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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08-25_금강삼매경론-K1501-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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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08-25_금강삼매경론-K1501-001

선현 2022. 1. 17. 09:58



®



『금강삼매경론』
K1501
T1730

상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금강삼매경론』 ♣1501-001♧

상권



○ [pt op tr]




○ 2020_0907_135958_nik_ct18 양산 통도사


♥아래는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페이지 내용 업데이트 관련 안내]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tienne Daho - Tombé Pour La France.lrc













○ 마음의 유무와 유무문제


○ 마음의 유무와 유무문제

일반적으로 유무를 구분한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없음이 아니다.
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있음이 아니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금강삼매경론』에서 제시한다.


...

▸ 1심(一心)의 근원은
유(有)․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1)의 바다는
진(眞)․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변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불유지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무상지상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
『금강삼매경론』 ♣1501-001♧



이하에서는
마음을 설명하고 실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대부분 2분법적인 구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서술한다.


우선 유무를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이는 있고 없음의 어중간한 상태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모호해진다.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진과 속을 융합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는 진인가 속인가.


그래서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 표현이 무슨 내용을 나타내는지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서술하게 되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있음과 없음'을 문제삼는 다양한 측면과 함께
이를 살피기로 한다.




○ 마음의 정체를 살필때 유무의 문제


일반적으로 유무를 문제삼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마음은 유무를 문제삼는 현실 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정작 그 마음 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정체를 파악할 때도
일반적으로 유무를 따지는 다양한 차원이 다 문제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다음처럼 살필 수 있다




○ 관념분별의 측면의 유무


마음을 문제삼으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미 관념으로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 가운데 문제삼게 된다.
즉, 마음에 대한 내용을 관념으로 일으킨다.
그것은 정확한 내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주체가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을 문제삼는다.
또 그런 경우 일단 그런 관념분별의 측면에서 그런 내용은 있다고 할 것이다.


○ 언어 측면의 유무


한편 언어차원에서도 일단 '마음'이나 심, 의, 식 이런 표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통해 이를 살피게 된다.


예를 들어 한문이나 영어나 불어에 한글 '마음'이란 글자는 없다
그러나 여하튼 언어로 표현해 '마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는그런 '언어표현'이 그렇게 '언어표현'으로서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무언가를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런 무언가를 관념분별하고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도 그런 언어표현만은 그런 측면으로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측면의 유무는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런 측면의 유무논의는 실익이 없는 희론이 된다.






○ 감각현실 측면의 유무


감각현실은 보이거나 만져진다.
또 그럴 때 '있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런 감각현실은 마음을 통해 얻는다.


그러나 마음은 정작 마음 자신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마치 눈이 눈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보거나 만져지는 측면에서는 마음은 '있다'고 하기 곤란하다.


○ 실재 측면의 마음


마음의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는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를 문제삼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감각내용이나 관념을 얻는다.
이런 경우 그 실재를 문제삼는다.


이 경우 실재에 대해 다음처럼 제시한다.
한 주체는 마음과 화합해 얻는 내용만 얻는다.
따라서 한 주체는 마음과 관계를 떠나, 본바탕이 되는 실재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있다거나 없다'라는 등의 2 분법상의 분별을 모두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이를 나타내게 된다. [ 공 ]
그러나 한편 현실 각 내용은 그런 실재를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 각 내용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의 실재에 대해서도 위처럼 제시하게 된다.


마음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실재 역시 얻을 수 없다.


- 마음과 실재의 혼동 문제


마음과 실재에 대해서는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현실 내용은 마음을 통해 얻는다.
그런데 정작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한편 실재도 마음을 떠난 것으로 현실에서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즉, 마음과 실재는 다 얻어지지 않는다.


한편 현실에서 마음으로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들을 얻는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마음도 알고보면 이들 현실 내용을 얻게 한 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엇비슷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동일한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를 문제삼을 때는 한 주체의 주관과 관계없이, 본래부터 그대로 있다고 할 것을 문제삼는다.
즉 각 주체의 마음을 떠난, 본 바탕의 상태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마음은 얻어진 현실 내용을 얻는 것으로 관념된다.
따라서 현실 내용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현실내용과 실재의 경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실재와 마음은 동일한 지위에 있지 않다.


다만 마음의 실재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 경우에도 그 실재는 역시 공하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과 실재의 관계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마음은 실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이는 일반 현실 내용과 사정이 같다.




○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마음


한편 마음을 놓고 그것이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또는 마음의 실체가 따로 있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역시 그런 것은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무아, 무자성 ]


마음을 살필 때 매 생사과정을 통해서 한 주체의 근본마음(제 8식)을 제시하게 된다.
이는 생사와 관계없이 기본재료로서 무한히 이어진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근본정신이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진짜로서 실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서 진짜 자신의 정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아, 무자성]




○ 마음이란 언어표현[시설]으로서 문제삼는 또 다른 측면의 유무


마음은 현실에서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무언가를 본다거나 또는 만진다.
그리고 또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거나 한다.


이들은 없다가 어느 순간 그처럼 얻게 된다.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은 그런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이 경우 그처럼 얻어진 결과물을 통해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활동을 추리할 수 있다.
즉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얻는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이나 활동을 추리할 수 있다.


한편 그런 기능을 맡아 행하는 기관도 추리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서 얻어지는 감각내용이나 관념을 근거로 추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얻는데 관여하는 '마음'을 시설해 제시한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에 관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마음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즉, '마음'이란 표현을 시설해 그에 관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마음이 '있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의 있음은 앞에 나열한 측면에서 '있음'들과는 의미가 다르다.






○ 마음의 있고 없음에 대한 문제


어떤 것이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양한 측면에서 있고 없음이 문제된다.
그래서 그런 각 측면에서 이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측면에서는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주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이러이러한 측면으로는 있다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처럼 각 측면마다 있고 없음을 달리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있다' '없다'는 표현 자체가 갖는 의미가 구분된다.


그래서 그렇게 각 경우마다 각기 다른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달리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오락가락 하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마음을 살필 때는 결국
여러 측면에서 문제삼는 유무판단과 함께 그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각 경우마다 각기 다른 측면에서 그 유무를 달리 표현하게 된다.
『금강삼매경론』에서 제시하는 표현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




마음의 '있고 없음'의 문제는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단순히 관념분별의 측면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마음'이란 관념을 일으키는 한, 그런 관념 측면에서는 그런 내용이 있다.


또 이를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언어나 글자 형태로는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유무'를 문제삼을 때
그런 측면으로 마음의 '유무'를 살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글자로 마음이란 글자가 종이에 적혀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한편 마음은 감각현실이나 관념을 얻게 한다.
그런데 정작 마음이 감각현실이나 관념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그처럼 무엇이 보이는가 만져지는가의 측면에서 유무를 따질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마음은 '없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그런 측면으로 따질 문제 자체가 아니다.
그런 영역에서는 마음은 얻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정확히 표현해 마음은 그런 측면으로 문제삼는 '유무'를 떠난다고 해야 한다.


한편 마음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 바탕인 실재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다.
또 마음의 실재는 역시 공하다.


또 마음도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하고 고정된 어떤 실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실체 또한 없다.
그래서 마음 역시 무아 무자성이다.


그래서 마음 역시 실답지 않다.
그래서 이런 내용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무아 무자성 공]


한편 마음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감각현실 등을 얻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기능이 행해진다.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는 그처럼 작용하는 마음이 그처럼 있다고 하게 된다.
이는 이를 통해 얻어진 현실 내용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 내용을 얻을 때 이를 얻게 한 마음이 아주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마음을 시설해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고 실재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즉 실다운 내용으로 이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마음을 실답다고 볼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유무를 논의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주로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와 비교해 그 내용의 실다움 여부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참된 '실체'의 존부도 문제삼는다.


실재는 현실에서 얻는 모든 내용들의 본바탕이 된다.
그런데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그래서 있고 없음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그리고 본 바탕의 실재는 공하다라고 제시한다.


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실체는 없다고 하게 된다. => [무아 무자성 ]
따라서 무아 무자성 공이라고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얻는 마음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는 이들 일체는 역시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내용에 대해 갖기 쉬운 집착과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명료하게 관념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들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전혀 없다고 할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참된 진짜로서 실체가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꿈처럼 실답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은 또 정작 꿈 자체는 아니다.
꿈과 달리 다수 주체가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관계로 대단히 반복해 얻는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다.
따라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또 한편, 생사현실 내용이 좋고 좋은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들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유무문제를 문제삼게 되는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처럼 각 측면마다 그 '있고 없음'을 달리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유무' 사이에서 어중간하고 애매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 어떤 때는 있다가 어떤 때는 없기도 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래서 단순히 유무 표현을 오락가락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각 측면에서 '유무'란 표현이 갖는 의미부터 잘 구분해 대해야 한다.


이처럼 마음을 유무를 문제삼는 각 측면과 관련시켜 살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일반적인 유무판단문제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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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Brigitte Bardot - Tu Veux, Tu Veux Pas.lrc





●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있고 없음의 일반적 판단문제


'있음'과 '없음'을 문제삼는 다양한 차원이 있다.


○ 다양한 유무 판단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뜬다고 하자.
그러면 일정한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대하며 관념영역에서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영희나 철수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에 임한다.

그런데 경전 등에서 그런 영희나 자신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 생멸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앞 내용들 가운데에서 무엇이 어떻다라고 제시하는 것인가를 찾아보자.

이는 다음 부분에서 어떤 부분에 대해 제시한 것인가를 숫자로 찾아보자.




[img8]

08pfl--image/8식-8.jpg




어떤 것의 있고 없음, 또는 얻을 수 없음, 얻을 수 있음을 논의한다고 하자.
이 경우 다양한 측면에서 이를 문제삼을 수 있다.
따라서 기초적으로 논의가능한 여러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 관념 영역에서 관념의 유무 문제

- 관념영역에서 관념이 얻어지는가 여부의 문제

어떤 관념내용이 관념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 않는가를 문제삼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일정한 관념이 그렇게 일으켜 얻어진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런 측면에서는 '있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있음'과 '없음'의 논의 과정에서는
일단 가장 먼저 관념분별 영역에서 이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또 이를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있음'과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무언가 '없다'고 문제삼는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일단 그렇게 문제삼는 내용 자체는 그런 '관념'으로는 '있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을 생각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황금독수리'가 세상에 있을까를 문제삼아 논의한다고 하자.
또는 예를 들어 토끼뿔은 없음을 주장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적어도 관념영역에서 그런 관념을 일으켜 이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어떤 논의가 그런 성격의 논의라고 하자.
그런 경우 세상 이곳 저곳을 살필 필요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문제삼을 때 그런 관념 내용자체는 이미 그렇게 관념 영역에 있다고 해야 한다.
즉, 관념영역에서 그런 관념 형태로 그것은 있다.

그래서 이런 관념 측면에서 '있음'과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결국 쓸모없는 희론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현실에서 찾고자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해 몽타쥬 형태로 그 모습이나 특징과 성품을 나열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몽타쥬 내용만은 관념 영역에 그렇게 있다.

그런데 그런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살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의 논의는 별 의미없이 심심해서 장난삼아 하는 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논의가 행해질 경우는 별로 없다.

- 다른 영역에 관념에 상응하는 내용이 있는가 여부 논의와 혼동 문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논의할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단지 그런 관념이 있는가 여부의 논의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즉, 자신이 어떤 내용을 관념에서 떠올린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만으로 그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각 경우 논의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기본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짜 진짜의 존부 문제가 이런 혼동을 불러 일으킬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물건을 찾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벽돌을 찾는다고 하자.
그런데 벽돌과 비슷하지만 벽돌이 아닌 물건이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종이에 비슷하게 물감을 친한 경우다.
이런 경우는 이를 가짜라고 하게 된다.

처음 벽돌을 찾을 때 그에 대한 대강의 관념을 갖는다.
이는 범인을 찾을 때 그리는 몽타쥬와 비슷하다.

그런데 어떤 것이 대강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가짜라고 표현하게 된다. (가짜금, 가짜 보석 등)

그런데 이 경우 다음처럼 생각하기 쉽다.
현실에 가짜가 있다.
그런데 가짜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상대되는 관념으로 진짜란 관념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는 세상에 존재한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이가 이와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고 하자.
듣기에는 언뜻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는 논의하는 초점에 대해 혼동을 일으킨 경우다.

위 문제는 진짜라는 '관념'이 있을 수 있는가 여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다.
또 진짜라는 관념을 마음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가 여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다.
또는 진짜라는 관념을 지금 마음에 떠올리고 있는 상태인가를 문제삼은 것도 아니다.
진짜에 해당한 관념은 마음에서 일으킬 수 있다.
가짜에 상대되는 관념으로 진짜라는 관념은 그렇게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 몽타쥬를 다시 관념영역에서 만들어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관념에 상응하는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경우는 위와 다르다.
그래서 이런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실체의 존부 문제와 관념의 존부문제의 혼동

불교에서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이런 문제와 혼동되기 쉽다.

실체의 존부 문제는 다음 경우에 문제삼는다.

꿈은 실답지 않다.
꿈 내용은 생생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꿈 내용은 일정한 조건에서 일시적으로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현실 등 다른 영역에서 얻지 못한다.
또 그에 기대하는 성품들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본 바다는 짜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 내용을 생생하게 얻더라도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한편, 현실은 꿈과는 다른 참된 특성을 갖는가가 문제된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실다운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자세를 달리해야 한다.
그래서 실체의 존부 여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진짜 참된 어떤 실체(본체)로서의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그런 자신의 본성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다고 제시한다. [ 승의무자성,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런 관념 자체는 만들어 논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그런 관념 자체를 관념영역에서 일으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경우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실체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본 논의를 관념적 내용의 존부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체의 존부문제는 이런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살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서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현실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한다.
이는 경전에서 자주 제시한다.
그런데 이 경우 생멸이란 관념 자체를 못 일으킨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어떤 내용이 자신의 생각으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된다고 하자.
그래서 그런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자신이 관념영역에서 그런 관념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관념이 있음을 주장하는 의미 밖에 갖지 못한다.
그런 경우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처럼 관념적 내용의 존부 측면에서 논의한다고 하자.
이는 사변 철학에 해당한다.
그러다가 경전의 논의를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경전의 논의도 이런 성격의 논의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수행에서는 한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받는 생사고통이 중요하다.
그래서 순수하게 사변적인 내용은 논의 초점이 되지 않는다.
즉, 희론성격을 갖는 내용은 논의초점이 되지 않는다.

한편, 이런 경우와 다음을 다시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있다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이 경우 어떤 이가 그런 마음은 단지 생각으로 있어야 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서 다음의 관계가 밝혀진다고 하자.
현실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현실 내용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관계가 밝혀진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마음이 있다고 시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비록 그것이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는 단지 사변적으로 생각만으로 만들어 내는 관념적 내용은 아니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논의과정에서 각 논의가 갖는 성격과 관련해 혼동을 많이 일으킨다.


관념이 일정하게 얻어지는가를 다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논의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불교에서 문제삼는 유무 논의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측면에서 유무를 문제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런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 관념영역에 관념이 현재 머물고 있는가의 문제

관념은 다양한 경로로 얻을 수 있다.
(몽중의식, 독산의식, 정중의식, 오구의식 등)
관념은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일으킬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일으키기도 한다.
또 다른 관념으로부터 단지 연상해서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한편 꿈 내용도 그 성격은 관념적 내용이다.
또한 정려 수행 중 얻는 내용도 관념적 내용이다.
대강 이런 경우만 놓고 보자.

그런데 어떤 경우에 일정한 관념을 떠올리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종이에 일정한 글자가 쓰여 있다.
그래서 일반인이 정상적인 상태로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글자를 대해 일반적으로 일정한 관념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그 종이를 대해 그런 관념을 떠올리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게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아무 답을 못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에게는 그런 관념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 경우는 그 주체의 마음에는 그런 관념이 없는 상태라고 해야 한다. [상대적 무]


- 수학문제에 답이 '없다'는 경우

- 일정한 규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따른 존부 문제
-- 관념적 규정에 적절한 관념의 존부 문제

관념영역에서 여러 조건을 만든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관념이 얻어지는가를 문제삼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수학문제를 놓고 보자.
예를 들어 제곱해서 2 가 되는 정수가 있는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정수는 '없다'고 답하게 된다.
이는 '제곱해서 2 가 되는 정수'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정수가 되기 위한 조건과 제곱해서 2 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한편, 제곱해서 -4 가 되는 수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출된다고 하자.
음수(-)나 양수(+)나 제곱하면 양수가 된다고 먼저 약속했다.
그래서 음수나 양수에서는 이런 수는 없다.
그래서 이 경우 그런 수는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제곱하면 음수가 되는 수를 새로 '허수'라고 약속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허수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에 대해 제출할 수가 다시 있다고 해야 한다.

그외
- 수학문제를 단지 풀지 못해 답이 '없다'고 여기는 경우
- 수학문제를 풀어 답이 '있다'고 하는 경우

-- 단지 연상되는 내용이 없다고 하는 경우
-- 단지 기억이 나지 않아 없다고 하는 경우
-- 과거 단순히 기억한 관념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부 등도
모두 관념영역에서 관념의 존부로 문제될 수 있다.

한편 다음 경우도 있다.
과거에 어떤 이를 만났다.
그런데 당시 그가 어떤 옷을 입었는가를 물어본다고 하자.
그런데 처음부터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하자.
그 경우는 앞에서 살핀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당시는 분명히 알았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 단지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에 대한 관념내용이 그 의식에 없는 상태다.

또 한편, 자신이 방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또는 무언가를 막 하려고 했었다.
한편, 무언가에 대해서 배우고 학습했다.

그런데 자신이 건망증 환자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무엇을 찾는지 자체를 잊어버렸다고 하자.
이 경우는 그런 관념적 내용들은 반드시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그가 분명 무언가를 찾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그 생각은 과연 지금 어딘가에 있는가 없는가.
이런 문제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4념처에 대해 과거에 배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구체적 내용이 생각이 잘 안 떠오른다고 하자.
그런데 또 나중에 그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4 념처는 신,수,심,법을 말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이처럼 그 내용이 떠오른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그 내용이 그 순간에 그 마음에 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 마음에 일단 그런 내용이 없는 상태다.
이런 경우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런 내용이 어디에 머물다가 어떻게 떠오르게 되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한편 생각이 안 나던 상황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내용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 감각현실에 대응한 적절히 일으킬만한 관념의 존재문제

-- 감각현실 자체를 잘 얻지 못해, 관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

안경점에서 시력을 검사한다고 하자.
어떤 물체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려 한다.
그러려면 일정한 감각현실이 일정한 정도로 얻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선, 감각현실 자체가 잘 얻어지지 않는다고 하자.
그 사정이 다양할 수 있다.
감각현실 하나를 얻기 위해 여러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무언가가 결여되거나 불충분할 수 있다.
그런 경우 감각현실 자체가 잘 얻어지지 않는다.

이는 감각현실이 아예 얻어지지 않는 경우와는 다르다.
다만 일정한 사정으로 뚜렷하게 분별할 만큼 잘 얻어지지 않는 경우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여러 경우가 있다.
우선 물체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또는 물체가 크기가 작을 수 있다.
또는 물체가 형체가 쉼없이 변화하고 뚜렷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연기나 안개와 같다.
또는 물체가 무언가에 가리워져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자에 든 물건과 같다.

또는 빛이 어둡다거나, 산란할 수도 있다.
또는 빛이 반대로 너무 눈부실 경우도 있다.

또는 눈에 병이 들었을 수도 있다.
또는 눈에 무언가가 가리워졌을 수도 있다.
또는 아예 눈을 감은 상태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감각현실이 다른 경우와 달리 잘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 대해 적절한 관념을 일으키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글자판에 4 라고 글자가 쓰여 있다.
그런데 시력판의 글씨가 작다.
그리고 그가 눈이 나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이가 이런 사정으로 4 라고 읽지 못한다.

또는 몽타쥬로 현상 수배 중인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곳에 그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경우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가를 물어본다고 하자.
그런데 멀리 있다.
그래서 무슨 색인지는 분별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에 안경점에서 시력판에 글씨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곳에 글씨가 있다.
다만 그가 글씨가 희미하게 잘 안 보인다.
그러면 그에 대해 관념을 일으키기 곤란하다.
그래서 답하기 곤란하다.

만일 이 경우 글씨가 잘 보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것이 1 이라거나 갑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 주체의 마음 안에는 그에 대한 적절한 관념내용이 없는 상태다.

한편, 어떤 글씨가 8 로도 보이고 9 로도 보인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것이 8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 명제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살펴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참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또 거짓이라고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 감각현실 자체는 잘 얻는다. 다만 일정한 사유로 관념을 잘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

감각현실 자체는 얻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얻어야 할 관념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어떤 이가 일정한 사유로 그런 관념을 잘 일으키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의식을 잃은 경우도 있다.
또는 알콜이나 약물에 취한 경우도 있다.
또 다른 것에 집중해서 파악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한편, 경험이나 학습의 부족으로 적절한 관념을 일으키지 못할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어서 판단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로 쓰여진 시력판을 놓고 시력검사를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그리스 철자를 배우지 않아 글자를 모를 수도 있다.

그 글자 모습은 보인다.
그런데 그 각 형태를 무엇이라고 읽거나 표현할 지 모른다고 하자.
예를 들어 그리스어 αβ 는 알파 베타라고 읽는다.
또 외국어 단어로 black 이란 단어가 있다.
이런 경우 이 글자모습을 보고 일으킬 것을 요구하는 일정한 관념이 있다.

그런데 이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 학습하지 않았다.
또 일정한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학습하지 않았다.
그래서 글자는 보인다.
그러나 글자의 소리값이나, 의미 등은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일정한 관념내용을 얻어내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그에 대해 답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그는 그에 대해 모른다라고 답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그 소리값이나 의미를 아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두 차이를 놓고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한편, 감각현실에 대해 분명하게 내용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일정한 형태로 답하기 곤란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림이 보는 각도에 따라 사람으로도 보이고 꽃으로도 보이는 형태라고 하자.
이런 경우 어느 하나로만 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다.

한편, 감각현실을 분명하게 얻었다고 하자.
그러나 이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는 형태도 있다.
심리학에서 이런 사례로 제시하는 예가 많다.
<-> >-< 이런 두 형태에서 선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짧은가. 이런 문제와 같다.

한편, 하나의 색이 어떤 색 주변에 있는가에 따라 색분별에 착오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본래 그 색 자체를 감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 색에 의해 그 색에 대해 적절한 분별을 잘 하지 못하는 상태다.


또 감각현실을 분명하게 얻었다고 하자.
그렇지만, 단순히 a 이다 아니다 형태의 2 분법적인 관념분별을 행하기 곤란한 경우도 많다.

다른 예를 들어 천에 검은 점과 흰점이 섞여 있는 옷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 옷이 흰옷인가 아닌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그 옷이 흰옷이다. 아니다의 2 분법만으로는 구분해 답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 옷은 흰옷이다'라고 진술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 명제를 참이라고 해야 하는가. 거짓이라고 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를 참이라고도 하기 곤란하다. 또 거짓이라고도 하기 곤란하다.

한편, 점을 종이에 흩뿌린다. 그것이 거미로도 보이고 사람으로도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사실은 그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단지 점을 흩뿌린 것 뿐이다.
이 경우도 위와 비슷하다.

한편, 피아노 소리가 하얀 색인가 아닌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피아노소리는 하얀색이다 또는 아니라라고만 답하기 곤란하다.

분별시 이런 사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4구 분별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분별한다.
a 이다.
a 가 아니다.
a 이기도 하고 a 아니기도 하다.
a 도 아니고 a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감각현실도 분명하게 얻었다.
또 분별도 명료하게 행한 경우에 해당한다.
즉, 분별할 대상내용으로서 감각현실 자체가 얻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감각현실 자체는 분명하게 얻어진다.
또 감각현실은 얻어져도 그에 대해 판단을 행한 것이다.
그래서 분별을 잘 행할 수 없는 상태도 아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는 경우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추론체계도 같이 문제된다.
참과 거짓으로만 2 분되어 처리되는 추론체계라고 하자.
그런 경우 위와 같은 경우 그 명제처리나 추론과정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참이다. 거짓이다. 이런 식으로 단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예상된다.


-- 감각현실 자체를 잘 얻는다. 그리고 필요한 적절한 관념을 일으키는 경우

한편, 감각현실 자체를 잘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감각내용을 대해 일반적으로 일정한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어떤 관념을 일으키는데 학습이나 경험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그런 내용마저도 잘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런 관념을 잘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αβ 란 글자를 보고 알파 베타라고도 읽는다
black 이란 단어를 대해 그것이 검은 색을 나타낸다고 이해한다.
그런 경우 그는 그 상태에 대해 일정한 내용을 안다고 여기게 된다.

감각현실을 대할 때 각 주체의 관념영역의 상태가 각기 다르다.
현실적으로 감각현실에 대해 알고 모름의 두 상태가 구분된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다만, 이는 어떤 이가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고 있는가 여부의 문제다.
이런 각 경우 관념영역에 어떤 내용이 잘 얻어지는가 여부를 문제삼을 경우도 있다.



- 감각현실에 대응하지 않은 관념의 존부문제 - 망상분별의 문제

한편 관념 가운데는 감각현실에 대응하지 않고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감각현실에 대응해 관념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명사 가운데 추상명사나 집합명사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어떤 공원 모습을 대해 평화스럽다라고 느낀다고 하자.
그래서 평화를 떠올렸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화가 그 구체적 현실에 대응한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또는 명사 이외 조사나 부사 형용사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다.

한편 수많은 군인들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 사정으로 군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경우 그런 관념이 구체적 현실에 실재하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논의가 과거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의로 서양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를 주로 유개념의 경우에 국한해 논의하였다.
한편 여기서 실재는 관념이 감각현실에 있는가의 문제다.
불교에서는 본 바탕 영역에서 실재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각 경우에서 실재의 의미가 다르다.

한편 불교에서는 고유명사인 경우까지도 같은 문제로 놓고 살피게 된다.
결국 모든 관념은 감각현실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이는 관념을 일으키는 문제와 관념이 감각현실에 있고 없음의 문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망상분별의 문제가 된다.

다만 이들은 모두 관념영역 자체에서는 그런 관념으로 있다고 할 내용들이다.
그래서 존재를 살필 경우에는 5위법 가운데 색심불상응행법의 범주에서 주로 이들을 살피게 된다.



○ 언어 영역에서 언어의 유무 문제

한편 언어표현은
감각현실 형태로 일정한 글자모양이나 소리를 주로 사용한다.

한편 어떤 주체가 그런 글자모양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 대해 1 차적으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는 마치 바위 모습을 보는 경우와 같다.
이제 눈을 감고 그 바위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고 하자.
이 경우 직전에 본 감각현실을 직접 떠올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관념영역에서 대강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에 선으로 그려 보는 대강의 모습과 같다.

글자모습을 대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 글자 자체의 모습에 대한 관념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한편 말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 그 소리 자체에 대해 1 차적으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 경우도 물소리를 듣는 경우와 같다.
귀를 닫고 소리를 듣지 않는 상태라고 하자.
이 경우 그 직전의 소리를 그대로 다시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의 관념영역에서 직전에 들은 소리를 대강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글자모양이나 소리를 대해 일으키는 관념 측면도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눈을 감고 '꽃'이란 글자 형태를 떠올린다고 하자.
또는 소리를 듣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으로 'KKot 이란 말소리'를 떠올려 보자.
이런 경우 마음에서 떠올려지는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언어는 다른 일정한 내용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일정한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이 언어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이 있다.

한편 이런 언어가 가리키는 영역은 제한이 없다.

언어는 각 감각현실의 각 부분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언어는 어떤 느낌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언어는 관념분별내용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외국어나 모국어를 비롯해 언어적 표현 그 자체[단어, 철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언어는 본 바탕의 실재내용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언어는 참된 진짜 실체의 존부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 모두 언어가 사용된다.
그것은 언어가 갖는 이런 기능 때문이다.

예를 들어 '꽃'이란 글자형태나 KKot 이란 소리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런 언어표현을 통해 눈을 떠서 보는 화분에 있는 장미꽃 모습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꽃관념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그런 꽃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인 실재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차원의 내용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 논의할 때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여러 주체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것도 언어가 갖는 이런 기능 때문이다.

한편 어떤 것의 '유무'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언어 차원에서 어떤 내용의 '유무'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는 관념분별측면에서 유무를 살피는 경우와 같은 문제를 갖는다.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그런 언어 측면에서만은 '있다'고 해야한다.
예를 들어 '라라꾸'라는 언어표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단지 언어측면에서 그 유무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글자는 일단 그렇게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런 측면에서는 일단 있다.

한편 이런 경우 그런 글자형태를 대해 관념분별도 행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도 일단 있다.

따라서 결국 이런 측면의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쓸모없는 희론이 된다.

다만, 언어학적으로는 다음 측면에서 여전히 이들 주제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언어 표현을 놓고 그 표현이 특정 언어권에서 사용하는 표현인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kkot 이란 단어가 영어나 불어 언어권에서 사용하는 표현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또는 그런 kkot 이란 표현이 영어나 불어 사전에 올려져 있는가 여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언어 표현이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한 의미를 본래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blue 란 영어단어가 영어권에서 '활기차고 희망참'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들은 언어학적인 논의 대상은 될 수 있다.

한편 철학적으로 그런 단어에 일정한 의미가 본래 있다고 할 것인가도 문제삼을 여지는 있다.

다만, 생사고통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 불교에서 무언가의 유무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관념영역에서나 언어 차원에서의 유무는 보통 문제삼지 않는다.



○ 일반적 입장에서의 유무 문제

- 일반적인 유무판단- 관념에 대응하는 감각현실 유무문제

현실에서 있고 없음은 주로 다음 측면에서 문제삼게 된다.

즉,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
빛도 비추고 있다.
사물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지도 않다.
그래서 무언가가 보인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 일정 부분을 대해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자신이 일으킨다.
이런 경우 그 부분에 꽃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꽃이 '없다'라는 표현은 다음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
빛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물도 보인다.
따라서 만일 그런 꽃이 거기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앞과 같은 형태로 일정한 모습이 보일 것이다
즉 꽃이라는 생각을 일으킬 일정한 감각현실이 얻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 경우 거기에 꽃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 꽃이 '없다'고 표현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유무 판단은 대부분 이런 성격의 유무판단이다.
일반 현실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때는 기본적으로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일정한 감각현실을 대할 때 일반적으로 일정한 a 의 관념을 일반적으로 '일으킨다'고 하자.
그 경우 반대로 그런 a 의 관념으로는 다시 그런 일정한 감각현실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현재 어떤 a 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형태의 감각현실이 얻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감각현실에 그런 a의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있다' '없다'란 표현은 주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방에 장미꽃이 있는가를 누군가 묻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장미꽃이 방에 있다거나 없다고 답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이런 측면의 있고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지 이런 상태에만 있다고 하자.
그것은 자신에게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거나 얻지 못함을 나타낸다.
엄밀히 이 부분까지만 보면 망상분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는 다음 망집상태의 경계선에 가까이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다음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즉, 앞의 경우라고 하자.
즉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대해 '꽃'이라는 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 경우 곧 그 감각현실 부분이 그런 꽃'이다'라고 여기게 된다.
또 이런 경우 그 부분에 꽃이 '있다'라고 여기게 된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 일반적인 유무판단과 망상분별

일반적 입장에서 행하는 유무판단을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대부분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한 분별이 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다음 사정으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뜨면 무언가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그 감각현실의 일정한 부분에 대해 어떤 관념을 일으킨다.
이 경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이 그런 관념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이후 다음과 같은 망상분별을 관념영역에서 이어 일으킨다.

이 상황에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 있다.
그런데 이 감각현실의 각 부분은 다 같은 형태가 아니다.
즉 눈을 뜰 때 보는 내용은 그 전체가 하나의 흰색이거나 검은 색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일정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정한 분별을 반복해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그가 다른 부분을 대하는 경우와는 다른 반응이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 부분과 그 관념을 서로 '대응시켜' 대한다.
이 상황에서 그는 감각현실과 관념을 함께 얻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재료로 관념영역에서 다음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눈을 떠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 일정 부분을 대해 일정한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예를 들어 그 감각현실 일정 부분은 꽃이다라고 여길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이 곧 그가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인 꽃'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는 그 감각현실에 그가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인 꽃이 '있다'라고 잘못 여긴다.
즉, 그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이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관념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부분은 또 그런 꽃이 '아니다'라고 여긴다.
또 다른 부분에는 그런 꽃이 '없다'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가 대하는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그런데 일체의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또 그 부분에는 그런 관념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일체의 감각현실 영역에 그가 문제삼는 관념분별은 얻을 수 없다.
또 반대로 일체의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또 일체의 관념분별에 감각현실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감각현실 영역에서 본래 관념내용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관념의 있고 없음을 분별할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그런 관념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을 대한다.
그러면 그런 부분이 그 관념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며 대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별을 망상분별이라고 하게 된다.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이에게 장미꽃은 무엇인가.

그 장미꽃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은 감각현실 부분이다.
이는 그런 감각현실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또 그런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라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서 손가락으로 그렇게 가리킨다.

그런 경우 이는 일반적인 전도망상상태의 상태가 된다.
그것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을 그것'이다'라고 잘못 여기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을 그것이 '있다'라고 잘못 여기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떤 A 라는 내용으로부터 어떤 B 라는 내용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렇다고 A 라는 내용이 B 는 아니다.
또 A 라는 내용에 B 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연필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리고 이후 이로부터 기차를 떠올렸다고 하자.
이 경우 연필이란 생각이 기차라는 생각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연필이 기차인 것도 아니다.
또 연필이란 생각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부분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있고 없음을 문제삼게 된다.
즉, 일반적 입장에서는 현실에 무언가가 있고 없음은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일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이 얻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꽃을 찾는다고 하자.
이 경우 꽃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철수가 방에 꽃이 '없다'고 한다.
또 영희는 다른 방에 꽃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표현은 일반적으로 다음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뜨면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
이를 □ 이라고 표시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일정한 관념을 '일으킬' 감각현실이 얻어진다.
또는 일정한 관념으로 '가리키게 되는' 감각현실이 얻어진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찾아진다.

경전에서도 망집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일정한 언어를 시설해 설명한다.
이 경우 그런 언어 시설은 이런 내용을 그처럼 가리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이 상태에 그쳐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분별을 일으킨다.
그러면 그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부분은 곧 그런 분별내용'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상태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런 상태를 상(相)을 취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현실에서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다.
이를 아상을 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망집을 바탕해 현실을 대한다.
그리고 그런 망집의 바탕에서 일정 부분이 꽃'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 감각현실 다른 일정 부분은 바위라고 잘못 여긴다.
또 마찬가지로 일정 부분은 영희나 철수'이다' 라고 잘못 여긴다.
또 마찬가지로 일정 부분은 자기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이런 경우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분별내용'이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그런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일정 상황에서 영희가 저기에서 여기로 오고감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종이를 태워 연기나 재가 나타난다고 하자.
즉 연기나 재가 없다가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종이나 연기 재 등의 '생멸함'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마찬가지로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가 겪는 '생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대부분 이런 측면에서의 '있고 없음'을 표현한다.
이런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경전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경전에서는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
우선 이런 각 상황에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생멸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다.
우선 감각현실 영역에서부터 그가 생각하는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처음 일으킨 망집이 생사에 묶이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근본적으로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즉, 현실에서 그렇게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경우 그런 부분을 그런 내용이라고 취해 붙들지 않아야 한다.
즉,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무상해탈삼매]
따라서 경전에서 다음처럼 제시한다.
현실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취하면 수행자가 아니다. [참고. 『금강반야바라밀경』]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망집을 바탕으로 유무를 판단한다.
사정이 그렇기에 경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본 바탕인 실재 영역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공하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여기는 망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해탈삼매]
여하튼 이 문제는 나중에 함께 다시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실재영역의 문제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 본 바탕인 실재 영역과 관련한 유무 문제

현실에서 눈을 뜬다. 그래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그가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 모습은 사라지고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때 그 모습은 아주 사라져 버리고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아도 그와 관련된 어떤 것은 별도로 실재하는가가 문제된다.
즉 자신의 주관이나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신이나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실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가 문제된다.

결국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것이 있는가 여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실재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은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모습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감아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인가.
또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내용이나 성품 A 인가 아닌가.
이런 내용이 문제된다.


○ 실재를 문제삼는 취지 - 현실 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하기 위함

이런 실재는 단순히 지적호기심 때문에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수행에서 생사고통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부분의 이해가 필요하다.

생사고통은 번뇌 - 업 - 생사고통의 관계를 통해 받게 된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예방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이를 받게 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 내용에 집착을 갖지 않야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현실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실재가 공함을 파악해야 한다.
즉, 본 바탕 실재는 현실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각 주체가 얻는다.
그래서 현실이 침대에서 꾸는 바다의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실재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경전에서 실재가 공의 이해를 중요시 한다.
이 사정도 이것이다.

이는 다음 사정과 같다.
우선 현실에서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생생하게 꾸었다고 하자.
그 꿈 자체는 생생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꿈을 실답지 않다고 여긴다.
꿈은 그런 조건과 상황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정작 꿈을 꾼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꿈 내용은 그에 기대하는 여러 성품을 갖지 못한다.
이런 사정으로 꿈을 아무리 생생하게 꾸었더라도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꿈이 실답지 않음을 판단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꿈만 살펴서는 알 수 없다.
꿈을 꾼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의 내용을 함께 대조해 살펴 알게 된다.

그런데 현실 내용도 그 성격이 꿈과 같은가가 문제된다.
즉, 현실이 실다운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에도 앞과 문제성격이 같다.

우선 현실 내용은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런데 이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는가 여부를 살피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현실 내용만 살펴서는 알 수 없다.
그런 현실이 실다운가는 다른 영역의 상태를 살펴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의 본바탕인 실재가 무언가를 살피게 된다.
결국 실재를 살피는 것은 이런 사정이다.
즉,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는 않은가를 살피기 위함이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 다음을 제시하게 된다.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주체는 자신의 마음이 관계한 내용만 얻는다.
즉 마음이 관계해 화합해 얻어내는 내용만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관계를 떠난 내용이다.
따라서 그런 실재는 한 주체로서는 끝내 얻지 못한다. [불가득]

=> 따라서 실재는 모든 2분법적인 분별을 떠난 상태가 된다. [불이법]
즉,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분별을 떠난다.
또한 그런 사정으로 언설을 떠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시설하여 이를 나타내게 된다.

즉, 본 바탕의 실재는 공하다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이란 표현은 없다는 '무'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 a 라는 무엇이 있다는 '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얻지 못함은 있고 없음의 양변을 떠남을 말한다.
즉, 얻지 못함은 없음[무]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 a 라는 무엇이 있음[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있고 없음의 분별을 모두 떠남]

비유하면 눈이 소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눈은 소리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리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눈은 소리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소리가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실재를 바탕으로 현실 내용을 얻게 된다.
따라서 실재와 현실 내용과의 이런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집착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현실 내용[감각현실 및 관념분별]과 실재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실재는 현실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내용도 실재가 아니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실재를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도 현실내용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결국 현실 내용은 본 바탕에서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한다.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그렇게 얻는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생사현실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현실 내용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이런 부분이 이 논의의 초점이 된다.

실재는 공하다.
실재는 현실과 같은 차별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실재가 실재를 아는 일도 없다.
또한 생멸이나 생사, 고통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생사고통을 해결하려 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서는 이런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함이 중요하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인 실재가 공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과 이 실재를 서로 대조해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이해해야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 내용은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실재에서는 현실 내용과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 안에서 고통을 겪는다.
이런 사정을 생사현실안에서 잘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현실 내용은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관계와 같다.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꿈에서는 그런 엉뚱한 내용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현실도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현실도 실답지 않다.
이런 실재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은 생사현실 안에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 생사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집착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잘 성취해나가야 한다.

이는 마치 꿈이라는 것을 꿈 안에서 인식하는 것과 같다.
꿈을 꿀 때마다 악몽을 꾸어 고통받는다고 하자.
그런데 꿈을 깨면 꿈인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러나 꿈을 꿀 때는 모른다고 하자.

그러면 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임을 안다고 하자.
그러면 꿈을 꿈 밖 침대에서 대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꿈안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생사현실 안에서 실재 영역의 사정을 이해함이 요구된다.

현실에서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현실내용을 붙잡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런 집착에 바탕해 행하게 되는 업을 좀 더 잘 제거 중단할 수 있다.

한편 생사고통을 직면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본 바탕의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고통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행함에 있어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


- 실재의 공함의 이해와 수행의 단계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정작 꿈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색,성,향,미,촉,법 등처럼 다양하고 생생하게 얻는다.
또 꿈과는 달리 현실 내용은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 다수 주체가 얻는다.
그리고 일정 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
이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지만, 대단히 실답게 여기며 대하게끔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게 장구하게 겪어나간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그대로 방치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이는 곧 수행자가 해결해야 하는 생사현실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실재가 공함을 이해함이 중요하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그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일으키는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을 당장 제거하기는 힘들다.

그런 경우에는 망집을 바탕으로 처하게 되는 생사현실을 우선 좋은 형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즉, 생사고통을 극심히 받는 3 악도에 묶이지 않도록 우선 예방해야 한다. [인천교적인 방안]
그러러면 우선 망집에 바탕해 행하게끔 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또 기존에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러면 우선 계의 수행덕목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집착을 갖고 대하는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그런 가운데 복덕자량을 성취하고 지혜자량을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무명 어리석음과 망집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이런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 성문승, 벽지불승의 기본 수행 목표- ]

그런데 한편 수행자 자신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경우
생사현실에 남아 있는 중생들이 문제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중생 제도를 위해 다시 그런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해 그런 중생과 다시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할 때
생사현실의 이런 기본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임해야 한다.

즉 생사현실의 재료 자체는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 즉 열반임을 잘 관하고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할 수 있어야 한다. [대승 보살승의 수행목표 ]

본 바탕의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다.
현실 안에서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차별이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실답지 않지만, 그런 내용을 상을 취하고 실답다고 여기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이런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 생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 대해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사정으로 경전과 논서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
이 경우 그 주된 초점은 위와 같은 부분이 된다.

한편, 이를 위해서는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는가 여부도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게 된다.
여기서는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 감각현실과 실재의 관계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해서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는다.
이 경우 여러 조건이 화합해서 마음에 그 내용을 얻게 된다.
이를 A + B => C 와 같은 형태로 나나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세상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경우 자신이 눈을 떠서 빛을 보게 된다.
또 일정한 물체모습도 보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눈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음 등이 이에 관계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런 여러 요소를 통해 그런 내용을 보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마음에 얻어진 내용'이 '마음에 얻어진 내용'을 얻게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일반적 이해방식이 옳은가는 차후 다시 논의할 문제다.
그러나 일단 이런 일반적 이해를 받아들인다고 하자. [=가정적논의]

그 경우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 C 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런 조건을 떠나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실재는 이런 관계를 떠나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위 A + B => C 와 같은 관계식을 통해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실재는 그렇게 얻게 되는 현실 내용이나 언설 분별을 모두 떠나는 상태라고 하게 된다.
[연기(인과) 즉 공]

실재는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감각현실과 같은 현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이런 현실 내용은 그런 실재를 떠나서 얻거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실 내용이 나타나는 관계는 현실 안의 내용들로 그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인과관계[연기]와 실상의 관계를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안에서 현실 내용들이 일정한 관계로 얻게 됨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이 인과관계[연기] 문제다.
이를 통해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해가 수행과 관련해서 중요하다.

# 참고로 마음에 어떤 내용이 얻어지는 관계가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그 관계성을 일정한 형태로 이해한다.
여기서는 그런 입장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살핀다[가정적 논의]
이는 그런 바탕에서 실재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방안이다. [세속제를 통한 승의제의 이해]

그러나 본 사정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본래 어떤 내용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마음에 얻어진 내용'이 거꾸로 이들 '마음내용을 얻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는 없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빛과 물체와 눈 등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원인요소로 나열하는 내용들을 살펴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은 본래 마음으로 얻은 내용들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얻어놓은 내용이 거꾸로 이들 마음내용을 얻게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시각정보가 그 시각정보를 얻게 한다고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시각정보가 다른 청각정보나 촉각정보를 얻게 하는 원인이라고도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그런 내용을 얻은 상태에서 이를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렇게 잘못 생각하게끔 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
그런 상태에서 그 내용만 놓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손바닥을 마주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소리를 얻는 관계를 반복해 경험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 간에 그런 관계성이 파악된다.
그래서 그 관계를 그처럼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그러나 본래는 그런 형태로 마음안 내용이 얻어진다고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부대상황의 관계라고 이해해야 한다.
즉 눈으로 무언가를 보게 되는 상황에서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은 관계다.
다만 이를 반복 경험하는 가운데 이들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것뿐이다.

이를 쉽게 확인해보자.
그 상황에서 눈을 감아 시각정보를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도 소리는 여전히 듣게 된다.
그래서 앞 상황에서 본 손바닥은 원인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알고보면 동시에 병행하는 부대상황 관계의 내용일 뿐이다.
즉 소리가 날 때 시각에서 병행해 얻어진 내용일 뿐이다.
다만 이 부분은 별도로 관계되는 부분에서 살피기로 한다.




○ 꿈이 실답지 않음과 진짜의 존부문제

- 참된 진짜의 내용[실체, 본질, 본성, 자성 등]의 있고 없음의 문제

무엇이 있고 없음이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 실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실다운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 이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 생생한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는 사정

꿈을 꾸는 조건에서는 그 꿈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이는 다음 사정들 때문이다.
꿈은 꿈을 꾸는 일정한 조건에서만 생생하게 얻을 뿐이다.
꿈은 꿈을 꾸는 영역에서는 생생하게 그 내용이 있다.
그러나 꿈을 깬 경우처럼 다른 경우에서는 얻지 못한다.
즉, 다른 현실 영역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 기대하게 되는 성품들을 얻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침대에서 황금과 바다꿈을 꾸었다고 하자.
꿈 안에서는 그런 조건에서 황금과 바다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꿈 안에서는 황금과 바다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꿈을 깨어 그런 조건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그런 황금과 바다는 얻지 못한다.
또 그 꿈을 꾼 현실의 침대에서도 그런 황금과 바다는 역시 얻지 못한다.

한편 꿈에서 보는 바다나 황금의 모습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어떤 측면에서는 바다나 황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그림이나 사진에서 보는 바다나 황금과 성격이 같다.
그 내용에서 기대하게 되는 다른 성품을 얻지 못한다.
배를 띄울 수도 없다. 무겁거나 딱딱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는 그런 조건에서만 그런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비록 얻더라도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참된 존재라고 하기 힘들다.


○ 감각현실을 실답지 않다고 보는 사정

그런데 이런 사정은 감각현실도 마찬가지다.

바위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를 평소 자신이 볼 때는 어떤 모습으로 본다고 하자.
그러나 눈에 파란 색안경을 쓰고 본다고 하자.
그러면 모습이 달라진다.
또 돗수가 다른 안경을 쓰고 볼 때도 달라진다.
아침 빛에 보는 경우와 저녁 빛에 보는 경우가 다르다.
바위를 어느 각도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또 가까이 대하거나 또는 멀리 떨어져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그 색상이나 그 형태 크기가 다 달라짐을 경험한다.

그래서 어떤 한 순간 한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 모습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한 내용을 바위의 대표라고도 보기 힘들다.
그런 경우 매 순간 각 상황에서 달리 얻는 각 내용은 다 가짜라고 해야 하게 된다.

한편,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본 바탕으로 실재영역이 있다.
이 실재 영역의 사정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한편 다른 감각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은 얻지 못한다.
시각으로 일정한 내용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청각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또 후각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또 미각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또 촉각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각 감각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비교하면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관념영역을 고려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영역에서도 역시 그런 내용은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과를 눈을 떠 보는 감각현실을 □로 표시해보자.
그 상황에서 손으로 사과를 두드리면 귀로 소리를 듣는다.
코를 대어 향을 맡는다.
입으로 먹어 맛을 느낀다.
손으로 만져 촉감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을 얻는 각 영역에서 모두 시각으로 얻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또 그 부분에 대해 일정한 관념분별을 행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런 부분은 사과다.
그리고 과일이다.
이런 관념분별을 한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 관념분별 영역에 그 감각현실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도 사정이 같다.
실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 영역에서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한편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즉 본 바탕이 되는 영역에서는 얻지 못한다.
그처럼 실재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을 현실에서 얻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결국 감각현실도 꿈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결국 이들 현실내용은 실다운 진짜의 내용이라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



○ 꿈과 달리 실다운 진짜를 찾는 사정

한 주체가 주변 사물이나 자신 모습을 반복해 대한다고 하자.
이런 가운데 시시각각 그 내용이 다름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어떤 꽃이나 바위를 대한다고 하자.
이는 매 순간 매 상황마다 그 모습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규칙적이고 일정한 형태를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매번 달리 내용을 얻는다.
그래도 꽃은 꽃이고 바위는 바위로 분별하게 된다.
그리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구분해 분별하게 된다.
이렇게 현실에서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사정은 꽃은 꽃만이 갖고 있는 어떤 실답고 진짜라고 할 내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즉, 다음처럼 추리하게 된다.
참된 진짜 실체가 어딘가에 있다.
즉 그런 참된 뼈대가 그 안에 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이 경우 참된 진짜로서 실체는 꿈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즉, 그런 진짜는 꿈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게 하는 특성들은 없어야 한다.
꿈이 갖는 그런 특성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를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꿈이 갖는 특성과는 반대되는 특성을 가져야 진짜라고 하게 된다.

즉, 꿈과는 달리 실답다고 볼 성품을 가져야 한다.
결국 그런 실체는 어떤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내용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꿈과 달리 늘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내용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을 다른 것과 구분하게 하는 영원불변한 성품[자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을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실체에 대한 관념을 이렇게 관념적으로 만들어 갖게 된다.
이는 관념영역에서 찾는 내용을 일종의 몽타쥬 형태로 그리는 작업이 된다.
먼저 관념 영역에서 분별을 통해 실체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된다.
그것은 꿈과는 다른 성품을 갖는 어떤 것을 관념한다.
그래서 관념영역에서 실체에 대한 몽타쥬를 만들어 놓게 된다.
이 경우 이는 관념영역에서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리고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을 '실체나 본체[실상]'라고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이 경우 문제는 과연 그런 몽타쥬에 해당한 것이 과연 있는가가 문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현실과 관련해 과연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진짜의 내용이 이들 안이나 어딘 가에 과연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런 측면에서 그런 실체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는 관념영역에서 몽타쥬 형태로 그려낸 그런 내용이 어딘가에 정말 있는가를 찾는 문제다.

그리고 이 주제는 현실내용을 실답다고 여길만한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그리고 현실 내용을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하다.
따라서 수행에 큰 의미를 갖는다 .
현실 내용이 이런 실체를 갖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현실에서 대하는 것을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
이런 측면에서 그런 실체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는 결국 불교의 무아 무자성과 관련된 논의에 해당한다.
그리고 불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런 실체는 없다.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무소유]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이처럼 판단하는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렇게 관념으로 구상해 찾는 몽타쥬에 해당하는 것이 어느 영역에라도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반대로 현실 내용은 나타날 수 없다.
또 한 주체가 그 내용을 그처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실체는 없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판단하게 된다.



○ 무아 무자성과 실재의 공함의 관계

어떤 이가 눈을 떠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주관이 관계하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있다고 할 실재 영역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본 바탕에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또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라고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진짜의 존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래서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어떤 것 A 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위 질문이 제기될 때 바로 그런 A 를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무아, 무자성]

한편 실재의 내용은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끝내 얻어낼 수 없다.
그래서 일체의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등의 분별을 행할 수 없다.
그리고 언설을 떠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를 나타내게 된다.

이 경우 공하다는 표현은 무아 무자성과 완전히 같은 측면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가 공함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는 결국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는 없음(무아, 무자성)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음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된다. ( 무소유+ 불가득 )

즉, 그런 진짜는 없다.
따라서 실재가 무언가 문제될 때 그런 진짜가 있다고 제시할 수 없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한편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공]
그래서 공하다는 표현은 결국 이런 사정을 함께 포함해 제시하는 것이 된다.





○ 언어표현 [시설]을 통해 문제삼는 또 다른 측면들의 유무

앞과 같이 크게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각 내용을 살폈다.
그런데 이들에 넣기 힘든 형태로 유무를 문제삼는 경우를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는 방에 꽃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빛이 밝은 상황에서 눈을 떠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꽃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런 내용을 감각한다.
그래서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보인다.
그렇지만, 꽃이라고 여길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꽃은 '없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주로 이런 측면에서 유무 판단을 행한다.
즉,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무언가가 보이거나 대할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측면으로 무언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약간 모호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잘게 갈거나 또는 현미경을 통해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아주 작은 입자를 또 대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반복한다고 하자.

그런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을 대한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작은 입자는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 앞과 같이 잘게 나눈다고 하자.
그러면 더 작은 입자를 대하게 되리라 여긴다.
또는 현미경으로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보게 될 작은 입자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현실에서 이처럼 어떤 사물의 극미나 원소의 존부를 문제삼는다.

이를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다.
멀리서 산의 숲모습만 본다.
그리고 정작 나무는 낱낱이 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상황에 나무가 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극미 등의 존부문제는 이런 경우와 성격이 같다.

한편 허공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밀페된 공간에 어떤 공기를 주입한다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구토를 느낄 수 있다.
또는 질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냄새도 맡지 못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질소나 수소나 헬륨 등등이 그런 경우다.
그런 가운데 허공의 명암이나 빛 그림자를 위처럼 미세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극미상태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경우도 있다.

한편 어떤 이가 평소 어떤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하자.
그래서 턱걸이를 100 회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의 신체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상태가 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와 철봉앞에서 실험을 해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예측대로 차이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계율을 지켜 익힌다고 하자.
그러면 어느 단계 이후는 그의 상태가 달라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분노가 일으킬 상황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에서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또 일반적으로 탐욕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에서도 탐욕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런 경우 그런 수행자에게 무언가 일반인과 달리 갖추게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수 있다.

또는 거울에 어떤 꽃이 비추이고 있다고 하자.
또는 물에 달이 비추이는 경우라고 하자.
그것은 물론 직접 대하는 꽃이나 달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하튼 거울 자체나 물 자체와는 다르다.
그런 가운데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이는 바위가 비추이는 거울이나 물의 상태와도 다르다.
따라서 그렇게 달리 파악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또는 일정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생각으로 그 현실을 달리 여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경우 솥으려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거북을 보고 놀란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솥뚜겅을 거북으로 잘못 여겨 놀랄 수도 있다.
이처럼 일반의 경우와 달리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런 반응을 하게 하는 무엇이 이 상황에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한편 정려 수행 중에서 경험하는 특수 현상이 있다.
이런 내용도 역시 문제된다.
다만 정려 수행은 특수하고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일반적 입장에서 이를 함께 살피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최면은 비교적 일반인도 종종 경험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최면술사가 최면에 걸었다고 하자.
그리고 손가락을 대면서 그것이 아주 뜨거운 물이라고 최면을 걸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상대는 화상을 입을 때 나타나는 수포 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는 혁대를 뱀이라고 최면에 걸었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는 이를 대하면서 소름이 돋거나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이런 내용을 현실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이를 대하는 주체의 입장을 고려해 살펴보자.
그러면 여하튼 일반적인 상태와는 다른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주체와 관련해 그런 내용이 있어서 그렇게 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경우 있다 없다의 문제를 판단한다고 하자.
이와 같은 경우는 처음 살핀 일반적 입장과는 조금 차이난다.

일반적으로 있다 없다고 표현하는 상태는 이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어떤 관념A 에 적절하게 대응된다고여기는 감각현실이 있다고 하자.
이런 감각현실을 직접 얻는 상태에 무엇이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위 경우는 어떤 것이 눈에 보이거나 만져져서 있다고 하는 상태는 아니다.
즉, 감각현실을 직접 얻는 상태이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순전히 관념영역 안의 관념적 내용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들은 감각현실에 준해 무언가가 그 상황에 있기에 그렇게 된다고 생각되는 경우들이다.
그래서 이들 경우는 조금 모호한 영역에 놓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하튼 그런 내용의 유무가 문제된다.
따라서 유무 논의에서는 이런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참고: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 극략색(極略色)ㆍ
- 극형색(極逈色)ㆍ
- 수소인색(受所引色~ 무표색)ㆍ
-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ㆍ
-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 등 ]




- 상대적 특정 관계에 따라 변하는 유무판단문제

그 외에도 또 다음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자 속에 어떤 과일이 들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상자를 닫아서 다시 열수 없다.
한편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상자에 과일이 계속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 다음 경우도 있다.
벽이 있다.
이 경우 벽 안에 흙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한편, 벽이 있다고 할 때 또 벽 뒤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위와 비슷하다.

또 어두운 방에서 불이 꺼졌다고 하자.
이 경우 직전에 본 사과가 그대로 있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또 깊은 산속에 지내는 이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아직 산너머 바다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산너머에 바닷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한편 어떤 이가 묶여 있다.
그 상태에서 눈을 떠 세상을 본다.
그런데 자신의 눈썹과 이마나 허리 등은 보지 못한다.
그 상황에서 그런 모습도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거울을 통해서 이를 볼 수 있다.
또 나중에 손이 풀리면 만질 수도 있다.
이처럼 상황이 달라지면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어떤 사정으로든 현재 직접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를 있다거나 없다라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어떤 측면에서 유무를 표현하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또 현실에 다음 문제도 있다.
장님에게 노란 색을 말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것을 있다고 해야 할 지 없다고 해야 할지 애매해진다.

또 귀가 안들리는 이가 있다고 하자.
이런 이에게 아름다운 피아노소리가 있는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 주체는 상대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을 감각하고 얻는다.
그래서 어떤 상태를 기준으로 있다고 해야 할 지가 애매해진다.

비슷한 예로 다음 경우들이 있다.
개는 맡지만 사람은 못 맡는 냄새가 있다.
고래는 듣지만 사람은 못듣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이런 것들의 있고 없음의 판단도 앞과 같은 성격의 문제가 된다.


한편, 현실에서는 자신이 끝내 가보지 못할 아주 먼 어떤 곳이 있다고 하자.
그런 곳에 자신이 평소 보지 못한 이상한 동식물이 있다고 다른 이가 보고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기자가 현지를 가서 사진을 찍어 왔다고 하자.
또는 학자가 어떤 내용을 글로만 적어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이 정말 그처럼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런 내용만으로 그 있고 없음을 판단하기 곤란할 수 있다.

한편 요즘 과학기계가 발달했다.
그래서 적외선이나 자외선, 기타 X선 초음파 이런 측정장치를 통해서 영상을 얻는다.
그리고 그 때마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내용과는 다른 내용을 얻는다.
이 경우도 기준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다른 측정수단을 동원하면 파악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어떤 주체가 기계 상태로 직접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그 기계는 직접 어떤 상태를 얻는지는 또 파악하기 힘들다.

경전이나 수행과 관련해서는 수행을 통해 6 신통을 증득한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부처님의 입장이 되면 5 안을 갖추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여기서 5 안은 불안 법안 혜안 천안 육안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시간 공간의 장애나 감관 등의 문제로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내용들을 감각하고 경험하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내용이 경전에서 제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반적 입장에서 그런 내용이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경전에서 3 계 6 도를 제시한다.
이 경우 지옥과 지옥중생이 있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
또는 아귀세계와 아귀 중생이 있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경전에서 부처님이 이런 성격을 내용을 제시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는 어느 정도 기자의 보고와 성격이 비슷하다.

다만 이들 경우는 모두 다음 성격의 유무 판단문제다.
우선 감각현실을 얻는 관계가 조건이 모두 충족된다고 하자.
이들은 바로 그런 경우 얻게될 성격의 내용이다.
그런데 현재 그 일부 요소가 결여되어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 내용들의 유무를 판단하는 경우들이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충족되면 얻게될 내용들이다.
그래서 단순히 관념영역에서 관념분별 내용의 유무를 살피는 것은 아니다.

한편,이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을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실재 영역은 처음부터 현실 내용을 얻는 주관과의 관계를 떠난 본 바탕의 내용을 문제삼는다.
예를 들어 눈을 감기 직전에 상자를 보았다.
그런데 눈을 감고 그 상자가 그대로 여전히 남아 있나 없나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주관과의 관계를 떠난 그 무엇[실재]를 찾는 경우는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눈을 뜨면 보게 될 내용[현실내용]을 찾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두 경우를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서 '있고 없음'을 논의한다고 하자.
상황이 달라지면 그런 내용을 감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있다고 판단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 직접 그 상황에서 보는 것은 아니다.
또는 그것을 만져 그 내용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단 앞에서 일반적으로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경우와 구분해야 한다.

경전에서 3 계 6 도 안의 지옥이나 아귀 하늘 등을 제시한다.
각 주체가 그런 세계에 그런 중생의 상태에 처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지금 현실에서 경험하는 내용처럼 경험하게끔 되는 내용이다.
즉, 경전에서 그런 성격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다.

다만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지금은 그런 내용을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 내용을 지금은 직접 얻지 못한다.
따라서 그 유무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게 된다.


한편 공간은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공간은 생주멸 변화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공간의 크기나 유무를 문제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하늘 위에서 점으로 보이는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옆에서 의자는 이 점보다 대단히 커 보인다.
그런데 그 작은 점으로 보인 곳이 알고보면 수천명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일 수 있다.

공간은 일정한 기준 사물을 가지고 크기를 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준이 되는 사물을 넣고 빼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부분이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자.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간이 그만큼 있다거나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 공간의 크기를 재는 기준 사물에 따라 공간의 유무나 크기 관념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느 공간에 어떤 사물을 넣어보려도 들어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집에 아무리 10 톤 트럭을 넣어보려도 들어갈 공간은 없다.
그러나 산소 10톤 분량은 이상하게 들어간다.
이런 경우 무엇을 기준으로 공간의 크기를 재는가에 따라 공간의 유무나 크기의 관념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이는 상대적인 차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끝내 직접 감각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감각하는 내용을 근거로 그 유무나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공간의 유무판단은 결국 그런 성격의 유무 판단 성격을 갖게 된다.

공간이 생주멸 변화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하튼 이 경우도 그런 상대적 관계를 통해 공간의 유무나 크기 여부를 달리 문제삼을 수 있다.



- 마음의 유무 문제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
그러나 눈이 눈 자신은 보지 못한다.
마음도 성격이 비슷하다.

마음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을 얻는데 작용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 대해서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현실에서 마음현상으로 이해하는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모습을 보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 상황에서 정작 그런 모습을 보게 하는 마음이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마음은 굳이 없어도 보는 데 지장이 없는가가 문제된다.
마음의 있고 없음의 문제는 이런 성격의 논의다.

경전에서 마음을 시설해 그런 마음이 있다고 제시한다.
물론 그 마음을 일반적인 경우처럼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렇지만,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경우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있다고 시설해 제시하게 된다.

이와 달리 물질간의 작용 변화관계로만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물리적인 작용의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장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파장이 호수가에 가 닿게 된다.
또는 도미노를 세워 놓고 한쪽에서 쓰러뜨린다고 하자.
그러면 연달아 쓰러져 끝 부분이 쓰러진다.
이들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 현상처럼 마음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오늘날 생리학자들은 마음현상을 이런 물리적 현상의 하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즉 외부 물질이 있다. 그리고 한 주체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있다.
그리고 이들 간에 작용 반작용 자극 반응 이런 운동 변화관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마음현상은 이런 현상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생리학자들은 주로 이런 형태로 마음현상을 이해한다.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이 옳은가.

불교 경전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음이 존재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음처럼 제시한다.
마음이 별도로 존재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얻는다.
즉, 마음 현상이란 마음을 전제로 해서 얻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얻는 일체 내용은 마음이 별도로 존재함을 전제해야만 한다.
현실에서 생리학자들이 판단하는 각 현실 내용도 그런 바탕에서 얻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생리학자들이 판단하는 그런 각 현실 내용들이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빛이나 물체 그리고 눈이 관계해 뇌에서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내용은 그 생리학자가 마음을 통해 관찰해 얻어낸 내용이다.
즉 이는 생리학자의 마음이 얻어낸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그처럼 마음으로 얻어진 결과물로 그런 마음 현상이 일어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것은 관계를 거꾸로 뒤집혀 행한 잘못된 판단이 된다.

- 마음과 실재의 혼동과 구분

한편 이런 마음은 현실 내용을 얻어내는 바탕이 된다.
그 내용을 직접 보거나 얻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본 바탕의 실재 영역과 혼동하기 쉽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을 준거로 한다.
그리고 마음은 이런 현실 내용을 얻는데 기능한다.
그러한 것을 마음으로 표현해 문제삼는다.

반면 실재는 그런 마음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의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마음을 통해 얻는 내용들을 떠난다.
또 그런 마음도 떠나게 된다.

결국 마음을 기준으로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이 현실 내용이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그런 현실내용을 바탕으로 시설된다.

반대로 실재는 그런 마음을 떠난 내용이 된다.
즉 마음과의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내용과 실재의 경계선에 마음이 위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실재와 마음은 이처럼 서로 구분된다.


여하튼 이와 같은 각 경우마다 문제되는 어떤 A 의 있고 없음을 판단한다.
그리고 논의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일정한 언어표현을 통해 논의해야 한다.
그런 경우 그 언어표현으로 가리킨 각 내용을 정확히 잘 파악해야 한다.

마음의 존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는 오로지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의 존부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또 단순히 언어표현을 언어표현 영역에서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직접 감각하여 보고 만져 어떤 감각내용을 얻는가를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또는 주관과 전혀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진짜라고 할 실체의 존부를 문제삼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을 얻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를 통해 이를 얻게 하는 마음을 전혀 없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일단 언어로 그런 내용을 일정하게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이런 기본 사정을 잘 파악한 가운데 살펴 나가야 한다.





○ 있고 없음의 판단에서 각 영역의 상호관계를 살피는 형식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있고 없음의 문제 자체는 일단 관념영역에서만 문제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먼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등등이 모두 그 자체가 관념내용이다.

이 관념영역을 벗어난다고 하자.
그래서 실재나 감각현실의 영역을 놓고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 영역에서는 이들 관념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있고 없음을 모두 떠나야 한다.

사정이 그렇다.
그러나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를 '있거나 없다'라는 분별한다고 하자.
그리고 언어표현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처럼 가리키게 되는 그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은 또 아니다.
즉, 그렇게 '유무' 분별이나 언어표현을 통해 '가리키는' 그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 실재나 감각현실이란 표현으로 가리키는 영역이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잘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감각현실을 놓고 살핀다고 하자.
이 때 그 감각현실에 자신이 문제삼는 관념분별 내용으로 A 가 있는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이 그런 A 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감각현실 무언가가 그런 관념 내용 자체는 아니다.
또 그런 감각현실 무언가가 진짜라고 볼 실다운 내용도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어떤 생생한 내용을 감각현실로 얻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가 어떤 감각현실의 한 부분을 그렇게 묶고 나누어서 그것을 A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주체는 일단 그 부분을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는 그 어떤 상태로 얻는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그런 분별을 행한다.

즉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어떤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또 다른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이 경우 예를 들어 눈을 떠 오로지 하얀 색만을 전체적으로 보는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단지 자신이 생각만으로 이 부분은 꽃이고 저 부분은 자신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상호관계를 살필 때는 원칙적으로 다음방식으로
그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먼저 감각현실 그 자체가 곧 관념분별 A 인가를 살펴야 한다.
또 반대로 관념분별 A 그 자체가 곧 그 감각현실인가를 살펴야 한다.
물론 이 각 경우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분별 A 는 그런 감각현실을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인가.
즉, 이들은 서로 전혀 무관한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관념분별은 감각현실과 관게없이 독자적으로 그렇게 얻게 된 것인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는 감각현실과 실재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또 관념분별과 실재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음과 실재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또 마음과 그 마음에 얻어진 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즉, 마음과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또 마음과 관념분별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꿈과 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또 거울이나 거울에 나타난 모습의 관계를 살필 때도 이 형식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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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에서 시설하는 언어방편에 대한 혼동


● 경전에서 시설하는 언어방편에 대한 혼동


○ 망상분별 집착현상과 유무 판단


언어표현은 각기 다른 차원이나 측면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반적 입장에서 일으키는 망집현상이 있다.
이와 관련해 다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어떤 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는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데 초점이 있다.
즉 침대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꾼 꿈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제시함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이런 취지에서 문제삼는다.
이 경우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념분별은 일정한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으킨다.
또한 그런 감각현실 자체를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은 생생하게 매순간 얻는다.


이는 그런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무 판단 문제에서 이들 각 내용을 놓고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경전에서 현실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또는 오고감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오고가는 영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현실에서 생멸이나 오고감 영희 등으로 여기고 대하는 감각현실이 있다.
이 경우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일으킨 분별내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그가 대하는 그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 그래서 그 분별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머지 영역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이 있다.
그리고 감각현실을 얻는 영역이 있다.
그리고 관념분별 영역이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분별 영역에서 분별을 일으켜 문제삼는다.
그런데 그 일체의 내용은 관념 영역 외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실체는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분별을 일으켜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이해시키고자 그런 내용의 유무 문제를 살핀다.
그런 경우 위와 같은 형태로 그 유무를 문제삼고 살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상대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런 내용을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의 입장에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일정한 언어로 각 부분을 일단 가리켜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 사정을 설명해 나가야 한다.


그런 내용은 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임시로 각 내용을 언어를 시설해 세워 가리켜야 한다.
그런 경우 그처럼 방편으로 각 내용을 시설해 그런 부분을 가리키는 것을
시설, 안립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경우 이런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각 내용과 그 의미를 놓고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일반적 입장에서는 각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 대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언어표현이 갖는다고 이해하는 내용을 서로 혼동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단히 곤란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 일반적으로 영희라고 보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에 그가 생각하는 영희는 얻을 수 없음을 이해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 부분에 그런 영희는 없다.
그러나 그 사정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려면
일단 그 부분을 '영희'라는 형태로 언어로 가리키며 설명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그 부분을 영희라고 언어로 시설해 표현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결국 다음 입장이다.
그 언어가 가리키는 그 부분에는 그런 '영희'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분을 설명을 위해 일단 '영희'라고 칭하자.
이런 입장이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렇게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 부분을 영희라고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자.
이처럼 표현하면 이로써 곧 그 부분에 영희가 '있음'을 의미한다고 잘못 이해한다.
또 그 부분이 곧 영희'이다'라고 나타낸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혼동하기 쉽다.


부처님이 처음에 중생들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가르치게 된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가르침이 이런 사정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예를 들어 일체는 생멸하며 무상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내용이 현실에 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따라서 그런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경전에서 뗏목의 비유로 제시한다.


경전에서는 이런 사정과 이런 취지에서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방편으로 시설하여 내용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온갖 분별을 일으키고 문제삼는다.
그런데 이들에는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따라서 무아 무자성임을 제시한다.


또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살핀다고 하자.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처럼 문제삼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언설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별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 공하다는 표현으로 이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현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마음에서 화합해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그것들은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하나같이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이에 대해 갖는 집착과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과 수행의 필요성의 혼동 문제
- 여론 [차후 살펴야할 주제]


현실에서 문제삼는 온갖 것이 있다.
그 일체가 위와 같은 사정으로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답지 않다고 하여, 전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편 현실은 꿈 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정작 꿈 자체는 아니다.
다수 주체가 일정한 조건에서는 일정한 관계로 그런 내용을 대단히 반복해 얻게 된다.
그래서 무한히 그런 내용을 대단히 다양하고 생생하게 얻어 나가게 된다.
또 그 바탕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간다.
그래서 그 해결이 문제가 된다.


이는 마치 게임기의 상황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게임에 임한다고 하자.
이들은 게임 밖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러나 이는 다수에게 그런 형태가 그처럼 생생한 형태로 반복된다.
이런 사정으로 대단히 생생하게 이를 대하게끔 된다.


생사현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의 바탕은 공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 현실이 예를 들어 심하게 억울하고 고통을 받는 상황이라고 하자.
예를 들어 자신이 별 이유도 없이 붙잡혔다.
그리고 수용소에 갇혔다.
그리고 계속 폭행과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중노동 등을 수십년간 계속해야 한다고 하자.


또는 자신이 별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음주운전자가 자동차로 자신을 받았다.
그래서 불구가 되었다.
그래서 평생 통증을 느끼면서 지내야 한다.
그런데 가해자는 도망쳤다.
그래서 자신이 병원비 수억원을 갚아야 한다.
이로 인해 생활하기 힘들다.
그러자 가족들마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쳐다.
그래서 자신 혼자 이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자.


그외에도 현실에 억울하고 고통스런 상황들이 많다.


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처럼 설한다.
이런 생사현실이 공하여 실답지 않다.
그 현실은 본래 생멸과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생사현실에서 이런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 처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위와 같은 경전 내용으로 그 생사고통을 잘 벗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 본 바탕에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런 재료가 현실에서 주어진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재료 자체에도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재료가 그처럼 동시에 주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이후 그가 분별한 내용들이 그런 각 내용에 들어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그 사정이 위와 같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그런 재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것은 하나같이 생생하고 실답게 여겨진다.
그런 가운데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생사현실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가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평소 자신이 자신이나 세상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내용이 있다.
이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본 정체가 아니다.


그러나 쉽게 이런 망상분별을 벗어나기 힘들다.
현실에서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하자.
그런 경우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만 따라 변화해 움직인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마음 내용이다.
그래서 외부 세상이나 외부 대상 등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유식무경]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관계를 통해 일정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


경전에서 이들 내용의 정체가 자신의 마음내용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본 바탕은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제시한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현실 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 된다.
한편 기존에 가졌던 망상 분별이 오히려 현실에 더 적절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매순간 업을 행하며 생활하게끔 된다.
그리고 또 그런 바탕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이런 내용의 본 바탕은 본래 공하다.
그래서 이들 현실 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 일체가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가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내용이 곧 외부 세상이라고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렇게 망집을 일으키게끔 되는 그 배경사정까지 잘 파악해야 한다.
한 생명은 매 생을 그런 형태로 시작하고 마친다.
그리고 그처럼 망집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량하게 생사를 반복해 받아 나가게 된다.


이런 자신이나 세상이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런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행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수행자는 도대체 생사현실에 어떻게 임해 수행을 하는가.
즉, 생사현실에서 어떤 부분이 그런 수행을 행해 가는 것인가.
또 무엇을 다른 생명으로 대하여 중생을 제도하는가.
또 무엇이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가.
또 무엇이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는가.
또 무엇이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을 하는가.
이런 내용을 함께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생사현실의 배경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통해 망집을 잘 제거해야 한다.
한편 업의 장애가 제거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생사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업의 장애를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한편 그런 상태에서 다시 다른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중생들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래서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이런 현실 사정과 그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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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hnr1171

◈Lab value 불기2561/08/25/금/08:55




○ [pt op tr]


mus0fl--Yves Duteil - Jonathan.lrc


○ [pt op tr]Clos_luce_04_straight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Georgetown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5349


●● 수행자의 선교 방편과 현실에서 루팡의 방편


● 수행자의 선교 방편과 현실에서 루팡의 방편


현실에서 교묘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가 많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지혜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제갈공명과 같은 책략가를 생각할 수 있다.
또 소설에 나오는 루팡과 같은 이를 생각할 수 있다.


요즘 전자화폐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사기를 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곤충을 기르면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사기를 행하기도 한다.
일정한 기간 아주 성실하게 수익이나 이자를 지급한다.
그리고 수많은 투자자를 모은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진다.
이런 사기 사건 피해자도 많다.
이런 사기를 폰지사기라고 한다.


투자자가 처음 자금을 제공한다.
이 원금을 가지고 다른 투자자에게 이자나 수익금을 제공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돌려막기를 한다.
그리고 어느 기간까지는 그런 수익을 지불한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 투자금이 모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는 유형이다.


처음 사업을 할 때는 누구나 다른 투자자의 자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투자계획을 설명하고 투자금을 투자받는다.
기업을 운영한다고 하자.
이 과정에서는 계획처럼 모든 일이 다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성공과 실퍠를 겪게 마련이다.
이는 모든 기업이 다 마찬가지다.


다만 사기의 경우는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 없다.
그저 외관만 그렇게 갖춘다.
그리고 투자자를 모은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기망하고 피해를 주고 사라진다.
이런 점이 문제다.


전쟁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인다.
그래서 이런 양상이 더 심각해진다.
전쟁에선 상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를 무조건 격퇴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이 경우 상대와 바로 맞붙어 승부를 겨루는 정공법도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상대를 기망하는 해서 속이는 방법이 무량하게 사용한다.


그 최종목적은 여하튼 상대에게 피해나 손해를 주는데에 있다.
그리고 결과가 발생하기까지
상대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발생한 후에도 누가 어떻게 그것을 발생시켰는가를
잘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가운데 지혜를 기울인다.
그래서 이는 결국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바탕해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일단 손해나 피해가 발생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설령 어린이라도 그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과 사정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그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 지혜를 자꾸 발휘한다고 하자.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 수행자의 선교 방편 [복팡?]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양한 방편을 사용한다.
이런 경우 수행자 역시 방편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루팡과는 다른 취지로 임한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 방편을 사용한다.


소설에 나오는 루팡은 교묘한 지혜로
번뇌[루]를 무량하게 증폭시킨다. [팡! ]
그래서 자신이나 상대를 생사고통에 묶는다.
이는 넓고 길고 깊게 고통을 주고 받게 하는 관계다.


이에 반해 수행자는 이와는 반대로 임한다.
그래서 이와 반대로 복덕과 지혜 자량을 무량하게 증폭해 얻게 하고자 한다.
그런 취지로 서원을 장착한다.
그런 가운데 매 상황을 대하고 바라본다.
그러면 그 상황마다 그에 걸맞은 내용을 반야지혜를 통해 얻게 된다.


이 경우 한 개인이 갖는 지식이나 기술의 양이나 깊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한 개인은 그런 자세하고 구체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모두 갖출 수 없다.
그렇다해도 어떤 한 개인이 그런 심성으로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필요시마다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부처님이나 대력보살도 역시 그런 수행자를 돕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기술의 양이나 깊이가 아니다.
그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즉 그 심성의 내용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사에 묶이고 번뇌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무한히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루팡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사묶임과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복덕과 지혜 자량을 무한히 증폭시켜 얻어나갈 수 있다.
이런 차별이 생겨난다.


원래 본 바탕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은 공하다.
그런 가운데 각 생명이 공수래 공수거한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 임하는 가에 따라 각 현실 내용이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생사현실에서 공한 극락의 수행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이와 반대로 공한 지옥에 묶인 수행자가 되기도 한다.


처음 우주가 아주 미세한 공간에서 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처럼 되었다고 하는 이론이 있다.
이를 빅뱅[팡!]의 이론이라고 한다.


망집에 바탕해 지혜를 발휘한다고 하자.
그러면 번뇌[루]가 빅뱅현상처럼 증폭 확장되어 간다.
이를 루팡의 형태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반대로 한 수행자가 중생제도와 불국토의 서원을 갖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를 위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춘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 서원을 성취시켜 나간다.
그래서 중생세간이 불국토로 장엄된다.
이를 앞과 반대로 복팡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이 처음 어떤 취지로 어떤 방편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이후 생사과정이 달라진다.
자신이 루팡 형태로 임할 수도 있다.
그러면 번뇌를 증폭시키고 생사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무한히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 형태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반대로 생사묶임과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복덕과 지혜 자량을 무한히 증폭시켜 얻어나갈 수 있다.
생사현실에는 그래서 이런 차별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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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1501t1730.html#1171
sfed--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txt ☞상권
sfd8--불교단상_2561_08.txt ☞◆vhnr1171
불기2561-08-25
θθ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5견(見)의 하나.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말함. 5온(蘊)이 가(假)로 화합한 신체를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뜻이 있는 아(我)라 망집(妄執)하고, 또 아(我)에 속한 기구ㆍ권속 등을 나의 소유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

답 후보
● 신견(身見)
신삼구사의삼(身三口四意三)

신표업(身表業)
실담오십자문(悉曇五十字門)
실유불성(悉有佛性)
심(心)
심소법(心所法)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20_0910_120916_nik_CT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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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6/04/목/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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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보충내역 Lab value
불기2562/10/08/월/00:33
불기256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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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삼매경론_K1501_T1730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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