임처럼 실답지 않음을 관하되, 그러나 게임의 주인공처럼 임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기본 바탕은 생사현실이 이런 게임 내용처럼 실답지 않음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수행에 임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 쉬는 동안 가정적 항변에 대해서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논서에서 제시된 구체적 내용을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논의를 진행하려면 기본적으로 제시해야 할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 그 내용을 일일히 하나하나 제시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려면 대단히 번잡하다. 그래서 곡을 듣고 쉬었다. 골이 아파오는 사정과 관련된 메세지를 전하는 듯 하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대강의 내용부터 한 줄이라도 써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 일단 글이 길어졌다. 여하튼 논의가 이뤄지는 배경 사정을 쉽고 간단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전이나 논서를 대하면 낫다. 그런 가운데 부담없이 바로 내용을 쉽게 이해하면 좋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글도 길다. 그러나 쉬는 활동이 일으키는 피로감도 상당하다. 그래서 조금 더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일단 쉬기로 한다. 연말이 되어서 대단히 상황이 바쁘고 복잡하다. 글은 이미 글대로 상당히 길어졌다. 여하튼 오늘 가정적 항변의 기본 성격까지는 마치기로 한다. 오늘 글을 너무 길게 써서 오타가 심하다. 날짜 경계선은 지났다. 일단 조금 더 쉬고 이와 관련된 문제를 짧게 간추려 살피고 마치기로 한다. 여기서 마치면 또 어떤 페이지에서인가는 앞 내용을 다시 이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오히려 더 복잡하다. 계속 같은 내용만 반복해가면 곤란하다. ○ ▼mus0fl--KYO - Dernière Danse.lrc 글이 길기에 첫부분부터 계속 읽다 보면 상당히 골치아프다. 그런데 글 쓰는 입장은 상태가 조금 더 안 좋다. 잘못하면 과로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상태로 글을 마치면 상쾌하지 않다. 그래서 무리가 따르지만, 대략적으로라도 마무리를 지으려 하게 된다. 노래를 뽑아 올리고 글을 계속 쓰려다 과로사할 위험을 느낀다. 그래서 바로 쉬었다. 그런데 이후 너무 많이 쉬게 되었다. 올려진 노래를 다시 들어보니 노래에서도 죽을 위험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같다. 그런데 죽기 전까지는 대부분 그 위험성을 모른다. 그리고 정신없이 함부로 행하고 다니기 쉽다. 그리고 대부분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다시 조금 더 쉬자. ○ [pt op tr] ▼mus0fl--Live Raphael Théatre Du Chatelet Complet.lrc 쉬면서 옥상기지에서 prince 님이 주인공인 노래를 들었다. 그런데 곡이 1 시간이 넘는다. 그래서 들은 곡의 제목을 찾아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1 시간 되는 곡을 올려 놓았다. 일단 조금 더 쉬자. 요즘 끝장 토론을 진행하는 프로가 없어진 지 오래다. 벌써 또 2 일째 날짜 경계선을 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쉬어야 한다. ○ ▼mus0fl--Cali - C'est Quand LE Bonheur.lrc 옥상기지에서 노래를 듣고 올린다. 이 노래에서 새것을 내보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하는 듯 하다. ○ [pt op tr] ▼mus0fl--Alain Souchon - Parachute Doré.lrc 너무 글이 길어져서 이후 내용은 페이지를 옮길까 생각하게 된다. 옥상기지에서 쉬는 동안 위 노래를 듣고 용기를 내고 다시 이어 쓰기로 한다. 글을 적고나서 쓴 부분을 다시 살핀다. 오탈자가 많아 수정하게 된다. 수정작업에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 그래서 새 내용을 이어 쓰기 전에 미리 지치게 된다. 그리고 또 어제상황과 비슷하게 되는 느낌이다. 현재 몸 상태가 여러 사정으로 좋지 않다. 그런데 잘못하면 글 쓰다가 과로사로 사망할 듯 하다. 처음 이 글을 쓸 때 백척간두진일보 이런 내용을 적고 글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른 경전이나 논서 등도 앞으로 계속 살펴나가야 한다. 그래서 조금 자제해야 한다. 백척간두 진일보 이런 내용을 곧바로 실천하려고 하면 위험하다. 사정은 어렵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살폈다. 기본적인 내용만은 일단 다 마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하는 상태다. 본인이 어느 페이지에선가 년말이 되어 한 해를 보낼 때마다 한번 자신보다 나이가 앞선 다른 사람을 따라 잡기 힘들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한편 그런 가운데 본인은 그런 상태를 성취한 것 같다고 제시했다. 그런데 그 상태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이는 어느 순간 무리하면 과거 비교적 건강하고 젊었을 때와는 달리 바로 끝인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글에 오자가 많기에 다시 읽어본다. 오자 수정과 표현교정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게 된다. 일단 긴급하게 공사중 표지판을 걸고 조금 쉬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또 살피기로 한다. [ 옮김...] 앞 내용까지는 이전에 많이 반복한 내용인데 정작 가정적 항변에 대해서 살피려고 하는 순간부터 페이지가 양이 많아져서인지 타이핑도 입력이 잘 안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조금 쉬기로 한다. ▼mus0fl--Circus - Sur Le Fil.lrc 처음 간단하게 대략적인 내용만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쓰다보니 3일을 이어서 쓰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4 일째 경계선을 넘어서 4일째 이어서 쓰는 중이다. >>> 제거하는 군더더기 부분 가정적 항변이나 무량한 if 논의의 구체적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가장 기본적인 내용만이라도 오늘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간단히 살피가기 쉽지 않다. 간단하게 가정적 항변의 성격과 그로 인해 수많은 오해와 혼동을 일으키는 사정을 살피려고 한다. 그런데 너무 길어진다. 가정적 항변의 성격을 살핀다. 이를 위해 기초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살핀다. 그런데 이 내용이 너무 길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이해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가정적 항변 논의를 이해하기도 대단히 힘들다. 그래서 별 도리가 없다. 글이 많이 길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면 나중에 또 같은 내용을 반복해 살펴야 한다. 그래서 무리가 따르지만, 계속 이어나가기로 한다. 이런 다양한 사정은 기존에도 제시하였다. 그래서 생략한다. 일단 가정적 항변이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원칙적인 방안과 관계시켜 살피기로 한다. >>> >>> 제거하는 군더더기 부분 『중론』 논의하고자 하는 초점은 어떤 것이 과연 실다운 내용인가 그런 것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붙잡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 적절하고 그리고 무량한 기간 무량한 수명과 복덕 지혜 자량을 얻는 수행을 그처럼 행한다고 제시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고 엉뚱한 내용이라고 보고 무시하고 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런 문제를 살피려고 하는데 정작 왜 저런 S - M M - P ∴ S - P 이런 if 논의가 제시되고 그 각 내용이나 관계는 또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괸계로 그렇게 제시되는가. 이런 것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직접 논서를 하나 꺼내서 살피거나 경전을 꺼내서 하나 살피면 이런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만 제시하고 쉬기로 한다. 부분부터 그것이 각 생명이 생사고통을 겪는 현상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보게 되고 이것을 놓고 원칙적으로 그 문제 내용을 직접 놓고 살피는 방안 또는 가정적항변 IF 논의에 임하여 엉터리 주장을 논파하는 방안 이런 것이 동원됨을 잘 이해해야 한다 >>> 연일 작업이 누적되서 피로도가 심하다. 지금 살피는 주제의 글도 상당히 골치 아픈 주제다. 그리고 글을 올려 놓고 prince 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도 상당히 피로를 가중시킨다. 과거에 prince 님이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을 통해 망상체계를 굳건히 견지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이 대목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 노래를 들으면 본인이 새것을 내보내라는 메세지로 이해하는 구절이 있다.은 그런데 번역문을 보면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답 = 새것을 내보낼 때 >>> 또 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쉬는 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일단 계속 이어나가기로 한다. 다만 한번에 이렇게 많은 내용을 읽거나 적게 되면 대부분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알아서 자주 쉬면서 읽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칸을 상당히 띄우고 내용을 잇기로 한다. >>> 앞 내용을 잘 정리해서 각 부분을 살펴야 한다.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를 살피면 곤란하다. 글자는 글자다. 언어표현은 언어표현이다. 그런데 문장 자체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앞 문장과 뒷문장이 왜 그런 관계로 제시되는지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경우 기본적으로 각 언어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는 가운데 더욱이 처음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현실에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방에 안경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논의내용과도 또 혼동을 일으키면서 종합적으로 뒤범벅이 되고 혼동된 상태로 각 논의 내용을 살펴나기가 쉽다. 이렇게 되면 이 가정적 항변으로 이 문제를 살피고 이를 통해서 전도몽상 증상을 해소시키고 생사고통을 벗어날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아직 가정적 항변과 이 문제와 관련해 원칙적인 방안 등을 이어 살펴나가기로 한다. >>> 지금까지 글도 상당히 길다. 그런데 살펴야 할 내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바로 내용에 들어가기로 하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을 놓고 이 문제를 살피자. 손이 잘려져 있다. 조금 심한가. 그렇게 잘려서 자기 지금까지 어떤 첫 문제는 이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그리고 앞으로 문제삼는 내용은 일단 이 내용이다. 과연 이 내용을 어떤 측면에서 놓고 살리는 것인가를 앞에서 길게 설명한 것이다. 그런 감각현실을 그렇게 얻고 그 상황에 대해서 자신의 손가락이 잘려지고 피가 흘러서 큰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 앞에서도 반복했지만, 그런 감각현실과 그런 분별을 일으켜 행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여기서 이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할 때는 이들 내용의 어떤 측면을 놓고 무엇을 문제삼는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살펴야 하는 내용을 앞에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보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은 처음 살핀 것처럼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그 문제와는 이것은 달리 실다운 것인가. 이런 문제를 지금 살피는 것이다. >>> 그리고 경전에서 생사현실의 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할 때 그렇게 보게 되는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내용을 놓고 생사현실이란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또는 아예 사전에서 생사 고통 이런 단어가 없다거나 그런 단어를 지워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거나 그런 감각현실을 얻으면 결코 안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과연 그것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실다운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이를 살피는 것이다. >>> 그래서 어떤 경전이나 논서를 펼쳐서 지금 보기로 하자. 그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얀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자. 이런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감은 있지만, 앞에서 손이 잘려진 심각한 상태를 놓고 이 문제를 일단 다음과 같이 살피기로 하자. 이제 그렇게 피가 흐르는 손옆에 종이를 놓고 손가락이라고 글자를 하나 써보자. 상황이 이상하지만, 손을 옆에 놓고 '손가락'이라고 글자를 써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글자와 손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자는 의미다. 첫 문제는 자신이 눈으로 이 내용을 바라볼 때 이 두 내용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되는가.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일단 그 두 내용을 눈으로 보는 것은 같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는 이 두 내용은 같다. 손가락이란 글자나 자신이 손으로 보는 그 부분이나 눈으로 보고 얻는 감각현실인 점에서는 같다는 의미다. 일단 이 내용을 잘 확인하자. 그 다음 눈을 감고 방금 본 손과 방금 자신이 쓴 글자 '손가락'을 마음 속에서 떠올린다고 해보자. 무언가 떠오르는 내용을 잘 붙잡아 두면 이를 관념분별이라고 표현한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앞에서 실험한 것처럼 이제 그렇게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손과 '손가락'이란 글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 생각해보자. 물론 역시 둘이 같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데 일단 이 두 내용이 그렇게 생각으로 떠올리는 내용인 것만은 같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는 또 이 둘이 같다. 그런데 서로 다른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지금 경전이나 논서를 대하면 거기에 손이 그려져 있거나 사진이 올려져 있는 경우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드물다. 더욱이 사람의 손을 논의한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손이 정말 거기에 떡 하고 올려져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결국은 대부분 종이와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의 본 정체가 무언가 하고 살피면 그것은 또 결국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 언어표현을 다른 감각현실과 관념분별과는 구분하는가를 먼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글자도 결국 눈으로 보고 그래서 감각현실의 측면에서는 눈으로 보는 다른 감각현실과 성격이 같은 하나의 색깔이나 형체라고 할 것이고 또 생각으로 떠올릴 때는 또 글자나 다른 관념이나 또 성격이 같은 관념내용의 하나인 것이다. 만일 말소리를 놓고 이 문제를 살피면 소리라는 차이는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을 따로 언어나 언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처럼 그런 지위로서 살피기보다는 조금 다른 특색을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감각현실의 부분이나 관념분별을 언어라고 따로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지위에 있지만, 그것이 그런 내용으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내용을 가리키는 기능을 하는 지위에 있음을 그렇게 나타낸다고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피흘리는 손과 '손가락'이란 글자모양은 일단 다 같이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인데 '손가락'이라고 쓰여진 글자부분은 조금 다른 기능을 한다고 별도로 취급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다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인데 왜 이것을 여기서 문제삼는가.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가 경전이나 논서에 쓰여진 글자를 척 보고 그 글자가 무슨 내용을 각 경우마다 가리키는지 바로 바로 알고 그래서 원래 그런 내용을 제시한 이가 그 글자로 가리키고 나타내고자 한 바를 또 바로 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정말 대단히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전과 논서를 읽는 이 각 경우마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첫번째 문제다. 그래서 지금 그 사정을 일단 기본적으로 설명하고자 앞 부분을 다 소진해버린 것이다. 왜 그런가. 사정이 그러그러해서 그렇고 그래서 이런 논의가 이렇게 이뤄지는 것이고 그래서 또 그런 사정으로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보아도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이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앞에서 '손가락'이란 글자를 써 놓고 눈으로 보는 손과의 관계를 살폈는데 그 글자가 가리키는 내용이 이처럼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그런 내용만 가리킨다면 그래도 조금 문제가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어떤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고 현실에서 집착을 가질만한 내용인가. 이런 주제를 놓고 논의할 때 그 논의에 사용하는 언어표현은 단지 그런 차원의 그런 내용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복잡한 측면을 다양하게 가리키게 되는데 이것이 논의과정에서 서로 대단히 많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가정적 항변이 논의되는 초점은 사실은 그처럼 대단히 혼동을 많이 일으키는 그 부분을 놓고 논의가 집중되는 사정에 있는 것이다. 또 그렇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대부분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그리고 언어를 놓고 살폈으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만 놓고 다시 살펴보자. 앞에서 눈을 감고 피흘리는 손을 떠올린다고 하는 상황으로 다시 가보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앞에서 보던 그 모습을 비록 보지 못하지만, 그런데 그에 관련된 생각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눈을 떠서 본 감각현실의 내용으로서 피흘리는 손 모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부분부터가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한 부분이고 또 첫 퀴즈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실험해보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이므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흘리는 자신의 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자신이 그 직전 눈을 뜬 상태에서 보던 그 손 모습(감각현실)이 그런 생각 내용 안에서 어느 단 한 부분에서라도 그런 감각현실의 내용이 찾아지고 얻어지는가부터 잘 곰곰히 검토해보자.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감각현실의 내용으로서 그런 피흘리는 손 모습과 눈을 감고 생각으로 떠올리는 그 손에 대한 관념분별내용이 서로 무슨 관계인가 이것부터가 첫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일단 이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 앞 노래에서 죽어야 바뀐다 이런 메세지를 들려준다고 시감상하게 된다. 앞 단계에서 이 망상 편집증상을 시정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으로 전환해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이런 노래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게 된다. 이런 사정을 노래가 전한다고 감상하게 된다. >>> 노래를 올려 놓고 듣다보니 심하면 곤란하다는 메세지를 듣게 된다. 글을 너무 길게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하다. 쓰다 보니 개략적인 내용을 제시함에 필요한 내용은 다 제시한 것 같다. 이대로 마쳐도 큰 불만은 없을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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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1427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sfd8--불교단상_2561_12.txt ☞◆vxmm1427 불기2561-12-24 θθ |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Luis Mariano - Seul.lrc
○ [pt op tr]Ribot_Theodule_The_Cook_And_The_Ca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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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File:Ribot_Theodule_The_Cook_And_The_Cat-1.jpg
Artist Augustin Théodule Ribot (1823–1891)
Title The cook and the cat
Licensing[edit]
● [pt op tr] fr
■end■
>>>
이는 가정적 항변 형식의 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부터 기초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정적 항변 형식의 논의에 대한 이해가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논의는 다음의 논의가 아니다.
즉,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상태에서 각 주체가 일으켜 얻는 관념분별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이 내용은 이미 앞에서 살폈다.
○ 감각현실이 본 바탕에 대해 실다운가- 가정적 논의
현실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라졌다고 하자.
그런데 이 때 그 손가락이 어느 영역의 내용인가가 문제된다.
이는 자신이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 영역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감각현실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이 감각현실 자체를 그처럼 얻었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실재가 무언가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실재가 공하다. = 그런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나타내게 된다.
○ 관념분별이 감각현실에 대해 실다운가- 가정적 논의
한편, 한 주체가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 일정 부분이 자신의 손가락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이런 관념분별이 실다운가도 문제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 관념분별을 그렇게 얻었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
또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한 감각현실을 그처럼 얻었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 감각현실 영역에 관념분별을 얻을 수 있는가.
또 본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것이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살피는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게 된다.
논의과정에서 관념분별로 문제삼는 주요 내용을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경전이나 논서내용은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경우 대부분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취지다.
생사현실에 생멸이나 오고감 또 그런 주체를 얻을 수 없다.
이 표현도 마찬가지다.
○ 언어표현
논의과정에서 언어표현이 위 각 내용을 모두 가리킬 수 있다.
따라서 정작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다시 확인해보자.
눈을 떠 거리를 보니 평소 영희라고 여기게 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 상황에 그런 영희나 그 영희의 오고감은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여기서 영희가 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영희란 언어표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또 없다란 언어표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부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이 내용을 살폈다.
현실에 그런 영희가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영희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영희는 실다운 존재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어디에 없기에 그렇다고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앞 내용을 잘 살핀 가운데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 경전에서 현실의 실다움의 논의와 실재와 실체 문제
경전과 논서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문제삼는다.
이 경우 이들이 과연 실다운 내용인가를 살피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본 바탕의 내용 #실재를 문제삼게 된다.
한편, 이들 내용을 얻게 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는가도 살피게 된다.
그런데 #실재는 어떤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한다.
그래서 상당히 모호하다.
○ 각 영역의 발생단계와 - 논의시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
각 영역에서 각기 성격이 다른 내용을 얻는다.
이 경우 이들 각 내용의 발생 과정을 생각해보자.
그런 경우 본바탕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의 단계로 발생한다고 보게 된다.
#실재는 어떤 주체와 관계없이 그대로 있는 어떤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즉 어떤 주체가 감각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내용이 실다운가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이와 순서를 거꾸로 해서 살피게 된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어떤 이가 그 내용도 직접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처음부터 문제삼을 도리는 없다.
논의과정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제시하고 논의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정체는 일단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주체는 일단 무언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분별을 일으킨다.
그 이후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내용을 다른 이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는 이런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논의 가운데 그런 내용이 실다운가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래서 가정적 항변의 논의를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언어표현은 주로 그 #실재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실재 영역의 상태가 어떤가를 살피게 된다.
이를 통해 현실내용[관념분별, 감각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일정한 언어표현은 관념분별이나 감각현실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다운가 여부를 판단할 때는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다시 처음 살핀 문제로 돌아가자.
>>>
그러나 가정적 항변 논의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이와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이를 다음에 살피기로 한다.
>>>
○ 감각현실과 관련한 망집-
현실에서 영희가 거리에서 이리 걸어 오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런데 거기에 그런 영희나 그런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한편,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게 된다.
그런 경우 그 상황에 그런 소리의 생멸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대부분 고집을 갖고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런 경우 이런 논의는 어떤 배경에서 무엇을 초점으로 논의하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img9]
08pfl--image/8식-9.jpg
위 그림은 앞과 같은 성격의 그림이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있다.
그림에서 a! 부분이 그런 부분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런 a!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대하면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또 현실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를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또 일정 부분을 영희나 철수로 여기고 대한다.
현실상황이 이와 같다.
눈을 떠서 그런 부분을 얻고난 후
그런 부분이 곧 그런 자신이나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 생각 내용은 앞의 감각현실 a! 와는 구별해 a@ 라고 구분해 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6 @ 관념분별 영역에 표시해 넣었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가 앞에 제시한 비닐마술의 상황과 같다
그런데 전도망상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잘 안 되게 된다.
자신이 눈을 떠서
치솔을 보면 치솔이라고 여기게 된다.
또 꽃을 보면 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보면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왜 이것이 문제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또 왜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하는가를 받아들이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망상증 환자도 이와 마찬가지다.
또는 최면 걸린 상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 상태에서도 증상이 이와 같다.
그래서 그 자체는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무조건 원칙적인 방안으로만 해결하고 벗어나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가 잘 해소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 그렇게 되는 사정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각 논사들이
가정적 항변으로 그런 주장을 논파시키려고 하게 된다.
원래는 앞의 원칙적인 방안으로
그 문제를 잘 해결하고 벗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수행을 잘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처음에 그 상태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잘 제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잘 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3 악도라는 수용소에 입소하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 상태로 방치할 도리는 또 없다.
그래서 그 이후 상태에서도 다시 여러가지 방편이 제시된다.
이런 사정을 앞에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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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에서는 지혜와 덕행을 갖추고, 수행을 마친 뒤에 다른 이의 추대를 따라 다른 절로 가는 것을 말함.
뒤에는 달라져서 수좌(首座)가 서당(西堂)으로 가거나, 나라에서 황의(黃衣)나 자의(紫衣)를 주는 것도 출세라 함.
답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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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_암기방안
100 네이블navel, 옴파로스Ompharos 臍 【배꼽 제】 / 벨리버튼belly button,
88 하퇴(下腿)
46 발 곡면 [신조어] 곡면( Arch)
34 복숭아뼈 [멀리 얼어스 malleo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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